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해의 시작..배들의 휴게소 싱가폴

‘지구별 항해기’내용
(1)바다로 간다 (2)승선 (3)고요속 긴장, 수라바야 (4)항해의 시작 (5)문명의 경계, 아마존 (6)고단한 선원 (7)파도마저 얼어붙은 발틱의 겨울, 라트비아 (8)대륙의 끝, 무르만스크 (9)커피공화국, 산토스 (10)해적의 바다를 가르다 (11)그들이 사는 법, 인도 (12)지도보다 빨리 성장하는 중국 (13)지금은 항해중,
본호에서는 (3)(4)(5) 게재.         

 
 
<고요 속 긴장, 수라바야>
서울은 슬슬 단풍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는 땡볕이다. 정오 태양이 우산 꼭지처럼 하늘 한가운데 올랐다. 이곳은 적도에서 남쪽으로 약 800㎞지점. 추분이 14일 지났다.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넘어가는 해가 적도를 지나 이곳에 닿았으리라 짐작한다. 생애 처음 맞는 적도의 태양은 가혹하다. 수직으로 내리 꽂는 뙤약볕에 그림자조차 자취를 감췄다. 세상은 꼼짝도 안한다. 가만히 더위를 달래는 것 밖에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다. 아스팔트는 맥반석처럼 달아올랐다. 열기를 뿜는 디젤 엔진 아래도 그늘이라고 인부들은 앞 다퉈 들어갔다. 이 사람들은 불가마 같은 선체와 철제 컨테이너에 맨몸으로 오른다. 종일 그늘도 없이 일한다. 일당은 6만 2천 루피. 약 7달러, 우리 돈으로 8천여원이다.

첫 상륙

솔로몬의 말처럼 모든 것은 곧 지나간다. 영원할 것처럼 기세부리던 태양도 때가 되니 사그라졌다. 세상은 차츰 기지개를 켜고, 거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으로 분주하다. 오후 6시, 일과를 마치고 도시로 향하는 대열에 합류했다. 첫 상륙이다. 현문사다리를 내려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신나게 길을 나섰지만 속으로는 불안하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 이곳은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여행정보가 줄줄이 나오는 관광지가 아니다. 나는 그동안 여행을 갈 때나 영화를 볼 때, 선물을 살 때, 심지어 저녁에 찾아갈 식당도 인터넷으로만 알아봤다. 제주도를 여행할 때는 제주도민에게 길을 묻지 않고 외지인 인터넷 블로거를 찾아갔다. 그러니 나는 현지 주민의 인심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외지인의 입장에서 쓴 글이 실체이며 그것을 전부로 믿었다. 짧은 인터넷 기사를 진실로 믿고, 몇몇이 모인 논쟁 터를 여론의 중심지로 생각했다. 글과 말로 감히 세상을 읽으려 덤볐다.

 
 
법가에도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정나라 차치리라는 사람은 종이에 자기 발을 본 떠 놓았다. 어느 날 시장에 신발을 사러 갔는데, 본을 집에 놓고 왔다. 사내는 본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갔다. 그 사이 장이 파했다. 사람들이 왜 신발을 신어보지 않았냐고 묻자 차치리는 말했다. ‘본은 믿을 수 있지만, 내 발은 믿을 수 없잖소.’

세상 모든 것에 답을 해줄 것 같은 인터넷도 이곳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다. 이제 나는 인터넷을 접고 진짜 세상을 만나야한다. 현지인에게 길을 묻고, 그 숨결을 느껴야한다. 나는 미숙하다. 겁이 난다. 어두컴컴한 길을 홀로 개척하는 심정이다. 불안한 마음을 누르고 여정을 재촉했다.
택시 한 대가 부두 정문에 서 있다. 상륙하는 선원을 낚아채려고 종일 기다린 모양이다. 누구든 나를 기다려 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선원들의 호주머니를 쉽게 생각하는 장사꾼의 등쌀은 싫다. 이런 사람들은 제가 기다린 만큼, 마음먹은 만큼 돈을 챙기지 못하면 금방 얼굴색을 바꾼다.
-살라맛

기사 암만이 살살 웃으며 다가왔다. 성격 같아서는 뿌리치고 싶지만 일행이 있다. 떠밀리듯 뒷좌석에 올랐다. 낡고 낡아 안감이 삐져나온 시트, 소음기 어딘가가 터졌는지 귀를 간질이는 엔진소리, 고장 난 에어컨을 거쳐 나오는 탁한 공기. 택시를 타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애시 당초 마음을 고쳐먹자. 이 택시기사가 좋은 가이드가 되어 주기는 바라지도 않는다. 바가지를 안 쓰려고 악착같이 버티지도 않을 테다. 시간과 정보가 없는 우리를 안내할 사람은 이 운전수뿐이다. 우리 하루가, 내 첫 상륙이 이 사람에게 달렸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바가지를 써 주겠다. 대신 나는 정보를 얻어 시간을 알차게 쓰면 그만이다. 그나저나 나는 또 계산기만 두드리는구나.

낡은 택시는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도시의 품으로 냉큼 달려들었다. 낯선 향신료 냄새와 습한 바람, 군데군데 피운 장작 연기가 메케했다. 멀리 이슬람 사원에서 잔잔한 기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기저기 있는 사원은 광화문 미국대사관처럼 삼엄했다. 무장한 경찰들이 보란 듯이 서 있었다. 섬 1만 8천여 개로 구성된 인도네시아에는 360여 부족이 산다. 종교 간, 부족 간 대립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교회에 폭탄을 터뜨리면 복수가 뒤따른다. 부족사이에서도 살인과 폭력이 빈발한다. 종교가 다르면 결혼도 할 수 없다니 한데 섞여 있지만 같은 사람이 아니다. 여기는 인도네시아 한가운데 있는 항구다. 종교와 종교가, 부족과 부족이 만나는 공간이다. 남모를 긴장이 흘렀다.

