내게 있어서도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였다. 일상에서 다양한 일본문물을 접하면서도 실제 일본에 가서 일본인들을 대면한 것은 2항사 시절 적하차 2번 가본 것이 전부였다. 본선 COC에 일본 전통과자 꾸러미를 선물로 들고 온 백발의 로딩마스터가 매니폴드에서 직접 현장을 지휘감독하는 것이나 부두 라인맨이 호루라기를 크게 불어 본선으로 계류삭 작업 신호를 보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후 매 항차 일본에 입항하는 일본 선사 원유선에 승선하게 되면서 회사 일본인 감독들, 여러 부두 관계자들과 함께 일하며 그들에 대한 이해와 친근감을 조금이나마 더할 수 있었다.

일본 입항 시마다 회사 서류들, 부속품들과 함께 전일본해원조합에서 보내주는 영화 DVD와 조합 소식지『海上 の 友(해상의 친구)』를 받았는데, 일본어를 못하는 나로서는 그야말로 ‘겐또(見當)’로 소식지를 훑어보는 정도였다. 그럼에도 간혹 ‘도쿄 배 과학관 어린이 초청 행사’, ‘니뽄마루 총범전범(總帆展帆) 및 만선식(滿船飾) 일정’, ‘니뽄유센 역사박물관 미래의 배 기획전’ 같은 기사들은 호기심을 자극했다. 해당 기사들을 스크랩하여 밑줄을 그어가며 읽으면서 함께 근무하는 일본인 동료들과 업무 시스템 너머의 일본 해운을 좀더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기사에 나온 곳들을 직접 방문해 보기로 결심하였다. 이후 하선하여 인터넷과 여행 안내 책자를 뒤적여 일정을 계획한 끝에 지난해 4월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어 도쿄로 날아가 와세다대학 근처 게스트 하우스에 여장을 풀 수 있었다.

 
 
1년에 2두 번 하는 ‘총범전범 및 만선식’ 행사를 보기 위해 요꼬하마에 있는 니뽄마루(日本丸) 기념공원을 가장 먼저 방문하였다. 총범전범 행사와 만선식 행사는 연중 십여 차례 각기 별도로 실시되는데 고 히로히토 일왕 생일(4월 29일)과 바다의 날(7월 셋째 월요일)에만 함께 실시한다. 1930년 건조된 실습범선 니뽄마루는 54년간 11,500명의 실습생을 배출하고 지구 45.4 바퀴에 해당하는 거리를 항해한 후 1985년부터 옛 요꼬하마 조선소 도크에 전시되어 있다.

