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산업합리화와 해운학회 설립

 
 
연재순
▶1회-대학진학이전 시기
▶2회-대학입학이후 도쿄상선학교 학창시절
▶3회-상선학교 학창시절
▶4회-졸업이후 취업과 마지막 승선
▶5회-육상(서울)에서의 새 생활
▶6회-전쟁, 그리고 한국해양대학과 인연
▶7회-해양대학을 떠나 만학, 해사문제연구소 설립
▶8회-해사문제연구소의 사업활동 확대
▶9회-해운산업합리화위원장과 해운학회 설립





1984년 3월 나는 뜻하지 않은 해운산업합리화심의위원회 위원장이라는 감투를 썼다. 물론 심의만 끝나면 해체되는 기구이고 보수도 없는 감투였지만 그 임무만은 참으로 중차대한 기구였다. 해운항만청으로부터 내게 심의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아달라고 제의가 왔을 때 나는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내가 해운계에서 여러가지 일에 종사하였지만, 실무에서 손을 뗀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업무가 너무나 중차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를 찾아 온 해운항만청의 실무자도 위로부터 특별한 지시를 받고 왔는지 매우 강경하였다.

“저 개인이 부탁드리는 것이 아니고 청장님과 국장님의 지시를 받고 왔습니다. 위에서 말씀하시기를 윤 박사님은 우리 해운업계의 대 원로이실 뿐 아니라 가장 공정하게 처리할 수 있는 분이니 어떻게든 꼭 승낙을 받아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정 그렇다면 고려해 보겠다고 돌려보내고 주변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았다. 대체적인 의견은 아무리 고매한 인격을 지니고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분이라도 현역에 계신 분에게 맡길 수는 없는 일이고, 현역에서 떠나 있는 원로가 몇 분 계시기는 하지만 서울에는 나밖에 없으니 내가 맡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연구소 내부에서도 황근식 전무와 이원철 부장이 적극 권유하였다.

“해운산업합리화심의위원에서 처리하셔야 할 일이 우리 연구소와는 크게 관련이 없는 일입니다만 이사장께서 이 일을 맡아 잘 처리하시면 앞으로 연구소의 업무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위원장직을 맡았다. 심의위원은 민성규(한국해양대학 교수), 심병구(서울대학교 경영대학장), 홍문신(한국산업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 이강수(한국은행 부총재), 전영수(은행감독원 부원장), 장양술(한국산업은행 부총재), 황창익(한국외환은행 전무) 및 김익래(공인회계사) 등 각계의 저명한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1970년대 이후 세계경제는 1960년대에 비하여 성장률이 낮아지는 가운데 1979년의 두 번째 석유파동과 국제고금리로 장기 침체국면에 빠져들기 시작하여 1982년 중반에 최악의 상태를 나타냈다. 세계 무역량은 지속적으로 감소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80년 초까지 계속되었던 호황기에 발주한 선박들이 대량으로 해운시장에 풀리면서, 정기선 부문의 물동량 감소, 부정기선 부문의 지속적인 운임하락, 유조선 부문의 선복량 과잉으로 해운시장은 질곡에서 헤맬 수 밖에 없었다.

이같은 절박한 상황에서 우리나라 외항해운업계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 극심한 불황을 겪어야 했다. 즉 대부분의 선사들이 운항권가의 절반 수준을 밑도는 운임률로 적자운항을 계속하여 경영수지 악화에 따른 선가상환자금의 부족과 운전자금의 핍박으로 심한 자금난을 겪게 된 우리나라 외항해운업계는 1982년에 1,024억 원이라는 엄청난 결손을 냈으며, 이로인해 일부 선사가 도산하거나 선박이 해외에서 억류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외항 해운업계는 경비의 절감, 불용자산의 처분 등 자구대책 마련에 부심하였으나, 불황의 심도가 너무 깊어 자구노력만으로 불황의 극복이 어렵게 되어, 정부에 대하여 대책을 호소하였다.

 
 
해운항만청은 해운불황 대책의 추진목표를 보다 근원적인 것에 두고 우리나라 해운산업이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점을 분석하고 정책적인 해결방안을 강구한다는 기본방침을 세웠다. 이러한 방침 아래 해운항만청은 해운국장을 반장으로 비상대책반을 구성하여 해운산업육성대책(안)을 수립하여 1983년 10월 7일 제9차 경제장관회의에 상정하여 의결을 보았다. 그러나 관계부처가 실무작업반을 구성하여 해운불황을 효율적으로 타개할 수 있는 근본대책을 강구하라는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1983년 10월 19일 정부 관계 부처의 국장급 및 금융기관, 해운업계 인사들로 해운불황대책반을 구성하여 ‘해운산업합리화계획안’을 마련하였다.

