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진 앞바다 소재, 배호 취입해 히트

2003년 노래비 건립…같은 제목 영화, 드라마도

 

[필자 왕성상]=마산중·고, 중앙대 신문방송학과, 신문방송대학원을 나와 1979년 한국경제신문 기자를 시작으로 언론계에 몸담아오고 있다. 특히 ‘남인수가요제’에서 우수상을 받아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에 등록(865호), ‘이별 없는 마산항’ 등을 취입했다. ‘기자가수’로 가끔 무대에 서면서 글을 쓰고 있다.
[필자 왕성상]=마산중·고, 중앙대 신문방송학과, 신문방송대학원을 나와 1979년 한국경제신문 기자를 시작으로 언론계에 몸담아오고 있다. 특히 ‘남인수가요제’에서 우수상을 받아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에 등록(865호), ‘이별 없는 마산항’ 등을 취입했다. ‘기자가수’로 가끔 무대에 서면서 글을 쓰고 있다.
배호(1942∼1971년)가 부른 ‘파도’는 1969년에 나온 대중가요다. 이인선 작사, 김영종 작곡의 이 노래는 43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자주 불린다. 특히 여름이면 ‘매혹의 가수’ 배호가 다시 태어나는 느낌이다. 대한민국 옥관문화훈장에 추서된 국민가수이자 불세출의 소리꾼으로 세상을 떠난 지 41주기를 맞지만 ‘파도’를 들으면 그 때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부딪쳐서 깨어지는 물거품만 남기고 가버린 그 사람을 못 잊어 웁니다~’ 영혼을 울리는 차분한 저음으로 고단한 민초들의 심금을 어루만져줬다.


이 노래는 강원도 주문진 앞바다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끊임없이 밀려왔다 쓸려나가며 하얀 물거품을 남기는 동해안의 파도를 우리들 삶과 사랑, 이별을 접목시켜 노랫말로 엮은 것이다.


‘파도’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면서 2003년 7월 12일 동해안에 노래비까지 세워졌다. 강릉시가 주문진해수욕장 ‘아들바위’ 부근에 제막식을 가진 것이다. 비 앞면엔 노랫말을, 뒷면엔 강릉시장의 건립경위가 새겨져 있다. 280cm 높이의 비는 아름답게 파도치는 동해의 바위 위에 우뚝 서서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 환경기금조성을 위해 비 옆의 돌 저금통에 500원짜리 동전을 넣으면 노래가 흘러나온다. 갈매기가 춤추며 날아다니는 해안에 ‘파도’ 노래가 울려 퍼져 관광객들에게 색다른 추억을 안겨준다.


파도가요제’ 때 배일호 ‘파도’ 열창

 
 
2004년 여름엔 주문진 오징어축제의 하나로 ‘제1회 강릉 배호 파도가요제’가 열렸다. 그 때 신토불이 가수 배일호씨가 ‘파도’를 열창해 눈길을 모았다. 가수가 되기 위해 배호 모창으로 실력을 쌓아온 그는 배호 노래를 좋아해 연예명도 배일호로 지었다.


‘파도’ 노래가 전국적으로 뜨면서 동해안 사람들은 주문진을 중심으로 관광객 끌어들이기에 나서 쏠쏠한 재미를 보기도 했다. ‘파도’ 노래비에서 조금 밑으로 가면 강릉이고 경포호 주변엔 오죽헌, 선교장, 참소리축음기박물관, 에디슨과학박물관 등 볼거리가 많아 외지인들 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소나무에 둘러싸인 강릉 초당동은 순두부와 모두부가 유명한 음식마을이 됐다. 콩물에 바닷물을 부어 만들어 맛이 특이해 지역명물로 자리 잡았다.


노래가 히트하자 같은 제목의 영화와 드라마도 나와 또 한 번 배호를 떠올리게 했다. 1967년 선보인 영화 ‘파도(波濤)’는 최훈 감독 작품으로 김지미, 문희, 김진규, 오영일 등 그 무렵 잘 나갔던 스타들이 출연했다.


