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국민의 해운업 인식제고가 시급하다”


⊙ 참석패널 : 박현규 한국해사문제연구소 이사장(해양한국 발행인), 이윤재 흥아해운 회장(한국선주협회 회장), 신태범 KCTC 회장(전 항만하역협회 회장), 마상곤 협운그룹 회장(전 국제해운대리점협회 회장), 정은구 삼영익스프레스 회장(전 국제복합운송협회 회장), 최재수 전 선주협회 전무(전 교통부 외항과장)

⊙ 사회·정리 : 이인애 해양한국 편집국장
⊙ 진행 : 김승섭, 강미주 기자
⊙ 좌담안건 : △해사산업계 입문시기와 해당업종 상황 △어려웠던 때와 보람있었던 때 △고난극복의 개인적·사회적인 동력 △세계 5위 한국해운의 성장동력과 現 위기 원인 △향후 해사산업계의 발전에 필요한 것 △후배 해운인들에 들려주는 말 △해양한국과의 인연

⊙ 일자 : 9월 16일 오전 9시 30분-12시 30분
⊙ 장소 : 서울 명동 로얄호텔 제이드홀

 

 
 

사회(이인애 국장): 해양한국 창간 40주년 기념 좌담회에 참석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본지 발행사인 한국해사문제연구소는 2년전에 먼저 40주년을 맞았으며, 당시 이를 기념하기 위해 해운과 항만, 조선 등 해사산업별 40년 역사에 대한 회고는 2011년 특집호(4월호)에서 점검한 바 있습니다. 이에 이번 해양한국 40주년 좌담회는 우리 해사산업계에서 40년이상 종사해오신 해운 원로분들을 모시고 입문 당시 해당업종의 상황과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해운위기 극복과 한국해사산업계의 발전을 위한 고견을 듣는 시간입니다. 원로분들이 종사해온 개별기업과 관련 개인적(또는 사회적인) 경험을 통해 한국해운의 성장동력이 무엇이었고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더욱 발전하기 위해 우리 해사산업계가 걸어가야할 발전방향 좌표를 제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좌장이신 박현규 한국해사문제연구소 이사장님의 인사말씀으로 좌담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박현규 이사장=우선 바쁘신 가운데도 해양한국 40주년 기념 좌담회에 참석해주신데 대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무엇보다 외항해운을 비롯해 해운대리점, 복합운송업 등 해운산업계의 원로로서 지금도 개별기업의 회장과 관련협회의 장으로 활동하며(또는 역임) 해사산업계 발전을 이끌어온 산증인이신 분들을 한자리에 모시게 되어 반갑습니다. 현재 해운산업이 위기에 처하게 됐지만 해운 5위, 조선 1위의 해사산업계의 세계적인 지위는 여기 계신 원로분들을 비롯한 많은 해사산업계 종사자들의 열과 성을 바탕으로 이룬 결과라고 봅니다.
 

각 해당업종에서 건실한 기업을 영위하고 계시고 또한 관련업계의 협회장을 지내신 분들을 모셨기에 오늘 좌담에서 패널분들의 개인 또는 개별기업 과거와 현재를 통해 해사산업계 상황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현재 우리 해운업계의 문제점과 개선점은 무엇이고 앞으로 지향해야할 바는 무엇인지 원로분들의 고견을 듣는 귀한 자리가 될 것입니다. 패널여러분 오늘 좌담 안건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저도 나름대로 해운산업계의 발전방향에 대한 제언을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사회: 오늘 좌담회는 패널분들이 해사산업계에 입문시기와 해당업종의 상황을 비롯해 해운계 종사기간 가장 어려웠던 때와 보람있었던 때를 회고하고, 과거 어려운 시기를 극복한 동력을 짚은 뒤, 현재 세계 5위 한국해운의 성장동력과 現 위기의 원인,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과 업계 후배(또는 종사자)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 그리고 해양한국과의 인연에 대한 말씀으로 나누어 진행하겠습니다.
 

