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바다의 날’ 제 17차 해사문제연구소 선상세미나 참가기‘


우리역사 되돌아보기, 무관심 반성 기회

 

 
 

만남, 그리고 설레임
2011년, 한국해사문제연구소와 국토해양부가 주관한 해운물류전문가 양성교육에서 운이 좋게 1등을 하여 부상으로 중국 5박 6일간의 견학을 가게 되었다. 다음 차수 교육에서 대학교 동기가 같은 상을 받게 되어 외롭진 않을 거란 생각에 인천 여객 터미널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약간 지각을 한 덕분(?)에 일정을 함께 동고동락할 분들이 모여 있었고 어렵지 않게 합류할 수 있었다. 약 120여명으로 이루어진 일행들과 함께 할 5박 6일의 추억은 설레임으로 다가왔고 앞으로의 험난한 일정을 좋은 기억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중국과의 첫만남
중국이란 대국은 미묘한 매력을 느끼게 한다. 우선 같은 아시아 국가이면서도 문화적으로는 한국, 일본과는 상이한 문화 특히 서민문화가 많이 발달되었고 산업적으로 우리나라의 새마을 운동 시절의 과거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들게 해준다. 개인적으로는 중국 여행이 처음이라 많이 설레고 호기심이 충만했지만, 일정상으로 중국 문화 관광이 아닌 우리민족의 한 축을 이루는 고구려 문화를 답사한다는 마음에 경건한 마음이 앞섰으며 한편으론 국사책에서만 보고 느꼈던 민족의 얼을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할 수 있다는 생각에 단동으로 가는 페리선 안에서도 쉽사리 잠이 들지를 않았다.


14시간의 항해 끝에 단동항에 도착하여 받은 첫 느낌은 우리나라 시골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이었다. 특이한 점은 토양의 질과 기후 때문인지 벼농사가 적고 대부분 옥수수 농사를 많이 짓는다는 것이었다. 점심 식사를 하러 단동 시내에 도착하여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대부분의 간판 및 전단지 등에 한글이 많이 눈에 띄었다는 점이다. 북한과 단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터라 한글을 병행하여 사용한다는 점이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새로운 경험임에는 틀림 없었다.


식사 후 7시간이 넘는 버스 여행이 시작되었다. 피곤을 느낄 만도 하지만 지나가는 풍경 속에서 때묻지 않은 자연을 느낄 수 있었고 맑은 하늘과 깨끗한 강물을 보며 마음까지 정화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때묻지 않은 이곳마저 관광 및 상업 발전을 위해 훼손되지 않을까 걱정을 하며 통화 시내로 향하는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고 있었다.

 

 

 
 

‘아..’ 백두산 그리고 고구려
통화 시내 호텔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날 새벽 백두산 등반을 위해 다들 분주히 준비하였다. 백두산이라는 단어만으로 가슴이 먹먹해지고 벅차올라 잠을 설쳤지만 백두산을 향해 가는 동안 설렘에 피곤을 잊을 정도였다. 일행 모두 부푼 가슴을 애써 가라앉히며 버스에 올라 아름다운 풍경을 벗삼아 민족의 정기 백두산을 향해 가는 길이 실제 시간보다 훨씬 길게만 느껴지는 건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백두산에 도착하였을 때는 날씨가 맑아서 천지를 잘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가이드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셔틀버스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비가 왔다가 맑아 졌다가 안개가 자욱해졌다 하는 등 수시로 바뀌는 백두산의 변덕스런 날씨 덕에 천지를 보려면 백두산을 백두번 올라야 한다는 가이드의 농담 섞인 말이 피부로 와 닿았다. 셔틀 버스 하차지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안개가 자욱하여 앞을 내다 볼 수 없을 정도였지만 1,300여 계단을 오르면 백두산 천지를 두 눈에 담을 수 있다는 들뜬 마음에 힘든 것도 잊은 채 단숨에 올라갔다. 5월임에도 곳곳에 눈이 쌓여있었고 두터운 옷을 입지 않으면 안될 만큼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등줄기에 땀이 흐를 정도로 올라갔으니 당시의 벅찬 마음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아..’
천지는 우리에게 마음을 반만 허락하였다. 반쪽 얼굴은 안개로 가린 채 우리를 맞이한 천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우리 일행의 마음을 차지할 만큼 장관이었다. 너무 아름답고 가슴이 벅차 올라 백두산 천지를 밟고 있다는 사실마저 망각한 채 멍하니 민족의 영산을 바라보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천지는 이미 부끄러운 듯 안개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맑은 공기를 깊게 들여 마시고 흙을 한번 만져보면서 이 아름다운 산을 중국에서만 볼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이 아려옴을 느꼈다. 사진을 쉴 새 없이 찍은 후에도 쉽사리 돌아서질 못했지만 무심한 일정 시간에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내려가야만 했다. 협곡을 돌아보고 다시 내려갈 때에는 민족의 정기를 일행 모두의 가슴속에 담고 갈 수 있어서 힘든 여정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꼈다.


