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선 설정에서 신성모의 역할에 관한 소고

 
 
1950년대 중반의 어느 날 공무원채용시험에서 면접을 보게 되었다. 시험관 앞에 앉으니 엎어놓은 백지를 뒤집는데 보니 평화선이었다. 평화선에 대하여 특별히 아는 것은 없었으나 답하라는 말에 엉겁결에 중언부언하였다. 그러나 다행이었던 것은 그 당시 평화선을 침범한 일본어선의 포획기사가 신문에 자주 났기 때문에 그 기사를 중심으로 설명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운 좋게 합격하였다. 지식은 자기생활과 직접 관련된 것에 대한 집착이 있게 마련이다. 그 후 해운과 관련된 업무에 50여년 종사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평화선에 대하여 더 이상 접근할 기회가 없었다. 그 이유는 평화선은 어업과 관련된 것이고, 필자는 해운분야에 종사하였기 때문이다.

정년 후 한국해운사를 정리하는 작업을 나름대로 하게 되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이승만대통령의 해운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접할 수 있게 되었고, 신성모의 해운과 관련된 여러 가지 업적을 접하게 되었다. 신성모와 해운과의 인연은 약간 특수하다고 생각하게 하였고, 그 이유가 무엇인가 추적하는 과정에서 무엇인가 집히는 것이 있어, 그것을 파고들었고 대체로 이 글의 결과를 추론할 수 있게 되었다. 신성모는 내무부장관과 6. 25 당시의 국방부장관이고 국무총리 서리까지 지낸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1952년 말의 어느 날 정부조직법에도 없는 해사위원회라는 대통령 자문기구의 위원장 자리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그 해사위원회라는 기구가 하여야 할 일이란 해기사 시험에의 입회나 선박검사에의 입회 등 극히 하잘 것 없는 일에 불과하다. 요즈음 이야기로 하자면 교육인적자원부장관이나 국무총리를 역임한 사람이 대입 수능시험에 감독관으로 들어가는 격이다. 교통부에 해운국이 있고, 해운국에서 해기사 시험이나 선박검사를 시행하는데 그 자리에 입회하는 업무가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사람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격에 맞지 아니한다. 무엇인가 위인설관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곰곰 생각해 보니 대통령령인 해사위원회 규정에 나와 있는 업무란 그저 예산을 배정하기 위한 대외용이고 실제로 그가 수행한 업무는 이승만대통령이 그에게 준 특수 비밀 과제인 평화선의 설정이 아니었는가 추측하게 되었다.

일단 그러한 의문을 가지고 관련 자료들을 면밀하게 검토한 결과 이러한 추론을 뒷받침할만한 자료들이 제법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필자의 추측을 정리 해보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그러나 여기서 명백하게 해 두고자 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아직은 필자의 추측선을 넘치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누군가가 이를 더 깊이 연구하여 평화선의 설정 및 유지과정 전반에 관한 상세한 것을 정리하기를 기대하면서 이 글을 쓴다.

신성모의 주요이력

대한민국의 건국을 주도한 이승만 대통령과는 달리 신성모에 관하여 일반국민들에게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해방 후 귀국하여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게 발탁되어 내무부장관으로 정부에 입각한 후 1950년 초에 국방부장관으로 전임되었고, 그 후 국무총리가 공석이 되자 국방부장관을 역임하면서 국무총리 서리를 역임한 것은 확실하다. 그러다가  1951년 초에 일어났던 거창양민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사건으로 국방부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신성모에 관한 한국현대사의 공식기록은 여기쯤에서 끝났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신성모에 대한 국민적인 평가는 그 자신의 진실성과는 관계없이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 또한 거의 고정된 국민적 시각이다. 필자 자신도 이러한 국민적 시각에서 예외는 아니다. 망국의 한을 안고 정치적으로 망명한 우국지사이기는 하지만 경력이 해기사로 선장까지 지냈다는 것이 이력서의 전부라고 해야 할 그의 경력으로 보아 세계사의 방향을 바꿔 놓을 가공할 전쟁을 직접 수행하는 한 국가의 국방부장관 직이 너무 버거워서 자기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후의 신성모의 활동은 국민들 앞에 어필할만한 내용이 아닌 해운 및 해양과 관련된 업무에 한정되기는 하였지만 적어도 이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설득력을 갖는 실적을 올린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하에서는 이러한 부분에 대하여 관련 자료들을 검토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신성모의 관계
1945년 8월 15일 이전 일제식민치하에서 이승만은 해외(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신성모는 영국 상선의 선장으로서 인도에 있는 상선회사의 고문이라는 직에 있었다. 이러한 전력으로 보아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공식적으로는 거의 접점이 없기 때문에 친근한 관계라고 하기는 어렵다. 두 사람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해외로 나간 것이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정치적인 동기였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그 중 이승만 박사의 경우 너무 잘 알려진 것이므로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신성모의 망명 동기는 한국해양대학 50년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신성모는 의령 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한일합방이 되자 우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여 신채호, 안희제 등과 독립운동을 하다가 상해로 건너가 1913년 오송상선학교를 졸업한 후 다시 남경항해대학을 거쳐 런던의 항해대학에 유학하여 영국의 선장 자격을 취득하였다. 여러 해 동안 영국 선박의 선장으로 근무하면서 이승만 등 독립지사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위의 해양대학 50년사에 나와 있는 자료 중 앞에 부분은 대체로 맞을 것이나 “여러 해 동안 영국 선박의 선장으로 근무하면서 이승만 등 독립지사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는 부분이 구체적이지 않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가 어떤 관계인지에 대하여 억측이 구구하다. 사람에 따라서는 신성모가 선장으로 있으면서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는 과정에서 이승만의 밀사 역할을 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신성모가 선장으로 받은 월급의 상당부분을 이승만에게 보내 독립운동자금으로 활용하도록 하였다고도 하나, 어느 이야기도 추측의 수준을 넘기 어렵다.