‘해운산업랍리화계획안’은 몇 차례에 업계 대표자와의 공청회 및 간담회 등을 통해 의견을 수렴하여, 최종적으로 1983년 12월 15일 제14차 경제장관협의회의 협의를 거쳐 1983년 12월 23일 제21차 산업정책심의회에서 확정 의결되었다. 해운항만청은 이를 1983년 12월 29일 해운항만청 공고 제209호로 공고하였다.

그 내용은 업계가 자율적으로 참여하여 해운업계를 합리적으로 통폐합함으로써 국적 선사간의 과당경쟁을 방지하고, 정부는 이를 중점적으로 지원하여 육성하여 국제경쟁력을 높여 기업경영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그 방안은 첫째, 국내 선사간의 합병 또는 운영선사를 설립하되, 다만 운영선사를 설립하는 경우, 위탁선사는 2년 이내에 운영선사에 완전 합병하도록 하였으며, 둘째, 합리화 참여 선사에 대하여는 금융 및 세제상의 지원을 중점적으로 시행하도록 하였는데, ① 조세감면규제법에 의한 등록세, 취득세, 특별부가세의 감면, ② 시황 호전 시까지 선박수입과 관련된 원리금 상환의 유예, ③ 계획조선 자금의 거치기간 연장 및 외화부문의 특별 외화대출 연장, ④ 비경제선의 처분을 위한 중고선 개조자금을 지원하는 것 등으로 되어 있었다.

위와 같은 해운산업합리화계획이 확정됨에 따라 해운항만청은 합리화계획에 참여하고자 하는 선사는 1984년 1월 16일까지 채권, 채무 및 자산현황을 신고하도록 했는데, 대상선사 66개사 중 외국 합작회사가 동의하지 않아 불참한 동영해운, 한진해운 및 호남탱카 등 3개사를 제외한 63개사가 신고를 마쳤다. 신고 된 내용을 보면 채무액이 2조 5,163억 원, 채권 및 자산액이 2조 7,972억 원으로 집계되었다. 이어 1984년 3월 31일 합리화계획서의 제출을 마감한 결과 63개사가 17개 그룹으로 집약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들 17개 합리화 대상선사를 항로별로 보면 원양항로에 고려해운, 대양선박, 대한선주, 대한해운, 두양상선, 범양상선, 조양상선, 현대상선 등 8개 그룹, 동남아항로에 동남아해운, 세양선박, 오성해운, 조양근해상선 등 4개 그룹, 한일항로에 남일상선, 동진해운, 신라해운, 한일해운 등 4개 그룹, 그리고 특수선 그룹으로 한국특수선이 형성되었다. 이 가운데 고려해운, 대양상선, 대한선주, 대한해운, 범양상선, 세양선박 등 6개 구릅은 합병선사였고, 나머지 11개 그룹은 운영선사 그룹이었다. 그리고 범주해운, 보양선박, 삼원선박, 서진해운, 선일상선, 성운물산, 유공해운, 중앙상선, 한림해운 등 9개 선사는 계열선사로 참여하는 것으로 되었다.

내가 위원장이 된 해운산업합리화심의위원회는 이상과 같은 합리화 계획이 과연 합리성을 지닌 것이며, 그러한 합리화계획이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경우, 과연 해운불황의 늪에서 빠져나와 비약적인 발전을 기대할 수 있는가를 심사하여 결정하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그런데 나를 포함한 9명의 심의위원 가운데 금융계 인사가 4인으로 다수를 차지하였고, 이밖에 대학교수가 2인, 연구원 인사와 공인회계사가 각각 1인이었지만, 그 어느 누구도 선사 그룹별 합리화계획에 대하여 자신 있게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지 못하였다.

물론 사전에 해운항만청 실무자들에 의한 심의가 이루어져 그 내용이 심의위원회에 보고되었지만, 금융계 인사들은 대체적으로 계획안에 포함되어 있는 계수의 합리성 여부에 대하여 주목하여 발언하였고, 학계 및 연구원 인사들은 어떻게 하든 해운산업을 재생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명분론에 대체적으로 매달려 있었다. 나라고 해서 뾰족한 대안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떻게 하든 우리 해운업계로 하여금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마음에서, 그렇게 의결이 이루어지도록 유도하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11차례에 걸친 심의회를 통하여, 1984년 5월 7일 17개 그룹의 계획 모두에 대하여 합리적인 것으로 심의 의결하였다.

후일담이지만 나는 해운사업합리화계획이 과연 옳은 방안인가에 대하여 의문을 갖고 있었다. 물론 대안을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또 대안을 갖고 있었다 하더라도 일찍이 현역에 물러나 있던 나로서 대안을 제시할 처지도 못되었지만, 최선의 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듯 내가 주도하여 의결한 심의 결과도 그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예컨대 뒷날 대한선주의 경영권이 한진해운에 이양되었고, 범양상선이 법정관리를 받게 되었고 고려해운의 원양 컨테이너 항로 운항권이 현대상선으로 이양되었다. 또 어떤 회사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러나 이처럼 심의위원회의 결과가 뒤헝클어지기는 하였지만 우리 해운이 합리화계획을 통하여 재생의 길을 밟게 되었다는 점에 나는 만족하고 있다.

