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 항해기’내용
(1)바다로 간다 (2)승선 (3)고요속 긴장, 수라바야 (4)항해의 시작 (5)문명의 경계, 아마존 (6)고단한 선원 (7)파도마저 얼어붙은 발틱의 겨울, 라트비아 (8)대륙의 끝, 무르만스크 (9)커피공화국, 산토스 (10)해적의 바다를 가르다 (11)그들이 사는 법, 인도 (12)지도보다 빨리 성장하는 중국 (13)지금은 항해중
본호에서는 (10)(11)(12)(13) 게재.           

 
 
중동에 간다. 처음 배에 오를 때 꼭 한번 태양이 뜨거운 이곳에 가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벌크선이 가끔 시멘트나 곡물을 싣고 간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 그러나 유조선이 아니고서야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 같은 곳에 가는 건 드물다. 그럼에도 언제나 이곳을 바라왔다. 뜨거운 햇살, 40도가 넘는 더위, 물이 한결 소중해지는 곳. 사막의 나라에 가는 기대는 달에 가는 상상만큼이나 나를 설레게 했다.

목적지가 두바이다. 이곳 인공 섬은 중국 만리장성과 더불어 지구 밖에서도 볼 수 있는 인간의 창조물이다. 우리는 세 개 인공 섬 중 하나인 팜 제벨 알리Palm Jebel Ali 바로 옆 제벨 알리 항에 간다. 기대가 남다르다. 물론 텔레비전에 나오는 칠성급 호텔이나 실내 스키장을 기대하는 건 아니다. 내가 가는 곳은 항구다. 다만 나는 다들 말하는 두바이를 한번쯤 가보고 싶었다. 그 태양과 공기, 더위가 궁금했다. 언제나 말로만 들어 온 곳에 나는 또 간다.

바다에서 만난 아버지
언제나 거친 희망봉을 지나자 바다는 잔잔하고 오가는 배는 드물다. 선원들은 이 틈에 갑판을 정비한다. 일명 깡깡이. 선체의 녹을 벗기고 페인트를 칠한다. 전동망치로 묵은 페인트와 녹을 벗긴다. 기계의 힘을 빌린다지만 뜨거운 햇살과 사방으로 튀는 잔해 때문에 고되다.
나는 꼬산과 짝을 지었다. 버마에서는 존대하는 의미로 이름 앞에 ‘꼬’를 붙인다. 올해 나이 마흔. 버마 친구들 사이에서 그는 맡 형이다. 실제 그는 역할을 다 했다. 성실하고 다른 선원을 대변했다. 사관들도 이 친구에게는 믿고 일을 맡겼다. 오늘은 나와 손발을 맞췄다. 꼬산이 사다리를 타면, 나는 아래서 흔들리지 않게 붙잡고 공구를 올려 주었다.

내 눈앞에 그의 신발이 멈췄다. 낡은 안전화는 피곤에 지친 듯 혓바닥을 날름 내밀었다. 찢어진 겉감 사이로 안감이 삐져나왔다. 반대편 양말은 돌처럼 딱딱한 안전화에 닳고 닳아 큼지막한 구멍이 났다. 허연 뒤꿈치가 수줍게 드러났다. 안쓰러웠다.

 
 
그날 저녁, 한국에서 챙겨간 두툼한 등산 양말을 조용히 건넸다. 안전화 지급대장을 보니 얼마 전에 새 신발을 받아갔다. 나는 안전을 위해 새 신발을 신으라고 권했다. 그러나 꼬산은 이튿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낡은 것만 신었다. 두꺼운 양말과 안전화가 흔치 않은 고국에 가져가려고 가방에 넣어 뒀단다. 산에서 일하는 동생을 위해, 한참 사춘기인 아들을 위해서 말이다. 꼬산은 능청스레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우리나라에서 몇 푼 안하는 물자를 귀히 담아두는 게 안쓰러웠다. 저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이다. 버마선원들은 파스와 두통약, 작은 손전등처럼 제 나라에서 귀한 물건들을 몰래 챙긴다. 꾀병으로 약을 타가는 걸 알면서도 박대하지 못한다. 가족을 생각하는 속내를 알기 때문이다.

