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건국초창기 한국해운의 발전개관

해방직후의 해운현황과 미군정의 해사관련중요조치들

 
 
1. 개관
1945년 8월 15일 꿈에 그렸던 조국의 해방이 이루어졌다. 바로 새로운 나라의 건설을 시작하여야 하였다. 해방으로 자유를 찾았으나 자유와 함께 우리를 맞이한 것은 폐허나 다름없이 망가진 경제현실이었다. 해운도 마찬가지였다. 2차 대전 발발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해운은 비록 일본인들의 필요에 의하여 발전된 것이기는 하였지만 제법 체제를 갖춘 해운기업인 조선우선주식회사를 비롯한 몇 개의 해운기업이 활동하고 있었으나, 2차 대전의 수행과정에서 일본군에 의하여 대부분의 선박이 징발, 전선에 배선되어 적의 공격으로 침몰하는 등으로 없어지고, 해방된 당시에 우리나라 수역에 남아 있는 선박 중 외항이 가능한 선박은 고장으로 운항하지 못하고 계선되어 있던 2,000 톤급의 부산호 한 척뿐이었다.

해방된 환희와 함께 해운관계자들도 새로운 조국건설에 무엇인가 이바지 하고자 발 벗고 나섰다. 해방 정국하에서 해운관계자들이 이룩한 업적은 세 가지 정도였다. 그 첫째는 일제강점기하에서 일본인들에 의하여 설립되고 운영된 회사이기는 하지만 제법 외항활동이 가능한 수준의 외형을 갖춘 조선우선 주식회사가 일본인들이 모두 철수하면서 방치된 상태에 있는 것을 정상화시켜 해방 정국하에서 필요한 해상수송기능을 원활하게 수행하도록 한 것이다. 둘째는 신생조국이 해외로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해운업의 발전이 최급선무인데 이에 필요한 고급해기사를 대량 양성하여야 하는데 이에 필요한 해기사 양성 교육기관인 한국해양대학을 설립하여 고급해기사를 양성한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는 조선우선을 발판으로 국영기업체인 대한해운공사를 설립한 것이다.

2. 미군정 및 과도정부 체제 하에서의 해운행정기구
1946년 1월에 미군정은 일제 총독부 시대의 교통국을 운수국으로 개편하고, 철도운영, 관리를 포함한 우리나라의 모든 교통기관을 국유국영으로 할 방침을 정하여 우선사철(私鐵)을 모두 국유화하여, 철도를 국유 국영으로 하였다. 미군정의 사철을 국유화하기 며칠 전인 1946년 4월 27일, 미 군정청은 세관행정 이라는 군정 법령을 제정하여 시행하였는데, 그 법에서 해사국의 세관업무는 재무부에 해안경비의 모든 업무기능, 기록, 재산 및 직원을 조선정부 국방국에 이관하였다.

그 후 정부수립 직전인 1948년 상반기 중에는 선원 및 선박관련 행정은 해안경비대로, 개항장과 항내 단속업무는 재무부 세관국으로 이관되어 해사국은 사실상휴면상태로 들어갔다.  
미군정 당국은 해사국 업무를 타 부처로 이관하여 공동화시킨 후 운수부안에 해사국과는 별도의 기구인 해상운수국을 신설하였는데1) 이 해상운수국의 기능은 미군이 대여한 전표선을 운영하는 선박관리, 운영 전담기관이었다. 해상운수국에는 업무과, 자재과, 경리과 및 항만과를 산하에 두고, 그 밖에 국장총괄실을 두고, 그 산하에 부산선단을 두어 미군정 당국이 대여2)한 미국 전표선의 운항업무를 담당하였다.
지방 조직은 부두국(또는 부두부)의 기능 중 입출항 업무 기능만 남은 상태에서 1946년 7월까지 항무청이라는 이름으로 업무를 보다가 그 후로는 항만청이라고 하였다. 정부 수립 후는 주요 항만을 중심으로 한 해사국이 되었다.