근처에 일본 식당이 있었다. 마당에 고목이 여럿 있고, 그 아래 아담한 단층 건물이 우리를 기다렸다. 기분을 낸다고 바깥에 자리 잡았다. 촘촘한 가지는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잎을 길게 떨어뜨렸다. 깊은 정글에 온 기분이다. 가만 보니 집이 먼저 있고 나무가 있는 게 아니다. 오래 된 나무 곁에 집이 살그머니 자리 잡았다. 서울 근교에 있는 대형음식점 나무는 손님이 드나들기 불편하지 않은 자리에 심어놓은 관상용이다. 나는 그동안 나무마저 사람에 맞춰 배치한 인공의 공간에 살았구나 싶다. 달러 가치가 높아 여유를 부렸다. 이 나라 볶음밥은 우리네 그것과 비슷하다. 바닥까지 싹싹 긁어 먹었다.

상점가로 발길을 재촉했다. 나는 현지 영자신문과 휴대전화를 샀다. 자카르타 포스트에는 우리나라에 전해지지 않는 갖가지 소식이 쏟아졌다. 1면은 이슬람 지도자가 알카에다와 연계한 증거를 발견했다는 뉴스로 도배했다. 이어 나무를 많이 베는 바람에 비온 뒤에 땅이 주저앉은 현장, 지난 1주일 사이 홍수로 90명이 숨졌다는 뉴스, 기차 충돌 현장 구조속보가 나왔다. 정쟁, 북한, 교육, 부동산이 대부분인 우리와 다르다.

삼성전자 매장에서 여러 나라에서 쓸 수 있는 전화기를 단돈 4만원에 샀다. 이곳 휴대전화는 우리나라처럼 통신사에 가입해 고유 번호를 받을 필요가 없다. 일회용 심(Sim)카드만 끼우면 쓸 수 있다. 당연히 로밍도 없다. 국경을 넘어도 해당 국가 통신사 카드를 넣으면 된다. 심카드 값은 우리 돈으로 800원 정도. 인도삿(Indosat)이라는 통신사에서 우리 돈 1만 2천원을 충전하면 서울 집에 2시간 가까이 전화할 수 있다. 국제 휴대 전화 간 통화료가 우리나라 국내통화료와 비슷하다.

어느덧 오후 10시. 이제 도시는 잠들 모양이다. 저만치서 암만이 우리를 기다린다. 그는 우리가 유흥업소에 가기만 바란다. 그래야 수입이 좋은 모양이다. 굳이 밝히자면 선원들, 건강한 남성이다. 드물지만 해외에서 밤을 보내는 경우가 있다. 윤리문제는 잠시 접는다. 내가 꼬집고 싶은 것은 선원들에 관해 겪지 않은 일을 겪은 듯이, 보지 않은 것을 본 듯이 떠벌리는 사람들이다. 배를 타면 해외에 여자가 생긴다는 둥, 살림을 차린다는 둥 없는 말로 선원들을 깎아 내린다. 나와 여자 친구도 그런 말 때문에 적지 않게 힘들었다. 잘라 말해 모르는 소리. 배를 타면 육지에 있는 사람들보다 여자를 접할 기회가 적다. 언제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요새 상륙해서 밤새 술을 마시는 일은 드물다. 선원들은 땀 흘린 만큼 버는 정직한 사람이다. 공돈을 바라는 마음으로 종일 사무실에서 주식 창만 보지도 않고, 남의 등을 치지도 않는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집 떠나 바다와 사투한다. 우리 사회가 선원에 대해 정확하게 알았으면 좋겠다.

시간이 늦었다. 우리는 암만의 유혹을 뿌리치고 배로 향했다. 마침 비가 내렸다. 인력자전거에 비닐을 씌우고 손님을 기다리는 노인을 보노라니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이 떠올랐다. 비가 와서 신이 난 김 첨지는 아마 저런 모습이었겠지? 나도 운수 좋은 상륙이었다. 특별할 건 없지만 계획도 없이 나와서 수라바야의 환대를 받은 느낌이다. 선상 생활이 꽤나 재미있겠다 싶다.

그래도 사람을 믿어
아하마드는 바보다. 순한 곰이다. 선임 동료들은 갓 일을 시작한 스무 살 풋내기에게 잔심부름을 시키고 그의 시원한 그늘을 뺏는다. 그는 고분고분하다. 절대 화내는 법이 없다. 심지어 제 담배도 내준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술을 안 마시는 대신 담배로 친분을 다진다지만, 녀석은 미련해 보일만큼 베풀기만 한다. 삐쩍 마른 몸이 얼마나 다부진지 동료들 몫까지 척척해낸다. 아하마드와 동료들은 크레인이 갑판에 떨어뜨린 콩을 모아 나른다. 그는 오전 11시가 지나면 가방에서 솥과 버너, 그릇을 꺼낸다. 물을 끓이고 꼬깃꼬깃 싸온 음식을 펼친다. 그러다가도 남의 일을 돕는다. 그러다보면 요리는 12시가 다 되어서야 끝난다. 순둥이는 하얗게 불어버린 면과 밥을 산해진미라도 되는 것처럼 맛있게 먹는다. 그렇게 또 하루가 저문다. 집으로 향하는 그의 어깨가 어쩐지 쓸쓸하다. 나는 노을 속으로 걸어가는 그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이튿날, 나와 동료들의 전화카드가 바닥났다. 날이 저물 무렵, 나는 착한 아하마드에게 30달러를 쥐어주고 새 카드를 사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상관의 명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예스, 예스’했다.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는 게 고마웠다. 나는 우리 순둥이가 돌아오면 수고비로 이곳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7달러를 주기로 마음먹었다. 소년은 한 시간 후에 돌아오겠다며 잰걸음으로 항구를 빠져나갔다.

착한 아하마드가 빨리 오기를 바랐다. 나는 손에 전화기를 들고 약속한 시간 30분 전부터 현문에 나갔다. 그가 모습을 드러낼 건물 모퉁이에 시선을 고정했다. 나는 아하마드가 9시 뉴스처럼 ‘땡’하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엄지손톱을 깨물며 시계를 들었다 놨다 반복했다. 10분전, 5분전, 3분전, 1분전. 기다리는 시간은 길기만 했다.

