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딱선 기적 소리 젊은 꿈을 싣고서~”
1958년 태안 만리포해수욕장 배경으로 탄생

바다, 백사장 클로즈업 시켜 노랫말 만들어져

 
 
시원한 물, 나무그늘이 그립고 ‘바닷가 추억’이 만들어지는 여름이 왔다. 해수욕장에서 맺어지는 사랑도 이맘때가 가장 뜨겁고 아름답다. 특히 서해 바닷가처럼 아늑하고 내밀한 곳도 없다. 톱니바퀴 같은 충남 태안지역의 해안은 리아스식으로 바다를 밀고 당기면서 곳곳에 크고 작은 백사장들을 숨겨놓았다.
이원반도의 끝자락 만대에서 꾸지 나무골을 거쳐 학암포, 구례포, 신두리의 해안사구(국내 최대 규모의 모래 언덕으로 천연기념물 제431호)와 소원반도의 구름포, 십리포, 백리포, 천리포, 만리포에 이르기까지 바다는 숨 가쁘게 모래를 토해놓는다. 학암포 가까이의 안뫼마을은 ‘먼동’ ‘용의 눈물’ ‘야망의 전설’ 등의 촬영지로 낙조의 황홀감에 빠져들게 한다.

흥겨운 반주리듬에 중·장년층 단골가요
대중가요 ‘만리포 사랑’을 자주 듣게 되고 불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섬, 똑딱선, 꽃구름 등이 사랑과 버물어져 감흥을 더해준다.
이 노래는 만리포해수욕장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1958년 센추리레코드에서 제작돼 첫 선을 보인 ‘만리포 사랑’은 반야월 작사, 김교성 작곡, 박경원 노래다. 폭스 트로트풍의 4분의 2박자 곡으로 멜로디가 경쾌하다. 쿵짝! 쿵짝! 하는 흥겨운 반주리듬에 중·장년층의 단골가요이기도 하다. 
노랫말을 쓴 반야월 선생은 자신의 저서 ‘나의 삶, 나의 노래’를 통해 ‘만리포 사랑’에 대해 술회해놓은 얘기가 재미있다. “(노래가 만들어질 무렵은) 춘궁기가 있었고 원조자금으로 살던 시절이라 요즘처럼 레저가 일반화되지 못했다. 하지만 여름이면 벌어지는 해변의 ‘인파 축제’는 갖가지 이채로운 풍속도를 낳았다”며 노랫말 탄생배경을 들려줬다.

그는 풍속도의 한 모습을 만리포백사장에 클로즈업시켜 가사를 만들었다는 얘기다. “노래가 나오자 신기하게도 적중, 삽시간 애창되는 행운을 안았다”고 회고했다. 배꼽이 나온 수영복, 수박빛 선 그라스, 비치파라솔 밑에서 캔 맥주를 따서 마시는 싱싱한 젊은이들….
그의 눈에 비친 그 때 모습들이 웃음을 머금게 한다. 지금은 보통사람들의 생활이 돼버렸지만 노래를 부르다 보면 1950년대 말의 시대상을 현장에서 흑백사진처럼 보는 것 같아 재미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가는 느낌이 온다. 1994년 세워진 ‘만리포 사랑’ 노래비(높이 220㎝, 너비 80㎝)가 그곳에 세워져 있다. 

‘만리포 사랑’을 불러 일약 유명해진 원로가수 박경원씨는 2007년 5월 31일 오후 지병으로 별세했다. 유족으론 아내(정현수씨)와 2남 1녀가 있다. 1931년 4월 3일 인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2년 오아시스레코드사 전속가수로 데뷔해 신신레코드사, 노벨레코드사, 센추리레코드사 등을 거치며 ‘이별의 인천항’ ‘남성 넘버원’ ‘비애 부르스’ ‘남성 넘보원’ ‘나포리 연가’ 등 히트곡들을 쏟아냈다. 1999년 ‘이별의 인천항’ 노래비가 인천시 중구 북성동 월미도에 세워졌다.
1955년 동국대 경제과를 졸업한 그는 1972년 인천문화상을 받았다. 2007년 해외교포 위문공연을 다녀오는 등 노년에도 열심히 뛰었지만 당뇨 등 지병이 악화돼 입원치료 중 세상을 떠났다.

만리포사랑 작사가 반야월 선생의 생전 모습
만리포사랑 작사가 반야월 선생의 생전 모습
반야월, 5,000여 곡 노랫말 쓴 작사가 겸 가수
작사가 반야월 선생(본명 박창오)도 음악적으로 대단한 분이다. ‘목포의 눈물’을 부른 여성가수 이난영, 진주출신 가수 남인수와 함께 국내 3대 음악명인으로 꼽힐 만큼 유명하다. 올해 3월 26일 별세한 그는 1917년 경남 마산태생이다. 진해농산고를 수료한 뒤 태평레코드사가 주관한 콩쿠르에서 입상하면서 가요계에 첫발을 디뎠다. 진방남이란 예명으로 1938년부터 태평레코드사 전속가수로 있으면서 ‘불효자는 웁니다’ ‘꽃마차’ 등을 불러 히트시켰다. 1942년부터 노랫말을 지으며 반달을 뜻하는 반야월(半夜月)이란 예명을 쓰기 시작했고 광복 뒤엔 주로 작사가로 활동했다.