두 사람의 관계가 보통 수준은 넘는다고 추측할 수 있는 근거가 하나 있다. 그것은 이한우가 지은 “우남 이승만, 대한민국을 세우다”에 나와 있는 다음과 같은 글이다.
「이승만이 캡틴 신이라 부르며 그토록 총애했던 신성모는 누구인가? 이승만은 1948년 대통령이 된 직후 매주 토요일 오후를 ‘민성(民聲)일’로 정해 요즈음 말로 하면 국민과의 대화를 진행했다. 직접 국민들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취지에서 마련된 이벤트였다. 그런데 어느 날 경상도 사투리를 심하게 쓰는 할머니가 민성일 행사에 참석했다. 이 할머니는 이승만을 보자마자 “대통령 어른께서 내 아들을 좀 데려와 주이소”라고 간청했다. 이에 이승만이 “당신 아들이 누구요?”라고 묻자 이 할머니는 “내 아들이 신성모입니다”라고 답했다. 한참을 생각하던 이승만은 “오 캡틴 신! 선장하는 신성모 말이지”라며 “신성모는 얼마 전에 내가 불렀어. 아마 곧 돌아올 거요”라고 말했다.

실제로 12월 중순(1948년) 신성모는 경무대로 이승만을 찾아왔고, 12월 23일 윤치영의 후임으로 내무부장관에 임명된 뒤 곧바로 국방부장관, 대한청년단 초대 단장, 국무총리 서리 등을 맡으면서 초고속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이상 이한우의 책449~450쪽)」
이와 같은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승만과 신성모는 해방이전에 상당히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서로 인간적인 신뢰관계도 매우 깊었던 것으로 믿어도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사람 관계는 신성모가 거창양민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한 정치적인 책임을 지고 장관직을 사임한 후에도 계속되고 그 이후 두 사람이 이뤄낸 일이 이 글의 주제다.   
  
신성모의 주일공사 기용
이한우의 같은 책 449쪽에 의하면 신성모가 거창양민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국방부장관직에서 물러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시점에 신성모를 주일대표부 공사로 임명한다. 거창양민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에 불만을 품고 부통령직에서 사임한 이시영의 뒤를 이어 부통령으로 갓 당선된 김성수(5. 15)를 위시한 국무위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5월 20일에 개최된 국무회의에 신성모의 주일대표부 공사 임명 안을 상정하였고, 국무회의는 이 안건을 부결시켰다. 관련된 기사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그런 가운데 이승만은 신성모와 조병옥을 해임해 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성모를 주일대표부 공사로 보낸다. 5월 20일경 국무회의에서의 일이다. 대통령의 지시로 변영태 외무부장관이 신성모를 주일대표부 공사로 내정하기로 했다는 안건을 설명했다. 이에 5월 18일 이시영의 후임으로 부통령에 선출된 김성수가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이승만은 기분 나쁜 표정을 지우며 “이것 보시요 부통령. 우리는 개인감정을 초월해서 국가 민족의 이익을 생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김성수는 “신성모로 말하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중대사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사람입니다. 그 사람 밑에 있던 사람들은 지금 재판에 회부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을 다시 요직에 중용한다면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라며 맞섰다.

“이승만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고 국무회의는 격론 끝에 토론을 거쳐 신성모의 주일공사 임명 안을 부결시켜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변영태 외무부장관을 불렀다. 변영태가 들어서자마자 이승만은 “캡틴 신의 아그레망을 보내도록 하시요”라고 지시했다. 변영태가 “그러면 국무회의 의결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반문하자, “대통령은 나야 장관은 대통령을 보좌하면 되는 것입네다. 내가 임명하니 장관은 내 지시대로 하면 그만입니다.” 이렇게 해서 거창양민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사건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신성모는 일본공사로 떠나게 됐다.” 신성모가 전임 주일전권공사인 김용주의 후임으로 부임한 것은 1951년 7월 중순이었다.

이승만은 왜 신성모를 주일대사로 기용하였나?
여기서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 있다. 그것은 신성모의 주일공사 기용이 무리라는 것을 이승만도 충분히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국무회의의 부결을 뒤엎어가면서 무리하게 신성모를 주일공사에 기용할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승만 대통령의 머릿속에는 당시 이미 평화선 선포에 대한 구상이 들어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그는 그 준비 작업을 위한 적임자를 고르는 과정에서 신성모를 점찍었던 것이다. 이러한 추정의 근거에는 다음과 같은 사항이 자리잡고 있다.