이상의 사실을 종합 정리해 보면 ①미군정은 해사행정기능을 미국식으로 개편한 것으로 보인다.3) ②그리고 해상수송에 대한 기능은 당시 선박이 거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전술한 운송기능을 국유국영으로 한다는 방침하에 해상운수국을 두고 해상운송을 담당할 선박은 미 전표선을 해상운수국에 대여하여 운항하도록 함으로서 해상운송수요에 충당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3. 조선우선의 경영정상화와 김용주
전술한바와 같이 전쟁중 거의 대부분의 상선이 전쟁용으로 징발되어 전선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적의 공격에 의하여 침몰되거나 대파되어 사라져 버렸고, 남은 몇 척의 중소형 선박들도 일본이 패전하고 나서 일본인들이 서둘러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타고 달아나서 이를 돌려주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 해역에는 글자 그대로 쓸 만한 선박은 한 척도 안남아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방 정국하에서는 해운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던 건물과 가옥 각종 대소 상점을 비롯하여 운영하던 공장 및 기업체 등이 수도 없이 방치되어 있어서 이것을 서로 차지하려는 경쟁이 해방정국을 어지럽히는 하나의 큰 요인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적산기업 중 해운인들의 관심거리의 하나는 조선우선의 행방이었다. 이 조선우선의 관리권의 인수와 관련된 두 갈레의 움직임이 있었다.  하나는 조선우선 선박에 승선근무를 하던 해기사를 주축으로 한 선원들이 중심이 되어 해원동맹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미불임금과 퇴직금등을 받아내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다가 여의치 않자 조선우선의 관리권을 인수, 운영하자고 나왔다. 다른 하나는 해운에 어느 정도의 경영지식과 관심을 가진 김용주가 주축이 되어 해운의 경영에 관련되어 있던 사람들을 규합하여 해운건설연맹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 기구의 대표인 위원장에는 김용주가 취임하였다. 이 해운건설연맹이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진 문제도 조선우선의 관리권을 인수하여 회사를 정상화시켜 보겠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미군정당국이 김용주를 중심으로 한 단체인 해운건설연맹에 조선우선의 경영정상화를 위임하였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전술한바와 같이 조선우선에 남아 있는 선박이라는 것이 2,000톤 급의 부산호 한 척이 고장으로 인천항에 계선되어 있는데 이 선박을 어떻게 해서든지 수리하여 묵호로부터 인천으로 무연탄을 운송하라는 것이었다.

 이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비용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조선우선의 금고는 텅 비어 있었고, 당시는 금융기관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시기였으므로 융자 받을 데도 없다. 그래서 미 군정청 해사부장 이동근 씨와 의론하여 동조자 몇 사람을 규합하여 조선우선을 인수하기 위한 관리위원회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관리위원은 강일성, 김철호, 설경동 김종섭과 김용주 등 5인이었다.
 조선우선의 부산호의 수리에는 최소한 200만원의 자금이 필요하였다. 광복직후의 10월이라 당시의 200만원은 지금(70년대 말)의 20억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이 자금을 관리위원 5인이 분담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자금 염출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아니하였다. 처음에는 관리위원인 강일성씨가 중국 상해에 대단한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그를 믿고 이 일을 시작하였으나 전혀 돈을 내지 아니하였으며, 다른 위원들도 마찬가지여서 결국은 200만원을 위원장인 김용주가 자기의 사재를 털어 출연하여 부산호를 수리하여 정상운항할 수 있게 하였다.  이렇게 되자 미군정도 조선우선관리위원회를 해체하고 김용주를 조선우선 사장으로 임명하였다. 수리를 마친 부산호는 당초 목적한대로 묵호/인천항 간을 몇 항차 운항하면서 무연탄을 수송하였으나, 일기불순으로 남해안의 다도해에서 좌초하였는데, 천신만고 끝에 이를 구조하여 부산항으로 예인하던 중 다시 침몰하고 말았다.

4. 조선우선의 선대 확충 및 해상운수국의 전표선 직영    
부산호를 수리하여 조선우선이 해운업을 재개하였으나 배 한척으로 운항하였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느껴 어떻게 하든 선대를 확충하는 것이 시급하였다.