하루를 마치며 일기에 이 이야기를 쓰는데, 기억 저편 아버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어렸을 적 부친은 종종 공사장에서 새참으로 받은 단팥빵을 먹지 않고 주머니에 뒀다가 집에 와서 내게 주셨다. 꼬깃꼬깃해진 겉 봉지를 두어 번 매만져 펴고 조용히 내 이름을 부르셨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가 무심코 빵만 받아 왔다. 그 빵을 쏜살같이 먹어 치웠다. 생각해보니 아버지도 이런 신발을 신고 계셨다.

나는 여태껏 아버지의 고마움을 모르고 살아왔다. 나는 내가 잘나서 스스로 컸다고 생각했다. 등록금 부담을 덜기 위해 지방 국립대에 다녔다. 공사장 잡부, 행사안내원, 배달원 같은 아르바이트는 물론, 대학방송국에서 일하면서 받은 봉사 장학금까지 용돈에 보탰다. 대학교 영어대회에서 수석을 해 해외어학연수 장학생이 되었고, 배낭여행도 제출한 계획서가 공모전에 당선 된 덕분에 지원금을 받아 다녀왔다. 심지어 첫 직장을 구할 때도 어떤 직장에 지원할지 아버지의 의견을 묻기는커녕 짧은 합격소식만 전해드렸다. 집에 손 한번 안 벌리고 살았다 믿었으니 부모님의 고마움은 생각도 안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게 전부인 아버지는 조세희의 소설 속 난장이처럼 온갖 고생을 마다않으며 가정을 꾸려오셨다. 나는 그런 부친께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알아서 길을 찾아야 했다. 그러니 내가 잘난 줄만 알았다. 그런데 이제 보니 나는 아버지의 꼬깃꼬깃한 단팥빵을 먹으며 자랐다. 이렇게 속 안 썩이고 커나가는 게 효도인 줄 알았는데, 다른 게 아니라 이게 불효다. 지금도 단팥빵을 볼 때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떠오르는데, 왜 여태껏 그 따뜻한 부정은 몰랐을까…. 오늘 꼬산을 보고 알게 된, 이제껏 내가 모르던 따뜻한 아버지의 사랑에 눈물이 멈출 줄 모르고 터져 나왔다. 맛있게 먹은 것은 빵인데, 그리운 건 아버지 목소리다.

해적의 바다
적도를 지나자 걱정이 몰려왔다. 요 몇 년 사이 인도양은 온통 해적이다. 소말리아 연안은 물론 아덴만과 홍해, 멀리 아라비아해 일대에서도 판친다. 남아프리카에서 곧장 중동으로 가는 바닷길은 모두 막혔다. 우리는 7일을 더 항해해서 인도 남부, 몰디브제도 동쪽 해안까지 돌아가기로 했다.
요즈막에는 여러 가지 해적 대응책이 나왔다. 우리 정부는 배의 비밀스러운 곳에 선원 피난처를 만들도록 강제한다. 해적이 나타나면 조난신호를 보내고 숨으면 된다. 그러면 곧 구조대가 도착한다. 인질이 없는 해적은 도망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여기에 더해 무장 안전요원을 태우기로 했다.

28일을 항해한 끝에 스리랑카 서남단 갈레Galle항에 닿았다. 이곳은 인도양 해적위험지역의 입구, 보안요원이 승선하는 정류장이다. 싱가폴만큼 배가 많았다. 갈 길이 바쁜 배들은 앵커도 놓지 않고 표류했다. 새벽녘 택시가 손님을 낚아 쏜살같이 출발하듯, 요원을 태우자마자 항해를 재촉했다. 우리도 요원 셋을 태우고 엔진을 전속력으로 돌렸다. 곧장 갑판을 철조망으로 둘렀다. 경험 많은 요원들은 철조망을 더 촘촘히 치라고 닦달했다.

요원들은 진지했다. 선원들을 교육하고 배의 모든 것을 통제했다. 갑판으로 나가려면 허락을 받아야 했다. 보안요원이 요구하는 대로 항로를 바꿨으며, 밤에 창으로 새는 빛을 가렸다. 반면 무기는 실망스러웠다. 요원이 내리는 오만에서는 자동소총을 소지할 수 없다. 그래서 한국 전쟁 때나 썼을 법한 반자동 단발 소총 4정을 갖고 왔다. 뜻밖에 왜소하기까지 했다. 내 상상 속 요원들은 키가 크고 덩치가 우람한 ‘람보’다. 영국인 1명은 기대한 것과 같았지만, 스리랑카인 2명은 작고 깡말라 중학생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예비역 병장인 내가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원과 요원을 섞어 세 모둠을 만들었다. 하루 8시간씩 교대로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항해했다.