-땡!
마음속에서 종이 울렸다. 약속한 6시가 지났다. 하지만 그가 돌아오는 길은 정적뿐. 나는 초조했다. 아무 일도 없는데 주위가 어두워진 것만 같았다. 처음에는 조금 늦겠거니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차올랐다. 스무 살 때 혼자 떠난 여행길에 기차역에서 멀쩡하게 생긴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 연락이 끊긴 일, 백화점에 납품한다는 냉동트럭에서 가짜 옥돔을 산 일 같이 쉽게 사람을 믿었다가 당한 사례가 떠올랐다. 직접 경험한 일과 남에게 들은 일, 내가 상상한 일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이다. 가만히 생각하니 우리 배는 내일 떠난다. 이곳이 일터지만 그는 하루 쉬고 안 오면 그만이다. 마음이 언짢아졌다.

-일당의 4배가 넘는 돈을 쥐어주는 게 아닌데….
아차. 아하마드는 착하지만 그렇게 큰돈은 유혹일 수 있다. 그냥 늦는 것이기를 바랐다. 나는 그가 돌아오기를 바라면서도 마음 속 저편에서부터 헐뜯기 시작했다. 손톱만한 비난은 점점 커졌다. 10분 사이 그는 ‘도망자’와 ‘국제 사기꾼’이 되었다. 나는 그에게 한없는 저주를 퍼부었다. 동료들 카드 값은 어찌할지, 새 카드는 어떻게 사야할지, 그리고 만일 그가 돌아오면…. 내 머릿속은 긍정과 부정, 온갖 생각들로 혼잡했다. 그 사이 자정이 지났다. 당직을 마치고 쓸쓸히 방으로 들어갔다. 우울하게 이불속에 들어갔다.
-아직 사람 보는 눈이 부족한가.

이런 저런 생각은 잠결에도 이어졌다. 천진난만한 아하마드가 꿈에 나타났다.
잠깐 생각한 것 같은데 아침이 밝았다. 온 몸이 찌뿌듯했다. 오늘은 작업을 마치고 떠난다. 평소보다 긴장해야 한다. 옷을 주섬주섬 입고 현문에 나갔는데 간밤에 당직을 선 2항사가 전화카드와 잔돈을 내밀었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친구 새벽 1시쯤 왔더라고. 뭐라 뭐라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나름 사정이 있었나봐. 오늘은 다른 일로 우리 배에 못 오는 모양이야.

아하마드는 부탁한 전화카드와 내게는 필요도 없는 인도네시아 잔돈까지 놓고 갔다. 그 늦은 시간에.
-집이나 회사에 급한 일이 있겠지. 그렇다고 새벽에 올 건 뭐람.
고마움과 미안함, 섣불리 그에게 부은 저주가 회오리쳤다. 생각해보니 나는 단돈 3만원에 착한 순둥이를 악당으로 만들었다. 고작 3만원에 말이다. 나는 곱절로 고맙고, 그 곱절로 미안했다. 깊은 밤 어둠을 헤치고 항구로 오는 그 천진난만한 모습이 눈에 선했다. 생각할수록 안타까웠다.

나는 아하마드 덕에 고국의 소중한 사람들과 연락했다. 그냥 떠날 수 없었다. 어떻게든 감사를 전하고 싶었다. 짧은 편지와 수고비 10달러, 그가 주고 간 잔돈을 봉투에 담았다. 그걸 전해달라고 동료들에게 부탁할 참이었다. 순간 멈칫했다. 그에게 잔심부름을 시키는 약삭빠른 친구들이다.
-과연 이 친구들이 이걸 아하마드에게 전달할까?
다른 방법이 없다. 나는 또 의심하지만 이번에는 마냥 믿어보는 수밖에 없다. 더 큰 모험이다. 다시 아하마드가 안쓰럽다. 바보.

<항해의 시작>

아마존에 간다
믿을 수 없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원주민들이 자연을 벗 삼는 곳. 울창한 숲과 눈부신 햇살, 따스한 바람에 절로 배부를 것 같은 곳. 텔레비전에서나 본, 안드로메다처럼 멀어서 직접 가리라 상상조차 못한 곳에 내가 간다. 첫 항해가 원시의 강이라니 뜻밖이다. 이탈리아 나폴리나 호주 시드니, 브라질 리오 데 자네이로처럼 이름난 아름다운 항구를 기대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이 아니면 아마존에 갈 일은 평생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무척 설렌다. 부정기 화물선에 승선하기를 잘했다.
기대만큼 걱정도 많다. 워낙 깊숙한 곳이라 우리 배에는 현지 해도가 없다. 궁여지책으로 컴퓨터로 스캔한 것을 전자우편으로 받았다. 하지만 너무 흐려서 이것으로는 수심이 얕은 강을 항해하지 못한다. 축구장만한 배가 모래톱에 얹히기라도 하면 끝장이다. 만일 오지에서 기관이 고장이라도 나면 수리하는데 한참이 걸린다.

가만히 아마존을 떠올리니 죄스럽다. 우리 배는 그 푸른 숲길 위에 얼마나 많은 매연을 뿜을 것이며, 나는 더러운 달러와 냄새나는 쓰레기를 얼마나 뿌릴까? 신성한 곳을 침범하는 도굴꾼이나 식민지를 개척하는 침략자가 된 느낌이다. 사실이 그렇다. 우리 배는 강을 1천 킬로미터나 거슬러 올라 그 지류인 트롬베타스(Trombetas)에 닿을 예정이다. 남아메리카 지도를 놓고 가장 깊숙하리라 생각하는 지점을 찍으면 그곳이 우리 목적지일 것이다. 거리만 놓고 보면 부산에서 낙동강 뱃길로 백두산까지 가는 셈이고, 인천에서 상하이를 훨씬 지난다. 사흘을 항해한다고 하니, 우리가 얼마나 깊숙이 들어가는 건지 짐작이 간다.

그곳에서 보크사이트를 5만 톤쯤 싣고 대서양으로 나온다. 트롬베타스에서는 이런 식으로 보크사이트를 1년에 1,100만 톤씩 캐낸다. 해마다 여의도 전체를 0.5미터씩 파내는 것이다. 이 광물을 캐려면 조상 대대로 다닌 길을 허물고, 수백 년간 숲을 지켜온 나무를 물리쳐야 한다. 밀림 한가운데 들어가 자연을 훼손해 얻은 결과물을 받아 나르자니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하다. 지구의 허파가 죽어간다는 소식에 눈살을 찌푸리던 나다. 내가 그 일의 공범이 되는 셈이다.

