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4일에서 16일까지 2泊3日의 日程으로 그동안 한 번 가보려고 생각했던 中國의 大連에 여행을 했다. 사실 그 많은 지역 중에 다롄(大連)을 고른 것은 지금은 大連市에 편입된 뤼순(旅順)에 가보고 싶어 그곳으로 결정하여 다녀왔다.

 

大連과 旅順은 東北三省의 제일 남쪽이 되는 遼東半島에 자리 잡고 있다. 대련은 중국 제2의 무역항구이며, 東北地方(만주)의 창문이다. 또 여순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여순감옥이 있고, 또 노일전쟁에서 日本이 많은 희생자를 낸 203高地가 있다. 여순과 합쳐서 한 때 旅大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그냥 大連이라고 부른다. 中國 사람들은 泰山에 올라 해돋이 구경하고 대련에 가서 해수욕한다는 말이 있듯이 대련에는 星海公園과 성해공원 해수욕장, 老虎灘공원 등 그림같이 아름다운 해상 및 해변 공원으로 유명하다.


이번 여행은 個人 자유여행으로 안내원과 운전기사로 간편하게 자유로운 여행을 했다. 안내원이 일러준 말이 중국 사람은 세 가지를 못하고 죽는다고 한다. 첫째는 땅이 너무 넓어서 다 가보지 못하는 일이고, 둘째는 음식이 너무 다양하여 다 먹지 못하고, 셋째는 한문이 너무 많아 다 이해하지 못 한다고 하여 참으로 재미있는 말이다.

 

 
 

러시아와 日本이 같이 개발한 도시 - 大連
大連市는 遼東半島 최남단에 위치하여 동으로는 黃海, 서로는 발해, 남으로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山東 반도를 마주하고 있다. 무역항을 지닌 地理的 位置 때문에 외국의 기업들이 앞 다투어 자본을 투자하는 ‘북방의 홍콩’으로 발전하고 있는 북방 최대의 항만 도시다. 현재 人口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약 700만이 되고 중국에서도 여덟 번째 큰 도시이다.


大連은 7개의 區와 3개의 市, 1개의 현으로 되어 있으며 면적은 12,574㎢로 매우 넓고 도시는 日本 사람들이 오래 살려고 마음먹고 都市計劃을 하여 아주 깨끗하고 近代化된 都市이다.


唐代초기 大連은 ‘三山浦’라고 불리는 작은 어촌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19세기 후반 유럽 열강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자 淸朝政府는 그 勢力에 굴복, 1989년 제정 러시아에게 여순(중국 발음은 뤼?)과 대련을 租借하는 조약을 체결한다. 다음 해 제정 러시아의 칙령에 의해 청니와(靑泥窪-그 지방의 고유명) 일대는 “다리니”(러시아어로는 멀고 먼 땅이라는 의미)로 불렸다. 그후 러일전쟁(1904-5)을 거치면서 일본에 의해 식민지 시대가 시작된 1905년, 일본에 의해 ‘대련-일본발음은 다이렌’이 정식 명칭이 되었다.
러시아 그리고 일본에 의한 침략시대의 흔적은 현재도 시내 곳곳에 남아 있다. 관광객으로 느낀 점은 보통 다른 중국 도시에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많은데 대련에서는 도시가 고개가 많아 자전거 탄 사람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 특징이다.


대련의 이름난 곳으로는
-老虎灘공원: 이는 海上공원으로 대련시 남동쪽에 있어 우리가 비행장에서 대련에 들어오면서 처음 들러본 곳이다. 기암절경이 3면으로 둘러싸인 멋있는 곳이고 화강암으로 만든 대형 호랑이가 인상적이다. 이곳은 전설에 의하면 백호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인간 세상의 선과 악을 가려 마귀를 물리치고 바다 밑에 갇혔던 「미인어」를 구하여 노호탄 벼랑에 올랐다고 하여 호랑이의 조형물을 만들어 놓아 관광객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었다.

