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고동이 울어대는 이별의 인천항구??.”

1954년 인천출신 가수 박경원이 취입, 빅히트
서민들 삶, 사랑, 이별과 바다, 항구, 섬 담아


쌍고동이 울어 대는 이별의 인천 항구
갈매기도 슬피 우는 이별의 인천 항구
항구마다 울고 가는 하루살이 사랑인가
정들자 이별의 고동소리 목메어 운다.

등대마다 임을 두고 내일은 어느 항구
쓴웃음 친 남아에도 순정은 있다.
항구마다 웃고 가는 하루살이 사랑인가
작약도에 등대불만 가물거린다.

외항선원 수첩에는 이별도 많은데
오늘밤도 그라스에 맺은 인연을
항구마다 끊고 가는 하루살이 사랑인가
물새들도 눈물 짖는 이별의 인천항구

 
 
‘인천’, ‘인천사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바다, 항구, 섬이다. 인천국제공항, 경제자유구역, 동북아물류비즈니스도시 등이 들어선 건 몇 십 년 되지 않는다.
1954년 발표된 ‘이별의 인천항’엔 서민들의 진솔한 삶, 사랑, 이별이 스며 있다. 거기엔 바다, 항구, 섬에 얽힌 인천사람들의 애환이 녹아 있다.

세고천 작사, 전오승 작곡, 박경원 노래의 이 곡은 인천 월미도에 노래비가 서있을 만큼 인천을 대표하는 대중가요다. 인천항은 물론 인천사람들의 삶을 소리로 잘 그려냈다. 더욱이 아름다운 사랑의 로맨스가 담긴 추억의 노래로 마도로스의 사랑을 서정적이고 낭만적으로 나타내 맛깔스럽다. 4분의 2박자 폴카Polka리듬으로 템포가 비교적 빨라 애상적인 노랫말 내용과 달리 경쾌한 느낌을 준다.

 
 
인천사람들의 대표 애창곡

이 노래는 6·25전쟁 후 치열한 삶속에서 좌절의 쓴잔을 맞본 민초들에 의해 인내의 고통을 삭일 때 많이 불려졌다. 분한 맘을 달래거나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때도 자주 등장했다. 노래가 만병통치약 구실을 하며 대중의 심금을 울린 것도 그 때문이다. 가사 곳곳에 진한 애향의 마음과 뿌리 깊은 지역의 흔적들도 묻어난다. 2절 끄트머리대목에 나오는 ‘작약도 등대’는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우리나라가 세운 최초의 등대다. 인천엔 ‘국내 최초’란 수식어가 붙여진 곳들이 많다. 자유공원은 국내 처음 만든 서구식 공원이다. 조선말 격동기 때 외세에 밀린 아픈 역사를 증언하는 곳이기도 하다.

인천항에서 좀 나가면 팔미도八尾島가 나온다. 그 섬은 인천항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자리 잡은 지정학 상 아주 중요한 곳이다. 인천시 중구 무의동에 있는 무인도로 인천항에서 남쪽으로 15.7㎞ 떨어져 있다. 그곳에 일제의 압력으로 우리나라 최초 등대인 팔미도등대가 세워졌다. 등대는 광복 뒤 어려운 나라살림살이로 가동이 일시 멈췄다. 그러다 6·25전쟁이 터지자 인천상륙작전의 길잡이로서 풍전등화의 대한민국을 구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곳을 비롯해 항구는 만남보다는 이별의 공간이다.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을 보내는 곳, 선원들의 하루살이 사랑을 나누는 곳이기도 하다. 갈매기, 등대, 뱃고동이 그런 분위기를 북돋운다. ‘이별의 인천항’은 그런 정취를 잘 살려내 히트했다. 노랫말에 인천항, 작약도, 등대불, 쌍고동, 갈매기, 파도, 외항선원, 물새와 사랑, 이별이 적절히 곁들여져 있다. 항구를 주제로 한 가요의 일반적인 정서들이 다 담겼다. 항구와 등대는 낭만적 의미보다 아픔이 숨어있는 부정적 뜻을 떠올리게 한다. 항구는 떠나는 곳이기도 하지만 돌아오는 곳이기도 하다. 등대는 배웅도 하지만 마중도 한다. 인천의 항구와 등대가 그렇다.