긴장 속에 7일을 항해한 끝에 페르시아만 입구에 다다랐다. 그 전에 오만 무스카트에 들러 보안요원을 떠나보냈다. 장화 같은 아라비아반도의 엄지부분이다. 해적의 바다를 무사히 건넜다는 안도감 사이로 같이 밤을 새운 요원과 헤어지는 아쉬움이 덮쳤다. 사람을 만나고 떠나보내는데 이골이 났고, 지난 1주일은 스쳐 지난다 할 만큼 짧은 시간이다. 그러나 해적이라는 공동의 적을 막아야 한다는 동질감 때문에 쉽게 마음을 열었다. 사람은 오래 지내는 것보다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구의 신도시, 두바이
제벨 알리 항은 어마어마하다. 외항에 컨테이너가 목동 아파트단지처럼 높고 빼곡하게 쌓여있다. 안벽에는 크레인과 배들이 줄줄이 붙어 있다. 배들의 행렬은 안개 너머까지 이어졌다. 조금 들어가자 석유저장고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거대한 기름배들이 드나든다. 온갖 부두가 다 있다. 우리가 가져간 설탕은 물론 알루미늄, 곡물부두도 있다. 사막 위 부두는 세상의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부두에 닿자 알싸한 매연과 낯선 이국의 향기가 덮쳤다. 여기는 지구의 신도시. 맨땅에 도시를 만들고 항구를 지어 사람을 모았다. 벽돌 한 장, 대비 한 자루까지 밖에서 들여왔다. 일하는 사람도 외국에서 왔다. 갑판에서 몸으로 일하는 사람은 대부분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출신이다. 하역은 선장 출신 프랑스인이 총괄한다. 크레인 담당은 영국인. 멀리 인공 섬 위 다리는 우리나라 삼성물산이 짓는다. 일자리를 찾아 시골에서 서울로 사람이 몰리듯, 이곳은 돈과 사람으로 엉켜있다.

나는 그동안 거대한 땅덩이에 맹장같이 붙어있는 좁은 나라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힘들어했다. 시야를 지구 전체로 넓히면 여기는 일자리가 넘치는 대도시다. 나중에라도 경력을 쌓고 기회가 생기면 이런 곳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사는 법, 인도
부정기선의 항해는 언제나 예측불허다. 다음에 어느 항구에 갈지 마지막까지 모른다. 복권 당첨번호만큼 선원들의 기대를 모은다. 이번에도 소식은 그렇게 왔다. 인도다. 서쪽 중남부 해안 고아Goa에 간다. 정식 명칭은 몰무가오Mulmogao. 우리는 여기서 철광석을 실어 중국 산둥반도 롱코우Longkou에 내려준다.
인도. 이곳을 다녀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뜬구름 같은 이야기를 풀었다. 정신의 고향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 질서와 무질서가 평행선을 그린다. 온통 신비로운 말 뿐이다. 글자와 단어는 알겠는데 그네들이 말하는 게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이렇게 어려운 설명이 붙는 것일까? 호기심과 기대가 가만히 차올랐다. 그런 초록빛 기대에 찬물을 끼얹은 건 우리 배 막말꾼 조리장이다.

-고대 문명? 신비한 정신세계? 꿈도 꾸지 마. 우리가 가는 곳은 항구야. 도시 최하층 민들이 사는 곳이야. 더구나 인도는 빈부격차가 심해서 항구는 뭘 생각하든 그 이하야.
그가 말하는 인도는 구질구질했다. 본인이 인도에 수십 번을 갔지만 기행문에서 본 장면은 눈을 씻어도 없더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마을이 기다리는 것만 같다. 여행가들과 조리장이 말하는 인도는 북극과 사막만큼 달랐다.

두바이에서 고아까지는 고작 5일. 짧은 항해는 언제나 고되다.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자 해적 경계당직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무장요원을 태우지 않는다. 불안하다. 엎친 데 덮쳐서 화물창을 청소할 시간마저 넉넉지 않다. 5일 안에 벽과 바닥에 붙은 설탕 찌꺼기를 치워야한다. 뜨거운 날씨와 해적, 짧은 항해가 우리를 압박했다. 신비의 나라 인도는 그렇게 멀었다.