무엇보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할 때 그의 전공이 국제법이었다. 그리고 국제법의 핵심은 해양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필자가 젊었을 때 고등고시를 응시하였는데 선택과목인 국제법에 나온 문제가 “국제법의 아버지가 누구이며, 해양자유의 원칙을 논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필자는  국제법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랐고, 보기 좋게 낙방하였다. 후에 알고 보니 국제법의 아버지는 AD 1600년경에 네덜란드의 법학자로서 해양자유론이라는 명저를 남겨서 오늘날의 국제법의 기본체계를 마련한 휴고 그로디우스였다. 그의 해양자유론의 핵심은 해양을 자유스럽게 이용하게 함으로써 국가 간의 자유스러운 교통을 가능하게 하여 이를 바탕으로 국가간의 교류가 활성화되어 궁극적으로는 이를 바탕으로 한 국제사회가 형성되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국제법의 연원에서 보면 국제법을 공부한다면 해양법은 바로 그 ABC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으므로 이승만은 해양법의 전문가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더구나 그는 2차대전 종전 후인 1947년에 미국대통령 투르만이 선포한 인접해양에 대한 주권을 선언한 것과 이를 모방하여 세계의 여러 나라가 비슷한 선언을 잇달아 발표한 것을 잘 알고 있고, 아마도 그 자신이 대통령이 되자마자 이러한 것을 구상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6. 25의 발발로 구상을 미루다가 1951년 들어 전국이 안정기에 들어가고, 휴전이 눈앞에 닥쳐온다는 것을 예감하였을 것이고, 휴전 후에 전개할 국정과제 중의 하나로 평화선의 선포를 구상하였을 수도 있다. 

특히 이 문제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의 안보상 일본의 중요성이 새삼 부각되어 미국이 일본을 아시아지역 안보의 중요한 파트너로 생각하게 되면서 전후 연합군의 점령 상태하에 있던 일본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년 9월 8일)을 체결하므로써 일본의 패전 후 피점령 상태로부터 정상적인 국가로 복귀하게 되었다. 여기서 이 문제와 관련 주요한 것은 피점령  상태하에서 일본에 대한 극동군사령부 점령정책의 초점은 일본의 재무장방지였다. 그래서 일본의 해외진출을 극단적으로 억제하기 위하여 맥아더 라인으로 지칭되었던 일본 선박의 어로한계선을 만들어 해양에의 진출을 극단적으로 억제하였다. 그러나 그 후 미일관계가 개선되면서 맥아더 라인도 점진적으로 완화되어가다가,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계기로 전면 폐지가 초읽기에 들어간 것이다. 그간 일본은 맥아더 라인이 설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빈번하게 침범하여 우리의 주요 어장을 싹쓸이 하다시피 한 것이 다반사인데 일본이 강화조약에 의하여 독립국가로서의 주권을 갖게 되고, 비점령 상태 하에서 해양활동의 족쇄로 작용하였던 맥아더 라인이 철폐될 경우 일본어선의 활동은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고, 이를 막아낼 수 있는 법적근거도 이것을 실력으로 저지할 능력도 한국이 못가지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해양법을 전공한 대통령답게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이에 대처하기 위한 대책의 강구가 시급하다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승만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우리 정부 내에서나 민간 전문가들 중에서도 이 문제에 대하여 이승만 대통령만큼 정확하게 그리고 전문적으로 알고 있는 전문가가 적어도 그의 측근에는 없었던 것이다. 이것을 입증하는 것으로 지금까지도 평화선의 선포를 이승만 대통령이 갑자기 선포한 것은 온 국민 중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이 문제만은 이승만 대통령의 독자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고, 이승만 대통령이 이 평화선을 선포하기 위하여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누가 도왔다는 말이 단한마디도 나온 일이 없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전 세계를 상대로 하는 평화선이라는 주권 선을 선포하면서, 대통령 혼자서 아무의 도움도 없이 이 방대한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 더구나 북한공산군과 힘겨운 전쟁을 치르고 있는 한나라의 대통령이 혼자서 이러한 일을 하였다는 것을 믿을 수는 없다. 누군가 이승만 대통령의 지침을 받고 그가 생각하는 바를 현실화시키는 작업을 도왔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성모가 아니었을까? 생각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고 이하에서는 바로 이러한 필자의 가정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를 이하에서 정리해본다.

1. 신성모는 당시(1951년) 우리나라에서 해양법에 대한 전문지식을 가진 유이唯二한 전문가의 한사람이었다. 다른 한사람은 이승만 자신이었다.

이승만은 해양법을 잘 알 수 있는 국제법학자였다. 신성모는 선장이었다. 그것도 해양지배로 세계제국을 건설하였던 영국의 선장이었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 상선의 선장은 해양법에 대한 지식은 가장 기본적인 지식이었고, 상선학교에서 해양법은 필수과목이었고, 항해 중 분쟁이 생길 경우 분쟁해결의 기본 잣대의 중요한 한 잣대가 해양법이었다. 자칭이기는 하지만 영국의 선장중의 선장이었다고 하는  엑스트러 마스터인 신성모가 해양법을 잘 알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그는 귀국전에는 공부벌레였다. 그가 스스로 하는 말에 유색인종에게는 부여한 사례가 없다고 공언하는 영국의 엑스트로 마스터(선장중의 선장) 시험에 응시하였고, 영국역사상 유색인종에게 이 면허장을 준 예가 없으니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좋다고 빈정대는 시험관에게  ‘나는 당신이 시험관을 그만두기를 기다려서 그때 와서 다시 시험을 치더라도  이 시험에 꼭 합격하고 말겠다’고 공언하였다고 스스로 말한바가 있다고 하니 공부벌레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 그가 후일 한국해양대학 학장을 할 때 수업중인 강의실에 예고 없이 들어와 수업을 청강하다가,   교수에게 예리한 질문을 던지는 통에 교수들이 혼쭐이 났다고 하는 소리를 해양대학 교수들이 많이 하는데 그만큼 그는 해양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였던 것이다.

2. 이승만은 신성모를 평화선 설정의 파트너로 선정했다.