 
 
항구란 이별이 타고난 숙명의 장소다. 그래서 항구의 밤 여흥은 부두가 선술집의 술잔 부딪치는 소리로 시작된다. 술을 마시며 만남의 기쁨과 곧 닥쳐올 이별의 슬픔을 나눈다. 1950년대 인천을 등장시킨 노래들에서 떠남과 이별의 공간이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비 내리는 인천항’, ‘추억의 인천부두’, ‘인천행 버스’, ‘비 오는 인천항’ 등이 그렇다. 2008년 월미도에 문을 연 한국이민사박물관 앞 작은 화단에 재외동포재단이 세운 ‘첫 이민 떠난 곳’ 기념비도 같은 맥락이다.

1999년 10월 월미도에 노래비 건립
‘이별의 인천항’은 왜 만남보다 이별을 강조했는지 궁금해진다. 만남은 몸으로 하고 이별은 가슴으로 해서일까. 가사도 그렇게 엮여져있다. 첫 구절에서 ‘쌍고동이 울어대는 이별의 인천항구~’로 시작, 끝나는 부분이 ‘정들자 이별의 고동소리 목메어 운다’로 맺었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인천은 인천~평양, 인천~군산~목포 간 정기항로가 열려 있었다. 인천~일본~상해 간 부정기항로도 개설돼 꽤 활발하게 여객운송을 맡았다. 서해연안항로는 물론 그 옛날 인천~마포 사이에도 항로가 뚫려 많은 이들이 드나드는 활기찬 항구모습을 보였다. 서울과 경기지역에서 인천항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인천항이 대중가요소재로 자주 등장한 건 그런 까닭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노래 배경지인 인천항엔 과거의 기억과 이국의 흔적이 첨단의 현대와 공존한다. 인천시 중구가 1500만원을 들여 1999년 10월 9일 북성동 1가 월미도 문화의 거리에 세운 ‘이별의 인천항’ 노래비(가로 3.6m, 세로 1.5m 자연석)도 그런 흐름에서 비롯됐다. 비의 아래쪽에 적힌 글(김윤식 작)은 ‘이별의 인천항’ 노래의 등장배경과 그 무렵 시대상을 짐작케 한다.

“100여 년 전 이 나라 최초 이민선의 노래 소리에 피눈물 뿌리던 곳이요, 8·15광복, 6·25동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리운 사람, 사랑하는 피붙이와 모질게 이별하던 마당이었으니 그 절절한 인간사는 두고라도 뜬 구름, 푸른 물, 해풍에 쓸리던 갈매기 하나인들 어찌 서러운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랴. 오늘, 비록 한 시절을 유행하다 사라진 노래이나 이 고장 인천항의 정한을 실어 세인이 부르던 곡 ‘이별의 인천항’을 이 비에 새겨 다시 한 번 그때 그 시절의 인천을 추억해 본다.”

박경원, 레코드사 전속가수로 데뷔
노래를 작곡한 세고천은 작사·작곡가로 유명한 원로음악인 전오승(본명 전봉수, 1923년생)이다. 노래에 따라 전오승, 세고천, 세고석 등의 예명을 섰다. 그는 ‘아리조나 카우보이’ ‘미사의 종’ ‘인도의 향불’ 등의 히트곡들을 만들었다. 따라서 ‘이별의 인천항’ 작곡·작사가는 같은 사람이다.

 
 
노래를 취입한 인천출신 가수 박경원(1931년 4월 3일~2007년 5월 31일)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기 노래는 민초들의 애환을 어루만져주고 있다. 동국대 경제학과를 나온 고인은 1952년 오아시스레코드사 전속가수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만리포 사랑’ ‘남성 넘버원’ ‘비애 브루스’ ‘나포리 연가’ ‘청춘은 산맥을 타고’ 등 주옥같은 곳을 발표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런 공로로 1972년엔 인천문화상을 받은 그는 2007년 초까지만 해도 해외교포 위문공연을 다녀오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그러나 당뇨 등 지병이 악화돼 입원치료 받던 중 그해 5월 31일 오후 76세의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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