다행히 브라질 정부는 환경규제를 엄격하게 정했다. 강을 오르내리는 열흘 동안 빨래조차 못한다. 입항 전에 갑판을 깨끗하게 해서 비가 내려도 오물이 흘러내리지 않게 해야 한다. 약품에 관한 규정도 엄하다. 소화제 하나도 마음대로 보관할 수 없다. 이래저래 힘들고 귀찮다. 그럼에도 이번 항해가 설레는 건, 내 평생 다시 못 갈 ‘아마존’이기 때문이다.

 
 
배들의 휴게소 싱가폴

수라바야의 도선사가 승선하고 배를 부축할 예인선이 붙었다. 부두에 건 줄을 모두 풀자 배는 의지할 것 없이 물 위에 둥실둥실 떴다. 이제 바람이 부는 대로 밀리고 파도가 치는 대로 흔들린다. 어찌 보면 아무것도 딛지 않고 떠있는 자체가 가혹한 형벌이다.
사실 인생이 그렇다. 강한 태풍을 만나면 아무리 프로펠러를 돌려도 소용없다. 태풍에 흔들리는 것은 배의 잘못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서민은 아이엠에프니 국제금융위기니 취업난이니 하는 거대한 위기에 무력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취업이 안 되는 것이, 직장을 잃은 것이 오직 제 못난 탓인 것처럼 기죽고 힘들어하지 않았는가. 좋은 엔진보다 태풍을 피하는 선장의 지혜가 중요하다.

우리는 일단 연료를 채우기 위해 싱가폴로 향했다. 이곳은 말레이반도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사이에 있는 말라카해협의 시작점이다. 이 해협은 모레시계의 오목한 부분처럼 태평양과 인도양을 잇는다. 좁고 얕아 위험하지만 여기가 아니면 수백, 수천 킬로미터를 돌아가야 한다. 큰 바다를 건넌 배들이 이쯤해서 허기질 법하다. 자동차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기름을 넣고 요기하듯, 배들에게 이곳은 기나긴 여정의 쉼터다. 대서양 라스팔마스, 인도양 남아프리카 공화국, 카리브해 트리니다드 토바고와 함께 세계적으로 이름난 장터다. 이 나라 정부는 선박을 상대로 장사를 할 수 있도록 바다 일부를 선용품과 기름을 거래하는 곳으로 지정했다. 일단 닻을 던지기만 해도 이용료를 내야 한다. 배 한 척이 한번 오면 기름과 부품, 부식을 수억 원어치씩 사간다.

목적지를 100킬로미터쯤 남기고부터 좌우앞뒤로 배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바다에서는 며칠 동안 안보이던 배들이 어디서 왔는지 주차장처럼 빼곡하다. 항해사들이 긴장해야 한다. 브레이크가 없는 선박이 서로 가까이 지나면 사고나기 십상이다. 그래서 바다에도 길을 만들어 놨다. 해협마다 ‘통항분리대’라는 보이지 않는 중앙선이 있다. 배들은 분리대 오른쪽을 따라 은하수처럼 어둔 바다를 밝혔다.
이튿날 바다는 배들로 혼잡해 현지 도선사를 태웠다. 보통 3항사가 도선사를 마중한다. 쉰 살 쯤 되어 보이는 필리핀 출신 도선사는 배에 오르자마자 나에게 제 가방을 던졌다. 제대로 걷기 힘들 정도로 무거웠다. 다짜고짜 “나를 브릿지까지 안내해”하고 다그쳤다. 선교에 올라서는 안하무인. 한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 아무 말 없이 선장님과 악수했다. 그것도 거의 스치듯 손을 뺐다. 매너가 없었다. 첫마디가 가관이다.
-내 지시 없이 아무것도 하지 마. 안 그러면 난 당장 내리겠어.

협박조였다. 싱가폴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설마 내리겠냐만 배가 지체되면 우리의 손해가 크다. 선원들은 숨소리도 못 냈다. 마네킹처럼 서 있어야 했다. 5분쯤 지났을까? 충분히 배를 장악했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천천히 배를 움직이게 했다. 도선사는 내 손짓 하나까지 참견했다. 한국 사람을 마음껏 조종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요즘 한류 덕에 외국에서 우리나라 사람의 대우가 좋다지만 바다에서는 다르다. 이 도선사는 우리나라 사관들과 오래 승선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우리에게 감정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서글펐다. 지금 나와 일하는 버마선원들은 어떤 심정일까? 혹시 이 도선사와 같은 마음일까? 내 마음에 덕을 키워야겠다.

긴장 속에 도착한 싱가폴 앞 바다는 온통 옥빛, 맑은 하늘에는 구름이 옹기종기 모여 다녔다. 구름은 금세 모였다 흩어졌다. 그러다 한가운데에 동그랗게 주둥이를 내밀더니 열대소나기 스콜을 시원하게 뿌렸다. 육지에서 볼 수 없는 신비한 광경이 흔하게 펼쳐졌다. 닻을 놓자마자 장사배 4척이 달라붙었다. 중환자가 온 몸에 주사바늘을 꽂은 것처럼 갖가지 줄을 엮었다. 현지 직원들은 능숙했다. 왼쪽에 붙은 배가 연료 관을 연결했다. 오른쪽에선 각종 윤활유를 넣기 시작했다. 배 뒤쪽에서는 크레인으로 물과 쌀, 과일, 음료 등 식재료를 실었다. 가만 보니 배에 있는 것은 산지가 모두 다르다. 연필은 한국산, 지우개는 중국산, 종이는 인도네시아산, 도장은 네덜란드산이다.

누구보다 긴장하는 건 기관사다. 이곳에는 양을 속이는 장사꾼들이 많다. 줄자로 기름 탱크가 잠긴 정도를 재서 넣은 양을 재는데, 계산 방식만 달리해도 수천 리터가 달라진다. 조금 넉넉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바닥에 물이 들어있다. 속이려는 자와 속지 않으려는 자가 팽팽히 대립한다. 재미있는 건, 기관사들은 육상과 달리 후진국에서 정제한 연료를 좋아한다. 배에 넣는 벙커C유는 원유에서 휘발유, 경유, 등유, 중유, 벙커A유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다. 우리나라같이 정제기술이 좋은 나라에서는 좋은 성분을 남김없이 빼간다. 반면 후진국 것에는 좋은 성분이 조금 남아있다. 그래서 벙커C유는 정제기술이 떨어질수록 폭발력이 좋다. 기관사들은 정유 업체까지 꼼꼼히 확인했다.

