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가 선원의 공급부족난을 겪고 있는 가운데 선주국인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해기인력을 양성하는 교육시스템을 잘 갖추고 있으며, 이를 기반으로 우수한 한국선원을 배출하고 있다. 그러나 해양계 교육 출신 선원들의 조기 하선율이 급증하면서 한국인 해기사의 공급차질이 우려되고 있으며, 현재도 부족한 해기사 공급을 해결하는 방안의 일환으로 비해양계 교육 출신을 대상으로 ‘해기사단기양성과정’을 통해 해기사를 배출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이 과정을 수료한 20기를 비롯해 외항해운분야에서 양성한 일명 ‘오션폴리텍’ 수료자들은 1,000여명을 넘어섰고 이들 대부분은 해기사로 취업해 항해업무를 수행 중이다. (해양한국 2012년 11월호 참조)


이렇게 승선 해기사부족 문제해결의 한 축으로 기능하고 있는 일반인 해기사의 등용문 ‘오션폴리텍’을 통해 3항사 해기사 자격을 취득하고 승선 재직하며, 일반인의 선원직 입문과정과 승선, 선원생활을 사실적으로 알려준 논픽션이 있어 이를 신년호부터 4-5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 글은 제48회 신동아 논픽션부문 공모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현재 3항사로 해상근무 중인 김연식씨의 체험기 ‘지구별 항해기’이다. 필자인 김연식씨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졸업자로 한국해양수산연수원이 정부로부터 위탁받아 수행하는 3급 외항상선 해기사단기양성과정 제17기 항해과 수료자로서, 2010년 9월부터 중앙상선에 취업해 부정기 파나막스 벌크선에서 실습과 승선을 하며 25개국을 기항했고 이를 통해 습득한 체험을 생생하게 글로 담아냈다.


정부가 수립 중인 향후 중장기 선원양성 정책에는 오션폴리텍의 증원에 대한 내용도 들어 있다. 사회적으로 팽배한 청년실업난의 해소에도 일조하며, 한국 해기인력 확충문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부분이 된 ‘비해양계’ 출신 ‘해기사’의 ‘선원 입문기’는 해운계는 물론 정부와 교육계 등 범사회적으로 주목할만한 내용으로 판단된다. 이에 필자와 협의해 해양한국 독자들에게 전문을 소개하게 됐다.

-편집자 주-

 

 
 

‘지구별 항해기’내용
(1)바다로 간다 (2)승선 (3)고요속 긴장, 수라바야 (4)항해의 시작 (5)문명의 경계, 아마존 (6)고단한 선원 (7)파도마저 얼어붙은 발틱의 겨울, 라트비아 (8)대륙의 끝, 무르만스크 (9)커피공화국, 산토스 (10)해적의 바다를 가르다 (11)그들이 사는 법, 인도 (12)지도보다 빨리 성장하는 중국 (13)지금은 항해중,
본호에서는 (1)(2) 게재.            

 

김연식 중앙상선 3항사
김연식 중앙상선 3항사
1. 바다로 간다
# 낯선 이의 전화를 받다

2010년 9월 28일 이른 아침, 잠을 깨우는 전화벨이 울렸다.


-따르릉…. 김연식씨죠? 내일 인도네시아에 가서 써니 영(Sunny Young)호를 타세요. 인천공항에서 같이 승선하는 선원을 만나면 됩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나의 항해는 선사의 다급한 전화 한통으로 시작했다. 그것도 하루 전날, 아침, 잠결에. 전화기 너머 직원은 적도 반대편에 가는 일을 무척 쉽게 말했다. 이 사람에게 인도네시아는 내가 생각하는 서울과 부산 거리쯤 되는 모양이다.


-떠나는구나!
느닷없는 소식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설렘인지, 아쉬움인지, 기쁨인지, 걱정인지 복잡다단하다. 방 안에 짐이 잔뜩 널브러져 있다. 지난 6개월 간 부산 한국해양수산연수원에서 해기사 교육을 받으며 쓰던 것이다. 수료식 날 가져와 흩어놓고는 정리해야지, 곧 할 거야 하면서 보름을 넘겼다. 곧 떠날 것을 알기에 나도 모르게 방치했다. 마음속으로 출항을 준비했으면서 막상 내일이라니 막막하다.