한국해운학회 설립의 주도
1981년 초 여름 어느 날 성균관대학교의 한동호 박사와 박은회(朴恩會) 박사가 한국해사문제연구소의 내 사무실을 방문하였다. 두 분은 학교에서는 물론 다른 여러 곳에서도 자주 만나 뵙던 분들이어서 그 분들의 방문에 대하여 나는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고 반갑게 맞았다. 몇 마디 의례적인 인사가 오간 뒤에 한동호 박사가 정색을 하고 말하였다.
“전에도 몇 번인가 말씀을 드린 일이 있죠.”
“무슨 말씀인데요?”
“더 늦추어서는 안 되겠기에 이렇게 박은회 박사를 대동하고 찾아 왔습니다.”
“글쎄 무슨 얘기를 하셨더라....”
“학회........... 해운학회 말입니다.”

“아 그거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제 자신 학자라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또 학회 같은 걸 만들어 운영할 능력이 없어요. 한 박사님께서 주도하신다면 제 힘이 닿는 대로 도와드리기는 하죠.”
“허 또 그 말씀...... 학자로서는 제가 윤 박사님보다 먼저인지 모르지만, 연세로 보아 윤 박사님께서 대 선배이시고,....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해운에 관해서는 대한민국에 윤 박사님밖에 안 계십니다. 만약 제가 해운학회의 창립을 주도한다면 모르는 사람은 모르겠습니다만, 아는 사람들은 웃어요. 제가 뭐 위대한 사람은 아니지만 웃음꺼리가 되는 건 싫습니다.”

“왜 이러시죠? 해운이라고 해도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좀 더 아는 부분이 없지는 않겠지만, 한 박사가 저보다 못한 점이 뭐 있습니까? 그것도 그것이지만 학회를 운영하자면 학회의 운영을 뒷받침할만한 능력이 없어요.”
“재정적인 면에서 능력이 없기는 윤 박사님이나 한 박사님이나 마찬가지죠. 그 문제는 우선 학회를 설립한 뒤에 의논하여 진로를 찾아보기로 하고 다른 무엇도 아닌 해운학회라면 아무래도 윤 박사님께서 앞장을 서시는 것이 순리입니다. 한 박사님이나 저나 윤 박사님께 이렇게 간곡하게 말씀드리는 것은 윤 박사님이 엄연히 계시기 때문입니다. 한 박사님께 죄송스러운 말씀입니다만, 대한민국에 윤 박사님이 안 계셨더라면 저라도 앞장을 설 것입니다.”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만 있던 박은회 박사가 이렇게 끼어드는 바람에 나는 해운학회의 설립에 대하여 두 사람의 의견에 따르기로 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과 의논하여 한동호, 박은회, 서병기(동지상선 사장), 최재수(한국선주협회 전무), 배병태(한바다해운 대표), 이균성(외국어대학교 교수), 이원철(해사문제연구소 이사), 이준수(한국해양대학교 교수), 민성규(한국해양대학교 교수), 박현규(고려해운 사장) 및 황근식(해사문제연구소 전무) 등 제씨를 발기인 대표로 선정하고, 1981년 8월 15일 한국해사문제연구소 회의실에서 발기인 총회를 개최하였다.

이어 1982년 8월 27일 한국선주협회 회의실에서 창립총회 개최하고 정관의 제정 및 임원을 선출하였다. 회장에는 한동호 박사의 추대발언으로 내가 선임되었고, 부회장에 한동호, 박현규, 서병기, 신민교(한국해양대학 하장), 그리고 이사에 김광득, 김동균 등 36인, 그리고 감사에 이균성 교수와 최재수 전무이사를 선임하였다. 이 창립총회에서 제1회 학술발표회를 개최하였다.
이로써 한국해운학회는 정식으로 발족되었지만 역시 재정상의 문제로 학회지의 발간이 여의치 않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업계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야 하고 업계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법인화하는 것이 우선적이라고 생각했다. 업체가 학회 등을 지원하는 경우, 학회가 법인이어야 비과세로 될 뿐 아니라 학회를 지원하는 업체로서도 명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법인화가 쉽지 않았다.