조리장도 바쁘다. 식재료를 확인해서 자동차가 들어갈 만큼 커다란 냉장고에 집어넣는다. 망고나 파인애플, 구아바 같은 열대과일이 올라왔다. 조리장은 그 중 두 가지를 따로 뺐다. ‘망고스틴’과 ‘두리안’이다. 전 세계의 과일을 맞본 선원들에게 망고스틴은 열대 과일 중 으뜸이다. 물컹한 것이 자두를 닮았는데 조금 크다. 검고 질긴 껍질을 벗기니 하얗고 물컹한 속살이 나온다. 나는 떨어지는 단물이 아까워 높이 들고 한입 깨물었다. 새콤달콤한 즙이 뿜어 나와 입안에 가득 퍼졌다. 무화과를 처음 먹었을 때와 비슷하다. 이 맛있는 과일은 명이 짧아 5일을 못 넘긴다. 한국에 가져갈 수 없는 것도 그렇지만, 동남아에 돌아 올 때까지 다시 맛 볼 수 없다는 게 안타깝다. 나는 조리장 몰래 몇 개를 더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두리안은 손도 안댔다. 파인애플처럼 큰 것이 냄새는 얼마나 구린지 일주일 묵힌 양말 더미 같다. 두툼한 껍질을 벗기면 이것도 새하얀 속살이 나온다. 뜻밖에 맛은 좋다. 달고 기름지다. 냄새 때문에 푸대접이다.
12시간이 넘게 싣고 또 실었다. 쌀과 반찬, 과일, 물이 끝도 없이 올라왔다. 도대체 이걸 누가 다 먹나 싶다. 이날 넣은 연료만 1천 톤(1백만 리터)이다. 경차 3만대에 기름을 가득 채울 수 있고, 돈으로 3억 원에 달한다. 이 정도면 한 달도 거뜬하다.

아마존으로
이튿날 이른 아침, 써니영은 기적을 한번 힘차게 울리고 엔진을 돌렸다. 연료를 가득 채웠으니 지구 구석구석 어디라도 못갈 곳이 없다. 커튼을 열자 푸른 바다의 아침이 나를 맞았다. 새하얀 구름 사이로 바늘처럼 날카로운 햇살이 삐죽 나왔다. 신의 광채라도 본 것처럼 눈을 감췄다. 커튼을 닫으려는 순간 그리스인 조르바의 구절이 떠올랐다.
-잠깐만 대장! 저게 무엇이오? 저기 저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파란 색깔, 저 기적이 무엇이오? 당신은 저 기적을 뭐라 부르지요? 바다?

신이 나서 배 꼭대기까지 단숨에 올랐다. 바다에 부딪힌 햇볕은 수천 개로 찬란하게 부서졌다. 바닷바람이 볼을 때렸다. 하늘은 어지럽게 넓다. 돌고 돌아도 하늘이고 바다다. 순간, 가슴이 먹먹했다. 누가 머리를 누르는 것 같았다. 멀미다. 많이 흔들리지 않지만 땅에서 발을 뗀 값은 잊지 않았다. 나는 이틀 내내 침대에 누워 규칙 바르게 호흡하는 바다의 숨소리를 들어야 했다.

항로에 오른 배는 파도를 따라 넘실댔다. 지루할 것만 같은 40일 대양 항해지만 지도에 없는 섬과 볼거리가 있다.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은 건 말라카해협. 이곳은 해적과 좌초의 바다로 악명이 높다. 해협의 폭은 18킬로미터지만 대형 선박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깊은 곳은 고작 3-4킬로미터. 항로는 좁고, 선박은 빈번히 왕래한다. 얼마 후 원 패덤 뱅크(One fathom bank)에 다다랐다. 말 그대로 수심이 한길에 불과하다. 바다 속 곳곳에는 배에게 치명적인 모래톱이 솟아있다. 수심이 얕은 곳은 선저와 해저사이가 1미터도 안 된다. 조금이라도 항로를 벗어나면 좌초한다. 긴장 속에 꼬박 하루를 달려 협수로를 빠져나왔다.

뱃길은 여럿으로 갈라졌다. 우리는 중동과 수에즈로 향하는 무리에서 떨어져 아프리카대륙 남단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마침 해협 끝에는 2005년 인도네시아 쓰나미 사고 현장 반다 아케(Banda Ache)가 보였다. 입구 양 옆에 산처럼 높은 섬이 협곡을 만들었다. 막다른 곳에 있는 해변은 난데없는 물난리를 피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망원경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해변은 죽은 듯 조용했다.

곧 적도를 지났다. 적도에서는 햇빛에 가열된 수증기가 수직으로 상승한다. 이 때문에 바람이 없고 수면은 거울처럼 잔잔하다. 적도무풍대라고 부른다. 과거 무풍대에 들어선 범선은 다시 바람이 불 때까지 넋 놓고 기다려야했다. 덥고 지루한 동안 선원들은 신의 저주로 오도 가도 못 하는 바다 감옥에 갇혔노라 개탄했을 것이다. 지구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던 시절에는 이 모든 현상이 용왕님이나 포세이돈 또는 무슨 무슨 신 때문이었을 게다. 그래서 예로부터 적도를 지나는 배들은 항해의 안전을 위해 적도제를 지냈다. 이제 뱃사람은 용왕님보다 GPS를 믿는다.
다음은 평온하고 너른 바다 인도양, 맑은 하늘과 상쾌한 바람이 우리를 반겼다. 모두 한시름 놓고 기나 긴 항해에 돌입했다. 그 사이 인도양의 첫 날이 저물었다. 대양의 노을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문명의 경계, 아마존>
검은색과 흰색 깃털이 박혀 있는 새
아마존 가는 길은 길고 길고 길다. 싱가폴을 출발한지 24일째. 배는 1만 9천 킬로미터를 달렸다. 생수와 부식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상추, 부추, 오이 같은 신선야채는 열흘을 못 넘겼다. 감자, 당근, 양배추 같이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채소들이 그나마 입맛을 돋운다. 창밖은 며칠 째 같은 바다. 해가 뜨고 지는 것 말고는 바뀌는 게 없다. 맑은 하늘에 뜨거운 햇빛, 가볍게 넘실대는 파도, 가끔 나타났다 사라지는 화물선. 반복하는 일상에 선원들은 표정을 잃었다.