창 밖에 차들이 분주히 달린다. 뛰노는 아이들 소리. 과일장수의 트럭소리. 나는 내일 떠나는데 밖은 섭섭하리만큼 일상적이다. 10월 일기장을 폈다. 남은 하루 사이에 할 일을 모조리 적었다. 내일 떠나면 10월 부분은 하얗게 남을 테니 뭐라도 채워 넣고 싶었다. 개천절이면 대학 동문이 모여 체육대회를 하겠지. 크리스마스에는 모두 흥겨울 테지. 나만 빼고 즐거울 세상이 얄궂다.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내 방이 이렇게 포근한 줄은 미처 몰랐다. 산중턱의 녹음이 푸르다. 바람이 상쾌하다. 세계 여러 곳을 다니는 부정기 화물선을 찾아다닐 때가 언제였는지 원망스럽다. 우리나라에는 오지도 않는단다.


# 88만원 세대
나는 우리나라에서 월드컵 축구대회가 열린 2002년 대학생이 되었다. 나는 젊었다. 새로운 삶을 잔뜩 기대했다. 눈이 녹지 않은 2월, 신입생 예비모임을 떠났다. 낯선 얼굴들과 버스를 타고 충청도로 향했다. 어색함이 사그라질 무렵 천안휴게소에 들렀다. 그런데 진눈깨비 날리는 주차장 한복판이 진풍경이었다. 또래 학생들이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전기, 전자, 건축, 토목, 체육학과처럼 남학생이 많은 과마다 얼차려를 했다. 예비역 선배들은 창이 긴 모자를 눌러 썼다. 온기 없는 목소리로 ‘하나, 둘’ 외치면 신입생들은 휴게소가 떠나가게 악을 썼다. 학과끼리 경쟁이 붙었다. ‘강철! 공대!’와 ‘점프! 체대!’가 경합했다. 선배들은 경주마를 몰듯 후배를 닦달했다. 우리는 나약했다. 아무도 저항하지 못했다.


-빨리 가자.
갓 사귄 동기들이 발길을 재촉했다. 그 말은 외면하자는 말과 다르지 않다.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일단 피하고 보자는 것이다. 나는 입학과 동시에 대학방송국에서 일했는데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학생들이 많았다. 철쭉이 필 즈음 경기도 청평에서 모꼬지했다. 봄이 무르익은 밤, 졸업한 선배들은 건물 뒤 외진 곳으로 우리를 불러냈다. 그날 난생 처음 얼차려를 받았다. 내 깊은 곳에서 나오는 신음이 어둠을 흔들었다. 얼차려는 학과 모꼬지에서도 받았다. 대학은 온통 얼차려. 도무지 이걸 피할 곳이 없었다.


월드컵은 성대하게 끝났다. 얼마 후 새 대통령이 당선했다. 그의 노란색은 새 시대를 상징했다. 그 대통령이 취임을 앞둔 2003년 2월 어느 날 9시 뉴스에 대학 신입생이 숨졌다는 소식이 나왔다. 신입생 예비모임에서 얼차려 도중 꽃잎 하나가 졌다. 새 세상이 열렸다는데 우리 대학생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 해 안암대학교에서 열린 노동절 전야제에서 나는 갓 취임한 대통령을 비난했다. 이듬해에도 어느 어느 대학교에서 밤을 꼬박 지새웠다. ‘시국’을 걱정하면서 말이다. 나는 정작 이른 아침 수업은 만날 빼먹거나 영상물만 틀어놓는 교수에게 옳은 말 한마디 못했다. 취업준비소가 되어 가는 대학은 고민하지 않았다. 밖에서는 더 나은 사회를 말하면서 안에서는 얼차려 같은 구태를 답습했다. 눈앞에 있는 것은 바꿀 생각도 못하면서 국가와 사회를 말하려 들었다. 나는 휴강을 밥 먹듯이 하던 교수에게 학기말 강의 평가를 후하게 줬다. 내 학점이 조금이라도 위협받지 않기를 바라는 곤궁한 마음에서다.


그렇게 바짝 엎드린 나는 결국 88만원 세대로 불린다. 돌아보니 내 청춘은 한없이 초라하다. 나이 서른, 사뭇 진지해진다. 어깨가 무겁다. 부모님은 주름이 깊어지더니 혈색도 어둡다. 짝을 찾아 식을 올리는 친구들 소식과 얼마 전 동네 전철역에 붙은 고교동창의 사법고시 합격 현수막은 나를 조급하게 한다.