신성모는 이승만과 해방 전에 이미 상당히 친숙한 사이였고, 귀국 후 바로 장관을 시킬 만큼 총애한 사람이니 이승만으로서는 평화선 설정 작업의 조수로 이만한 적임자를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작업은 절대적으로 대외비로 할 필요가 있는 사안이다. 자칫 잘못하여 이러한 구상이 진행 중이라는 것이 외부로 알려질 경우, 일본이나 한, 일 양국 이해관계의 조정 역을 하던 미국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일이므로 보안을 철저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성모는 정치적으로 실각하여 아무도 그의 동정에 관심을 갖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그의 휘하에 일을 도울 사람도 없는 외톨이였다.

이러한 그의 상황은 비밀 작업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승만이 신성모를 주일공사로 임명하면서 국무회의에서 반대하자 이승만은 기분 나쁜 표정을 지우며 “이것 보시요 부통령. 우리는 개인감정을 초월해서 국가 민족의 이익을 생각하여야 하는 것입네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무엇이 국가 민족의 이익을 위하는 것인가를 설명하지는 아니하였다. 그 이유는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하자면 평화선 설정 작업을 위한 것이라고 공개하여야 하는데 이것은 부통령과 국무위원들에게도 알려지면 안 될 극비사항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욕을 먹으면서도 구체적인 설명을 생략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일에 관한 한 신성모 이외는 다른 대안이 없다고 보고 국무회의의 부결을 무시하고 주일공사로 임명하는 무리수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이 작업에는 맥아더 라인을 설정한 미극동군사령부의 사정을 잘 알아야 하는데 국방부장관 출신이니 그쪽 사정에도 누구보다 아는 것이 많을 수 있는 사람이다. 만약 이러한 요소들을 모두 고려하여 이승만이 신성모를 평화선 설정의 조수 겸 파트너로 선정하였다면 이 인사는 정말 적재적소의 인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외교에는 귀신, 인사에는 등신이라고 평하는데, 이 인사는 인사에도 귀신이라고 평가해도 될 듯하다.   

3. 신성모를 주일공사로 보낸 것은 평화선 설정의 준비차였다.

그렇다면 신성모가 주일공사로 임명된 후 재직 중 평화선과 관련하여 그가 수행한 구체적인 일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관한 자료는 남아있는 것이 없다. 뿐만 아니라 신성모의 주일공사 임명이 이승만의 평화선 선포와 관련이 있을 것 아니냐는 추측이라도 하는 것은 이 글이 처음이다. 그러므로 그가 주일공사로 재임중 무슨 일을 하였는지에 관하여는 추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로는 그가 평화선의 선포와 관련된 준비를 하는데 최적의 장소는 바로 일본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으며, 신성모가 수행한 업무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1) 평화선의 법적근거는 1947년 미국대통령이 선포한 인접해양에 대한 주권선언이다. 이 투르만 선언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국제해양법상 바다는 좁은 영해(영해 3해리설 : 착탄거리설)이 통설이었고, 영해를 제외한 잔여수역은 공해로서 만인의 자유스러운 사용에 개방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것이 해양자유의 원칙이다. 그런 전통적인 해양법 사상에 일대 예외를 선포한 것이 투르만 선언이었고, 당시 세계 최강의 국가였던 미국의 일방적인 선언에 감히 이의를 다는 국가는 거의 없었다. 이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남미 등 많은 약소국가들은 오히려 이를 흉내 내어 유사한 선언들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해양에 대한 백가쟁명의 권리주장이 난무하게 된다. 평화선도 어찌 보면 이러한 국제적인 추세에 적기에 올라 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평화선의 선 포안을 마련하기 위하여는 미국의 인접해양에 대한 주권선언의 배경과 이론적 근거, 그리고 선포안의 세부내용까지 파약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일은 미국에서보다 가까운 일본의 극동군사령부에서 자료 찾기가 비용 면에서나 시간 면에서 보다 유리하였을 것이다.

2) 맥아더 라인에 관한 자료수집과 미일 강화조약 발효 후의 정세변화 파악과 대처방안 수립이다. 평화선의 선포가 시급하게 된 것은 한국전을 기화로 동맹관계가 강화된 미일 양국이 강화조약의 체결을 서두르면서 일본 점령 통치 수단의 하나로 설정하였던 맥아더 라인의 철폐가 초읽기에 들어갔으므로 맥아더 라인의 설정경과로부터 그 후의 변화과정과 미일 국교 정상화 후의 맥아더 라인의 운명, 그리고 평화선을 새로 설정할 경우, 어떤 선에서 평화선을 그어야 할 것인가 등에 대한 검토를 위해서는 일본에서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여 검토하여야 한다. 당시 이러한 국제정세의 움직임을 시간 순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1951년 7월 중순, 신성모 김용주 주일대표부 공사의 후임으로 주일대표부 공사로 취임.
2. 1951년 9월 8일 미일간의 강화조약인 샌프란시스코 조약 조인
3. 1952년 1월 18일 평화선(정식명칭 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 선포
4. 1952년 4월 25일 맥아더 라인 철폐
5. 1952년 9월 27일 연합군 총사령관 클라크 장군에 의한 크라크 라인 선포(주로 공산오열의 침투 방지 목적)
6. 1952년 10월, 대통령령으로 해사위원회 규정을 선포하고, 그 위원장에 신성모 취임.
7. 1952년 10월 14일 대통령긴급명령으로 포획심판령을 제정 공포하고, 포획심판소를 설치 운영개시
8. 1953년 12월 23일 내무부 치안국 산하에 해양경찰대 설치
9. 1955년 2월 17일 해무청의 설립, 해양경찰대 소속을 해무청 산하로 이동