10월 아라비아 해는 고요했다. 지난 여름 계절풍이 불 때는 한겨울 태평양과 대서양 못지않게 사나웠다고 한다. 그러다 바람이 멎어 한순간에 무풍대처럼 잔잔해졌다. 바다가 이렇게 온순하면 해적들이 배에 오르기 수월하다. 날이 맑을수록 불안감은 커졌다. 오가는 어선들도 많아졌다. 배들은 유유히 우리를 스쳐 지났다. 그 때마다 경계하는 눈초리를 켰다. 차라리 폭풍 속을 항해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인도와 영국해군이 연안에서 사격 훈련하는 덕분에 걱정을 덜었다. 멀리 고아 등대가 보이자 선장님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인도 앞 바다는 해상에서 철광석을 싣는 배들로 소란스러웠다. 항만 시설이 부족하기 때문에 작은 바지에 짐을 실어와 바다 위에서 옮겨 싣는다.

항구는 아주 느리게 모습을 드러냈다. 죽은 듯 잠잠했다. 바람 없는 나무는 꼼짝도 안했다. 자동차며 크레인도 멈췄다. 정지한 사진처럼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위로 까마귀 한마리가 주책없게 날아갔다. 정전이다. 이곳은 전기가 자주 끊긴다. 그럴 때마다 도시는 가만히 멈춘다. 배를 붙이는 건 이런 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우리는 모두 잠든 밤에 아무도 몰래 집에 들어가듯 살금살금 배를 댔다. 곧 전기가 들어오면 잠에서 깬 사람들이 언제 왔느냐고 말할 것 같았다.

그런 내 생각과 달리 부두 위에는 현지인 50여명이 바글거리며 우리를 기다렸다. 현문사다리를 내리기 무섭게 배에 올라왔다. 태반이 장사꾼. 파는 것도 많고 가격도 제멋대로다. 크게 보면 보석, 기념품, 해산물 그리고 전화카드 장수다. 배는 순식간에 북새통을 이뤘다. 우리 돈 1만원으로 한국에 있는 휴대전화에 한 시간 가량 연결할 수 있다. 구석진 항구에서도 무선 인터넷이 제법 빨랐다. 최신 유행곡을 내려 받았다. 인도가 정보통신강국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줄을 서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채에서 걸러낸 밀가루처럼 출입절차를 기다리는 무리에서 열댓 명이 떨어져 나왔다. 선박 업무를 돕는 대리점 직원과 세관, 검역, 출입국관리소, 항구 직원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혼자 하는 일인데 각 관청에서 둘, 셋씩 왔다. 배에서 챙겨 갈 것이 많기 때문이다. 관리들이 부패했다. 대리점 직원이 중재해 담배 30뭉치를 풀자 모든 게 일사천리다. 이내 전기가 들어오고 항구는 다시 숨을 쉬었다. 선적기가 요란한 기계음을 내며 황토 같은 철광석을 쏟았다. 경건하게 기도하는 것 같던 이곳은 순식간에 여느 항구 못지않게 분주해졌다.

못된 세관원
날이 어두워지자 낮에 온 세관원이 다시 찾아왔다. 처음 보는 추레한 사내 셋과 함께였다. 능글맞은 얼굴로 낮에 못한 검사를 마저 하자했다. 먼저 공구창고와 페인트창고를 열었다. 공구창고는 들어가지도 않고 밖에서 흘끗 둘러보고 말았다. 페인트창고에서는 검정색 페인트가 있느냐고 물었다. 없다고 하니 작정한 듯 여기저기를 뒤졌다. 집에 검정색이 필요한 모양이다. 그러다 단념한 듯 부식창고로 향했다. 언제나 마지막은 이곳이다. 사실, 앞 두 곳은 모양새 갖추기다.

인도에 가면 공무원들이 여행 가방을 갖고 온다고 했다. 소문은 사실이다. 사내들은 문밖에 둔 가방을 들고 왔다. 셋의 가방을 합치면 공항에서 볼 수 있는 이민 가는 사람의 짐 정도다. 남자는 부식창고에 들어서자마자 주인 없는 가게를 터는 것처럼 무섭게 담았다. 닥치는 대로 넣었다. 잼과 통조림, 케첩은 물론이고 부피가 큰 라면에도 손을 뻗었다. 큼지막한 손으로 한 번에 대여섯 개를 집었다. 몇 번 손길에 빈상자만 남았다. 남자는 계속 커피를 요구했다. 커피가 귀한 모양이다. 두어 개 쥐어주자 엄지손가락을 폈다.