 
 
이쯤 되면 인내가 바닥에 닿는다. 가끔 엉뚱한 생각이 찾아온다. 배에서 눈에 보이는 건 고작 15킬로미터. 지구본의 점도 안 되는 공간이다. 도대체 배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혹시 신의 저주에 걸려 한곳에 붙잡혀 있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그럼에도 항해자들은 열심히 해도를 넘긴다. 점을 찍고, 선을 그어 제 자리를 찾는다.

항해란 그런 것이다. 해도에 옮겨 놓은 가상의 지구와 눈앞의 실제 지구를 찾아 맞추는 일이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바다의 것은 훨씬 힘들다. 육지에서는 산과 건물을 비교해 확인할 수 있다. 바다에는 비교할 것이 없다. 그렇기에 의심하고 의심하는 가운데서도 확신하고 확신해야 한다. 기저에 믿음과 인내를 갖고서 말이다.

마침 새벽녘부터 뱃전에 갈매기가 날아들었다. 인내가 바닥에 닿을 때 찾아오는 갈매기는 절망의 구렁에 뻗는 구원의 손길이다. 먼 길 잘 찾아왔다고, 곧 육지가 있으니 힘을 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GPS가 있는 내 심정이 이런데 콜럼버스나 마젤란 같은 범선 시대의 항해자들은 갈매기를 보고 얼마나 기뻤을까? 16세기 네덜란드 한 선단의 기록을 보면, 유럽을 떠난 배는 계절풍을 타고 브라질 연안까지 내려온다. 배는 항해 87일째에 검은색과 흰색 깃털이 박혀 있는 새를 만난다. 선원들은 함성을 질렀다. 선장은 포르투갈 선박들이 하는 대로 새를 보자마자 방향을 바꿨다고 한다. 예나 지금의나 항해를 완수하는 방법은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 밖에 없다.

갈매기는 현란한 사냥 재주로 시선을 모았다. 배가 물살을 가르면 놀란 날치들이 황급히 옆으로 피하는 바람에 뱃전은 파도 반, 날치 반이다. 시력이 좋은 갈매기는 날치가 날아오른 틈을 놓치지 않고 화살처럼 바다로 몸을 던진다. 3-4미터쯤 잠수한 새는 약속한 듯 물고기를 물고 나온다. 다른 새들은 물어 온 홍합을 갑판에 떨어뜨린다. 단단한 껍질이 깨지면 안에 있는 것을 꺼내 먹는다. 좌현에서 바람이 불자 조금 왼쪽에서 던진다. 낙하지점을 예상하는 걸 보니 새에게도 충분한 지능이 있는 모양이다. 배 주변은 새들로 아수라장. 여기 먼 바다도 오늘을 살아가는 치열한 생명의 아우성으로 가득하다.

밀림의 향기

곧장 아마존에 들어섰다. 강을 150킬로미터나 거슬러 올라도 여전히 바다같이 넓다. 수평선 위로 낮은 숲이 어렴풋이 보인다. 아무리 가도 15킬로미터에 달하는 강폭이 좁아질 줄을 모른다. 이대로 아마존이라는 바다가 나오겠다. 빽빽하게 우거진 숲은 겹겹이 쌓인 구름을 이고 있다. 거대한 UFO가 떠 있는 것 같다. 신이 깜빡 실수라도 하면 와르르 쏟아져 내릴 것 같다.

우기를 맞은 아마존은 시시각각 모습을 바꾼다. 이른 아침이면 하얀 숲 안개를 내뿜는다. 떠오르는 태양빛에 투명한 이슬이 반짝인다. 새들이 지저귀며 하루를 재촉한다. 한낮 수면은 맑은 하늘을 고이 담아낸다. 거울 같은 강물 위를 새들이 날아가면 이곳은 무릉도원의 그 장면이다. 잔잔한 물위로 분홍색 민물돌고래 보토가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냈다. 선원 스물 중 이 신비한 돌고래를 보는 행운을 누린 사람은 다섯 명. 소수에게만 허락한 아마존의 선물이다.

창문을 열자 아무데서도 맡아 본적 없는 짙은 숲 향기가 들이친다. 도처에서 아우성치듯 맑은 공기를 뿜어낸다. 선원들은 '음-하- 음-하-' 숨소리를 내며 향기에 빠졌다. 흠 잡을 데 없이 청량한 공기. 갖가지 나무와 풀이 채취를 뿜어내는 이곳은 분명 지구의 허파 아마존이 틀림없다. 나는 이 신선한 공기를 아낌없이 들이마셨다. 햇살, 공기, 바람, 하늘. 소중한 건 다 공짜다.

땅거미가 깔리자 아마존은 얼굴을 바꾼다. 불을 밝힌 창문은 벌레로 빼곡하다. 나는 놈, 기는 놈, 뛰는 놈, 달라붙는 놈, 매달리는 놈, 튀어 오르는 놈에 뒹구는 놈까지. 붉은 놈 푸른 놈, 노란 놈, 하얀 놈에 검은 놈, 알록달록한 놈 등 온 세상 벌레들이 다 모였다. 바깥은 박쥐 떼로 만원. 배를 밝히는 조명에 몰려든 벌레를 잡아먹느라 정신없다. 손바닥만 한 잠자리가 내 안전모에 사뿐히 앉고, 실내는 환기구로 들어온 작은 벌레들로 엉망이다. 배를 타지 않았다면 지구 반대편에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모르고 죽었을 게 아닌가. 이제 시작이지만 내 선택은 분명 옳다.