종전 후에 설정된 맥아더 라인
1) 맥아더 라인의 설정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여 일본을 군정으로 통치하게 된 연합군사령부인 SCAP은 일본의 재무장 방지 및 해외진출을 억제하기 위하여 어로제한 수역을 설정하여 이 수역 내에서만 어업을 할 수 있도록 제한하였다. 이것이 맥아더 라인으로 불리게 된 일본의 어로한계선이다. 이 맥아더 라인설정의 배경에는 위에서 거론한 이유 외에도 전전(戰前)에 일본 어선들이 세계의 주요해양에 진출하여 공해자유의 원칙을 빙자하여 남획을 거듭하여 세계의 어장을 황폐하게 하였는데, 차제에 이러한 일본어선의 무분별한 출어와 남획으로 인한 어족자원의 훼손에 대하여도 제동을 걸어야겠다는 장기적인 정책 목표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 맥아더 라인의 거듭된 확장
이 조치는 일본인들로서는 사활이 걸린 매우 중대한 문제였다. 일본은 장기간의 전쟁으로 경제와 국토가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생활고가 극심하였는데 특히 식량자원의 절대적 부족으로 인한 기아가 매우 심각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으로 어업을 장려하여 수산물로 식량부족을 메울 생각이었는데, 군정통치권을 가진 SCAP이 이를 극단적으로 제한하게 되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일본은 군정당국에 통사정을 하고, 설득을 거듭하여 이 맥아더 라인을 일본이 원하는 선까지 확장하는 교섭을 끈질 지게 진행시켜 SCAP의 양보가 거듭되어 수차례에 걸쳐 맥아더 라인의 확장이 이루어졌다. 특히 일본에 대한 점령군의 군정 초기와는 달리 SCAP의 일본 점령정책은 점진적으로 완화되어 가는 추세를 나타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아예 맥아더 라인을 폐지해 달라는 의견을 내기도 하였다.

3) 맥아더 라인의 확장 및 월선조업으로 인한 피해

맥아더 라인의 설정은 우리로서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우리나라 어로구역들이 사실상 일본 어선들의 독무대가 되다시피 하였는데, 종전 후 SCAP이 점령군의 자격으로 이에 대하여 제한조치를 취해줌으로써, 일본 어선들의 안방같이 되었던 우리어장들이 우리에게 돌아왔기 때문이다.
맥아더 라인의 설정 후 얼마 동안은 큰 문제가 없었고, 우리나라도 군정기간동안에는 우리 정부 자체가 없었으므로 그럭저럭 넘어갈 수밖에 없었는데, 일본보다 우리 정부가 먼저 수립되자 우리도 이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 6. 25 동란이 일어나고, 미국이 한국전에 개입하게 되고, 한국전 수행에 필요한 군수물자의 상당부분을 일본에서 조달하게 되면서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매우 긴밀하게 되면서 맥아더 라인과 관련된 문제들이 크게 혼선을 빚게 되어 우리 정부로서도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떤 조치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렇게 제기된 문제는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일본정부가 SCAP에 작용하여 맥아더 라인을 자꾸 확장해나가는데 맥아더 라인의 확장은 크게 보면 우리 어장의 축소로도 이어지는 것이므로 좌시할 수 없으므로 예의 주시하고 항의도 하였으나, 우리의 주장이 크게 먹혀들지 못하였다.
다른 하나의 문제는  미일간의 긴장관계가 유연해지면서 일본 어선들이 시도 때도 없이 맥아더 라인을 넘어서 월선越境 조업을 일삼았다.  맥아더 라인은 SCAP이 군정통치권에 기하여 선포한 것이므로 법률과 같은 효력을 가짐으로 당연히 이를 준수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반한 경우, 맥아더 라인을 선포한 SCAP이 나서서 이를 단속하고 처벌하여야 하는데, 현실은 SCAP은 선포만 해놓고 이 라인을 지키도록 지도하고, 이를 어기는 것을 단속하고 처벌하는 일은 일본정부에 맡겨놓고 거의 방치하다시피하였다. 일본정부는 형식상 단속을 한다고 하지만 SCAP에서 특별히 말하지 않으면 방치하는 경향을 뚜렷이 하였다. 그러니 이 라인은 줄 만 그어놓은 것에 불과하고 실질적으로는 어로한계선으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일본 어선들의 월선조업은 결과적으로 우리어장을 불법 침해하는 것이므로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한국의 몫이 된다. 그러나 우리로서도 사실상 속수무책이었다. 왜냐하면 맥아더 라인을 선포한 것은 SCAP이 일본의 통치차원에서 선포한 것이므로 SCAP과 그 피통치자인 일본정부(그리고 일본어선까지)간의 관계를 규율하는 룰이지만 한국은 이 라인과 하등의 법적인 관계가 없으므로 피해는 우리가 보지만 우리가 나서서 단속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일본 어선들이 월선조업을 많이 하니 이를 단속해달라고 SCAP에 요청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다른 유효한 단속 수단이 없다. SCAP의 입장은 전술한 바와 같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자 화가 난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 해군에게 일본어선들이 월선조업을 하는 경우, 법적근거에 관계없이 나포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큰  실효성이 없었다. 우선 당시 해군이 가진 장비가 매우 낡고 성능이 안 좋고, 장비도 부족하여 넓은 수역을 모두 커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일강화와 맥아더 라인의 철폐 :그리고 평화선의 선포
1951년에 접어들면서 점령군 대 피점령국이라는 미국 측의 절대적인 우세로 시작한 미일관계는 우리나라의 6. 25전쟁을 계기로 매우 긴밀해지기 시작하였고, 극동지역의 안보와 관련하여 미일 양국간의 밀월관계가 시작되었다. 동시에 일본은 우리나라에 전쟁 물자를 대량 공급하게 되면서, 일본경제의 전후 회복속도가 급격히 빨라졌다. 한국 전선도 `951년 중반에 접어들면서 소강상태를 유지하게 되었고, 6월에는 소련 UN대표의 제의로 한국전의 휴전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되자, 미국은 일본과의 강화조약을 조속히 체결하여 미일간의 새로운 동반자관계를 만들고자 서둘게 되었다. 미일강화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은 시작하자마자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미일강화조약이 체결되면, 일본의 SCAP에 의한 통치는 끝나게 된다. 그것은 일본이 독립국가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맥아더 라인도 자연스럽게 없어지게 된다. 상황은 우리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갔다. 맥아더 라인이 없어지면 그때까지 일본 어선들의 어로작업 한계선이 없어지게 된다. 이것은 2차 대전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비상상태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대한민국과 일본간에 어업협정을 체결하여 서로의 조업구역을 정하여 준수하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일본과 우리나라는 국교가 정상화되어 있지 아니하였으므로 어업협정 같은 것을 맺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의 대일 강경입장은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한 상태였으므로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정부간의 어떠한 합의도 이끌어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때 이승만 대통령의 특기가 작용하게 된다. 흔히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에 대한 국민적 평가로 “인사에는 등신, 외교에는 귀신”이라는 말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적인 국제 감각은 뛰어날 뿐만 아니라 누구도 상상 못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것이 특기중의 특기다. 미일국교정상화로 인한 맥아더 라인의 철폐와 관련하여서도 이승만 대통령의 이 외교에서의 귀신이 곡할 번득이는 특기가 빛을 발하게 된다.