이러한 실무적인 문제는 연구소의 이사를 겸한 이원철 이사가 사무국장으로서 담당하였는데, 학회 활동을 하는데 학회의 법인화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이유로, 이 업무를 담당하는 해운항만청 해운국 진흥과는 법인승인 서류조차 접수하지 않았다. 이 문제는 마침 내가 해운산업합리화심의위원회의 위원장이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즉 해운산업합리화심의위원회 위원장이 회장으로 있는 학회의 법인 설립신청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는데, 그것이 그 당시의 현실이었다. 이렇게 하여 1984년 5월 23일 해운항만청으로부터 사단법인 설립인가(해운항만청 허가번호 제217호)를 받고 7월 1일 서울민사지방법원에 법인설립 등기(등기번호 2060)를 마쳤다.

그러나 넘어야 할 또 하나의 문제가 남아 있었다. 학회지를 발간하기 위해서는 문화공보부에 정기간행물 발간 등록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등록이란 절차상 모든 여건을 갖추어 제출하여 법정(法定) 공부(公簿)에 기재하는 것으로 완료되는 행정행위이지만 당시의 문화공보부가 운영한 간행물 등록제도는 일종의 인가행위로 운영되었는데, 당시 문화공보부는 반정부적 간행물 및 이적 간행물의 출판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방안을 신규 간행물의 등록을 원칙으로 하였다. 물론 신규 간행물이라 하더라도 그 내용이 반정부적이 아니고 이적간행물이 아니면 등록을 받아주어야 했지만, 실무자들은 까다로운 문제에 걸려드는 것을 꺼려하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한국해운학회지의 등록은 1984년 7월 13일자(등록번호 바-1119호)로 접수되었다.

이로써 학회지를 창간하기 위한 준비는 모두 갖추었지만, 이를 실행으로 옮기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원칙적으로 학회의 재정은 회원의 회비로 충당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 자체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었는데, 해운학회는 가입회원 자체가 아직 충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모처럼 설립한 학회가 더 이상 휴면상태에 있어서 안 되겠다는 일념으로 1984년 10월 20일 한국해운학회지의 창간을 단행하였다.
이 창간호에는 해운산업의 합리화에서 얻은 교훈과 한국해운의 진로(민성규), 선원재해보상에 관한 선주책임과 보험(박은회), 일본 외항선원의 임금제도에 관한 고찰(서병기), 미국의 화물우선적취정책에 관한 일 고찰(이원철), 편의치적제도의 배제론과 한국해운의 대응책(한동호), 해운생산성에 관한 제 문제(박명섭), 국제무역항으로서의 군산항의 개발을 위한 제문제(김덕수), 콘테이너운송 진전에 따른 동맹운영 개선방향에 관한 일 고찰(구종순), 국제해사영어의 표준화에 관한 고찰(이재우), 무역학과를 중심으로 한 상경계 대학에서의 해운교육에 관한 제안(최종수), 신 협회 적하보험약관상의 면책사유에 관한 일 고찰(서경무) 및 우리나라 고대무역에 관한 고찰(강용수) 등 12편의 논문이 게재되었다.

한국해운학회의 창설은 내가 주도하였다고 하기보다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한동호 교수와 박은회 교수의 강력한 종용에 의한 것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내가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어 해운항만청으로부터 재단법인의 설립인가를 받아내고, 한국해운학회지를 발간하기 위한 문화공보부의 등록을 내 이름으로 하였다는 점에서 내가 느끼는 자부심은 매우 크다. 비록 밝은 미래보다는 헤쳐 나아가야 할 암담한 현실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한국해운학회 창설과 한국해운학회지의 창간이 우리나라 해운의 밝은 앞날을 약속해 주리라는 믿음 크기 때문이다.

나의 가족
위에서 더러 서술되었지만 내 할아버지 시훈(時薰)공께서는 아들만 규혁(圭爀), 규영(圭榮), 규한(圭漢) 및 규일(圭日) 등 넷을 두셨는데, 내 아버님 규한은 셋째 아들로 태어나셨다. 또 아버지께서는 이송(利松), 도송(道松) 및 상송(常松) 등 세 아들과 딸 금송(錦松)이를 두셨다. 내가 셋째 아들인데, 나와 누이동생 금송이 사이에 사내아이와 계집아이가 하나씩 있었으나,  전염병으로 아주 어렸을 때 죽었다.

그러므로 내 친형제는 두 형님과 누이동생 등 3남 1녀이다. 위에서 서술하였듯 아버지께서는 비록 시골에서의 일이지만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고, 커서는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한 당시로서는 대단한 엘리트였다. 그러나 그러한 엘리트의식이 그 자신에게 하나의 걸림돌이 되어 세상을 버리다시피 일생을 사셨다. 전문학교를 졸업할 임시에 나라가 일본강점기에 들어갔는데, 그로 인해 솟구치는 비분강개(悲憤慷慨)는 참을 수도 없는 일이었거니와, 다른 진로까지 막아버린 듯했다. 즉 아버지께서는 다른 동료 청년들처럼 만주나 러시아 등지로 망명하지 못하였지만, 그렇다고 일제에 협력하여 출세의 길로 들어서기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술로서 허송세월하시었다.