노래가 나온 지 30년 되는 1999년엔 드라마 ‘파도’도 만들어졌다. SBS-TV가 그해 4월 24일부터 12월 26일까지 70부 작 주말연속극(토·일)으로 내보냈다. 김한영 연출, 김정수 극본의 드라마엔 이재룡, 이영애, 김영애, 김호진, 신은경 등 인기연기인들이 나와 눈길을 모았다. 노래에 나오는 파도처럼 부서지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파도를 취입한 배호는 1963년 가요계에 데뷔, 1971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숱한 히트곡들을 남겼다. 만 29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 그는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 낀 장충단공원’, ‘비 내리는 명동’, ‘누가 울어’, ‘안녕’, ‘영시의 이별’, ‘마지막 잎새’, ‘두메산골’ 등 히트곡이 수두룩하다.


그는 짧게 살았지만 숱한 세상경험을 하고 저 세상으로 갔다. 1942년 4월 24일 중국 산동성 제남시 경7로 위15호에서 독립투사 부친인 배국민 씨와 모친 김금순 씨 사이에 1남1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네 살 때 귀국, 1946년 4월부터 서울 창신동에서 살았고 창신초등학교(1949~1955년)를 다녔다. 이어 1955년 서울영창학교(성동중학교 전신)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부친이 별세하자 부산으로 가서 이모가 운영하는 모자원에서 살며 삼성중학교 2학년 1학기를 마쳤다. 1956년 8월 음악을 하기 위해 혼자 서울로 와 막내외삼촌(김광빈)을 통해 드럼을 배우기 시작, 가요계에 입문했다. 1958년 1년 만에 드럼을 마스터하고 ‘김광빈 악단’에서 연주했다. 1960년 부평 미군부대 Camp Market 관할클럽 등지에서 2년간 악단생활을 하며 연예계에 본격 뛰어들었다. 1963년 ‘김광빈 악단’ ‘김인배 악단’에서 드럼을 치며 노래를 부른 것이다. 김광빈 작곡·편곡의 ‘굿바이’ 등을 첫 녹음해 음반으로 발표했다. 그 때 지어진 연예명이 배호다. 그해 데뷔곡 ‘두메산골’로 가요계에 뛰어든 그는 ‘가요 60년사’ 여론조사에서 좋아하는 가수 1위로 뽑혔을 만큼 유명했다. 음반은 독집 20여장을 포함, 70여 장을 냈고 취입한 노래는 250여곡.

 

 
 

배호사랑회 등 추모모임 활발
배호는 1971년 10월 20일 MBC ‘별이 빛나는 밤에(진행 : 이종환)’ 출연 뒤 감기증세와 신장염 악화로 10월 27일 신한의원에 입원했다. 사흘 뒤인 10월 30일 서울 신촌세브란스로 옮겼으나 혼수상태로 사경을 헤맸다. 11월 7일 살아날 가망이 없자 퇴원해 미아리 집으로 가던 중 의식불명에 빠져 그날 밤 집에서 운명했다. 고인은 11월 11일 예총회관(현재 세종문화회관) 광장에서 가수협회장으로 장례식을 치르고 경기도 장흥 신세계공원묘지에 안장됐다.


 
 
어머니는 1995년 심장병으로, 누이동생은 2003년 정신질환 및 당뇨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의 배호는 대구공연 때 만난 여성 팬과 약혼까지 했으나 임종직전 그녀와 ‘눈물의 파혼’을 하는 바람에 자식은 없다.


지금도 배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배호 라이브카페’가 2005년 7월 14일 서울 송파구에 문을 열었다. 인천시 부평 문화의 거리 부근엔 ‘배호 초상화 네온사인’도 있다. 배호사랑회(회장 최종문) 등 전국모임도 활발하다. 국내·외에 1만여 팬들이 그의 노래를 부르며 추모하고 있다. 대하소설 ‘애니깽’ 작가이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인 김선영 씨는 배호의 모든 것을 담은 단행본(배호 평전)까지 냈다. 김씨는 ‘살아 있는 배호’를 다룬 가상추리소설(배호 찬가-부제 : 聖 배호 코드)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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