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이후 60년의 해운 족적 집대성 
1월 17일 행사 성황 “60년사 학습효과 기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이 되기를”   

 

한국선주협회는 1월 17일 저녁 6시 롯데호텔 2층 사파이어볼룸에서 김성진 해양수산부 장관을 비롯, 초대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낸 신상우 KBO 총재, 조정재 전 해양수산부 장관, 서양원 해운참모차장, 박희태 의원 등 귀빈들과 해운항만 및 조선업계 대표와 해양수산부 관계자 300여명이 참석하는 가운데 ‘한국해운 60년사’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광복을 우리나라 근대해운의 시발점으로 보고, 광복이후 현재까지 한국해운의 성장과정을 정리해 놓은 ‘한국해운 60년사’(이하 해운 60년사)는 우리나라 해운산업의 발자취를 집대성한 최초의 해운사로서 의미가 있다. 이 책에는 외항해운의 태동에서부터 세계 8위의 해운국으로 성장한 최근까지 한국해운의 족적이 기록돼 있다.

 

“60년사 한 페이지마다 해운인들의 각고의 노력과 장엄한 의지력 기록”
17일 출판기념회에서 선주협회 장두찬 회장(전임)은 “우리 해운역사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광복이후 무(無)에서 출발해 해운 8위국으로 도약한데는 많은 해운인들의 희생과 주변의 지도편달이 있었다. 해수부로 확대개편된 이후 신상우 초대장관께서 해운업계의 오랜 숙원이던 관세를 철폐했고 10여년간 국회는 물론 여러분의 협조로 ‘해운하기 좋은 나라 건설’을 위한 많은 일들이 성사되었다”면서 “과거 해운의 불행했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해운 60년사의 학습효과를 기대한다. 발간되고 나니 아쉽고 부족한 점도 있지만 앞으로 100년, 200년이후 가치를 갖게 될 것이다”라고 발간 인사말을 했다. 


이어서 김성진 장관과 신성우 해수부 초대장관의 축사가 있었다. 신성우 전 장관은 “오늘밤은 오래 기억될 것이다. 수출 1억불 탑을 세운 지 불과 20여년만에 3,200억불을 달성한 것은 바다를 향한 해운인들의 땀의 결정이다. 향후 해운 100년사에서는 해양 3대국 진입이 기록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해운의 발전은 온국민이 박수쳐야 한다. 60년사 한페이지 한페이지마다 해운인들의 각고의 노력과 장엄한 의지력이 기록돼 있을 것이다. 이 시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이 되리라 기대한다”는 멋진 축하의 말을 전했다.
이날 발간회에서는 편찬자인 한국해사문제연구소의 최재수 소장과 이원철 연구위원에 대한 감사패 증정식에 이어 축하 케이크 커팅과 박현규 해사문제연구소장의 건배제의로 공식행사를 마치고 만찬시간을 가졌다. 

 

45년 외항선박은 25년된 1,625톤급 1척뿐
이 책에 기록된 한국 해운의 60년사를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태극기를 단 우리 선박으로 외국과의 교역물자를 수송해 온 외항해운의 역사는 60년이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일천하다. 1945년말 기준 총톤수 1,000톤급 이상의 한국적 외항선박은 선령 25년의  1,625톤급의 ‘부산호’ 1척뿐이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7월 미군정 산하의 해상운수국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국적선박의 일제 등록을 실시했는데, 당시 선대규모는 313척·1만7,170총톤. 선박 1척당 평균 톤수가 55톤에 불과했다. 이들 선박의 대부분은 어선이었으나 선박이 없는 관계로 도서지방에서 여객수송에 투입, 상선으로 등록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태극기를 국제교역품의 수송에 나선 최초의 국적외항선은 1948년 2월에 한국-홍콩항로에 투입된 ‘앵도호’(櫻島號, 1,281총톤). 이 선박의 처녀항해가 외항해운의 효시이다. 그러나 이 선박은 홍콩과의 처녀항해를 마치고 그 해 12월 남북 교역차 흥남에 갔다가 북한에 억류되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비운의 선박이 되고 말았다.


 

50년 대한해운공사 발족 한국해운의 뿌리
우리나라는 지난 1948년 8월 정부수립과 함께 교통부에 해운행정을 전담하는 해운국이 신설되면서 해운입국을 향한 정부의 정책적인 의지가 표출되기 시작했다. 이어 정부는 대한해운공사법을 제정, 1950년 1월 대한해운공사를 발족시키면서 해운산업 발전의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했으며, 오늘날 한국 해운산업의 큰 뿌리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1950년 ‘6.25 동란’으로 인해 항만시설과 선박들이 피폭됨으로써 우리 해운산업이 좌초되는 듯 했으나, 오히려 南北 분단은 해운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다.


1955년 2월 정부 조직법 개정을 통하여 해사행정을 총괄하는 해무청을 신설하여 체계적인 해운정책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1967년에는 해운산업의 획기적인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해운진흥법이 제정·공포되면서 우리 해운산업은 눈부신 성장을 지속했다. 그 결과, 해방 이후 2만여톤에도 못미치던 한국상선대 규모는 1960년대 이후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해운인들의 노력에 힘입어 1974년 선박보유량이 100만톤을 넘어섰으며, 1995년에는 1,000만톤을 돌파하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2006년말 현재 한국상선대는 모두 609척에 1,520여만톤에 달하고 있으며, 해외에 치적한 선박을 포함한 1,000톤 이상의 선박은 모두 1,900여만톤으로 반세기가 조금 지난 지금 세계 8위의 해운국으로 발돋움했다. 용선선박을 포함하여 우리 외항해운기업들이 운항중인 선대규모는 6,700여만톤으로 세계 전체상선대의 10%에 달할 정도로 해운강국으로 성장하였다.

 

외항해운계 수입 280억불 외화가득 효자산업
우리나라 외항해운의 비약적인 발전은 외항해운업계의 해운수입이 또다른 지표이다. 1970년 초반까지만 해도 1억달러를 밑돌았으나, 1970년대 후반에 10억달러를 돌파한데 이어 15년 뒤인 1995년에는 100억달러를 넘어섰다. 2004년에는 최초로 200억달러를 기록했으며, 2006년에는 28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등 반도체와 자동차에 이어 외화가득 효자산업으로서 국가경제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제 우리나라 해운산업은 재도약을 위한 전환기를 맞고 있다. 제주선박등록특구제도를 비롯하여 선박투자회사제도, 톤세제도 등 선진해운 제도를 잇따라 도입함으로써 재도약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오는 2010년 세계 5대 해운대국을 향해 힘차게 전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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