아버지께서는 자신을 그처럼 허송세월하도록 만든 덫이 고등교육이었다고 생각하시어, 되도록 자식이 고등교육을 받도록 하고 싶어 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즉 아버지께서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귀향하였을 때 두 아들은 이미 장성해 있었기 때문에, 셋째 아들만은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키워보고 싶다고 생각하여 여러 가지 혹독한 훈련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막내아들의 진학까지 막으려 했다는 점은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나의 중학교 진학은 큰형(利松)의 열의와 정성이 없었다면 불가능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버지 몰래 회령에서 경성으로 떠나는 열차에 태우려 했고, 아버지의 꾸중에 맞서면서까지 동생의 진학을 관철해 냈고, 그에 필요한 모든 학비를 부담하였다. 이러한 과정에 둘째형(道松)은 적극 개입하지는 않은 듯 보였지만, 큰 형님의 지시에 순종하여 동생인 나를 돌보는데 최선을 다 하였다. 그리고 늦도록 결혼하지 않는 나로 하여금 결혼하도록 뒤에서 일을 꾸미고, 내가 막상 결혼할 때에는 대부분의 비용을 스스로 부담하기하였다.

나에게 이들 두 분 형님은 내 일생의 진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분이다. 이들 두 분 형님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내 일생을 전혀 다른 일생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도쿄고등상선학교에 재학 중일 때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어머니께서 내가 요코하마에서 실습하다가 방학을 맞아 고향에 들렀다가 왔는데 그 며칠 뒤에 돌아가셨다. 아버지께서도 그 몇 년 뒤 승선실습 중에 돌아가셨다. 이른바 일본 유학 중이었고, 내가 다닌 학교가 상선학교라는 특수 학교였고, 또 날씨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나는 두 분의 장례식 모두 제 날짜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본의였든 아니었든 내가 두 분께 마지막까지 불효를 저지른 것만은 틀림없다.

그래서 두 분 부모님을 모시지 못하고 만 28세가 되던 1944년 6월 1일 전순혜와 결혼하였다. 이 결혼에서 두 분 형님이 베풀어 준 은혜도 매우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국이 광복을 맞은 1945년 12월 경 아내와 함께 월남해 버렸다. 두 분 모두에게 인편으로 소식을 전하기는 하였고, 또 아주 월남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서울에서 돌아가는 형세를 살펴보고자 했던 것이지만, 그것으로 둘째형 도송이, 그리고 누이동생 금송이와는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다행히 1951년의 1.4후퇴가 있기 전 북에 머물러 있던 내 가족들의 상당수가 거의 남하하였다. 첫째 형님(이송) 가족, 그리고 장인인 전기영씨와 손위 처남인 전두열씨 가족, 심지어 외가의 일부 등....... 내가 서울에 온 것은 공산주의 체제를 피하고자 한 것도, 또 가족들을 저버리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나중에 생각하기엔 참 잘한 노릇이었지만, 그렇다고 남이 못하는 용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내가 종사하던 직장이 광복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였고, 내가 앞으로 살 길은 내 천직인 해운과 관련된 일밖에 없다는 지극히 단순한 생각뿐이었다. 그랬던 것인데 결과적으로 내가 가족들을 저버린 꼴이 되어 적지 않게 가슴 아파 했지만, 나 개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하였다.

그랬던 것인데 1.4후퇴를 계기로 거의 대부분의 가족이 다시 모이게 된 것이다. 내가 서울로 와서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리 없는 그들이었지만, 그들은 용케도 내 직장이나 내 집을 찾아 왔다. 그만큼 조선우선(대한해운공사)이라는 회사는 당시로서는 참으로 대단한 회사였다. 그들이 나를 찾아올 수 있었던 단서는 오로지 ‘조선우선’(대한해운공사)이라는 이름뿐이었다. 다행히 내가 들어 살던 조선우선 사가이 감독 댁이었던 청파동 집이 꽤 넓어서 북에서 월남한 가족들을 비좁은 대로 충분히 수용할 만 하였다. 때로는 같이 밥을 해먹기도 했고, 또 때로는 따로따로 밥을 해먹기도 했지만, 우리 집은 마치 피란민 수용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둘째형(道松)과 그 가족은 남하하지 못하였다. 남하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남하하지 않은 것으로 들었다. 원산을 중심으로 여기 저기 큰 사업을 영위하고 있었는데, 그런 사업을 어떻게 정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생사소식조차 들을 수 없었다. 막연한 소문이지만 큰 사업을 하고 있었던 관계상 자본주의로 몰려 숙청되었을 것이라고 들었을 뿐이다.