이승만은 혼자 이 문제를 그대로 둘 수 없다고 판단하고 마침 사표를 제출한 상태였던 김용주 주일공사의 후임으로 해양법을 가장 잘 아는 신성모를  주일대표부 공사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이승만 대통령의 속마음은 누구에게도 밝히지 아니하였음은 물론이다. 그 이유는 한일관계는 매우 민감한 외교문제일 뿐만 아니라, 비밀이 샐 경우, 일을 그르칠 염려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승만 대통령의 속마음이 잘 표현된 것이 당시 부통령이던 김성수가 신성모의 주일대표부 공사로 임명하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하자, 왜 그를 주일대표부 공사로 임명하여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않고, 공직자가 일을 할 때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일을 하여야 한다는 막연한 말로 덮어버리고, 국무회의에서 안건을 부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의지를 그대로 관철하여 주일공사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필자의 추측이 맞다면 주일공사로 부임하는 신성모에게만 자기 의중을 알려주고 그에 필요한 준비를 극비리에 수행하도록 당부하였을 것이다. 이 시기를 전후한 대일강화조약의 체결 및 평화선 선포와 관련된 일정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51년 7월 중순경 신성모 주일공사로 부임
-1951년 7. 30일 대일 강화조약 체결 반대 국민궐기대회 개최
-1951년 9월 8일 미일간의 강화조약인 샌프란시스코 조약 조인
-1952년 1월 18일 평화선(정식명칭 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선언) 선포
4. 1952년 4월 25일 맥아더 라인 철폐

위 일정들을 살펴보자. 신성모가 주일대표부 공사로 부임한 시점은 미일 강화조약 초안이 어느 정도 확정단계에 들어간 시점이다. 그리고 바로 이어 미일강화조약 초안이 발표되자 이를 반대하는 한국민들의 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뒤이어 강화조약이 완성되어, 1951년 9월 8일 미일간의 강화조약인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조인되었다. 외교관례상 조약이 조인되면 그 발효는 초읽기에 들어간다. 약간의 시간여유는 있다. 왜냐하면 이런 성격의 조약 발효를 위해서는 양 당사국의 비준절차가 필요하고, 이를 위하여는 양국의 의회가 동의하여야 하므로 그 시간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길지 아니하였다. 여기서 다시 이승만대통령의 외교적인 기지가 번득이는 조치가 이루어졌다. 맥아더 라인의 철폐를 약 3개월 정도 앞둔 1952년 1월 18일에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이 선포되었다. 그 3개월 후에 미일강화조약이 발효되었고, 그 3일전인 52년 4월 25일에 맥아더 라인도 철폐되었다.

이 선언의 발표시기도 매우 미묘하다. 변화가 예상된다고 해서 너무 미리 발표할 경우, 여러 가지 잡음이 나올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고 맥아더 라인의 폐지 시점이나 폐지 후에 할 경우 한일 간에 해양주권과 관련된 경계선에 공백이 생길 염려가 있으므로 잡음이 날 가능성을 최소화시킴과 동시에 공백기도 없도록 하는 선으로 선포일을 선택하였다고 할 수 있다.

미일강화조약이 발효되고 일본이 주권을 다시 회복할 것이 확실해지고,  맥아더 라인의 철폐도 확실해지자 신성모가 주일공사로서 평화선 선포와 관련된 여러 가지 자료수집과 그 후의 대책 등을 대강 결정하고 후임인 김용식에게 공사직을 물려주고 귀국하였다. 1951년 12월 6일의 일이다.