 

# 잘난 허영심
모든 걸 멈추고 숨을 고르기로 했다. 종일 집에 있어도 부모님은 나무라지 않으셨다. 그러나 텔레비전을 켜면 청년실신(졸업 후 실업자나 신용불량자), 청백전(청년 백수 전성시대), 장미족(장기간 미취업) 같은 신조어가 쏟아졌다.


-저 노무 텔레비전!
나는 신경질을 내며 채널을 돌렸다. 아무래도 좌불안석. 나는 결국 동네 직업훈련소를 찾아갔다. 노동부의 지원금으로 운영하는 부천 자동차직업학교다. 자동차정비기능사 자격시험과 정비소 취업을 도와준다.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
 

여기는 다른 세상. 갓 고교를 졸업한 친구부터 60대 노인까지 일자리 없는 사람은 다 모였다. 어른들은 패배주의에 빠졌고, 담배에 쩐 아이들은 머리카락이 샛노랗다. 나라고 다르지 않다. 솔직히 손에 기름때 묻히며 살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 주머니에 손 찔러 넣고 자동차 수리는 어떻게 하는지 좀 보자는 식이다. 출석만 잘해도 교통비가 나왔다. 나는 개근해서 매달 11만원을 꼬박 받았다. 출석으로 치면 우등생이다. 가만 보니 대학교도 이렇게 다녔다. 꿈도 없이 몸뚱이만 왔다 갔다. 나는 여기서도 어정쩡하게 젊음을 흘려보냈다.
 

눈에 띄는 동생이 하나 있었다. 숫기 없이 만날 혼자 점심을 먹는, 그러나 자동차에 대한 꿈으로 가득한 스무 살 재준이다. 어머니는 안 계시고, 아버지의 무관심 속에 혼자 자랐다. 고교를 졸업하고 여기로 직행했다. 그의 멍한 눈은 만날 바닥을 향했지만 수업시간에는 빛이 났다. 실습할 때마다 먼저 나섰고 질문도 많았다. 저렇게 공부하면 명문대를 가겠다 싶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재준이의 미래를 가늠했다. 녀석이 자동차로 대단히 성공한다 해도 동네 정비소 사장이 전부일 것 같다. 대학 졸업장씩이나 가진 나는 그의 미래를 훤히 내려 보는듯한 쾌감을 느꼈다.
 

-정작 내 꿈은 뭐지….
나는 남의 꿈은 깐깐하게 저울질하면서 내 꿈은 달아보지 않는다. 나는 겁쟁이다. 사회적 위치를 배정받는 게 두려워 여태 이러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기업 아래 중소기업 직원이 되기 싫어서. 그보다 못한 비정규직이 되기 싫어서 그냥 취업준비생의 백지상태를 즐기지는 않나. 유치하게도 나는 만족하는 점수를 받을 수 있을 때까지 토익시험을 미뤘다. 낮은 점수를 받으면 그게 나일 것 같아서. 그래놓고 남이 받은 700점이니 800점이니 하는 점수는 속으로 ‘그까짓 거’하면서 조롱했다. 재준이는 바닥에 꿇어 앉아 더러운 볼트를 닦았다. 세상 전부인 것처럼 열정을 쏟는 모습을 보니 허영심에 팔짱만 끼고 있는 내가 창피했다. 내가 녀석보다 나은 건 아무것도 없다. 그 얼룩진 손앞에 내 하얀 손이 부끄러웠다.
 

나는 그 즈음 항해사가 되는 계획을 두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사나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품었을 비행기 조종사와 마도로스의 꿈. 지구본을 팔던 대학시절부터, 아니, 대학을 선택할 때에도 진지하게 관심을 뒀다. 주변의 반대와 선원에 대한 부정적 시선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했다. 사실 이제 와서 항해사가 되겠다는 건 우주비행사가 되겠다는 것만큼 엉뚱하다. 그래서 가슴 한구석에 뜯지 않은 편지로 간직했다. 그러다 한국해양수산연수원에 해기사 단기 양성과정이 있는 것을 알았다. 나는 고민이 많았지만, 앞뒤 재지 않고 열중하는 재준이를 보면서 지원서를 썼다.