상술하였지만 뒤늦은 나이에 결혼을 한 탓으로 1945년 겨울 초 월남할 때 장남은 아내의 뱃속에 있었다. 물론 월남할 때 아내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뒤늦게나마 아버지가 된다는 점에 나는 적지 않게 흥분해 있었다. 1946년 4월 26일 마침내 장남 원철(元喆)이 태어났다. 아직 시국이 어수선하던 때였지만, 나는 참으로 크나큰 보람과 함께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책임이 중차대함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이어 그 이듬해인 1947년 10월 5일에 둘째아들 한철(漢喆)이가 태어났다. 연년생이었지만, 연년생이기 때문에 키우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저 기쁘기만 하였다. 그리고 1949년 9월 14일 딸 성희(星姬)가 태어났다. 아들 둘 다음에 낳은 딸이어서 무척 귀여웠다. 그리고 1956년 12월 4일 막내아들 문철(文喆)이 태어났다.

이처럼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으나 아이들이 많다거나, 아이들이 많아 생활이 쪼들린다거나 그런 생각은 해 본 일이 없다. 그저 나는 아이들이 자랄 때는 아이들의 재롱에 기뻐하였고, 어느 정도 커서 학교에 다닐 때는 모두 학교 공부를 잘하는 편이어서, 아이들 때문에 누구에게 주눅이 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물론 누구에게나 다 그렇듯 아이들이 늘 마음에 쏙 드는 일만 하는 것도 아니었고, 막내아들은 고등학교 시험에 일차 실패하여 속상해 한 일도 있었지만, 아들 셋 모두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였다. 딸도 공부는 곧잘 하는 편이었다.

이처럼 공부를 제법 했고, 별로 말썽부리는 일도 없어서 그랬겠지만, 겉으로 나는 아이들의 일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관여한다고 해서 내가 뜻하는 바대로 되는 것도 아니거니와, 나에 대한 내 아버님의 지나친 간섭에 옥죄었던 기억이 쉽게 떨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성품 자체가 집안일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갖지 않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2남 한철이와 3남 문철이는 미국에 생활기반을 갖고 있지만, 3남 1녀 모두가 제각기 일가를 이루고 잘 살고 있다.

그렇듯 집안일에 대하여서는 모두 아내에게만 맡겨두고 살아왔다. 내 일생을 두고 볼 때 직장으로 보나 직장에서의 직위로 보나 남보다 크게 못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남보다 큰 여유를 갖고 살아온 것 같지도 않다. 일찍부터 우리 식구 살기에 넉넉한 집을 갖고 있었고, 식량이 떨어져 굶어 본 일도 없었다. 말하자면 집안일에 관한 한 나는 전적으로 아내에게 맡겨두고, 어느 면에서는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이렇게 본다면 내 아내 전순혜는 나에게는 더없는 천상배필(天上配匹)이었다.

결혼 초에는 나이 차 때문이었는지 거의 순종적이었던 아내가 나이가 들어가며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일이 많아지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나의 비위를 거스를 만큼 극성스럽지도 않았다. 그러나 내가 아내에게 고마워하는 것은 그런 성품도 성품이지만, 말없이 살림을 꾸려주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해운계에 입문하여 약관의 나이에 대한해운공사의 중역에 오르고, 한국해양대학장이 되는 등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았지만, 내가 한국선주협회 이사장직을 떠난 것은 1971년 2월로 우리 나이 56세였을 때였다. 그러므로 내가 기관사로 조선우선에 승선한 1941년 1월부터 따지자면 30년간 직장생활을 한 셈이다. 이 30년 사이에 직장을 떠나 있던 기간도 5년여가 된다. 그러므로 내가 급여를 탄 기간은 25년 정도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내가 대한해운공사 상무직을 사임한 것은 직장만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광복 이후 내가 들었던 청파동 집까지 내주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 집은 광복 이전 조선우선의 가사이(葛西) 감독이 살던 집으로 대한해운공사의 소유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6.25전쟁이 휴전된 이후 서울로 올라왔을 때 살 집이 없었다. 이 때 신당동에 새로운 집을 마련하였는데, 이런 모두를 아내가 담당하여 처리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 신당동 집을 처분하고, 공덕동에 새로운 집을 마련할 때도 모든 일을 아내가 처리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나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도 해야 할 일을 충분히 했다고 보기 어렵다. 이런 집안을 아무 탈 없이 꾸려준 것이 아내이다. 한 참 뒤에 안일이지만 아내는 내가 벌어다 준 월급을 조금씩 아껴 어느 정도의 목돈을 만든 다음, 장인어른이 돌아가신 뒤 처남과 처제와 동업으로 면목시장을 운영하여, 그 이익금으로 집안을 꾸려왔다. 아내가 아니었다면 내 일생에 거둔 것은 아무 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1971년 4월에 재단법인 한국해사문제연구소의 설립을 주도하여 1985년 8월까지 이사장직을 맡고 있었지만, 한국해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이라는 자리는 살림을 꾸릴 수 있는 월급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오로지 나 스스로의 인생을 보람있게 마무리하기 위한 사명감을 내세운 자리였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주도한 사업이었다는 점에서 자긍심을 느낀다. 사단법인 한국해운학회의 설립은 상술하였듯 한동호 박사와 박은회 박사의 강요에 의한 것이기는 하였지만, 내가 초대 회장으로서 그 기반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자긍심을 갖고 있다.