그들은 요란한 세관 검사 끝에 선장님께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선장님은 태연하게 응대했지만 속은 까맣게 타는 모양이다. 얄밉지만 어쩔 수 없다. 수백 가지 규정을 들이대고 트집을 잡자면 얼마든 만들어 낼 수 있다. 규정을 하나하나 따지고 늘어지면 하역작업이 지체된다. 이 배 하루 용선료가 수천만 원이다. 불합리하지만 그냥 쥐어 보내는 게 상책이다. 후진국 공무원들은 배의 이런 약점을 고약하게 이용했다.
나는 네 사내가 못마땅했다. 배웅하는 길에 웃으며 한국말로 쓴 소리를 뱉었다.
-빨리 가고 다시는 오지 마라. 이 추접스러운 것들아.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속이 좀 나아졌다. 인도의 첫날은 그렇게 저물었다.

이튿날 아침 식사 시간에 선장님이 꾸지람했다.
-이 사람들도 눈치가 있다. 우리말이지만 네가 추접하다고 말하면 다 짐작한다. 이 사람들이 이러는 건 못사는 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대단히 나빠서가 아니라 상황이 그런 것이다. 우리 어른들도 전에는 다 그랬다. 그런 시기를 거쳐 지금 이렇게 발전했다. 네가 지금 사관을 하는 건 잘 사는 나라에 태어났다는 아주 사소한 이유 때문이다. 네가 아무리 잘나고 성실해도 이곳에서 태어났으면 그들과 같았을 것이다. 다시는 그런 말 말아라.

짧은 꾸중이지만 깊은 여운을 남겼다. 공권력을 남용한 점, 그것으로 자기 주머니를 채운 점, 상대의 약점을 이용한 점은 옳지 않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격을 논할 수 없다. 생계의 벼랑 앞에선 사람을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장발장’을 옹호하던 내가 아니던가. 처지가 같다면 나는 더 심할 수도 있다.
부모 잘 만나 세상모르고 사는 친구를 손가락질하던 나다. 네가 무슨 고생을 알고 고민이 있겠냐며 무시했다. 어쩌면 그건 질투고 자기 안위다. 그런 내가 사내들을 보고 추접하다고 했다. 생계의 벼랑에 서보지 않은 내가 말이다. 나야말로 무슨 고생을 알며 고민이 있겠는가. 대학시절 해외 오지 봉사활동과 여럿이 모여 하던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고민은 고작 이력서 한 줄 채우기였고 거울 앞에 폼 내기였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 잘 사는 나라와 못 사는 나라 중간에 선 나는 이토록 이중적이다. 진지하게 시선을 추슬렀다.

 
 
버마인 뾰 웨이

인도에서 괴짜 녀석 하나가 승선했다. 버마출신 2등 타수 뾰 웨이다. 첫 인상부터 보통이 아니다. 그를 보면 동물원 우리 꼭대기에 앉아있는 두목원숭이가 생각난다. 웃을 때마다 마른 얼굴 전체에 주름이 간다. 검은 콧수염도 웃는다. 이 친구가 뾰족 구두를 신고 승선한 날, 다들 수군댔다. 날라리다, 건들댄다, 또는 건방지다. 좋지 않은 방향으로 의견이 모였다. 사람 보는 눈은 다들 비슷한 모양이다.

이마에 주름이 많은 선원들이기에 틀리지 않았다. 이 친구, 꽤나 뺀질댔다. 그동안 사람들이 나를 보고 뺀질댄다고 할 때는 도통 그 뜻을 몰랐다. 이 친구를 보니 알겠다. 아마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규칙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삐딱한 것. 해야 하는 일은 최소한만 하고 자기 시간을 보내는 걸 말하나 보다. 좌우를 넘나드는 건 영민하지 않고서는 못하는 행동이다.

나는 조금씩 편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이 날라리가 근무복이 아닌 청바지를 입고 첫 당직 근무를 왔다. 내 얼굴은 바로 구겨졌다. 복장을 지적하자 온 몸으로 건들대며 근무복이 없다는 한마디만 던졌다. 태도가 꽤나 도전적이었다. 나는 처음이니만큼 쉽게 보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눈을 똑바로 뜨고 다음에는 차라리 작업복을 입고 오라고 했다. 그는 툴툴거리며 ‘Yes, sir’하고 답했다. 좋지 않은 인상에 엇나간 첫 대면. 나는 마음속으로 그를 단단히 별렀다.