 

-星海공원: 대련의 남쪽 아주 넓은 곳에 위치한 대련의 자랑, 아치형 해변 공원이다. 星海라는 이름은 하늘의 별이 바다 속에 떨어졌다는 전설로 이곳을 星海공원이라고 하며 해수욕장과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놀이 공원이 만들어져 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공원 중앙에 대련의 100년 동안 사람들의 발자국을 청동판에 새겨 놓은 것은 대련의 볼거리의 하나이다.

 

-러시아거리-하얼빈 街: 옛날 제정 러시아인이 만든 거리가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고 그곳에 가면 러시아 인형 같은 물건들을 파는 상점이 많이 있어 러시아가 짧은 기간 통치한 흔적을 볼 수 있어 인상적이다.

 

-大連遠洋洲際酒店: 우리가 유했던 호텔 이름은 英語로는 Intercontinental Hotel-Dalian 五星級  호텔인데, 중국이름으로 원양주제주점이라고 하며 한국에 있는 인터콘티넨탈 호텔과 같은 수준이나 중국식으로 이름을 부르고 있다. 市內 中心部인 中山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식당에서 아침을 먹을 수 있는데 많은 과일 중에 석류같이 생겼으나 속은 희고 검은 깨가 묻은 느낌을 주는 火龍果(화룡과)가 있는데 이는 중국 남쪽 지방에서 나는 과일인 모양인데 처음 먹어 보아 인상적이었다.


이 호텔 근방에 大連에서 이름 있는 中山廣場 그리고 人民廣場이 있어 걸어 다니기에도 도로가 잘 되어 있어 쾌적한 대련 중심이라는 느낌을 준다.

 

 
 

旅順
-安重根 義士와 여순감옥
한국의병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기차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하여 세계를 놀라게 한 일을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조선의 독립과 아시아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애국주의적 정신 즉, 大我를 위하여 小我를 버린 정신은 영원히 빛날 것이다.


여순에는 日本關東法院이 있어 그에 관련된 감옥이 있고, 하루 오후를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安重根 義士는 1909년 10월 26일 거사하여 즉시 체포되어 일본 하얼빈(哈爾濱)총영사관을 거쳐 여순감옥으로 왔다. 安重根 義士가 지내시던 獨房과 고문당하던 방, 그리고 書道를 하신 물건들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또 1910년 3월 26일 死刑(교수형)이 집행되었는데 그 장소도 잘 보관되어 있다. 그곳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사형당할 때 입은 옷은 안 의사 모친께서 직접 가져온 수의를 입고 교수형이 집행되었다고 하여 모친의 사랑어린 처사를 듣고 감명 받았다. 또 中國 當局의 호의로 安重根 의사가 약 5個月 동안 쉬지 않고 쓰신 많은 이름있는 글씨가 한방에 전시되어 있어 너무나 감사하게 생각되었다.


그 중에서 안 의사의 좌우명이라고 할 見利思義 見危授命(이로운 일을 볼 때에는 의리를 생각하고 위급한 일을 볼 때에는 생명을 바치다)과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하루도 독서를 안 하면 입속에 가시가 생긴다)를 비롯해서 無數한 名筆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것이 그 당시 旅順감옥에는 난방이 안 된 추운 감방에서 그런 名筆의 作品을 쓰신 安義士의 心理的 安靜感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지에서 알아보았더니 여순감옥은 1902년 러시아 정부에서 만들었고 1904-5 러일전쟁 중에는 러시아군의 醫院과 騎兵隊營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후 1907년 11월 日本 關東都督監獄, 1920年 關東府監獄, 1934年 關東刑務所로 개명, 1939-45年 旅順刑務所로 개명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나라 신채호선생(1880-1931)도 별세했다. 주로 思想犯 등을 많이 收容하였다고 들었다.

