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실연한 20대 부산총각 고향 그리며 밤새 만든 노래
1976년 무명가수 조용필이 불러 크게 히트


돌아와요 부산항에 노래비 앞에 필자
돌아와요 부산항에 노래비 앞에 필자
가수 조용필(63)이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4분의 4박자 고고리듬으로 멜로디가 흥겹다. 음의 높낮이가 심한 편이 아니어서 노래를 모르는 사람도 몇 번만 듣고 따라 부르다보면 금방 배울 수 있는 가요다. 지난 6월 7일 방송된 SBS-TV의 ‘좋은 아침’에서 조용필의 히트곡 중 팬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곡으로도 뽑혔다. 국민적 인기를 끌어낸 곡으로 조용필이 밴드음악은 물론 여러 장르를 소화하는 천부적 가수로 인정받게 한 노래다.

황선우씨가 작사·작곡한 이 노래가 처음 선보인 건 1976년, 음반에 담겨 본격 히트한 건 1982년이다. 만 26살 때 노래를 발표했던 조용필은 그 무렵만 해도 무명가수였다. 그러나 33살 때 나온 제4집 음반에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실리면서 인기대열에 올랐다. 조용필의 다른 노래들이 그렇듯 ‘작은 거인’의 혼이 담긴 생명력 긴 작품이다. 더욱이 무명이었던 조용필이 일약 유명가수가 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행운의 노래이기도 하다.

이회택 프로축구팀 감독 권유로 녹음
이 노래는 작곡·작사가 황선우씨가 20대 젊은 총각시절 실연의 아픔을 겪었을 때 만들어 이채롭다. 부산출신으로 1970년대 고향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황 씨는 음악 쪽에 관심이 많아 고교졸업 뒤 작곡·작사가를 꿈꾸며 서울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부산은 시장이 좁고 여건이 좋지 않아 성공하기 힘들 것으로 보고 상경한 것이다.

객지생활을 한 그는 음악 일을 하며 어려운 가운데서도 목표를 향해 열심히 뛰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부산서 학교를 다닐 때 사귀었던 첫사랑의 또래 여학생이 결혼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부산시 영도구 끝 쪽 태종대 바닷가 고향집 부근에 살았던 그녀는 중학교 졸업 후 전라도로 시집을 간 것이다.    
황 씨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마음의 병이 심했던 어느 날 그는 실연의 아픔을 잊으려고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 술자리를 끝낸 뒤 사무실로 돌아온 그는 울적한 마음에 기타를 잡았다. 고향생각에다 그녀와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태종대 집 앞 바다에 펼쳐진 부산항과 멀리 보이는 오륙도, 동백섬, 갈매기, 연락선 등이 눈에 선했다. 밤새 기타를 치며 생각나는 대로 가사를 적고 악보도 만들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노래 속에 나오는  동백섬(사진=부산시 제공)
돌아와요 부산항에 노래 속에 나오는  동백섬(사진=부산시 제공)

날이 훤히 밝으면서 노래는 거의 완성됐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 형제 떠난 부산항에…”로 시작하는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노래는 손질을 거쳐 무명가수 조용필에게 넘겨져 취입됐다.

조용필은 1975년 10월 밴드로 활동하던 중 ‘너무 짧아요’ ‘생각이 나네’ 두 곡의 앨범녹음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친하게 지냈던 이회택씨(전 프로축구팀 전남 드래곤즈 감독) 권유도 있고 해서 녹음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음반의 두 번째 곡으로 실렸다. 조용필은 음반사에 록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트로트를 부른 게 자랑스럽지 않다며 “곡 순서를 밑으로 내려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주곡의 기타도 치며 노래를 부른 조용필은 그 때만해도 노래가 그렇게 뜰 것으로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음반이 나오고 방송전파를 타면서 히트곡이 됐다. 조용필의 가창력도 뛰어났지만 시대흐름과 맞아 떨어져서였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노래 속에 나오는 오륙도
돌아와요 부산항에 노래 속에 나오는 오륙도

일본서도 음반 100만 장 이상 팔려 ‘한류바람’
노래는 일본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2004년 일본서 우리나라 드라마 ‘겨울연가’ 주인공 배용준을 좋아하는 ‘욘사마’ 바람이 불었던 것처럼 30여 년 전에 조용필의 인기를 반영한 ‘조요삐루’ 바람이 불었다. ‘한류바람’이 1980년대부터 일본에 상륙한 셈이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제목과 노랫말이 말해주듯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노래다. 가깝고도 먼 이웃나라 일본은 우리와 터놓고 얘기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전두환 전 대통령시절인 1983년 조총련계 재일교포들의 모국방문이 줄을 이으면서 일본은 우리 곁에 한발 성큼 다가왔다. 이국땅으로 끌려갔다 죽음을 앞둔 나이에 부산항에 도착한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들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목 놓아 불러댔다.

부산 영도등대 전경
부산 영도등대 전경

때마침 부산에서부터 불기 시작한 가라오케 바람도 노래를 히트시키는데 한몫 했다. 해운대, 송도 등 바닷가술집과 일본인들을 상대로 하는 유흥업소 등에서 단골가요로 불렸다. 가라오케에 담긴 이 노래는 복고풍의 트로트리듬으로 사랑을 듬뿍 받았다. 일본노래 반주가 많은 가라오케에서 일본 여가수 이츠와 하유미가 부른 ‘고히비토요’가 마음대로 불릴 때 일본선 그보다 더 위세를 떨친 한국가요가 ‘돌아와요 부산항에’였다. 여가수 이성애의 ‘가슴 아프게’ 뒤를 이어 일본시장에 진출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조용필을 일본사람들의 우상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1983년 NHK주관으로 일본 전국순회공연을 가진 ‘조요삐루’(조용필)는 10대에서 50대까지 폭넓은 가요팬들을 확보하며 엔카 열도를 뒤흔들었다. 후원회가 만들어지고 팬클럽까지 결성됐다. 조용필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일본의 젊은이들이 거리를 활보하며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렀다. 싱글음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일본에서만 100만 장 이상 팔려나갔다. 일본가수치고 이 노래를 부르지 않은 이가 없었을 정도였다. 심지어 일본 음반회사들은 자기나라 가수들을 동원, 유사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내놓기까지 했다. 부산 해운대해수욕장 솔밭엔 노래비가 서있다.

최근 영화 ‘돌아와요 부산항에’(감독 박황준)가 만들어지고 있어 눈길을 끈다. 부산을 배경으로 쌍둥이형제가 어린 시절 헤어진 뒤 조직폭력배와 경찰로 만나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조용필, 록그룹 ‘애트킨스’ 결성 뒤 45년째 노래 삶
1950년 3월 21일 경기도 화성에서 조경구 씨와 김남수 씨 사이의 3남4녀 중 여섯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는 서울 경동중·고를 나와 음악의 길로 들어섰다. 1968년 록그룹 ‘애트킨스’를 결성한 뒤 올해로 데뷔 45년째 노래 삶을 살고 있다. 기타리스트로 데뷔했으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공전의 히트를 하면서 솔로싱어가 됐다. 1979년 1집 앨범 ‘창밖의 여자’를 낸 그는 2006년 제3회 한국대중음악상 공로상, 2005년 제20회 골든디스크상(공로상) 등을 받았다. 기획사 YPC프로덕션 대표이기도 한 그는 올봄 데뷔 45주년을 맞아 지난 18집 이후 10년 만에 새 음반 ‘헬로Hello’를 발표, 국내 가요계 정상의 자리에 올라 가왕歌王으로서 자리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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