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태풍 사라호에 희생된 어부들 추모가요

여가수 최숙자 불러 대히트…연평도 조기전시관 앞에 노래비

 
 
11월 23일로 ‘연평도(延坪島) 포격’ 2주년을 맞았다. 2010년 11월 23일 오후 북한군이 이곳에 무차별적으로 포를 쏴 섬마을은 쑥대밭이 됐다. 배를 타고 인천으로 빠져나가는 피난민들이 줄을 이어 평화롭던 연평도는 폐허의 섬으로 바뀌었다.

이 맘 때가 되면 연평도를 소재로 한 대중가요 ‘눈물의 연평도’가 떠오른다. 김남풍 작사, 김부해 작곡, 최숙자 노래인 이 곡은 그 때의 분위기를 잘 말해주는 것 같다.
‘눈물의 연평도’는 1964년에 발표된 민요조의 여가수 최숙자씨의 히트곡이다. 4분의 2박자 트위스트곡으로 멜로디는 흥겹지만 가사내용은 그렇잖다. 슬픈 사연이 그림을 보는 듯 잘 묘사 돼있다. ‘눈물’, ‘황천’ 등 노랫말 속의 단어들이 그런 분위기를 읽게 한다.

노래는 1959년 9월 17일 한반도를 휩쓸었던 태풍 사라(Sarah)호에 희생된 어부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작사가 김남풍 선생은 그 때의 눈물겨운 사건을 노랫말로 엮어 숨진 어부들의 넋을 달랬다. 그 때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사람은 전라도 어민들이다. 조기를 많이 잡겠다며 북으로 올라가는 조기떼를 쫓아 연평도까지 갔을 때 불어 닥친 사라호로 변을 당한 것이다. 추석명절을 앞뒤로 나흘간 휩쓴 사라호 태풍으로 사망 및 실종 800명, 이재민 37여만명으로 피해는 엄청났다. 연평도는 눈물바다가 됐다. 후유증이 수년간 이어지는 가운데 ‘눈물의 연평도’ 노래가 만들어져 유족들의 마음을 달랬다. 

 
 
‘눈물의 연평도’는 분단시대를 몸소 겪으며 살아가는 섬사람들의 잃어버린 꿈이요 못 다 부른 노래이기도 하다. 바다가 보이는 연평도 산등성이에 올라 ‘눈물의 연평도’를 부르며 눈물짓는 이들이 많았다. 살아남은 어촌사람들의 외로움은 눈물이고 한이 됐다. 연평도 사람들 중 중·장년층들은 요즘도 ‘눈물의 연평도’를 자주 부른다. 술자리나 회식, 즐겁거나 슬플 때 빠지지 않는다. 특히 지아비를 잃고 홀로된 아낙들의 애환가이고 하다.

국민애창곡으로 이미자 등도 리메이크
‘눈물의 연평도’는 당시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하며 국민애창곡이 됐다. 이미자, 조미미, 하춘화, 김상진 등 다른 가수들도 리메이크해서 취입했다. 연평도전망대의 조기전시관 앞에 ‘눈물의 연평도’ 노래비까지 섰다. 사각형의 콘크리트 받침돌 위 비석 앞면엔 노래 1절, 뒷면엔 2절이 새겨져 있다. 노래비는 M47전차를 전시한 등대공원 아래에 있다.

노래를 취입한 최숙자(1941년 출생) 인기는 하늘을 치솟았다.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씨는 자신의 저서 ‘인생 나의 40년’(1999년 10월)에서 “이미 중견가수 소리를 들었지만 여전히 무명이었다. 그러나 최숙자는 ‘눈물의 연평도’가 크게 히트하면서 인기가 대단한 톱 가수 대열에 진입해 있었다”고 털어놨다. ‘개나리 처녀’ ‘나룻배 처녀’ ‘효녀심청’ ‘모녀기타’ 등을 부른 최숙자는 ‘가는 봄 오는 봄’을 백설희와 듀엣으로 불러 상종가를 쳤다. 특유의 구성진 음색에 기교가 넘쳤던 가수다. 그는 대중적 인기를 끈 가수이긴 했으나 음반과 방송을 통해서만 활동하고 무대엔 자주 서지 않았다. 지금은 미국서 황혼을 맞고 있다.

우리나라 3대 어장의 한 곳인 연평도는 ‘눈물의 연평도’ 노래바람에 더욱 유명해졌다. 1968년까지만 해도 ‘조기의 섬’이었다. 해마다 조기철(4월 중순~6월 초)이 되면 북적댔다. 전국의 어선들이 조기떼를 따라 몰려들었다. 성어기엔 3,000~5,000척으로 파시(큰 어장)를 이뤘다. 하지만 지금의 연평도는 옛 영화를 잃어버렸다. 북한의 포격 후 주민들이 줄고 있다. 육지로 갔던 주민들이 돌아오긴 했으나 예전 같지 않다. 섬을 지키는 군인들과 주민들, 무심한 갈매기들만 남아 ‘눈물의 연평도’가 돼버렸다.