오늘 좌담이 현안에 대한 세세한 사항까지 논의하는 자리는 아닙니다만, 40년 이상 해운업계에서 종사하며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건실한 기업을 운영해오신 원로분들을 모신 만큼 패널들의 개인적인 경험만으로도 해사산업계에 교훈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럼 해사산업계 입문시기와 해당업종의 상황, 그리고 어려웠던 때와 보람있었던 때를 회고해보겠습니다. 먼저 해사산업계의 중추인 외항해운 분야는 흥아해운의 회장이시며 한국선주협회의 회장이신 이윤재 회장께서 말씀해주시겠습니다.

 

1970년초 흥아 입사 43년째 근무,
3척 소형선 운영시기 무역성장 시동시절

 
 
이윤재 회장= 먼저 해양한국 창간 4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저는 해운회사인 흥아해운에 1970년초 입사해서 지금까지 43년째 한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석탄부두 등 부산에서는 큰 배를 많이 봤습니다만, 흥아해운에 들어와보니 작은 선박가 주종이었습니다. 500톤급 등 잡화를 싣고 한신라인인 오사카, 고베를 운항하던 시절이고 우리회사는 모지에 선박을 배선했습니다. 제가 입사시절 흥아해운의 선박은 3척에 불과했습니다. 큰 선사들 보기에는 장난감 같은 규모이죠. 배가 작으니까 장난감 가지고 장난하는 그런 기분이 들었던 때였습니다.


당시는 우리나라 전체로 봐서는 무역이 한창 성장하기 위한 시동이 걸리는 때였어요. 당시 우리나라가 교역하는 거래처는 주거래처인 일본을 비롯해 아프리카 등과의 교역 제품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제품들이 서울 근교에 있는 공장에서 들어오는데, 수출화물 특성상 주로 밤 12시에 화물이 부두로 들어왔습니다. 당시는 통행금지가 없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주로 밤 12시에 화물을 싣고 부두로 옵니다. 그런데 직원수도 얼마 안되니까 사원들이 모두 그 시간부터 부두에서 화물을 받아서 서류를 작성하고 선적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근무환경에서는 여직원들이 가장 문제였어요. 당시 여직원이 2명 있었는데, 매니페스트를 작성하고나면 귀가를 못하고 새벽 4시나 돼야 집으로 가게 되곤 했습니다. 그 일로 상관한테 혼이 나기도 했습니다. 당시는 전화가 없는 시대였으니 여직원이 집에 못들어가게 되면 아침에 그 부모가 회사에 찾아와서 딸을 밤새도록 일을 시켰다고 항의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로 인해 제가 직접 타자를 배웠습니다. 매일 아침 1시간씩 일찍 출근해서 타자공부를 해서 업무를 하던 그런 시절을 보냈습니다. 당시에는 배도 부족했기 때문에 배를 짓고 조금씩 성장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제가 해운업계에 입문한 70년대초 외항해운업계의 현실이었습니다.

 

해운항만청과 해양수산부의 설치가 해운 성장동력의 밑거름 됐다
돌이켜보면, 해운항만청이 생기고 당시 대형선사에 대해서 국가가 훼이버를 주었습니다. 대형선사의 기준은 선박규모가 어느 정도인지와 거래은행과의 자금규모는 어느 정도인지 등 몇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이를 충족하면 정부가 지원을 해주는 식이었습니다. 그 때 각 회사에서 서로 앞다투어 배를 사곤 했습니다. 그때는 금융권에서도 잘 협조를 해주어서 선박을 많이 매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회사도 분에 넘치는 일을 하게 된 겁니다. 2만톤 벌크선 3척을 샀는데 그이후 얼마지나지 않아서 불황이 닥쳐왔습니다. 너도나도 할 것없이 망하게 되는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 시기가 바로 해운산업합리화 시기입니다. 82년 83년도 즈음이지요. 이를 계기로 해운산업이 재편된 것입니다. 그 당시가 제일 힘들었던 시기였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그때가 흥아해운으로서는 가장 어려웠던 시기였고 저 또한 그랬습니다. 흥아해운은 결국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다른 회사들도 통폐합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해운업계 모두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보람있었던 일은 우리나라 해운 전체로 볼 때 해양수산부가 생긴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흥아해운이 법정관리서 해제된 것이 가장 보람 있었습니다.