1930~40년대에 인천과 부산에도 기항한 기록이 있다. 이날 약 100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니뽄마루 사관들의 지휘에 맞춰 신호 깃발은 모두 올렸으나 아쉽게도 강한 바람 탓에 29장의 돛을 모두 펼치지는 못했다. 눌러 쓴 니뽄마루 모자 사이로 희끗한 머리가 보이는 신사분이 선교에서 관람객들에게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현재 국내에도 주로 퇴역 해군함정을 활용한 공원, 전시관들이 생겨나는 추세인데 장차 교육기관 실습선 내지 여타 역사적 의미가 있는 상선, 어선을 보존, 전시하고 이들 선박을 중심으로 동호회 내지 자원봉사자들의 모임이 활성화된다면 해양 문화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끌어내는 또 하나의 작은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기념공원 내에 함께 있는 요꼬하마항 박물관은 기존의 요꼬하마 해양박물관이 요꼬하마 개항 150주년인 2009년에 새롭게 개관한 것이다. 요꼬하마항의 역사와 현황 뿐만 아니라 해운, 조선, 환경 등 일반적인 사항에 대해서도 비교적 최근에 개관한 박물관답게 다양한 장치들과 방법들을 이용하여 전시되어 있다. 1873년 메이지 시대에 간행되었다는 일본 수로지를 보며 현재의 CD 한 장짜리 세계수로서지를 떠올렸다. 전기모형장치, 모니터 뿐만 아니라 실제 크기의 20피트 컨테이너, 요꼬하마항내를 항해해 보는 선박 조종 시뮬레이터 등을 이용한 전시 기법은 터치스크린과 동작감지센서에 지나치게 의존한 듯 한 우리나라 거제조선해양문화관에 비하여 관람객들의 체감지수를 보다 높일 수 있는 듯 했다. 1920~30년대 운항하던 여객선의 의자, 식기, 피아노 심지어 팜플렛을 비치해 두던 나무진열대까지 수집하여 전시한 것을 보며 일본인들의 꼼꼼함과 기록성을 새삼 실감했다. 박물관의 마지막 전시실은 해양대학, 해기대학, 항해훈련소 등을 소개하며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선원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1년에 NYK에 입사하는 일본인 신임 3항기사가 단 4명에 불과하다는 얘길 듣고 현직 NYK 이사진도 4명은 더 되겠다며 고베대학 해사과학부를 졸업한 일본인 1항사와 함께 웃었던 일이 생각났다. 자국인 선원 확보를 위한 섬나라 일본의 절실함을 느끼며 내년 개관 예정인 우리나라 국립해양박물관에 선원의 이미지 제고, 홍보와 해기전승을 위한 별도의 전시실을 두는 것도 괜찮은 시도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니뽄마루 기념공원에서 버스로 5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니뽄유센(日本郵船) 역사박물관은 1936년 건축된 이 회사 요꼬하마 지사 건물에 자리하고 있다. 과거 중앙청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는 동의했지만, 현재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니뽄유센 역사박물관처럼 건물이 갖는 공간의 역사성을 더 이상 누릴 수 없는 것이 못내 부러웠다. 1870년 설립된 츠쿠모쇼카이(九十九商會)에서 시작한 니뽄유센은 1885년 메이지 정부에 의해 니뽄유센가이샤(日本郵船會社)로 통합, 사명이 바뀌어 오늘날 흔히 불리는 ‘NYK’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1870년대부터 일본 이민자들을 해외로 실어 나르기 시작하여 정부의 보호정책 아래 계속 성장하면서 1896년에는 북미 항로를 개설하였고 1930년대에는 이른바 ‘일본 여객선사의 황금기’를 맞아 1936년 일본-유럽 항로의 경우 일본에서 상하이, 홍콩, 싱가폴, 수에즈운하를 거쳐 런던, 앤트워프까지 이어졌다. 당시 알버트 아인슈타인, 찰리 채플린, 베이비 루드, 헬렌 컬러 등 유명인사들이 NYK 여객선을 이용하여 대양을 건넜다. 2차 대전 이후 여객기의 발달로 여객선 분야가 침체되었지만 NYK는 컨테이너선, 카캐리어, LNG선, 터미널 운영, 물류 등의 분야가 있으며 2010년 현재 세계 4위의 탱커선사이기도 하다. 총 9개의 전시실은 일본의 개국부터 근대 해운의 시작과 현재, 미래까지 아우르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침몰한 NYK 선박 185척의 위치를 모두 표시한 해도가 인상적이었다. 안내데스크에서 일본해사광보협회에서 발행한 일본의 해운연감을 무료로 배포하여 협회를 직접 방문하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요꼬하마항에 정박해 있는 히까와마루(氷川丸)는 니뽄마루와 같은 해인 1930년 건조된 NYK의 호화여객선으로 미국, 유럽 항로에서 운항하였고 1961년부터 지금의 자리에 전시되어 있다. 현재도 계열사인 NYK 트래벌은 아쓰카(飛鳥) II 호를 운항하며 103일간의 세계일주 상품 등을 내놓고 있다.
요꼬하마에서 마지막으로 오오산바시 국제여객터미널을 둘러 보았다. 국제 현상 공모에 의해 만들어진 터미널 건물은 페리와 크루즈선이 기항하는데 지붕은 잔디와 목선 갑판 느낌을 주는 재질로 되어 있고 바닥과 벽의 구분이 모호하여 마치 전통 목선 안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둘쨋날 아침 일찍 일어나 와세다대학을 둘러보고 도쿄 오다이바에 자리한 배 과학관을 방문하였다. 지하 1층 지상 6층 건물에 해양환경, 배의 역사와 구조, 일본 전통 선박, 해운, 수산, 해상자위대, 해상보안청 등 그야말로 바다와 배에 관한 모든 것을 망라하였지만 1974년에 개관한 탓인지 다소 시설이 낡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실제 대형선박의 주기관을 전시해 놓기도 하였고 ‘Q & A Theater'라 하여 2~3개의 전시실마다 관람객들이 의자에 앉아 영상물을 보면서 의자에 설치된 버튼을 누르며 퀴즈에 답하는 쌍방향 공간이 마련된 것이 인상적이었다. 해상자위대원이 독도를 ‘다케시마’로 소개하는 영유권 분쟁 영상물을 시청하는 것은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과학관 건물 내에 도쿄 항만 교통 관제소 중 한 곳이 설치되어 관람객들이 사진과 설명으로 항만 관제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옥외에는 등대와 실험선, 잠수정, 해저 거주 실험 하우스 등이 전시되어 있고, 특히 과학관 옆 부두에는 혼슈와 훗카이도를 연결하던 열차페리선 요테이마루(羊蹄丸)와 남극관측선 소야(宗谷)가 공개되어 있다. 모두 덮여져 선교와 하나로 이어진 여객선 윙브릿지는 유조선 1항사에게 충분히 호사스럽게 보였다.

 
 
일정 중 마지막으로 방문한 일본해사도서관은 연휴라 휴관한 것만 확인하고 말았는데, 일본선주협회와 해사기자협회, 해기교육재단, 해운조합 등이 입주한 일본해사센터 건물 내에 있다.
이틀이란 짧은 기간 동안 박물관, 과학관, 기념관들과 네 척의 선박을 정신없이 둘러 봤다. 올해 개관할 우리나라 국립해양박물관이 아시아권에서 가장 최근에 개관하는 만큼 멋진  전시관이 되길 기대하며 개인적으로 고 정주영 회장의 일화를 소개하는 공간이 설치되길 소망해 본다. 500원짜리 거북선 지폐와 5만분의 1 지도, 백사장 사진을 들고 오늘날 세계 정상 한국 조선의 시발을 창조한 이 일화는 특정 회사의 이해를 떠나 해양인들 뿐 아니라 온 국민, 다음 세대까지 기억해야 할 정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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