 

# 부산으로 가자
그 겨울, 잘 나가는 직장인 여자 친구와 배고픈 선비가 전라남도 해남으로 여행을 떠났다. 속 깊은 여자 친구는 내게 제 자동차 운전대를 맡겼다. 백수 남자친구가 조수석에 앉으면 작아질 것을 배려한 것이다. 그즈음 나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여자 친구마저 떠나면 나는 이 세상 모두에게 버림받는 셈이다. 서른을 목전에 둔 동갑내기 남녀, 아니, 혼기 찬 여자와 무능력한 남자의 여행이다. 우리의 믿음은 충분히 견고하고, 사랑은 뜨거웠다. 그렇지만 나는 갈수록 움츠러들었다. 이 여행이 우리의 미래를 판가름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웃고 떠드는 사이 날이 저물었다. 우리는 남도의 지붕 낮은 술집에서 조용히 잔을 기울였다. 거센 물살에 휩쓸리듯 화제는 우리의 앞날 이야기로 흘렀다. 내가 미래 계획을 밝혀야 했다. 탁자 건너 눈동자는 홍명보의 마지막 페널티킥을 바라보는 관중처럼 반짝였다. 나는 삼포세대(연애, 결혼, 출산 포기)인데 곧 삼일절(31세까지 못하면 취업 길 막힘)이니 영원히 캥거루족(대학 졸업하고도 부모님에게 얹혀사는 청년)이 될 처지다. 조심스럽게 여자 친구에게 계획을 설명했다. 마지막에 물었다.


-부산에 있는 한국해양수산연수원에서 해기사 교육받을 수 있는데 모레 면접해. 갈까? 말까?
뼈 있는 질문이다. 나는 답을 세 가지로 예상했다. 첫째, 가지마. 둘째, 너 혼자가. 셋째, 같이 가자. 면접을 이틀 앞두고 밝히는 건 세 번째 답을 바랐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홈쇼핑에서 ‘마감임박’이라고 하면 무턱대고 사는 그녀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심리를 이용했다. 어쩌면 그건 꿈을 이루고, 돈도 벌고, 여자 친구까지 잃고 싶지 않은 나의 무한 욕심이다. 나는 두 번째 갈 테면 혼자 가라는 답만은 않기를 바랐다. 그건 헤어지자는 말이다.


-그럼 내일 가야겠네? 당일에 가면 시간에 쫓기잖아.
그녀는 아무렇지도,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세 번째 답을 했다. 자장면과 짬뽕을 두고 내린 결정만큼 무덤덤했다. 속으로 안절부절못한 게 억울했다.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던 것을 알기나 할까? 혼자 끙끙댄 것이 창피하고 미안했다.


그날 밤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자 친구의 동의를 받을 것에 불과한데, 나는 벌써 이국 항구에 있었다. 그 거리와 불빛이 아른거렸다. 텔레비전 속 고래를 직접 본다. 아침, 저녁으로 타는 태양을 맞는다. 밤이면 달을 본다. 별을 센다. 갖가지 구름과 벗하고 소나기와 무지개를 맞는다. 약품 냄새나는 수돗물은 안녕. 이제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을 얼굴에 댄다. 매연으로 찌든 공기 대신 시리게 푸른 하늘 아래 크게 숨 쉰다. 아프리카며 지중해며 온 나라를 다닌다. 어릴 적에 본 만화 영화 ‘80일간의 세계 일주’와 텔레비전 세계기행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신기하고 재미난 이야기가 가득할 것만 같았다.


물론 염려도 많았다. 부모님이 제일 걱정이었다. 수개월간, 그것도 파도에 흔들리는 배라니. 분명 어마어마한 태풍과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해적을 만날 것처럼 말씀하실 게다. 동화 같은 연애와 달콤한 신혼을 꿈꾸는 여자 친구도 마음에 걸렸다. 주말 조기축구도 못하게 될 터. 집 앞 삼겹살집과 우리 동네 명물 떡볶이도 떠올랐다. 생각 할수록 아까운 것 투성이다.