당직을 마치고 씻는데 문득 내가 잘못 생각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이 친구가 청바지를 입고 온 것은 나름 양식을 지키려고 한 것일 수 있다. 작업복은 더러우니 깔끔한 옷을 입어야 하는데 근무복이 없다. 그러니 아끼는 사복이라도 입자는 게 그의 판단일 것이다. 편견을 갖는 바람에 뭐든 삐뚤게 본 게 아닌 가 생각했다. 그날 저녁,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려고 애 썼다. 쉽지 않았지만.

출항 다음 날 소방훈련을 했다. 선원들 사이에서 깔깔대는 녀석이 눈에 거슬렸다. 어디보자는 식으로 소화복을 입어보라고 시켰다. 뾰 웨이는 자신감 있게 기지개를 한편 쭉 켜더니 혼자서 차례차례 입어나갔다. 중요한 것들은 재차 보여주면서 말이다. 어쩌면 내 머리 꼭대기에서 내 심중을 훤히 내려 보는 것 같았다. 두목 원숭이 같은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내 의도를 들킨 것 같아 뜨끔했다. 어찌됐건 그는 다른 일에도 꽤나 적극적이고, 마음에 들게 해결했다. 건들거리는 것만은 여전하지만.

어쩌면 그는 내가 동경하던 그리스인 조르바를 닮은 것 같다. 호탕하고, 자유분방하며, 유쾌하고, 자신감 있고, 때론 진지하고, 할 것은 똑 부러지게 하는 모습. 담배는 얼마나 맛있게 피우는지, 그걸 보면 담배를 모르는 나도 같이 피고 싶어진다. 그는 남이 뭐라 하면 받아들이면서도 주눅 들지 않는다. 묘하게 사람 마음을 잡아끈다. 그를 보면서 나는 왜 그동안 상관에게 꾸중 들을 때마다 죽는 시늉을 했을까 억울하기까지 했다. 딱 뾰웨이 만큼만 할 것을…. 아무도 모르게 질투하는 나를 발견했다.

이 녀석이 오늘 사고를 쳤다. 입항 전날 술을 마시고 선교 당직을 안 왔다. 시간에 칼 같은 배에서 근무를 늦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더 큰 문제는 협수로를 도선사가 조선할 정도로 위험한 항해를 하는데, 운전대를 잡는 타수가 술을 마신 것이다. 명령을 잘못 이해하면 배가 좌초할 수도 있다. 게다가 입항 할 때 장력이 강한 로프를 설치한다. 줄을 잘못 다루면 대형 사고가 일어난다. 자기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다칠 수 있다. 타수가 입항 중에 갑판에 구토를 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종일 배의 이야깃거리는 뾰 웨이였다. 승선한지 일주일 만에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그냥 넘길 수 없다. 이런 저런 사정 때문에 그를 나무랄 사람은 나 밖에 없어 보인다. 녀석을 사무실로 불렀다. 속을 또 게워 냈는지 얼굴이 퉁퉁 부었다. 본인도 제 잘못을 아는지 멋쩍게 들어왔다.
진지하고 강력한 경고, 낱낱이 말하기보다 엄중한 눈빛과 말투가 중요하다. 간단하다.
-오늘 네가 우리의 안전을 위협했어. 너는 오늘 옐로우 카드야. 난 옐로우 카드가 더 없어. 무슨 말인지 알지?

그는 ‘나름 반성하고 있어요’하는 표정으로 섰다. 무거움을 털기 위해 옆구리를 쿡 찌르자 스위치를 누른 것처럼 씩 웃는다. 나는 왜 이 날라리가 밉지 않은 걸까. 오히려 그렇게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그가 부럽다. 얽매여있지 않은 자유로운 망아지가 떠오른다.(사실 좋은 의미로 ‘개’라는 표현을 쓰고 싶다) 그는 정말 자유로운 영혼, 조르바다.

배를 타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 가까이 지낸다. 호탕한 사람, 소심한 사람, 거친 사람, 부드러운 사람 등 배를 타지 않았으면 못 만났을 세상 온갖 부류를 접한다. 자연스레 사람을 보는 눈도 넓어진다. 상대를 내 멋대로, 단순한 잣대로 가르면 안 된다는 것과 첫 인상의 편견이 얼마나 나쁜지를 배운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똑똑이와 바보를 무처럼 썰 수 없다. 우리 뾰 웨이처럼 지저분한 인상에 건들대는 날라리가 일은 잘하고, 술은 잘 먹고, 사고를 치는데도 밉지 않을 수 있다. 그건 사람이 마음먹고 따라할 수 없는, 신이 내린 묘한 재능이다. 오늘도 뾰 웨이는 갑판을 휘젓는다.