아쉬운 마음에 쉽사리 놓아주지 않는 백두산을 뒤로 하고 일행이 향한 곳은 바로 고구려 유적지였다. 처음으로 들른 곳이 국사책에서만 봐왔던 광개토대왕릉비였다. 약 1,700여 년 전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릉비를 직접 두 눈으로 보니 굉장히 웅장하고 거대하게 느껴졌다. 그 당시에 이러한 비석에 글을 새겨넣는 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 글이 약간의 훼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렷하게 남아있다는 것에 다시 한번 선조들의 기술과 노력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역사 왜곡의 한 방편으로 사용된다는 것에 분노심이 일었고 광개토대왕릉비 앞에서 우리 민족의 자취라고 표현할 수 없는 현실에 상실감 또한 느꼈다. 언젠가 국력이 강해지고 역사의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게 된다면 자랑스러운 우리 유산인 광개토대왕릉비도, 또한 대륙의 한 변방민족이라 여겨지고 있는 우리의 고구려도 다시 전 세계에 재조명받는 날이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광개토대왕릉비 옆으로 난 민들레 길을 지나가면 광개토대왕릉이 나온다. 표면적인 모습만 보면 왕릉이라기 보단 그냥 거대한 돌무덤이라고 볼 수 있는데, 예전 웅장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하나씩 하나씩 돌을 가져가서 지금의 돌무덤 형태가 되었다고 한다. 문화 유산을 지키려는 마음이 결여된 모습에 다시 한번 가슴이 치밀어 올랐지만 더 이상의 훼손 없이 지금처럼만이라도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하는 마음만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광개토대왕릉에서 조금더 가다 보면 장군총이 나온다. 그나마 훼손 정도가 양호하여 웅장한 모습을 지킬 수 있었는데 그 웅장함의 정도가 120여명 되는 일행을 압도할 만 하였다. 기계의 도움 없이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 그 큰 바위들을 옮겼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왕족 혹은 귀족에 가까울수록 무덤의 크기가 더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는데, 왕들의 무덤 근처로 빼곡히 다른 여러 크기의 무덤이 논, 밭 사이 사이에 있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버스를 타고 조금만 이동하면 오호분묘가 나온다. 한 번에 20명 이상은 입장이 불가할 정도의 크기로 웅장하진 않지만 그 안에 새겨진 벽화가 숨이 막힐 듯 아름답게 일행을 맞이 하여 주었다.  약간의 세월의 흔적이 묻어 나왔지만 알록달록한 색감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고 선조들의 지혜에 다시 한번 숙연해졌다.


고구려 유적을 돌아보며 느낀 점은 중국측이 유지 보수 등 관리보다는 입장료만 챙기기 급급한 모습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는 것이다. 1700여 년의 세월을 모진 자연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견디어 내며 위용을 자랑하는 우리 선조들의 영혼이 담긴 유적들이 이렇게 소홀한 관리와 무관심에 방치되어 있다는 생각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앞으로 더 많은 관심과 함께 유적에 대한 관리를 더욱 철저히 하여 아름답고 당당한 모습으로 후세에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우리 역사 되돌아보기.. 무관심과 반성
일정을 모두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페리선 안에서 일정을 되돌아보며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 특히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의 당당함과 고구려의 기백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과거를 돌아보고 우리 민족의 역사와 의의를 생각할 시간도 없이 현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바쁘다는 핑계와 개인주의적인 생각으로 우리의 것을 소홀히 하진 않았나 반성하게 된 시간이었다.


앞으로 백두산 천지가 다 중국 영토가 될 수도 있다는 것과 중국에 의해 고구려의 유적들이 유네스코에 등록되었다는 설명을 들을 때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무지, 아니 무관심이 역사적 왜곡과 함께 이렇게 큰 결과로 돌아온다면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우리의 흔적이 얼마나 남을까라는 생각에 앞으로 문화적, 사회적인 깊은 관심과 우리의 것을 되찾을 수 있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뜻 깊은 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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