그러나 이 셈에는 계산기가 필요 없다. 전 세계를 항해하는 꿈 앞에 모든 게 값어치를 잃었다. 항해사는 사양 직종이다. 반년이 넘게 가족과 떨어져 있으니 해양 대학을 졸업한 친구들도 다른 일을 찾는다. 지금 내 결심은 평범한 사람들의 기준과 어긋난다. 사람들이 만들고 강요하는, 그래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던 꿈과 다르다. 인생은 짧다. 이제 남의 꿈이 아니라 내 꿈을 꿀 생각이다. 내가 바라던 것을 직접 할 것이다. 모두 경험하고 싶다. 하늘을 올려 보고, 공기의 냄새를 맡고, 음식을 맛보고, 사람을 만날 것이다. 밤이 길었다.

 

# UN 깃발 아래 서다
이틀 후 한국해양수산연수원에서 면접했다. 해기사 단기 양성과정에 선발되면 6개월간 부산 연수원 기숙사에서 지내며 국비로 교육받는다. 경쟁률이 4대 1을 넘었다. 해양계 대학과 명문대학 졸업생, 해군이나 해양경찰에서 바다 경력을 쌓은 사람 등 쟁쟁한 지원자가 수두룩했는데, 나는 운 좋게 단박에 합격했다. 합격은 학력이나 학벌, 경력, 토익성적, 나이순이 아니었다.


같이 공부하는 100명을 돌아보면 공통분모를 찾기 힘들었다. 갓 군에서 전역한 23살 청년부터 딸아이 대학입시를 걱정하는 46세 가장까지 세대를 아울렀다. 고등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사람에서 석·박사까지 학력도 다양했다. 이전 직업 역시 교사, 연예인 매니저, 운동선수, 요리사, 고시생, 장교, 조선소 엔지니어, 공무원, 항공사 직원 등 제 각각이다. 서로 다른 우리를 엮는 건 ‘바다’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집을 떠나는 날 아침, 어머니는 기차에서 먹을 점심을 싸 주셨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던 날 이후 어머니의 도시락을 먹어보지 못했다. 꼭꼭 빚은 유부초밥에는 여러 가지 맛이 섞여 있었다. 새 길을 나서는 아들을 격려하는 것인지, 먼 길을 앞둔 나를 걱정하는 것인지, 나는 좀처럼 도시락의 맛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기대를 품고 달려간 한국해양수산연수원 본관 앞에는 UN깃발이 펄럭였다. 파란 바탕에 새하얀 지구를 담은 깃발이 힘차게 나부꼈다. 말로만 들어 온, 막연하기만 하던 국제기구가 머리맡에 놓였다. 입교하는 날 깃발을 멍하니 치켜봤다. 지구본을 볼 때보다 가깝고 뚜렷한 무언가를 느꼈다. 6개월 동안 이 깃발 아래서 체조하며 아침을 맞았다. 하루하루가 새로웠다. 해기사 양성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실전 영어실력이 필요했다. 선박의 기울기를 제어하기 위해 기억 너머 삼각함수를 끄집어냈다. 바닷물은 짜고 때론 씁쓸했다.

 

# 항로에 오르다
수료를 앞두고 연수원에서 취업박람회를 열었다. 선사를 꼼꼼히 알아봤다. 선박의 종류는 무척 다양하다. 흔히 아는 유조선과 컨테이너선을 비롯해 석탄이나 철광석을 싣는 산적화물선, 신나와 벤젠 같은 화학물질 운반선, 여객선, 차량운반선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정해진 항구만 왕래하는 ‘정기선’과 번번이 다른 곳을 항해하는 ‘부정기선’으로 구분한다. 정기선은 유조선과 컨테이너선이 대표겪이다. 시일을 다퉈 바삐 운항하는데다 항구에서 화물을 신속하게 내리고 올리기 때문에 접안해도 외출하기 힘들다. 배가 너무 크면 수심이 깊은 선진국의 일부 항구만 기항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정기선과 큰 배는 피하고 싶다.


내가 고민 끝에 입사한 중앙상선은 배 5척을 보유한 작은 회사다. 호황일 때 욕심내지 않아 불황일 때 흔들리지 않았다. 덕분에 수많은 회사가 생겼다 사라지는 해운 업계에서 30년 이상 성장했다. 내게 이 회사가 매력적인 건 5척 모두 중형 부정기 벌크화물선이라는 점. 배가 여럿인 회사에서 일하면 자칫 정기선에 배정받을 수 있다. 나는 전 세계 곳곳을 다니기 위해 배를 탄다. 그러니 내가 일 할 곳은 중앙상선 뿐이다. 이 회사 배는 주로 콩, 옥수수, 설탕, 석탄, 철광석, 보크사이트를 옮긴다. 다양한 항구에 입항해서 오랫동안 짐을 싣고 내린다. 주변 도시를 자주 여행할 수 있다.