 

 
 

사회: 같은 주제에 대해 마상곤 회장님, 정은구 회장님, 최재수 전무님, 신태범 회장님 순으로 계속 좌담을 진행하겠습니다.

 

76년 창업 해양한국과 비슷한 나이, TSR업무로 시작 대리점업으로  전환

 
 
마상곤 회장= 우선 해양한국은 창립 37주년인 우리 협운과 연배가 비슷합니다. 해운업계의 어려운 일 좋은 일을 같이 경험하며 여기까지 와있는 해양한국의 40주년을 축하드립니다. 제가 해운업계 들어온 것은 해양대학을 졸업했기에 당연히 제 갈 길을 찾았던 것입니다.

 

1964년 졸업했는데 봄에 졸업해서 겨울까지 직장을 찾지 못하다가 그해 12월 부산의 성창해운에서 신입사원 공개채용에 응시했습니다. 영어시험 하나만 보는데, 시험을 치르고 3일후 입사통보를 받았어요. 당시도 취업난이 심해 취직을 못하던 터라 하느님이 주신 천직이라 생각하고 너무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실무자 때부터 죽어라고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이윤재 회장님도 당시 같이 부산에서 근무하며 서로 일을 도와가며 일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성창기업은 합판제조 수출상사이며 그 자회사인 성창해운은 합판제조원료인 원목수입에 필요한 원목선을 보유하고 운송을 담당했습니다. 당시 일본 K라인의 원목선을 주로 쓰다보니 K라인의 한국대리점도 동시에 맡았어요. 성창해운은 자사의 원목선 운항과 함께 K라인의 대리점까지 하는 그런 회사였습니다. 정기선 대리점은 수출합판과 신발, 섬유 등 미주지역 수출화물을 취급했습니다.

 

당시 성창해운은 신설회사이어서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대학선배이신 정영현 부장님을 모시고 제가 실무자로서 급사 1명과 팔방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어려운 일은 닥치는데 사람이 없으니 북치고 장구치고 혼자서 동서남북 뛰었던 시절이었어요. 명절 여름휴가 한번 쉬지 못하고 늘 회사에 나와 근무할 정도로 일이 많았지만 그로인해 많이 배우고 공부하게 됐습니다. 성창해운은 합판 수출 증가로 인해 당시 일취월장 성장했습니다.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25살에 입사한 저는 31살에 차장급인 부장대리로 승진했습니다. 고속승진이었죠. 지금 생각하면 너무 보람있었고, 그것이 제가 해운업계의 개인회사를 창립해서 일을 성취하는 기반을 마련한 시기였어요. 고생이 됐지만 보람이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K라인 대리점으로서는 정기선 업무를 하는 중에 컨테이너 사업이 시작됐어요. 컨사업은 CY, 트럭, 운송 등 선주가 요구하는 시설을 준비해야 하는데, 성창은 당시 합판제조업과 원목선 운송업무를 위주로 하다보니 선주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K라인 측에서 이를 불편하게 여기고  대리점을 천우사로 이전하게 됐습니다. 이 시절 담당 실무자로서 동경 본사에서 1개월간 연수를 받았고, 컨사업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연수를 받은 제가 반드시 천우사로 옮겨갈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그러나 천우사와 접촉하던중 31살에 차장급인 제가 천우사의 조직체계에 맞지가 않아 직급 조율과정에서 젊은 패기로 이직을 거절해버렸습니다.