1) 미군대여선의 무상임차 운항
미국은 2차 세계 대전을 치르면서 상선이 대량으로 필요하자 정부예산으로 5,000척이 넘는 전시표준형 선박을 긴급 건조하여 운항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이 선박들이 할 일이 없어 상당수가 계선되게 되었다. 미군에서는 이들 잉여수송력을 일본등 점령지의 군정통치용으로도 활용하였다. 일본에 약 100여척의 전표선으로 무상으로 대여하여 운항하였다. 우리나라에도 20~30척의 전표선을 무상으로 빌려주어 운항하도록 하였다. 우리나라에 미군정에서 대여한 선박은 두 곳에 빌려주었다. 하나는 김용주가 사장인 조선우선에 빌려 주었고, 나머지는 미군정청 운수부안에 해상수송국을 두어 이 해상수송국에서 운항하도록 하였다.

김용주는 미군정청과  교섭한 결과 미국정부로부터 2,000톤급 발틱(Baltic)형 선박 6척 과 FS형 6척을 대여 받아 운항하게 되었다. 김용주는 이들 미군대여선을 합리적으로 운항하여 조선우선의 경영은 정상화되었고, 조선우선은 흑자를 내게 되었고, 해방정국하에서 민생문제 해결에 필요한 해상수송수요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미군정청 운수부도 발틱형 선박 10척등 20여척을 무상임차 운항하였다. 정부수립후에는 남한에 8척이 남아 있었다. 정부수립 후 미군으로부터 LST형 9척과 FS형 선박 10척을 더 빌려 정부가 직영하였다.

2)  대일선박반환 청구
조선우선의 김용주는 일본군부에 징발되었던 선박이 전부 손실, 파손되지는 아니하였을 것으로 생각하고, 만약 어딘가에 남아 있다면 그것을 찾아와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일본과는 전혀 왕래가 두절된 상태였으나 사방으로 수소문하고 종합 조사한 결과,  일본에 약 5~6척의 조선우선 선박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풍문으로 확인하였다. 이에 조선우선의 김용주는 조선우선회사의 주주는 일본법인과 조선식산은행이나 회사는 조선에 적을 둔 법인이고, 소유선박이 조선에 적을 둔 선박이니 전쟁이 종료된 이 마당에는 선적지인 조선으로 돌려주어야 함이 법리에 맞는 일이라고 주장하여, 1946년 3월에 미 군정청과 맥아더사령부에 조선우선의 선박리스트를 작성하여, 현재 일본에 잔류해있는 선박에 대한 반환청원서를 제출했다.

약 4~5개월 후에 내도한 회신의 내용은 김천호, 강원호, 함경호, 앵도호, 일진호 등 5척이 일본의 어느 항구에 있다는 사실과 이 배들을 반환할 터이니 선원을 보내 인수해가라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이때 정말로 기뻐서 환호성을 질렸다. 우리는 곧 선원들을 조직하여 일본으로 보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 배를 인수 운항하게 되었다.

3) 한일선박반환회담
1947년 초에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인수해왔던 5척의 배를 다시 반환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그때 우리는 먼저 인수해왔던 5척 외에 나머지 선박들을 반환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었던 터라 이는 어불성설이라고 한마디로 거부해버렸다.

그리고 계속하여 나머지 선박에 대한 반환요청을 하였다. 1948년 정부수립과 동시에 조선우선의 김용주는 당시 초대 법무부장관이었던 이인 씨와 상의하여 일본에 잔류중인 조선우선 소속 선박의 반환 교섭을 벌이기로 하고 맥아더 사령부에 갔더니 맥아더 사령부에서는 그 전에 반환하였던 5척을 도로 일본으로 반환하도록 할 심산으로 이 교섭회담을 받아주었다.