이제 출국이다. 세계를 향한 내 소중한 꿈이 이제 막을 올린다. 쉽지만은 않을 거란 걸 안다. 하지만 마냥 설렌다. 써니영은 어떤 배일까? 누구를 만날까? 어디를 갈까? 어떤 음식을 먹을까? 소풍 전날처럼 눈을 감아도 생각이 쏟아진다.

 

 
 

2. 승선
# 10년 전에 만난 꿈

아쉬운 마음에 놓지 못한 술잔은 늦잠으로 이어졌다. 헐레벌떡 일어났는데 방에 발 딛을 곳이 없다. 아차! 짐을 펼쳐 놓고 가방에 담지 않았다. 놓친 게 있는 것 같아서 더 챙기려고 내버려뒀다. 솔직히 트렁크를 닫기가 두려웠다. 지퍼를 미리 채우는 순간 우리 집 사람이 아닌 게 될 것 같았다. 부랴부랴 가방에 짐을 쏟아 넣고 인천공항으로 질주했다. 본래 성격대로 목록에 동그라미를 다 그리지 못하고 짐을 싸니 덜 마른 옷을 입은 것 같았다. 가는 내내 등 어딘가가 가려운 찝찝한 느낌에 시달렸다.


아침 바람은 계절을 앞질렀다. 아직 9월인데 싸늘한 바람이 귓불을 때렸다. 멀리 인천공항에는 어두운 구름이 잔뜩 내려앉았다. 일주일 전에 검역소에서 황열 예방주사를 맞고 3일 동안 몸살을 앓았다.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몄다. 멀리 공항 전망대가 보였다. 그래! 올해가 10년째다.


1999년 어느 겨울날이다. 40대 젊은 목사는 중고생 50여명을 데리고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를 찾아갔다. 변두리에서 온 장난꾸러기들은 공항을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과 키가 큰 승무원에 시선을 빼앗겼다. 아이들이 찾은 곳은 공항 전망대. 커다란 비행기가 코앞에서 활주로를 박찼다. 손에 잡힐 것 같던 비행기는 금세 창공으로 사라졌다. 그 때 그 뜨거운 기분을 어떻게 말로 옮길까. 왁자지껄하던 학생들은 말을 잃었다. 멍하니 비행기를 바라봤다. 목사는 말했다.


-우리 오늘부터 전 세계를 향한 꿈을 꿉시다. 10년 뒤에는 우리가 저 비행기를 타고 넓은 세상으로 나갑시다.
모두 진지했다. 각자 생각이 깊었다. 무리 구석에 있던 나 역시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꿈을 몰래 품었다. 막연하지만 그날 가슴속 꿈이 한 치는 자란 느낌이었다. 우리를 이끈 건 서울 신일고등학교 임일국 교육목사님이고, 나는 정확히 10년 뒤인 오늘 비행기를 탄다.


나는 서울 구로구와 경기도 부천시의 경계인 항동에서 자랐다. 여름이면 저수지에서 수영하고 가을에는 마른 논에서 쥐불놀이를 했으니 학교 밖에 선생님이 따로 없었다. 나와 친구들은 소위 ‘스타 강사’ 아래서 자란 아이들에게 열등의식이 있었다. 지금 보니 사람의 앞날을 좌우하는 건 비싼 과외가 아니라 진심어린 가르침이다. 학창시절에 임 목사님처럼 좋은 분을 만나 쌓은 작은 체험이 내 삶에 굵은 씨앗이 되었다.