 
 
지도보다 빨리 성장하는 중국
-3항사, 지금 배가 어디 있는 거야? 부두에 접안했는데 아직 바다 위라니 무슨 말이야?
-그게…. 자이로컴퍼스와 GPS는 이상 없습니다. 그런데 해도상 육지에서 1킬로미터 떨어진 바다입니다.
2011년 6월 15일 중국 롱코우항에 접안한 우리는 혼란에 빠졌다. 해도를 보면 부두가 6개인데, 실제로는 26곳이나 된다. 심지어 수심이 깊어야 들어올 수 있는 초대형 선박까지 접안했다. 현재 위치는 북위 37도18분, 동경 120도39분. 분명히 바다 한가운데서 항구를 바라보는 곳인데 배는 이미 접안했다. 해도로는 우리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도선사에게 물은 뒤에야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어느새 부두를 새로 지었다. 이 항구는 지난 2008년에 길이가 2.2킬로미터인 초대형 부두를 완공했다. 지금도 새 부두를 짓는다.

우리는 2006년에 구입한 지도를 사용했다. 항구가 변하는 소식을 매주 받지만, 수백 개 나라의 수천 개 부두가 변하는 사정을 일일이 수정할 수 없다. 보통 항만시설을 갖춘 선진국은 해도가 변하지 않는다. 반면 개발도상국은 해마다 모습이 바뀐다. 중국 해도를 사는 건 낭비다. 얼마 후면 전혀 다른 모습이 된다.
새 부두는 숨 가쁘게 돌아갔다. 현문 사다리를 내리자마자 출근길 전철 출입문이 열린 것처럼 하역인부들이 우르르 배에 올랐다. 곧장 크레인이 붙고 그 아래 굴삭기와 덤프트럭이 시동을 켠 채 출발신호를 기다렸다. 숙련된 요리사들이 나란히 서서 각자 재료를 다듬는 것 같았다.

롱코우는 무서운 기세로 외국 원자재를 빨아들였다. 26개 부두는 밤낮을 쉬지 않고 움직였다. 배와 예인선, 크레인과 불도저, 덤프트럭 중 누구 하나라도 박자를 놓치면 부두 전체가 멈춰버릴 것만 같다. 이곳에는 밤이 없다. 오전, 오후, 저녁, 새벽마다 인부들 얼굴이 바뀐다. 자고 나면 어제와 다른 배가 짐을 내린다. 우리도 인도에서 나흘간 실은 화물을 크레인 7대로 이틀 만에 내렸다. 항구 밖에는 배 수십 척이 닻을 놓고 제 차례를 기다렸다. 부두 뒤편에는 철광석과 석탄, 보크사이트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이 뿐 아니다. 반대편 부두에서는 대형 컨테이너선이 짐을 내렸다. 그 옆으로 원유저장시설도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봤다. ‘상전벽해.’ 나는 산둥반도 이름 모를 항구에서 중국의 성장을 목격했다. 상하이 고층 빌딩에서 볼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뉴스에서만 보고 듣던 이야기, 중국이 원유와 원자재를 마구 들이는 바람에 국제시장 가격이 출렁인다는 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남산대불의 따뜻한 위로
아침에 접안하고 점심에 동료 기관사와 시내로 나갔다. 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외지사람이 자주 드나드는 특유의 분위기가 없다. 선원을 꾀는 운전사가 없고, 외국인을 위한 음식점도 없다. 중국대륙 깊숙한 소도시에 온 느낌이다. 별 일 없는 우리는 이곳의 유일한 관광지 ‘남산대불’로 향했다. 택시를 타고 왕복 10차선 도로에 올랐다. 길은 곧게 뻗어 지평선에 닿았다.

광활한 중국대륙을 1시간 동안 가른 끝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곳은 일주문을 지나면 법당이 나오는 우리나라 산사가 아니다. 정문을 들어서자 서울대공원처럼 관광열차가 기다렸다. 산꼭대기 대불 좌상은 멀리 주변 산과 섞여 희미하게 보였다. 우리는 기차로 가는 길을 한 시간 동안 걸었다.
아무 소리도 없다. 간간히 나뭇잎 떨리는 소리가 요란스럽다. 왠지 기분이 좋다. 파도와 엔진 소리에 시달려 온 내게 이곳은 무릉도원. 우리는 침묵에 젖어 걷고 또 걸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기나긴 항해에 지쳤다. 흔들리는 배, 밤새 달달거리는 기계들, 쉬지 않고 돌아가는 환풍기, 무엇보다 나를 괴롭히는 긴장감. 넓은 바다를 항해한다지만 내 시선은 좁은 침실에 갇혔다.