평화선 수호를 위한 사후대책 수립 시행과 신성모의 역할
1) 평화선의 경계설정
평화선의 경계선을 누가 어떤 경위로 설정하였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현재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다. 거의 유일하다고 해야 할 문헌으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초부터 우리나라 수산행정을 이끌다시피 해온 지철근이라는 분이 집필한 평화선이라는 저서에 기록된 것이 가장 상세한데 이 책에서 평화선의 최초 안은 상공부수산국이 마련한 어업관할수역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안은 수산국이 주관하여 작성한 안이므로 어업과 관련된 요소만 포함되었으나, 수산국이 이 안을 제안하자, 당시 경무대에서  이 어업관할 수역 안이 독도 안쪽으로 그어졌으므로 독도를 포함하는 확대수정안에 제안되었고,  몇 차례의 수정이 더 가해지면서 명칭도 어업관할 수역이라는 한정된 것이 아니고, 획정된 해역에 대한 대한민국의 주권을 선언하는 인접해양에 대한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으로 수정되었다.

이 경계설정과 수역확대과정에 대한 실무 작업은 상공부 수산국의 지철근과 청와대의 임철호 비서관 그리고 외무부에서는 정무국장이었던 김동조가 깊이 관여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경무대가 주도권을 가지고 경계선을 조정한 안을 지철근의 평화선에서는 변영태(당시 외무부장관)안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 책의 어느 곳에서도 주일공사인 신성모가 관여하였다는 내용이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주변사정을 감안할 경우, 그가 관여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2) 대통령 자문기구인 해사위원회의 설치와 그 성격
신성모는 주일공사직을 후임인 김용식에게 인계하고(1951년 12월 6일) 귀국하였다.  그 후 그는 1952년 11월  10일에 대통령령으로 설치된 대통령의 자문기구인 해사위원회 위원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그는 그 후 1956년 11월 28일에 한국해양대학의 학장으로 부임하기 전까지 그 직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성모가 주일공사직을 사임하고 해사위원회 위원장직에 취임하기 까지의 약 11개월의 기간 중 평화선이 선포되었고(1952년 1월 18일), 이 평화선을 수호하기 위하여 월선 조업을 하는 등 평화선을 침범한 선박에 대한 처벌을 위한 사법기관이라 할 수 있는 포획심판소 규칙이 제정되었다. 신성모의 공사직 사임과 평화선의 선포 사이에는 약 2개월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이 2개월이라는 기간에 신성모는 아마도 외무부 소속의 공무원이었지만 보직이 없는 상태에서 이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자문역을 수행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평화선이 선포 된지 10여개월의 시간이 지난 1952년 11월 10일에 해사위원회가 발족되었고 신성모는 그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그런데 이 해사위원회라는 대통령의 자문기구는 조직의 성격이 매우 애매하다. 우선 이 위원회가 하는 일이라는 것이 이상하다. 그 설치근거가 되는 해사위원회규정이 명시한 위원회의 업무는 선박 검사와 선원에 대한 자격 부여라는 아주 하찮은 업무다. 그런 업무는 정부안의 교통부 해운국이나 상공부 수산국의 주사나 서기 급이 취급하는 업무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대통령의 특별자문기구를 설치할 필요는 전혀 느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설령 이런 기구가 필요하여 설치한다고 하더라도 국방부장관과 국무총리 서리를 역임한 거물급이 앉을 자리는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다. 바로 여기에 이승만 대통령의 번득이는 기지가 엿보인다. 이승만 대통령은 외형상 별 볼일 없는 해사위원회를 설치해놓고, 이 기구를 평화선을 관리하는 전담기구로 활용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대통령령인 해사위원회 규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이승만 대통령의 의중을 읽을 수 있다. 그 규정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선박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련되는 사항에 대하여 위원회에 대하여 자문할 수 있다.” 표면에 내세운 것은 대외용이고, 대통령이 이 위원회와 그 위원장인 신성모를 활용하여 평화선과 관련된 자기의 구상을 정책에 반영하고, 그 구체적인 집행 안을 마련하여, 평화선을 우리의 제도로 정착시키는 평화선 관리체제의 정비를 이 해사위원회 위원장인 신성모에게 맡기는 것이 이 위원회 설치의 진정한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승만대통령의 의중은 바로 다음과 같은 조항에서도 알 수 있다.
제7조 위원회의 사무는 교통부해운국과 상공부수산국으로 하여금  행하게 한다. 단 사무를 보좌하게 하기 위하여 좌의 공무원을 둘 수 있다(생략).
위 조항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평화선을 관리하여야 할 정부기구라 할 수 있는 해운국과 수산국을 사실상 해사위원회 위원장인 신성모로 하여금 관리하도록 한 것이다. 어느 면에서는 옥상옥의 감이 있지만 기존의 행정질서를 크게 흔들지 않으면서도 필요한 권한을 위원장이 수행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해사위원회는 그 후 평화선의 관리기구라 할 수 있는 해무청이 설치되고, 신성모가 평화선의 관리체제의 정비를 어느 정도 마친 후, 한국해양대학의 학장으로 부임하기 까지 약 4년간 해운, 수산, 그리고 해사와 관련된 정부 업무 처리에서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 후 평화선의 관리체제는 다음과 같이 정비되었다.

①1952년 10월 포획심판법의 제정7) 시행 : 포획심판소란
해양법 위반사건에 대한 재판을 담당하기 위한 사법기관이다. 이 포획심판소를 통하여 월선 조업하는 일본어선을 포획하여 심판하여 그 선박을 몰수하고, 선원들을 처벌하는 기능을 하는 기관이다. 이 기구의 역사적인 발전과정을 보면 해상에서 위법행위가 자행될 경우, 그 해역을 관할하는 주권국가의 군함등이 나포하여 그 위법행위에 대하여 재판절차를 거쳐 그 행위의 위법여부를 판단하고 그 위법정도에 따라 처벌수위를 결정한다. 이러한 포획심판절차는 주로 전시의 해전 과정에서 적선이나 적국 상선을 나포하였을 때 주로 사용되었으나, 대항해 시대이후 공해상에서 해적행위 등 위법행위가 난무하게 되자, 해상질서 유지 차원에서 널리 시행된 사법기관이고 절차다.