 

-노일전쟁의 격전지 - 203高地(지금은 203景區라고함)
1895년 淸日戰爭에서 일본이 청나라에 승리하자 열강에 의한 中國 侵略이 본격화되었다. 1904년 2월 日本과 러시아는 조선반도, 그리고 중국 東北地方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격돌 露日戰爭이 시작되었다.
203高地는 노일전쟁(1904-5)때 일본과 러시아가 격전을 벌였던 전쟁터 중의 하나이다. 노일전쟁 중 일본 노기(乃木希典) 大將과 러시아군이 203高地(현재는 白玉山이라고 하고 그곳에 의령탑이 있음)에서 싸워 日本軍은 1만7,000명이 전사, 러시아군은 5,000명이 전사하는 처참한 격전이 203고지에서 있었고, 이 전쟁에서 노기大將의 아들도 전사하는 일이 있어 전쟁 후에 노기將軍이 203高地를 바라보면서 1904년에 읊은 漢詩가 있어 여기 소개한다.

 

山川草木轉荒凉  산천과 초목은 황량하게 변했고
十里風腥新戰場  100里(일본의 10里는 우리의 100里) 밖에서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새 전쟁터
征馬不前人不語  군마도 움직이지 않고 사람도 말없이
金州城外立斜陽  석양이 깃든 금주성 밖에 나 홀로 외로이 서 있다.

 

이 漢詩는 日本 사람들이 시은(詩昑)이라고 해서 많이 애창되었던 것이고 필자도 중학교 2학년 때 이 시를 접하여 노기大將를 새롭게 평가한 바가 있었다.


203高地의 作戰 지휘를 노기大將이 했으나 作戰의 실패로 그 많은 軍人이 목숨을 잃게 되어 노기大將에 대한 비난이 그의 고향 야마구치(山口)에선 노골적인 反乃木 항의를 받았으나 노기大將은 일본 메이지(明治)天皇이 죽은 날 같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忠正의 軍人이라는 평도 받고 있다.

 

-水師營
여순에 가면 반드시 가볼만한 곳이 있어 소개하면, 水師營은 노일전쟁이 끝난 후(1905. 3. 28 전쟁 종식) 일본의 노기大將과 러시아의 스텟셀 장군이 대추나무가 있는 이곳 水師營에서 終戰會談을 가져 유명해졌다. 본래 日程에 넣지 않아 직접 가보지 못해 유감이나 中國政府의 지원으로 회담장소를 지금까지 잘 보존하고 있다.

 

 
 

요동반도 여행에서 느낀 점
安重根 義士의 고결하고 충정에 넘치는 愛國心을 다시 한 번 알게 되었다. 약 100年前 홀로 막강한 日本 그중에서도 제일가는 인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을 사살하고 약 5개월의 생명을 초월한 감방생활을 한 것을 보니 위대한 先烈로 머리가 숙여진다. 나는 지금까지 안중근의사를 숭배하는 인물로 살아 왔다. 안 의사의 기념관이 다행히 서울의 南山에 있어 자주 가볼 생각이다.


나라가 약하고 국가로 존재하지 않았던(외교상으로) 일은 참으로 비극이다. 우리나라가 1905년부터 완전히 일본의 통치를 받아온 것, 참으로 가슴 아프다. 우리가 外交權도 없고 해서 국제적으로 우리의 생각을 표시할 수도 없었던 것을 생각하고 지금의 完全獨立 국가인 大韓民國을 생각하니 참으로 자랑스럽다. 요동반도에도 옛 고구려의 비사성(卑沙城)이 660m 고지의 大連郊外에 있어 멀리서 사진만 찍고 왔다. 國權이 없을 때 淸나라가 심양에서 나라를 세우는 바람에 滿洲땅에 있던 많은 고구려의 땅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중국으로 들어간 것이 가슴 아프다. 얼마 전 중국 정부가 만리장성이 2만 1,100㎞가 넘는다고 하는 일이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나는 이번 여행으로 100년 전에 일어났던 일을 보고 온 것이다. 여순감옥, 203고지 등, 안내원에게 水師營에 가자고 하니 매우 의외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대련은 중국에서도 골프의 메카로 유명하여, 한국 관광객의 대부분이 골프장에 가자고 하지 여순감옥이나 203고지 더욱이 水師營에 가자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새삼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저작권자 © 해양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