뜨거운 노년 로드리게스
우리는 아마존 하구 도시 마카파에서 도선사 둘을 태웠다. 외국의 배는 현지사정에 어두우니 반드시 현지 사정에 밝은 도선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예순 두 살 로드리게스는 바캉스 복장이다. 훤칠한 키에 긴 파마머리, 몸에 딱 맞게 입은 새빨간 티셔츠와 하얀 면 반바지 때문에 나이를 가늠할 수 없다. 커다란 손바닥과 웃을 때 드러나는 건강한 이, 이목구비 뚜렷한 얼굴은 영국 영화배우 휴 그랜트를 꼭 닮았다. 이 날라리 도선사는 내내 전화만 붙잡고 있다. 손자, 손녀가 여럿인데도 연애에 바쁘다. 지금은 마흔다섯 살 아내 사이에 다섯 살배기 아들을 뒀단다. 순간 ‘여기는 브라질이야’하며 당황한 기색을 감추느라 혼났다. 브라질은 남성과 여성 간 비율이 매우 불균형하다. 여성 100명에 남성 95명꼴이다. 대도시 리우데자네이루는 100대 86.4다. 남성이 귀하니 나이가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다. 부럽다.

내가 나이 예순을 너무 어둡게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여느 한국인처럼 노후에 수입은 없고 몸은 아플 테니 젊을 때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쓸데없이 자격증을 따는데 욕심냈다. 이제 보니 젊음을 즐기지 않고 피곤하게 했을 뿐이다.
-나이 들어도 저렇게 젊고 멋있을 수 있구나.
문득 같은 나이에 아직도 ‘가족’이라는 짐을 놓지 못하는 아버지가 떠오른다. 아버지의 청춘은 언제였나. 내가 태어나지 전에 이미 식어버리지 않았나. 날라리 로드리게스를 보니 내 아버지가 안쓰럽다.

우리는 곧장 아마존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산란기 연어처럼 거대한 강물을 거꾸로 거슬렀다. 아마존 강물이 퍽 거세게 흘렀다. 강이 워낙 크기 때문에 빠르기를 가늠할 수 없을 뿐, 선수에 하얗게 물살이 생길 정도였다. 써니영은 보통 25킬로미터로 달리는데, 강물에 속도를 빼앗겨 17킬로미터가 고작이었다. 도선사는 배를 강가로 밀었다. 물의 저항을 덜 받기 위해서다. 강변 나무가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혹시나 배가 얕은 강바닥에 얹히는 게 아닌지 노심초사했지만, 얼마 안가서 나무사이로 보이는 밀림의 속살에 시선을 빼앗겼다.

강은 끝도 없었다. 불덩이 같은 태양이 달에게 자리를 내주고 그 달도 저물기를 반복했다. 번개가 치고, 비가 내리고, 구름이 걷히고, 태양이 불타고, 다시 먹구름이 몰려오기를 수십 번. 강이 갈라졌다 모이고, 넓어지고 다시 좁아지기를 수백 번. 빼곡한 숲이, 때론 습지가, 늪지가, 절벽이 보였다. 강물은 누랬다, 붉었다, 푸르렀다. 드문드문 작은 집들이, 환한 빛을 쏟아내는 큰 마을이 우리를 지나쳤다. 이런 곳에 사람이 사는 게 신기할 뿐이다. 고삐 매지 않은 말이 풀을 뜯고, 물소 때가 한가히 뒹군다. 목동은 한 아름 나무 그늘 아래 그물 침대를 만들었다.

가만 보니 밀림은 나무들의 다툼으로 아우성이다. 조금이라도 볕을 차지하기 위해 가지를 힘껏 뻗는다. 그건 다름 아닌 ‘생존경쟁’이다. 나무로 태어나지 않아 다행스럽다. 그러나 우리는 출근길 지하철과 번잡한 거리에서, 학교에서, 회사에서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조각만한 볕을 차지하려고 얼마나 애를 태우는가. 나는 잠시 그 경쟁에서 벗어나 있지만, 다시 차가운 밀림에 들어가 조금이라도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얼마나 버둥거릴까?
아마존 사람들과 비교하면, 버마선원들과 비교하면 엄청난 봉급을 받는 나다. 그럼에도 나는 만족할 줄을 모른다. 더 높은 곳만 보며, 오르지 못하고 갖지 못해 안달이다. 그러니 마음이 얼마나 가난하고 주머니가 인색한지 모르겠다.
그 사이 배는 깊고 깊은 밀림으로 끝도 없이 빨려들었다.

밀림 속 또 다른 세상
항해 사흘 만에 트롬베타스에 닿았다. 강인지 하늘인지, 하늘인지 강인지. 저녁 빛을 담은 수면은 그 자체로 신비롭다. 적도의 밀림은 고요하다. 두꺼운 구름이 달과 별을 가렸다. 빛도, 소리도, 바람도 숨어들었다. 나지막한 물안개가 배 주위를 덮었다. 깜깜한 지하실에 홀로 서있는 듯하다. 아! 하고 소리치면 바로 앞 벽에 부딪혀 금방 되돌아올 것 같다. 오감제로. 우주공간에 떠있는 느낌이다. 장엄한 대지의 고요를 맨 몸으로 마주하려니 숨소리조차 조심스럽다.

이곳은 아마존의 보크사이트 생산기지다. 1979년부터 반경 60킬로미터 밀림을 파헤쳤다. 여기에서 일하기 위해 노동자 1,300여명이 브라질 전역에서 이주했다. 그 가족을 포함한 4천여 명의 거주지가 생겼다. 우리나라로 치면 포항에 있는 제철소 사원단지다.

배를 붙이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밀림의 아침은 요란스런 수다로 시작했다. 바로 옆 여객선 선착장이 출근시간 신도림역 승강장처럼 북적거렸다. 정글 깊숙한 마을 주변은 온통 숲과 강, 늪지다. 공항은커녕 도로도 없다. 섬처럼 고립되었다. 외부로 나갈 방법은 이 허름한 여객선뿐이다. 내가 항해한 것처럼 이곳 사람들도 꼬박 하루를 달려야 인근 대도시 산타렘(Santarem)에 갈 수 있다.