 

 
 

그와중에 당시 원목선 운항선사이던 협성선박에서 자리가 나 협성선박으로 전직했고, 처음 부산에서 근무할 당시 원목선을 맡아서 일을 하다가 협성선박에서 갖고 있는 원목선 외에도 소형선박과 석탄 운반선 관련 영업을 맡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부산에서 서울의 중개업 회사들과 일을 하게 되고 이를 지켜본 왕상은 회장님께서 이 사람 부산에서는 안되겠다고 하며 서울로 보내야 겠다 해서 서울로 발령이 난 것입니다. 서울 지리도 모르기 때문에 처음엔 황당했지만,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당시 반도호텔에서 한진빌딩까지 거리가 지척이라는 것도 몰라 택시를 탈 정도로 서울지리에 어두웠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부산에 계속 있었으면 협운해운이라는 회사를 창립할 수 있었겠나, 역시 서울은 무대가 다르니까 참 잘했단 생각이 듭니다. 그때 발령난 것이 내 인생에 전환점이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협성선박의 서울 사무소장에 발령받아 이런저런 일을 했습니다. 협성그룹은 선박대리점 회사로서 외국의 큰 선주중 협성과 관계하지 않은 회사가 없을 정도로 일이 많았습니다. 이후 윌헬름슨 등의 대리점 일도 맡게 되었습니다. 저는 성창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리점을 맡게 되었어요. 이후 스와이어 그룹의 다른 선주들과 일을 합치면서 영창해운이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협성 측의 임원대표로 영창해운에 파견돼 일하다가 36세에 협운해운을 시작했습니다. 국내 포워딩 업무가 처음 시작된 것이 76년인데, 당시 스위스에 있는 한 포워딩회사가 방한해 시베리아철도수송 업무(TSR)를 할 한국대리점을 물색하던중 협성에서 맡게 되어, 그 일을 제가 맡게 됐습니다.

 

시베리아를 경유해 컨테이너를 유럽으로 운송하는 일인데, 그 당시 우리나라는 소련과 국교도 맺지 않은 상태여서 리스크가 있었지만 비전이 있을 것이라는 제안과 함께 운송루트 자체는 새롭다는 생각에 해보겠다고 결심하고 TSR 포워딩업무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10개 20개 하다가 점점 물량 늘어나면서 재미가 붙었습니다. 또 때마침 스위스회사가 저에게 전속으로 일해줄 것을 요청하며 월급쟁이 하지 말고 독립해서 회사 만들어서 같이 하자고 꼬드겼어요. 당시 제 나이가 35살. 너무 젊어서 고민하는 와중에 점도 봤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보는 곳마다 좋은 점괘가 나왔어요. 그 나이에 영창해운에서 상무직으로 월급도 많고 재밌게 할 수 있어서 불만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고민이 되더라고요. 회사 창립시 자금까지 빌려주겠다고 하고 집사람이 본 사업점괘도 좋고 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회사의 창립을 결정하게 됐습니다.

 

부당처우 선주에 먼저 해약통고 사례외 큰 어려움 없어
회사를 그만두는 일이니 왕 회장님께 양해를 구하는데 협성으로선 제가 중요한 일을 맡고 있었기에 처음에 거절하시더군요. 포워딩 그거 잘 안된다면서 국교도 없는 상황에서 위험하다면서 “자네는 회사 그만두지 말고, 회사는 만들어서 직원들에게 일을 맡기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6개월을 사표를 수리해주지 않아서 조그만 사무실에서 직원 3명을 고용해 6개월간 사업을 진행했는데 그 일이 재미가 있더군요. 그래서 6개월 후에 왕 회장님께 “열심히 하면 될 것 같다”면서 정 안되면 제가 배를 타는 한이 있더라도 발벗고 뛰어보겠다고 해서 완전히 독립하게 됐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양쪽일을 겸하도록 해준 왕 회장님은 정말 고마운 분입니다. 그렇게 1976년에 협운해운이 본격적으로 설립됐습니다. 협운은 현재 선주별 해운업종 경쟁을 피하기 위해 별개 대리점사 3개사를 자회사로 두어 분리경영을 하고 있으며, 그중 2개사는 5:5의 합작사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또한 총 취급 선박척수는 월간 150척, 연간으로는 1,700척 가량 처리하고 있어요.