 
 
연평도는 여의도 2.5배, 1,200여명 살아

연평도는 북위 37。38의 서해안 북단 섬이다. 인천시 옹진군 연평면에 속한 곳으로 지명의 한자풀이대로 길고 평평한 섬이다. 인천서 서북방 122㎞, 북한과는 3.4㎞거리다. 휴전선과 닿은 장방형의 유인도 대연평도, 소연평도와 30여 작은 무인도들로 이뤄져있다. 포격을 당한 대연평도에서 남쪽으로 약 4.5㎞ 지점에 소연평도가 있다. 중심 섬 대연평도는 127m의 구릉을 축으로 이뤄졌다. 연근해에서 조기가 많이 잡혔으나 지금은 꽃게가 대신하고 있다. 농어, 홍어, 새우 등이 잡히고 굴·김, 바지락도 양식된다. 마을은 시가지화 된 동쪽 연평마을을 중심으로 몰려있다. 인천항에서 정기여객선이 오간다. 소연평도는 214m의 구릉을 중심으로 이뤄진 섬이다.

구릉정상에 광산이 있다. 광산이 발견된 건 일제강점기 때로 1907년 채광을 했으나 여건이 맞지 않아 오래 전 멈췄다. 그러다 1987년 5월 대한광업진흥공사가 개발, 한해 1만 5,000여t의 철과 티탄을 캔다. 마을은 서쪽 해안가에 몰려있다. 대연평도(7.28㎢)는 여의도(2.95㎢)의 2.5배로 1800여명, 소연평도는 80여명이 살고 있다. 연평면엔 1071가구가 있다. 초·중·고, 유아원 각 1곳이 있다.

연평도는 생태계 보물섬이기도 하다. 천연기념물인 저어새와 검은머리 물떼새의 서식지다. 구리동 자연해변, 얼굴바위, 등대공원, 가래칠기 오석해안, 빠삐용 절벽, 아이스크림 바위(송곳바위), 관광전망대(조기역사관), 망향비 등이 볼거리다. 화려했던 연평도의 모습 뒤엔 태풍과 북한도발 등 아픈 역사가 있다. 1999년 6월, 2002년 6월 월드컵 때 연평해전이 벌어졌다.

연평도 조기 ‘7석이’ 인기
한편 서해의 대표 바다생선 조기로 굴비를 만들 때 많이 쓰이는 ‘연평도 7석이’가 인기다. ‘7석이’는 고기이름이 아니다. 크기를 말한다. 봄이 되면 고깃배들이 잡아온 조기를 경매에 붙이기 위해 상자에 담아 공판장에 내놓는다. 씨알이 작은 건 한 줄에 8~9마리, 중간 크기는 7마리씩 담는다. 마릿수가 적은 상자가 비싸다. 이 때 한 줄에 9마리가 깔리면 ‘9석이’, 8마리가 깔리면 ‘8석이’, 7마리가 깔리면 ‘7석이’라 부른다. 1970년대만 해도 3~4마리가 깔린 상자가 흔했다. 그 땐 ‘석이’를 ‘단’이라고 했다. 지금도 나이 든 어른이나 시장상인들은 ‘9석이’는 ‘9단’, ‘7석이’는 ‘7단’으로 통한다. 입찰에 붙이면 중간급 ‘7석이’가 단연 인기다. 조기애호가는 ‘7석이’를 살짝 말려 요리한 것을 밥반찬으로 즐긴다. 기름에 튀기기보다 약한 불에 노릇노릇 굽는 게 고소한 참맛을 즐길 수 있다.  

  연평도 조기잡이는 조선시대 임경업 장군과 인연이 깊다. 조선 16대 인조왕 14년(1636년) 병자호란 때 임 장군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구출키 위해 황해를 건너던 중 잠시 연평도에 머문다. 그는 바다생선을 병사들 양식으로 쓰기 위해 썰물 때 가시나무를 안목바다에 꽂게 했다. 물이 들어왔다가 빠지자 가시나무에 수많은 조기가 걸렸다. 이를 계기로 연평도 조기잡이의 역사가 시작됐다. 연평면사무소 뒷동산엔 임 장군의 사당이 있다. 주민들은 해마다 이곳에서 고사를 지내고 풍어제도 올린다.
 

 
 
왕성상 wss4044@hanmail.net
마산중·고, 중앙대 신문방송학과, 신문방송대학원을 나와 1979년 한국경제신문 기자를 시작으로 언론계에 몸담아오고 있다. 특히 ‘남인수가요제’에서 우수상을 받아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에 등록(865호), ‘이별 없는 마산항’ 등을 취입했다. ‘기자가수’로 가끔 무대에 서면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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