선착장에는 배 10여척이 붙어 있다. 끈적이에 대충 붙은 파리처럼 어지럽게 섞였다. 선실이 꽤 번잡하다. 원색 천으로 요란하게 만든 그물침대가 정육점 고기처럼 다닥다닥 매달려 있다. 먼저 온 여인이 해먹에 누워 목적지에 닿기를 기다린다. 얌전히 부화를 기다리는 번데기 같다. 좁은 객실은 승객들의 수다로 시끌벅적하다. 아이들의 목소리에 힘이 넘친다. 눈빛이 반짝인다. 표정이 살아있다. 꼬박 하루를 달려 도착할 신세계를 앞둔 마음을 이 외지인은 짐작이나 할까? 소풍가는 버스처럼 설렘이 묻어있다. 배에는 상인이, 학생이, 여행 꾼이 있다. 상인의 바구니에는 내다 팔 야채와 고기가 있고 널리 전할 소식도 있다. 강원도 깊은 산골 마을에 하루에 한번 들르는 버스처럼, 배는 이 마을의 축소판이다. 아무리 찾아봐도 영어를 하는 사람이 없다. 하나같이 이 강을 벗어나 본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 얼굴들이다. 이들에게 아마존은 세상의 시작이고 끝이니까. 창문도 없는 선실에는 바람이, 빗방울이, 벌레가 날아든다. 배는 꼬박 하루를 달려 근처 도시에 간다. 밤새 어둔 강을 달릴 것을 생각하니 높은 산을 앞에 둔 산 꾼 같다.

첫날 저녁에 찾은 마을은 생각보다 아담했다. 택시를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돌자니 어린왕자의 별처럼 5분 만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밀림 한가운데 그런 곳이 있다. 마당 널찍한 집들이 옹기종이 모여 있는 곳. 곧게 뻗은 도로에 나비가 앉아 쉬고, 자물쇠 없는 자전거가 소리 없이 지나가는 초록의 휴식 공간. 저녁에 먹을 야채를 구하는 여인이 한가롭게 걸어가는, 시계가 필요 없는 그런 곳 말이다. 뉴욕이나 파리, 런던에만 사람이 사는 게 아니다. 깊은 정글에 원주민 부족 마을과 똑같이 이런 곳도 있다.

나는 그새 이 고요가 지루했다. 사람을 찾아 근처 식당에 갔다. 강변 습지 위에 나무기둥을 박고, 그 위에 다듬지 않은 나무를 이어 붙여 지은 수상가옥이다. 주위를 둘러봤다. 집에 창에 틀과 유리가 없다. 창이라기보다 벽에 난 네모 구멍이다. 사람이 살까 싶어 내부를 훔쳐보니 부부가 자고 있었다. 평화로웠다.
발을 딛을 때마다 바닥이 위태로웠다. 삐걱삐걱 소리가 커지면 나는 걸음을 망설였다. 허름한 집 몇 채를 조심스레 지나자 어둠을 밝히는 텔레비전과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났다. 작은 브라운관 앞에 아이 일곱이 모여 있었다. 2인용 비디오게임을 하기 위해 동네 아이는 다 모인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서 예전에 사라진 게임기였다. 기대에 찬 눈빛으로 제 차례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표정에 나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아이들은 처음 보는 나를 ‘1달러, 1달러’하며 쫓아왔다. 주머니에 5달러짜리 지폐가 있었지만 나는 꺼내지 않았다. 경황이 없었는지, 나의 인색한 심성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마 나는 그 아이들을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친구들이 아인슈타인이나 스티브 잡스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자연 속에 파묻힌 아이들의 삶이, 그리고 짐작할 수 있는 그들의 미래가 우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따뜻한 자본주의
수상가옥 위의 식당에 가니 이곳에도 주민이 여럿 모여 있었다. 텔레비전에 브라질과 프랑스 간 축구경기가 나왔다. 이곳은 사장이 요리사이고 지배인이고 종업원인 햄버거 가게. 나는 그에게 햄버거를 주문했다. 한 번에 여러 역을 맡는 주인은 잠깐 주방에 다녀오더니 마당을 쓸기 시작했다. 작정한 듯 빗자루를 집어 들고 널찍한 마당을 깨끗이 정리했다. 그러고는 잠시 주방에 들르더니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이미 시간이 꽤 흘렀다. 그는 손님과 함께 경기에 빠졌다. 영혼이 순식간에 바다 건너 파리 관중석까지 날아간 모양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주인을 채근하지 않았다. 나는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는 것 같지만 딱히 갈 곳도 없었다.

햄버거는 전반전이 끝날 즈음에야 나왔다. 재미있는 건, 먼저 온 순서가 아니라 아저씨가 주고 싶은 순서대로 준다는 것. 외국인이라 배려한 걸까? 나는 남보다 햄버거를 빨리 받았다. 괜히 횡재한 기분이다. 이번에도 사람들은 그를 타박하지 않았다. 여기에서는 손님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이 왕이다. 돈이 사람을 좌우하지 못한다.

나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마치고 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서울 이문동에 있는 양식당에서 일했다. 호주머니가 넉넉해 학교 구내식당을 꺼리는 대학생들이 주로 왔다. 종종 동갑내기로 보이는 학생이 수표를 끼운 계산서를 던지고 갔다. 그런 손님의 자리는 어김없이 지저분한 담배꽁초와 여기저기 던져놓은 쓰레기로 엉망이었다. 요즘 말로 ‘진상’이다. 식당 일을 마치면 새벽에 주유원을 했는데, 조금만 늦어도 경적을 울리며 난리치는 운전자가 있었다. 대게 그런 사람은 나에게 쓰레기통을 내밀며 종처럼 부렸다. 내가 주인이면 ‘너 같은 놈한테는 기름 안 팔 테니 가라’ 말하고 싶었다.

같은 돈이지만 이 사람들 것은 다르다. 여기서 돈은 상대의 수고에 대한 감사다. 돈으로 상대방의 시간과 노동을 산다는 못된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 사장은 돈을 끌어 모으려 애쓰지 않는다. 이 식당은 자동차가 기름을 넣듯 사람 위장에 음식물을 꾸역꾸역 넣는 곳이 아니다. 이 요리사처럼 살고 싶다. 돈보다 사람이 먼저인 마을에서 내 뜻대로 일하고 정당한 수고를 보상받는 삶. 그깟 돈 좀 쥐었다고 봉사 직원을 하대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기다린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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