한 가지 덧붙여 두고 싶은 사족(蛇足)은 내가 도쿄고등상선학교 졸업을 앞둔 실습생 시절 모처럼 익혀 나의 유일한 취미가 되었던 춤을, 우리나라가 광복을 이룬 이후에는 공식적으로 즐겨 본 일이 없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풍토가 사교춤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사회 풍토가 그러하였기 때문이지만, 광복 이후에는 취미를 감추어 둔 채 살아야 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 대신 새로 개발한 취미가 낚시였는데, 나는 물고기를 낚는 것보다는 낚시터에서 느낄 수 있었던 고즈넉한 분위기와 그런 곳에서 마시는 소주 한 잔의 맛이었던 것 같다.

집필후기
위에서 서술한 내용은 윤상송 박사가 두 번째로 쓰러진 이후 몸을 약간 추스른 다음 댁에서 조리하시는 틈틈이 집필한 내용을 필자가 정리한 것이다. 윤 박사는 어려서부터 서예를 배워 글씨에 어느 정도 자신을 가진 분이었지만, 고등상선 시절 뒤늦게 공부에 열중하게 된 탓에 글씨를 버렸다고 스스로 말씀하였다. 그렇듯 윤상송 박사의 글씨는 매우 힘찬 달필이었지만, 다른 사람이 알아보기 쉽지 않은 글씨이다. 그런데 병환 중에 쓰신 글씨라 마치 암호를 해독하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자신의 그런 글씨를 의식하시어서 상당 부분을 녹음으로 남기시었지만, 병환 중의 말씀 역시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더욱 많았다. 그러했기 때문에 필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옮기고자 했지만 과연 윤상송 박사께서 하고자 함 말씀을 제대로 옮겼는지 두렵다.

또 병환 중이어서 그러하였겠지만 얘기가 두서없이 왔다 갔다 한 점도 있었다. 되도록 윤 박사의 서술 순서를 그대로 따랐지만, 아무래도 어색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서는 필자 마음대로 순서를 바꾼 대목도 몇 군데에 이름을 밝혀두고 싶다. 그리고 어떤 부분에서는 지나치게 세세하다고 느껴지는 대목도 여러 곳 필자 마음대로 생략했음도 밝혀두고 싶다.

윤상송 박사는 1940년 12월에 도쿄고등상선학교 기관과를 졸업하고 그 이듬해 조선우선의 3등 기관사로 승선하여 해상생활을 시작하여 기관장까지 승진하였으나, 해상생활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광복 이후는 물론이고 광복 이전 일제강점기 아래에서도 육상에서 근무한 경험이 많은 분이다.
광복 후 조선우선에서 선박 및 선원 담당 이사로 일하였고, 대한해운공사가 출범한 뒤에는 선박 및 선원 담당 상무이사로 일하였다. 대한해운공사를 그만 둔 이후 동남해운 부사장, 한국해양대학 학장, 대한수산개발공사 상임 고문 및 한국선주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그런 기관에서  어떤 일을 어떻게 처리하였는가에 대한 자세한 과정에 대하여 필자는 알지 못한다. 필자가 윤 박사를 모신 것은 1973년 8월경부터 윤 박사가 한국해사문제연구소 이사장직을 물러난 1985년 만 12년이다.

이 기간 중 필자가 느낀 윤 박사의 인품은 한마디로 매우 온후한 분이다. 누가 어떤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크게 꾸짖는 경우란 거의 없었다. 반면에 누구인가 일을 잘한 듯싶으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다만 누구이든 보고사항을 보고할 때 장황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다. 어떤 일이든 결론사항을 그것도 짧게 보고하는 것을 좋게 생각하였다. 보고를 받는 사람이 그러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보충 설명을 원하는 경우에만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윤 박사는 늘 강조하였다. 그리고 윤 박사는 누구이든 한번 믿을 만 하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믿어주고 간섭을 스스로 꺼리는 분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장, 단점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고, 그 장, 단점이라는 것 역시 보는 사람마다 평가가 달라지는 것이라고 하듯, 매우 신중한 분이라는 것이 윤 박사가 지닌 장점이고 단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결과가 나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해야 할 일에 제 때 손대지 못한 때문에 놓쳐버린 일이 하나 둘이 아니라는 것이 아랫사람들이 늘 지니고 있던 불만이었다. 이는 윤 박사 자신이 인정하는 자신의 성품이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아주 망쳐버린 일은 없다는 것을 윤 박사 스스로 가끔 자부하였다.
우리나라가 광복을 이룬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해기사 면허를 가지고 있던 분들을 우리는 제1세대 해운인들이라 부른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도쿄나 고베의 고등상선학교, 그리고 진해고등해원양성소에서 상선교육을 받은 분들인데, 이들의 대부분은 호탕한 기질의 소유자들이어서 두주불사(斗酒不辭)의 신화와 더불어 그로 인한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남기고 있다. 윤상송 박사의 경우도 마차가지여서 대단한 주량의 소유자였는데, 그래도 그 가운데에는 가장한 점잖았던 분(?)으로 알려져 있다. 또 말년에 이르러서는 상당한 애주가로서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일도 드물었다.