바람마저 숨죽이는 호젓한 호숫가. 새들도 침묵하는 경내 앞마당. 발소리, 숨소리도 조심스러운 산사. 이곳에 내리는 햇살은 어느 때보다 온화하다. 드넓은 경내는 나를 한 팔에 품는 것 같다. 남산대불은 360개 계단 위에서 나를 지그시 내려다 봤다. 좌상 높이만 38.66미터, 무게는 380톤에 달한다. 점보다 작은 나는 너무나 낮은 곳에 서있다. 깊은 평화에 갇힌 듯, 부처의 넓은 가슴에 푹 묻혔다. 그 날 나는 남산대불의 고요한 속삭임에 항해를 잠시 쉬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은 항해 중
그 길로 귀국해 오랜만에 휴가를 보냈다. 그건 아주 짧은 낮잠. 나는 다시 일어나 이름 모를 바다를 가르고 있다.
바다는 놀라운 풍경으로 넘친다. 항구는 재미난 이야기로 북적인다. 선원들은 바다에서 놀라운 자연을 만난다. 파도를 넘나드는 돌고래 무리의 재롱, 베토벤도 못 본 환한 월광, 발틱의 신기루, 거울처럼 잔잔한 적도 무풍대, 무섭게 쏟아지는 스콜 앞에 정신을 빼앗긴다. 항구에서는 재미난 세상을 만난다. 무겁지 않은 마음으로 근처 시내를 둘러본다. 손에 든 건 초라하지만 저마다 제법 푸짐한 견문을 담아온다.

 
 

멋모르고 꿈만 찾아 떠나는 나를 주변에서 많이 걱정했다. 좋은 회사에서 좋은 사람을 만난 덕분에 꿈은 현실이 되었다. 지구본을 보면 점점이 흩어진 추억이 살아난다. 지난 22개월 사이 24개국 36개 항구에 기항했다. 이 중 24곳을 여행(상륙)했다. 여행하면 남는 건 사진뿐이란다. 하루짜리 짧은 여행이 쌓이고 쌓여 사진을 1만장이나 남겼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남은 건 하루 하루, 장면 장면보다 가볍게, 때로는 깊게 스친 이름 모를 인연들이다. 암스테르담 반 고흐 박물관이나 안네 프랑크의 집보다 브라질 해변에서 같이 공을 찬 부루노와 순둥이 아하마드가 그립다.

항해는 만만치 않다. 어느덧 내 얼굴은 태양에 그을리고 해풍에 갈라졌다. 어찌 보면 바다에 떠 있는 자체가 고역이다. 그러나 바다는 나를 더 크게 만들고, 파도는 나를 강하게 했다. 복잡하게 꼬인 세상에서 정신없이 살면서 놓친 것들을 다시 찾았다. 한동안 놓은 트럼펫을 다시 잡는다. 매일 육체의 탄력을 유지할 만큼 운동한다. 돈과 시간에 초연해진다. 저녁에 손 편지를 쓴다.

기억을 더듬는다. 겁 많고 콧대만 높은 대학졸업생, 또는 청년백수. 그 때는 모든 게 깜깜했다. 세상에서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아직도 선원이라면 무시하는 사람을 종종만나지만, 나는 바라던 대로 이 지구를 신나게 돌아다니는 지금의 내가 좋다. 그 사이 내 통장에 적지 않은 봉급이 쌓였다. 갓 승선한 3항사는 1년에 5천여만 원을 받는다. 은행에 가니 직원이 무척 반긴다. 등밖에 보이지 않던 세상이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린다. 이 모든 건 허영심에 가득 찬 손길로 인터넷만 뒤지는 버릇을 끊고, 남들의 편견에 상관없이 오직 내 꿈을 향해 용기 있게 나선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제 시작이다. 앞으로도 나는 신이 허락한 이 지구별을 더 세밀하게 더듬을 테다. 내게 세상은 끝없는 보물 상자다. 못난 젊음이 어디까지 가는지 두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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