 

# 낯선 곳에서 날 기다리는 누군가에게로
경험 많은 선원들은 일찌감치 공항에 와 있었다. 모두 낯선 얼굴. 조심스레 인사했다. 같이 출국하는 갑판장은 30년 넘게 배를 탔다. 정년이 3년 남았다. 그는 표정 없이 악수했다. 내가 늦어서 화난 것이라 생각했다. 나중에 보니 대게 선원이 이렇다. 다른 이유로 마음에 없는 미소를 보이지 않는 사람들. 무뚝뚝하고 괜히 반가운 척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내가 늦는 바람에 촉박해졌다. 풋내기가 멋모르고 여유를 부렸다. 부랴부랴 출국장으로 향했다. 한 배를 타는 건 이런 것인가? 남을 위해 나를 맞추는 연습이 필요하다. 선원들은 짐을 일반인의 두 배까지 실을 수 있다. 그렇지만 반 년 치 세간에 선박 부속까지 얹으니 한참 부족했다.


출국수속을 마치니 번뜩이는 면세상가가 반겼다. 우리는 구석에 있는 점포에 찾아가 관광진흥개발기금 1만원을 돌려받았다. 여행이 아닌 목적으로 출국하는 승객에게는 항공권가격에 포함된 기금을 환급해준다.


-당신은 관광객이 아니군요!
손에 든 지폐가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제야 내가 놀러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렇다. 이제 나는 배에서 일한다. 동시에 텔레비전과 책으로 본 세상을 두 눈으로 보러 간다. 그림자가 아닌 실체를 보고, 만지고, 느끼러 간다.


7시간동안 승무원에게 ‘사육’당한 끝에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적도 위 도시는 몹시 뜨겁다. 널찍한 나뭇잎, 소란스런 이방 언어, 차도르를 둘러쓴 무슬림 여성들, 코를 자극하는 이국의 향기. 익숙한 게 없다. 운전석이 오른쪽인 자동차, 왼쪽으로 달리는 도로, 차보다 많은 오토바이, 오토바이보다 많은 사람들에 정신을 빼앗겼다. 이런 낯선 곳 어딘가에 날 기다리는 자가 있다니, 믿을 수 없었다.


수속을 대행하는 직원의 차를 타고 수라바야(Surabaya)항을 향해 달리기를 3시간,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우리는 칠흑 같은 어둠을 비집고 들어갔다. 얼마지 않아 환한 불빛으로 뒤덮인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은 우리나라 부산처럼 인도네시아 제 2의 도시다. 항구에는 굴뚝과 사일로, 크레인이 잔뜩 솟아 있다. 수라바야항에 들어가는 건 거대한 기계 속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멀리 부두 가장자리에 써니영호가 의젓하게 앉아 우리를 기다렸다. 이름을 우리말로 하면 ‘찬란한 젊음’쯤 되겠다. 나를 만나기 위해 이 외딴 곳에서 기다려 준 것만 같았다. 배가 무척 크다. 길이 229미터, 높이 51미터. 너비 32미터다. 길이는 축구장의 1.5배, 높이는 15층 빌딩과 맞먹는다. 주 기관은 말 1만 3,000 마리가 끄는 힘을 낸다. 우리나라 대우조선해양에서 건조했다. 곡물이나 철광석 같은 화물을 8만여톤, 20톤 트럭 4,000대 분량을 싣고 전 세계를 돌아다닌다. 이 배는 폭이 좁은 파나마운하 갑문을 통과할 수 있는 최대 크기라 해서 파나막스(Panamax)라고 부른다. 써니영은 미국 시애틀에서 콩 8만여 톤을 실어 여기까지 왔다. 남북한 모든 국민에게 1킬로그램씩 나눠줄 수 있는 양이다.


배에 오르려는데 버마 선원이 사다리 아래로 후다닥 내려왔다. 3등 갑판수 꼬산이다. 작업복은 페인트와 기름때가 잔뜩 묻어 다 헤졌다. 햇볕에 얼굴을 얼마나 그을렸는지 이가 유난히 하얘보인다. 낯선 선원의 깊게 패인 주름이 고된 항해를 말하는 것 같다. 이 배에는 한국인 선원 11명과 버마선원 9명을 합해 20명이 승선한다. 버마 사람은 인도계, 중국계, 동남아계 등 피부색과 생김새가 다양하다. 중국계인 그는 우리와 똑같이 생겼다. 나이 마흔인 꼬산은 우리나라 배에서 오래 일한 까닭에 우리말과 대중문화를 잘 안다. 무엇보다 우리 정서를 잘 이해했는데, 그가 제일 조심하는 건 직급에 따른 위계다. 외국인 선원을 하대하는 경향이 있다지만 삼촌뻘 되는 꼬산이 살갑게 대하는 게 편치 않았다. 출국하기 전에 아버지가 강조하신 게 예의다. 아무리 사관이라도 나이 많은 선원들 앞에서 조심하라고 누누이 말씀하셨다. 환갑이 넘는 지금도 막노동판에서 새파란 녀석들에게 ‘김씨’로 불리는 아버지다. 나만은 그러지 않겠노라 다짐했지만, 꼬산을 보니 헛기침만 나왔다.