윤 박사는 지도층이라면 누구나 으레 즐긴 골프도 전혀 즐기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바둑이나 다른 취미도 갖지 않은 분이었다. 윤 박사 자신은 상술하였듯 상선학교의 졸업을 앞둔 시점부터 사교춤(dance)에 빠져들었다고 하지만, 광복 이후에는 여러가지 사회 풍토로 그나마 즐길 기회를 갖지 못하였던 듯하다. 이러한 윤 박사가 그런대로 늘그막까지 즐긴 취미는 오로지 낚시였다. 주말이면 이따금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밤낚시에 동행하기를 권유하였다. 그래서 필자도 몇 번인가 윤 박사의 밤낚시에 동행한 일이 있었는데, 여러 사람들이 어울려 떠나는 밤낚시가 아니라 단 둘이 떠나는 밤낚시의 경우에는 곤욕을 각오해야 하였다.

서울을 떠나 으스름 저녁 무렵에 낚시터에 도착하면 우선 텐트를 쳤는데, 텐트를 치고 나면 어두워졌다. 그러면 카바이드 불을 붙여 어둠을 밝히고, 준비해 간 간단한 안주로 소주병 두 개를 따 마시는 것이 일과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는데, 윤 박사는 자신이 마셔야 할 만큼 마셨다고 생각하면, 날씨가 덥던 춥던 텐트 안에 쓰러져 이내 잠이 드셨다. 말하자면 윤 박사의 유일한 취미였던 낚시도 소주를 들기 위한 방편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윤 박사가 대취하는 일은 좀체 없었다. 무슨 일로 만들어진 주석이든 윤 박사는 맥주잔을 달라고 청하여, 맥주잔의 7할 정도 찰 만큼 소주를 스스로 따르거나 따르도록 하였는데, 그것이 그 날 주석에서 윤 박사가 마실 주량이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것을 다 마시도록 주석이 끝나지 않는 경우에는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대단한 애주가인 동시에 대단한 절주가(節酒家)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 박사는 술로 인한 고혈압으로 두 번이나 쓰러졌다.

두 번째로 쓰러져 병석에 누워 있던 윤 박사는 1985년 8월 더 이상 해사문제연구소의 이사장직을 영위하기 어렵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은퇴하였다. 그 때 윤 박사의 나이 70이었다. 그 뒤 10년 동안 더 계시다가 1994년 11월 18일에 이 세상을 하직하고 영면하였다. 위의 글은 윤 박사가 두 번째로 쓰러진 뒤 영면하시기 얼마 전까지 스스로 쓰신 자서를 필자가 정리한 것이다. 윤 박사가 영면하신지 1년 뒤 1주기를 맞아 한국해사문제연구소 임원들이 그 유택(幽宅) 앞에 비를 세웠는바, 그 비문을 아래에 소개하여 둔다.

이곳에 영원한 안식처를 잡으신 윤 박사께서는 우리 역사상 가장 어려웠던 때에 태어나 살다 가시었습니다만, 늘 어려운 오늘의 현실보다는 빛나는 내일을 준비하여 이 생을 살아오신 분입니다. 그 뜻을 다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말씀을 앞세우기보다는 행동으로, 그것도 아무도 모르게 아주 조용하게 실천하신 분입니다. 가슴 속 깊이 타오르는 열정을 되도록 안으로 감추고, 늘 인자한 모습만을 보여 주시었기에, 우리는 그 분의 깊이를 다 모릅니다. 하오나 그 깊이를 다 모른다 하여, 늘 조금쯤 뒤에 서신 채 우리 해운의 재건에 일생을 바쳐온 그 분의 크나큰 공적이 가려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우리 한국해사문제연구소의 창설에만은 서슴없이 앞장서신 바, 그 고귀한 뜻을 높이 기리고, 그 공적을 후세에 알리고자 이 작은 돌을 세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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