이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대일선박회담사절단으로 사절단장 김용주, 위원에 법무국장 홍진기(후에 중앙일보사장 역임), 해운국장 황부길, 수산국장 대리 오진호, 영어담당 정인섭 등으로 구성되어 1949년 4월초에 도일하였다. 일본측 주장은 종전후 맥아더 사령관의 포고령 제2호에 의하여 일본의 해외재산은 1945년 8월 9일 현재에 소재한 지역에 귀속된다는 속지주의에 의하여야 할 것임으로 조선우선 선박도 일본에 소재하였으면 일본 귀속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기히 조선에 반환한 5척도 일본귀속이니 도로 반환하라는 주장이었다.

우리 측은 이에 대하여 법인과 개인이 각기 다르며 조선우선은 지금 한국에 존속하고 있는 법인이기 때문에 한국의 법인재산이라는 요지의 주장을 하였고,  한편 저쪽은 8월 9일 이후 일본에 있었으니 귀속주의에 의하여 일본재산이라고 강경하게 주장하여 5일 동안이나 팽팽히 맞서서 주장하였다.

사령부측 위원은 관재처장인 모 미군소장과 법률가 4~5명이었는데, 서로 법 이론으로 싸우다가 끝으로 미군측은 선박은 무기이므로 조선에는 이 이상 선박을 보낼 수 없다는 맥아더 사령관의 지령을 내세워 회담을 종결해버렸다. 김용주 사장은 그때 더 이상 일본에 머무를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판단하고 교섭의 대상을 미 국무성으로 돌리기로 하고 이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워싱톤으로 떠나고 다른 위원은 본국으로 귀환하게 하였다. 일본에서 미국으로 도미한 김용주 사장은 위싱톤에서 1개월 동안 체류하며 당시의 주미대사 장면 박사와 더불어 미 국무성을 위시하여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여 보았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을 수가 없었다. 미국무성측은 연합군사령관이 집행하는 일이기 때문에 국무성 소관 밖의 일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 당시 일인이 주도하던 법인은 모두 다 일인재산으로 처리되고 있었다. 도미교섭도 성과없이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성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4) 상대측 법이론을 역이용하여 선박 획득
이상에서 기술한 내용을 종합해 보면 초기 조선우선의 선박이 일본수역에 어떤 형태로든 가 있는 선박의 반환을 요청하였을 때 미극동군사령부는 선박의 귀속을 선적지주의를 기초로 하여 5척의 선박을 순순히 반환하였는데, 그 후 어떤 이유로 방침을 꿨는지는 몰라도 미극동군사령부는 적산인 자산은 종전당시 있었던 장소를 기준으로 그 귀속을 결정하는 속지주의로 전환하고 나머지 선박의 반환을 완강히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환한 선박을 다시 반환하라는 억지까지 부렸던 것이다.

그 이론대로 한다면 종전 당시(1945년 8월 9일) 우리나라 수역에 있었던 선박은 우리선박이라는 결론이 된다. 조선우선의 김용주는 “그렇다면 해방당시 우리수역에 일본 선박이 상당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지금까지 방침을 바꾸어 우리나라 수역에 있던 일본선박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어떤 선박이 언제 어떻게 우리나라 수역에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쉽지 아니하였다. 그러던  중 부산에서 급수업을 하던 사람의 부산항에서의 급수일지를 면밀히 검토한 결과 몇 척의 선박이 종전을 전후하여 우리나라 수역에서 급수 받은 사실을 확인하였다. 조선우선의 김용주는 이것을 근거로 1945년  8월 9일 이후에 조선지역에 많은 일본선박이 입항하였다는 증거를 삼아 일본의 맥아더 사령부와 재교섭을 하여 2만톤급 평안호 1척을 반환받았다.

※이 이후에도 한일간에는 선박반환과 관련된 교섭이 몇차레 이루어졌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대일강경노선에 밀려 해결안을 찾지 못하고 한일간의 미해결  사항으로 계속 남아 있다가 5. 16 군사혁명 후 한일국교정상화 협상에서 일본이 선박반환문제의 대가로 3천만불의 협정차관의 제공으로 끝내기로 일괄타결하여 해결되었다. 이 차관에 의한 선박건조에 대하여는 후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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