포획심판제도는 해상활동에 대한 사법절차이므로 선장출신인 신성모는 이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므로 이 포획심판규칙의 제정을 주도하거나 적어도 깊이 신성모가 자문하였을 것을 추정하기 어렵지 않다. 그리고 이 포획심판소의 운영을 실질적으로 지도감독한 것도 해사위원원의 위원장인 신성모가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②1953년 12월 23일 내무부 치안국 산하에 해양경찰대 설치
평화선이 선포되기 이전부터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으로 맥아더 라인을 넘어서 불법조업을 하는 어선을 나포해 왔으나 그 이전까지는 법적근거도 그렇게 뚜렷하지 않고, 이를 단속하는 기관도 명백하지 아니하므로 해군이 우리 해역을 순시하는 과정에서 적발되는 것을 단속하는 선에서 머물렀으나, 평화선을 선포한 후 이 단속이 강화되었고, 그 법적근거를 마련하기 위하여 포획심판법을 제정, 시행하였는데 역시 그 단속활동은 단속 장비와 인력을 보유한 해군이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단속할 때마다 일본정부와 언론들이 떠들어대기 시작하였다. 특히 휴전이 성립되고 나서는 전시도 아닌데 공해상(일본측 주장)에서 한국해군 군함이 일본어선을 불법 나포한다고 떠들어 대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대한 어떤 조치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해군의 경비정 일부와 병력 일부를 떼어 내어 내무부 치안국 산하에 해양경찰대를 설치하여 평화선을 침범하여 조업하는 일본 어선들에 대한 전담 단속기관으로 발전시켰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해군이 보유하고 있는 장비 중 불법조업 단속을 하기에 알맞은 경비정과 인력을 차출하여야 하는데 해군에서는 자기들 장비와 인력을 빼앗으려 하는데 찬성할 이가 없다. 이 때 신성모가 역할을 하게 된다. 우선 국방부장관을 역임하였고, 영국 선장출신이라는 전문성과, 이대통령의 특명을 받아 업무를 수행하는 특권을 십분 발휘하여, 이 문제를 비교적 마찰 없이  해결하고  해양경찰대를 설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③해무청의 설립, 해양경찰대 소속을 해무청 산하로 이관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그 기능이 충분하다고 하기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었다. 무엇보다 해양경찰대의 소속이 내무부 치안국 산하에 있었으므로, 업무내용이 육상의 경찰업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해양경찰대가 수행하는 주 임무는 포획심판법에 의한 해상범죄의 단속과 처벌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해상에서의 위법행위에 대한 단속과 나포 그리고 심판은 육상의 사법체계와 별개의 독자적인 영역으로 발전하여왔다.  그 결과 업무 수행방법과 적용법규, 그리고 재판과정과 절차 등이 육상의 사법체계와 판이하게 다르다. 그래서 이 기능을 육상의 사법기능과 별개로 독립시킬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도 위법행위의 단속기능은 치안국 산하의 해양경찰대가 한다고 하지만 이러한 위법행위를  포함한 해양 전반에 관한 행정관할은 교통부 해운국이나 상공부 수산국 업무이므로 기능의 충돌도 있다.

그래서 이 기능을 독립시키기로 하여 교통부 해운국과 상공부 수산국, 그리고 내무부 치안국 산하의 해양경찰대를 떼내어 통합하여 해사행정전반에 대한 관리기구로 해무청을 1955년 2월 17일  설립하였다.
이 업무를 주도한 것도 대통령의 자문기구인 해사위원회의 위원장인 신성모가 이를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해무청 설립 후 신성모는 해대 학장으로

해무청이 설립되어 운영되면서 평화선을 선포하고 나서 신성모가 해사위원회 위원장직에 취임하여 추진하였던 평화선의 관리체제가 완성되었다. 그렇게 되자 해사위원회라는 위인설관의 기구는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되었다,  그대로 둘 경우 옥상옥이 될 수밖에 없는 기구가 된 것이다. 신성모의 처리문제는 이 대통령의 몫이 되었다. 그 후 확실하게 전해지는 것은 없으나, 신성모는 해무청장 자리에 앉기를 희망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확인된 바는 없다.이 문제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의중이 무엇이었는가도 확인된 바 없다. 그런데 당시 상공부장관이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해무청장 자리는 정부내 직급으로 차관급인데 전직이기는 하지만 신성모는 국방부장관과 국무총리 서리를 역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승만대통령의 측근중의 측근이었으므로 상공부 장관으로서는 자기 소속하의 외청장에 이러한 거물이 있게 된다는 것은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꾀를 낸 것이 교통부 해운국 산하에 있던 해기사 양성을 위한 특수대학이었던 해양대학을 대학 교육기관이라는 이유로 문교부로 이관하였다. 그리고, 이 대학의 학장으로 신성모를 추천하였던 것이다. 신성모의 여러 가지 경력으로 보아 이 인사는 적재적소의 인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 신성모는 해양대학 학장으로 와서 해양대학의 교육제도의 정상화와 발전에 온 힘을 기울여 오늘날의 한국해양대학의 기틀을 마련하다가, 1960년의 4. 19 혁명으로 이대통령이 하야하자, 그 충격으로 병을 얻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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