37년간 회사를 운영하면서 크게 어려웠던 점은 그다지 없었어요. 단지 아프리카쪽 서비스하는 홍콩 선주가 있었는데, 총 경영을 맡고 있었던 사람이 대리점을 종처럼 생각하고, 제대로 대리점답게 처우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항비도 제때 지불해주지 않는 등 점잖치 못한 선주와는 거래를 할 수 없겠다 싶어서 대리점 계약에 대해 우리측에서 해약통보를 한 적 있었습니다. 대리점이 선주에게 해약을 통보한 일은 참 드문 일입니다. 그 정도가 어려웠던 점으로 기억됩니다.


반면 보람된 일은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란 말이 있듯이, 제가 영창해운에서 일하던 시절 노르웨이선주인 윌헬름슨에 중동서비스를 제공하는 윌라인이 있었습니다. 윌라인은 일본, 대만, 홍콩 서비스는 있었지만 한국에는 서비스를 하지 않던 상황에서 국내 유치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영창 재직시에는 일이 성사되지 않다가, 제가 독립한 이후 오히려 그 회사에서 먼저 서비스 의사를 타진해왔습니다. 독립해서 시베리아 철도수송 포워딩 업무만 하다가 대리점을 시작한 것은 바로 윌라인의 업무였어요. 그러나 협운은 대리점 면허가 없어서 당시 면허를 보유하고 있던 협성을 통해 계약을 진행해 5%의 커미션중 협성에 2%를 면허수수료로 지불하고 저는 3%를 얻어서 대리점일을 시작했었죠. 중동에 한창 건설붐이 일어나던 시절이었기에 물량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벌크화물의 경우 한척에 3,000톤 싣겠다고 해도 배가 들어오면 5,000톤씩 집화가 돼 스페이스를 더 달라고 할 정도로 일이 잘 됐습니다.

 

그 이후 1년이 지난 시점에서 1년간 실적을 가지고 해운항만청에 대리점 면허를 신청했다. 이것이 대리점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됐으며 저의 큰 보람이었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당시 제가 일을 하겠다며 의욕적으로 문을 두드리지 않았으면 그 일이 제 몫이 될 리가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맡고 있는 모든 선주 대리점은 해외 지인의 추천으로 시작한 것이지 단 한 건도 남의 일을 빼앗은 것은 없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대리점업을 하며 정도경영을 한 나름의 보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65년 극동해운 입사 대리점업무, 75년부터 포워딩업

 
 
정은구 회장= 1965년 7월 극동해운주식회사에 입사했습니다. 당시 극동해운은 민간해운기업으로서 가장 큰 회사였어요. 극동해운은 사선을 보유하고 있었고 후에 극동선박으로 독립한 대리점부서도 함께 있었습니다. 회사는 반도호텔, 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 위치해있었으며 당시 해운업계에서 최강국이던 미국의 USLine, APL, LYKES PFEL 등 큰 선사들의 대리점을 맡고 있었습니다. 전 극동해운에 제1기 공채사원으로 입사해 대리점부에 발령이 났으며, 특히 고향이 부산이어서 부산사무소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해운업계에 입문한 특별한 계기는 없었지만 종교와 교육이 나름의 계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85년의 유서깊은 기독교 집안 출신이기에 미션스쿨을 다녔는데, 미션스쿨인 계성고등학교 시절 미국 선교사에게서 영어를 배우면서 해외에 대한 개방적· 친화적인 인격이 형성됐으며 국제 비즈니스인 해운회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또한 어릴 때 울산 방어진과 기장 바닷가에서 자랐기 때문에 바다를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1973년 세계적인 포워더인 퀸앤나겔(KUEHNE & NAGEL)의 제의로 극동선박이 한국대리점을 맡았으며 이후 아세아익스프레스를 설립하게 됐습니다. 당시 한국에는 포워딩업무를 수행하는 회사가 없었기에 퀸앤나겔이 들어오기까지 포워딩에 대해 전혀 몰랐었습니다. 저도 아세아익스프레스로 자리를 옮겨 상무로 1975년초부터 76년 6월까지 근무했으며 포워딩과의 인연은 이때 시작된 것입니다. 미국선사의 선박대리점 업무를 9년 하고 아시아익스프레스로 옮겨서 1년 6개월가량 포워딩 업무를 배웠습니다. 당시는 포워딩면허제도가 없어 업무상 가장 유사한 외국선박대리점이 외국 포워더의 대리점을 맡아서 해외송금문제와 노미네이션 화물 B/L 발행 등의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이후 1976년 10월 해운항만청이 외항해상운송부대사업면허 요령에 따라 26개 업체에 해상운송주선업면허를 발급해주었으며 79년 말까지 3차에 걸쳐 50개사가 포워딩 면허를 발급받았어요.


