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일제강점기 신문사 공모로 탄생


 

노랫말 말썽 빚어 작사·작곡가 日警에 문초
목포출신 이난영 취입, 국민가요로 크게 히트

 

 
 
우리 가요와 가곡엔 지역을 소재로 한 것들이 많다. 특히 바다를 끼고 있는 항구도시가 그렇다. ‘인천은 항구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가고파’, ‘만리포 사랑’ ‘비 내리는 삼천포’, ‘영일만 친구’ 등 찾아보면 많다.


전남 목포시도 예외가 아니다. 갯냄새 물씬 나는 노래 ‘목포의 눈물’이 있는 까닭이다. 언제 들어도 부드럽고 정겹다. 가수 이난영(1916~1965년) 특유의 목소리와 우리 민족의 한이 서린 가사로 목포소재의 간판곡이다.


이난영을 민족가수 반열에 올려놓은 ‘목포의 눈물’은 호남인들의 애창곡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국민가요라 할 수 있는 이 노래는 기성세대들 마음을 달래주는 서정적인 노래로 유명하다. 흥겨운 술자리에선 물론 호남사람들이 모인 프로야구장 응원석에선 ‘사공의 뱃노래~’ 곡조가 흘러나온다.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이난영 노래로 4분의 2박자 트로트풍인 이 곡은 가사소절마다 의미가 있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노래가 만들어진 건 일제강점기 때인 1934년 10월. 그 무렵 서울에선 노래가사 현상공모가 있었다. 조선일보사가 OK레코드사와 공동으로 전국 6대 도시의 ‘애향가’ 가사를 모집한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그 때만해도 목포는 전국 6대 도시였다.

 

3000여 응모작 중 뽑힌 노래
공모결과 3000여 응모작 중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로 나가는 무명시인 문일석씨 원고(제목 ‘목포의 노래’)가 당선작으로 뽑혔다. 우리 겨레의 끊임없는 이별과 애달픈 정한을 담은 내용으로 시대상황과 맞아떨어져 심사위원들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가사가 일제통치자들의 비위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노래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공모결과가 발표된 뒤 제목을 ‘목포의 눈물’로 바꾼 가사에 작곡가 손목인 씨의 ‘갈매기 항구’란 곡이 붙여져 이듬해인 1935년 ‘목포의 눈물’이 태어났다.

 
 

일제가 시비를 건 내용은 2절 가사다.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구절이 말썽이 돼 작사·작곡가가 일본경찰에 불려가 문초를 당했다.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의 대상이 일본이라며 문제를 삼은 것이다. 작사·작곡가는 순수한 동기로 만든 노래며 가사에 다른 의도가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삼백연(三栢淵) 원안풍(願安風)’으로 가사를 바꿨다. 삼백연의 바람이 목포항 앞 3개 섬으로 이뤄진 삼학도를 거쳐 유달산 노적봉 쪽으로 분다는 뜻이라고 설명해 검열을 거쳤다. 훗날 ‘원안풍은’은 ‘원한 품은’으로 고쳐져 취입됐다.


일본경찰의 조사과정에서 가사가 고쳐지긴 했으나 이 부문의 숨은 뜻은 우리민족의 한을 얘기하고 있다. 일제강점에 대한 불만과 저항을 일본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과 이슈들에 빗대어 담아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부터 1905년 을사조약, 1910년 한일합방으로 나라가 쓰러질 때까지의 300년 한을 나타낸 것이다.


임진왜란 때 유달산에서 지혜로 왜군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을 2절에서 ‘님’으로 표현한 이 가요는 3절에서 한이 더 깊어진다. 일제강점기의 어두운 사회상을 깊은 밤으로, 그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우리나라를 한 점의 조각달에 비유해 국가 잃은 아픔을 외치고 있다. 마지막엔 한을 승화시켜 항구에 맺은 절개, 즉 오기로 돼있는 임과의 약속과 나라를 되찾는 구국의 믿음을 목포사랑으로 그려 마무리했다.