분단의 비극과 6·25전쟁이 찾아오자 전쟁의 참화에 고통 받던 국민들에게 ‘울고 넘는 박달재’ ‘단장의 미아리고개’ 등 완성도 높은 노랫말을 지으며 민족의 애환을 나눴다. ‘산장의 여인’ ‘소양강 처녀’ 등 5000여 곡의 노랫말이 그의 펜 끝에서 나왔다. 1999년 별세한 작곡가 손목인과는 ‘아빠의 청춘’ ‘여자의 일생’ ‘유정천리’ 등 여러 히트곡들을 함께 내놓으며 명콤비로 불렸다.

 
 
그에겐 아쉬움의 그림자도 있었다. 데뷔한 뒤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을 위로하는 노래로 사랑받았으나 일제강점기 말엔 친일가요인 ‘소년초’, ‘결전 태평양’ ‘일억 총진군’ 등을 불러 오점을 남겼다. 친일음악이란 비난이 쏟아지자 그는 2010년 “친일 군국가요를 부른 것을 매우 후회하며 국민께 사과 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얼마 전까지도 창작열을 불태웠다. 2005년엔 67년 음악인생을 정리하는 920쪽 분량의 회고록과 신곡 ‘스카라 계곡’을 발표했다. 이 노래엔 ‘가요인의 거리’로 불렸던 서울 중구 인현동 이야기를 담아냈다. 2008년에도 ‘꿈꾸는 청계천’, ‘그리운 제2고향’ 등 10편의 노랫말을 발표했고 이듬해 ‘박달재 사랑’, ‘나의 별’ 등을, 지난해엔 아들 박인호와 딸 박희라 씨가 작곡한 ‘오이도 사랑’을 작사하며 현역으로서의 열정을 과시했다.

그는 전국에 가장 많은 노래비가 세워진 인물로 기록된다. 1993년 ‘내 고향 마산항’을 시작으로 ‘단장의 미아리고개’, ‘울고 넘는 박달재’, ‘만리포 사랑’ ‘소양강 처녀’, ‘삼천포 아가씨’, ‘산장의 여인’, ‘무너진 사랑탑’ 등 전국에 세워진 그의 노래비가 10여 개에 이른다.
그는 KBS마산방송국 문예부장, 한국가요작가동지회 종신회장, 한국음악저작권협회 고문, 한국전통가요사랑뿌리회장 등을 지냈다. 가요계에 이바지한 공로로 KBS특별상, 화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 부인 윤경분씨(92)와 2남 4녀가 있다.

 
 
1955년 7월 1일 개장한 서해안 3대 해수욕장
한편 노래탄생 배경지인 만리포해수욕장은 태안군 소원면 모항리에 있는 역사 깊은 해수욕장이다.
1955년 7월 1일 문을 연 이 곳은 백사장 길이 2.5㎞, 너비 100m, 면적 20만㎡ 규모의 서해안 최대 해수욕장이다. 변산·대천해수욕장과 함께 서해안 3대 해수욕장이다. 가는 모래, 완만한 경사, 얕은 수심으로 관광객들부터 사랑받고 있다. 2005년 해양수산부 평가에서 전국 최고 해수욕장이 된 이곳엔 해마다 수백만 피서인파가 추억을 만든다.

2005년 7월에 세워진 해수욕장 개장 50주년기념 ‘만리포 사랑 시비’도 곁에 있다. 서울에서 2시간이면 닿는 태안에서 18km쯤 가면 나온다. 서울~태안 간 시외버스는 20분마다 운행되고 있다. 7,000여 종의 꽃과 나무들로 유명한 식물원이 부근에 있고 낙조가 눈길을 끈다. 또 태안군 안흥항 북쪽 갈음리해수욕장도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촬영지로 이름나 있다. 깨끗한 바다, 아기자기한 작은 섬들이 낙조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풍부한 해산물, 숙박 시설, 삼림욕장도 갖춰져 있다. 껍데기가 두껍고 연푸른색을 띄며 국물이 얼큰한 태안 꽃게탕, 해삼창자 등이 별미다. 
 

 
 
왕성상 wss4044@hanmail.net
마산중·고, 중앙대 신문방송학과, 신문방송대학원을 나와 1979년 한국경제신문 기자를 시작으로 언론계에 몸담아오고 있다. 특히 ‘남인수가요제’에서 우수상을 받아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에 등록(865호), ‘이별 없는 마산항’ 등을 취입했다. ‘기자가수’로 가끔 무대에 서면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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