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멀고먼지 그리운 서울은~”

1969년 봄 경주 양남면 바닷가 낚시하다 작사

왕 성 상
왕 성 상
동해안 감포읍 나정해수욕장 주차장에 노래비
‘바다가 육지라면’은 바다를 사이에 둔 남녀의 이별의 정한을 애잔하게 나타낸 대중가요다. 아직도 중년층엔 국민가요라 해도 손색이 없다. 정귀문 작사, 이인권 작곡, 조미미 노래의 4분의 2박자 트로트 곡으로 뭔가 아쉽고 한이 서린 느낌의 가요다.

2007년 ‘바다가 육지라면’으로 ‘상록수 상’ 
이 곡은 향토작사가 정귀문(72) 선생이 1969년 이른 봄 경주 양남면의 어느 바닷가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만든 노래다. 정 선생이 30살 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감포 앞바다에서 낚시를 했다. 그러나 고기를 잡기보다 수평선을 바라보며 노랫말을 지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노래가 ‘바다가 육지라면’이다.
그 땐 감포 앞바다까지 고래가 들어왔다. 작사가는 동해의 푸른 물결을 보며 감포 앞바다가 육지라면 그 넓은 땅에서 밭을 일구며 살고 싶었다. 시리도록 푸른 나정리 앞 바다에서 밀려왔다 쓸려가는 파도에 마음을 실어 나르다 어려운 현실에서 벗어나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꿈을 수평선에 그려놓고 바라보면서 노래 말을 만든 것이다.

 
 
가사에 곡이 붙여져 그해 여자가수 조미미가 불러 전 국민의 애창곡이 됐다. 정귀문 선생은 2007년엔 ‘바다가 육지라면’으로 한국가요창작인 공로상 ‘상록수 상’을 받았다.
이 노래는 만들어진지 43년이 지났지만 동해안 나정해수욕장에 가면 멜로디를 담은 노래비가 세워져 오가는 길손들의 발길을 머물게 한다. 경주시가 40여 년 한(恨)과 정(情)을 노래한 정 작가의 ‘바다가 육지라면’ 노래비를 동해안 감포읍 나정해수욕장 주차장에 세운 것이다. 2009년 7월10일 오전 11시 백상승 경주시장을 비롯한 경주시의원, 정 작가, 현곡 고향 및 나정리 주민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이 열렸다. 3000만원을 들여 그해 6월 말 완공된 노래비는 화강석 및 검은색의 오석(烏石)으로 만들어졌다. 바다와 어우러진 배 모양으로 높이는 좌대를 합쳐 4.4m다. 노래비 앞쪽엔 가사가, 뒷면엔 창작 유래가 새겨져 있다. 특히 비 정면에 서면 센스작동으로 노래가 흘러나온다. 관광객들이 노래를 들으며 옛 추억에 젖어든다.

‘바다가 육지라면’ 노래가 히트하면서 같은 제목의 영화도 만들어졌다. 2001년 제작된 김지현, 김나영 감독의 작품으로 40분 분량(청소년 관람 불가)이다. 예술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차례대로 자기만의 ‘라면 끓이기’를 보여줘 흥미롭다. 가장 쉽고 간단한 음식인 라면 끓이기를 통해 각자 개성과 창의성을 어떻게 발휘하는지를 연구하는 줄거리다.

 
 
경주시 현곡면 하구리에서 태어나 지금껏 살아

‘바다가 육지라면’의 노랫말이 만들어지기까지엔 작사가 정 선생의 성장과정과 시대배경이 바탕에 깔려있다. 정귀문씨는 1941년 아버지 정용범씨와 어머니 허숙희씨 슬하의 7남매 중 맏이로 경주시 현곡면 하구3리 1057번지에서 태어나 지금껏 고향마을을 지키고 있다. 그러면서 농사도 짓고 흘러가는 구름, 떨어지는 나뭇잎, 잊혀져가는 이름들을 엮어 노랫말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는 해안선을 따라 돌고 돌아야하는 도로나 배를 타도 더디기만 한 바닷길 너머의 신기루를 쫓아 가슴 속의 꿈이 펼쳐지는 날을 기대하면서 지내왔다. 정 선생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언어를 한 단어씩 낚아 올리는 어부와 같은 심정으로 40년간 1000여 곡의 노랫말을 지었다”고 말했다.
그의 첫 데뷔작은 1969년 KBS가 공모해 방송가요로 채택된 ‘숲속의 외딴집’ ‘다정한 목소리’다. 그는 젊은 날 시를 쓰는 문학청년이었다. 정을 그리고 한을 노래한 아름다운 노랫말은 김소월의 시 세계와 닿아있다. 시조로 써놨던 ‘만추’를 노랫말로 고쳐 그해 11월 세광출판사의 신인작품공모에 당선추천을 받아 작사가의 길을 걷게 됐다.

그의 어머니는 가난한 농부의 아내로 7남매를 키웠음에도 자식들에겐 늘 반듯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줬다. 어머니가 별세해 아들(정귀문)의 벗들이 상여를 매고 장지로 갈 때 구성지게 불렀던 노랫가락은 우리나라의 전통상여곡이 아니었다. 특이하게도 ‘바다가 육지라면’이었다. 행렬을 따르던 조문객들도 그 노래를 따라 불러 눈길을 모았다. 슬퍼해야할 장례 때 대중가요를 부른 건 매우 이례적이었다. ‘바다가 육지라면’은 그만큼 스토리가 많은 노래다.

‘마지막 잎 새’ ‘먼 훗날’ ‘동네방네 뜬소문’ 등 1000여곡의 노랫말을 만든 정 선생은 지금도 작사활동에 열정적이다. 한국대중가요 100년사의 어려운 여건에서도 정열과 청춘을 가요발전에 쏟으며 노익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매주 포항MBC 라디오 ‘즐거운 오후 2시’에서 청취자들 참여프로그램인 ‘싱송생송’ 가요열전 심사를 맡고 있다. 그의 얼굴은 몰라도 목소리는 귀에 익은 청취자들이 많다. 전화노래방, 고고가요열창 등의 노래심사도 맡고 있다.

지방방송국으로 후배가수들이 신곡을 알리러 갈 땐 ‘정귀문 선생을 꼭 봬야한다’며 시골까지 물어물어 찾을 정도로 존경받는 작가다. 의리와 원칙을 지키는 선비정신으로 소박한 삶을 살고 있어서다. 동갑인 부인(임문조 여사)과의 사이에 1남 2녀를 뒀다.

 
 
목포출신 조미미 2012년 9월 간암으로 별세

한편 ‘바다가 육지라면’을 부른 조미미는 2012년 9월 9일 오전 11시 향년 65세로 별세했다. 그해 8월 간암말기 판정을 받고 서울 구로구 오류동 자택에서 투병 중 세상을 떠난 그는 경기도 양평 무궁화요원에서 영원히 잠들었다.
그녀는 1947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나 목포여고를 졸업한 뒤 동아방송(DBS) 소속으로 ‘떠나온 목포항’(1965년)으로 가요계에 데뷔했다. 이어 1969년부터 ‘여자의 꿈’, ‘동창생’, ‘바다가 육지라면’, ‘서산 갯마을’, ‘먼데서 오신 손님’, ‘단골손님’, ‘서귀포를 아시나요’, ‘눈물의 연평도’, ‘개나리 처녀’ 등 수많은 히트곡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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