 

# 돌이킬 수 없는 현실
배에 오르니 당직 근무자뿐, 아무도 없다. 선원들은 상륙 나가거나 방에서 잔단다. 이미 자정이 넘었다. 방에 짐을 풀었다. 침대에 누우니 배가 정박했는데도 좌우로 흔들리는 것 같다. 복잡 미묘하다. 바삐 달려와 짐을 푼 이곳은 너무나 다른 세상이다. 기대와 달리 배는 먼지와 기름투성이. 계단과 통로는 비좁고 천정은 너무 낮아서 머리를 누른다. 밖에 넓은 바다가 있지만 당장 나를 누르는 건 좁은 선실. 전날 잠도 못자고 설레며 소풍 왔는데 놀이공원에는 뜨거운 태양 아래 끝도 없이 늘어선 줄 뿐인 것이다. 세계를 일주하는 환상은 단 1분 만에 산산이 깨졌다.


저질러 버렸다. 눈을 뜨니 탁자 위에 물이 엎어져 있다. 나는 따뜻한 솜이불 대신 듣도 보도 못한 피터팬이라는 녀석의 손을 덥석 잡아버렸다. 이미 밤하늘을 날아올랐다. 밤공기는 생각보다 싸늘하고, 나는 얇은 잠옷 하나 걸친 초라한 이다. 이건 금세 돌아갈 수 있는 한 달 여행이 아니다. 짧게는 1, 2년에서 길게는 십 수 년을 여행해야 한다. 피터팬, 이 녀석을 믿어야 하는 걸까? 잡은 손이 꽤나 후회스럽다.


돌이킬 수 없다. 내가 택한 길이다. 지금부터 내게 닥친 세상을 마구 살아내야 한다. 배가 폭풍을 가를 때 나는 그보다 더한 어려움을 견뎌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건 곰이 사람이 되기 위해 먹는 마늘처럼 쓰디쓸 것이다. 그 끝에 찾아오는 보석 같은 저 너머 세상은 한결 달콤하겠지? 다시 집에 갔을 때 깨어날 일장춘몽을 시작한다.

 

 
 

# 맹글라바
잠깐 눈을 붙였다 뗐는데 날이 밝았다. 짧은 여정이지만 긴장한 탓에 피곤했나보다. 사뭇 다른 아침이다. 꽉 막힌 방에 달린 작은 창으로 어렴풋이 햇볕 한줄기가 들어온다. 침대와 책상, 소파, 옷장이 야무지다. 배가 흔들려도 움직이지 않도록 잘 짜 맞췄다. 방마다 있는 화장실은 필요한 것만 알맞게 배치했다. 달라진 일상을 맞는 두려움 사이로 새로운 것을 향한 호기심이 샘솟는다.


방문을 여니 좁은 복도와 계단이 나온다. 미로 같은 선실에 똑같이 생긴 방들이 어찌나 많은지, 이 방이 저 방 같고, 그 방은 또 아랫방과 똑같다. 이 좁은 공간에도 각자 잠자리가 있고 밥 먹는 자리가 있다. 어디서 뭘 해야 하나 머뭇거리는데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불쑥 불쑥 나온다. 각자 공구를 집어 들고 제 일에 바쁘다. 잘 훈련된 개미나라에 온 것 같다.


종일 인사하느라 정신없다. 나는 문고리부터 숟가락까지 모든 게 새로운데, 다들 너무나 일상적이다. 짧게는 수년에서 길게는 십 수 년간 배에서 지냈으니 사람 맞고 떠나보내는 일에 능숙할 법도 하다.


-슈고햐심댜.

버마 선원들은 우리말을 배워 인사했다. 배웠다기보다 따라하는 것. 그런데 한국 선원은 버마 말을 배우데 인색했다. 일단 인사말을 배웠다. 맹글라바.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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