노래가 선보이자 레코드가게마다 매진이었다. 음반을 구해달라는 주문이 쏟아졌다. ‘목포의 눈물’ 덕분에 다방주인들은 신바람이 났다. 노래를 듣거나 배우고 싶은 사람들이 축음기가 있는 다방으로 몰려들었다. 신청곡이 줄을 이어 틀었던 곡을 수십 번 되풀이해 틀어댔다. 노래가 히트하면서 1958년 같은 제목의 영화 ‘목포의 눈물’(감독 하한수)도 나왔다. 로맨스·멜로영화로 독고성, 황해(가수 전영록 아버지), 최봉, 전옥 등이 출연했다.

 
 

노래를 취입한 이난영은 노래 속의 한처럼 어려운 삶과 숱한 곡절을 겪은 가수다. 1916년 목포시 양동에서 이남순(李南順)씨 맏딸로 태어난 그는 목포공립보통학교(현재 목포북교초등학교)를 4학년까지 다니다 집안이 어려워 그만두고 엄마와 제주도에서 살았다.


극장주인집 아이를 돌보면서 흥얼거리는 이난영의 노래 소리를 높이 평가한 집주인이 그를 막간가수로 서게 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16살 때인 1932년 삼천리가극단장 권유를 받아 특별단원으로 채용됐다. 그 뒤 우연히 OK레코드사 이철 사장 눈에 띄어 작곡가 손목인 씨에게 소개돼 노래를 본격적으로 불렀다.

 

유달산에 세워진 국내 최초 노래비
이난영은 1933년 8월 태평레코드사에서 ‘지나간 옛 꿈’ ‘시드니 청춘’을 발표, 가수로 정식 데뷔했다. 그해 10월 ‘향수’, 11월 ‘불사조’를 취입해 인기를 얻으며 1934년 ‘신 강남’ ‘밤의 언덕을 넘어’를 내놨다. 이어 신민요 ‘봄맞이’ ‘오대강 타령’을 불러 정상급가수가 되면서 ‘목포의 눈물’로 상종가를 쳤다. 1937년 ‘목포의 눈물’ 속편 격인 ‘해조곡’을 불러 또 한번 떴다. 1942년 항구노래의 완결판이자 그녀 오빠(이봉룡)가 작곡한 ‘목포는 항구다’로 최고인기가수가 되기도 했다. 49세 때인 1965년 4월 11일 알코올중독으로 세상을 떠난 그녀는 4남 3녀를 뒀다. 자녀들 모두 미국서 가수로 활동해 ‘어머니 재능을 이어받았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목포의 눈물’엔 또 하나 재미난 기록이 있다. 목포 유달산(228.3m) 달선각 아래 세워진 노래비가 국내 최초란 점이다. 비는 1969년 한 목포시민이 600만원을 내놓아 마련됐다. 이어 2008년 4월 11일 목포시 산정동 삼학도에선 ‘이난영 기념공원’이 문을 열었다. 1000여 평에 ‘목포의 눈물’ ‘목포는 항구다’ 노래비와 파주에서 고향 품으로 돌아온 이 여사의 유해가 묻힌 수목, 체육시설 등이 있다.


이에 앞서 2006년 이난영은 파주 용미리 공동묘지에서 옮겨와 대삼학도 중턱 배롱나무 아래에 묻혔다. 노래비 위 스위치를 누르면 ‘목포의 눈물’이 흘러나온다. 목포에서 해마다 그녀를 추모키 위해 열리는 난영가요제에선 ‘목포의 눈물’이 시그널음악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노래를 작곡한 진주 출신 손목인 선생은 1999년 1월 9일 일본 동경시내 차안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8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가요협회장으로 장례식이 열린 그달 15일 서울 풍납동 현대아산병원에선 후배음악인들이 고인의 유품인 아코디언 반주에 맞춰 ‘목포의 눈물’을 부르며 애도했다. 고인은 성남시 삼성공원묘원에 안장됐다.


목화가 많이 난다고 해서 ‘목포’란 지명이 만들어졌을 만큼 옛 목포는 이름난 목화재배지였다. 일제는 재배한 면화를 목포면화주식회사에서 가공해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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