그러나 L/C상의 'Clean On Board Ocean B/L Negotiable' 규정으로 은행 네고의 어려움은 있었습니다. L/C에 포워더 B/L 노미 시만 네고가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이후 1984년 ICC 신용장통일규칙 개정에 따라 FIATA B/L의 은행네고가 가능해졌고, 미국의 1984년 해운법(Shipping Act)에서 프레이트 포워더의 복합운송인화를 실체화시킨 NVOCC 개념이 제도적으로 수용돼 해상운송주선업의 복합운송체제 구축이 더욱 촉진됐습니다.

 

한국 포워딩업 3,482사 매출 2조5천억 규모로
성장했으나 “지금이 가장 어려운 시기”
2012년말 기준, 국토부에 등록된 국내 포워더는 3,482개사입니다. 이중 한국국제물류협회에 가입된 포워더는 730개사 정도이며, 포워딩계 종사자는 2009년 기준 2만 1,551명, 이들이 이룩한 매출액은 2조 5,383억 9,100만원· 부가가치 1조 3,949억 600만원 정도입니다. 해상운송주선업계는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장확대됐습니다. 지금은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 포워더들이 없는 곳이 없어요. 이처럼 포워딩업이 성장한 것이 가장 보람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포워딩업계에 가장 어려운 시기는 지금이라 생각합니다. 포워딩업계는 초창기에 L/C 때문에 어려웠으며, 면허제에서 등록제로 전환되고 해외시장이 개방되면서 과거 2-3명으로 시작했던 포워딩업이 대기업들의 자회사인 2자 물류 포워딩회사들이 속속 설립되고 지금은 그들의 포지션이 점점 커지는 등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이 중소형 규모의 포워딩업계 상황이라는 생각입니다.


퀸앤나겔에서 상무로 일하면서 초기에 L/C문제로 힘들기는 했지만 물량이 증가하고 수월하게 포워딩 업무를 했습니다. 삼영익스프레스는 1976년 10월말에 포워딩업 면허를 받았습니다. 당시 포워딩업계에서는 포워딩이 작은 규모의 회사가 할 일이 아니라며 “한국에서도 포워딩업체가 나올 수 있느냐”며 부정적인 시각이 일반적이었어요. 그러나 저는 퀸앤나겔 일을 하면서 포워딩업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창업이후 가장 어려웠던 때는 1986년부터 88년까지 미국 FMC에 의해 당사 로스엔젤레스, 뉴욕, 시카고 사무소가 조사를 받았고. 홍콩 OOCL, 일본 SHOWA, 대한선주 등으로부터 리베이트 수수혐의를 받았던 시기입니다. 당시 전직 FMC 조사관 출신의 유태계 변호사 안내로 2차례 FMC-WASHINGTON을 방문해 해명함으로써 일을 해결했습니다. 선사의 FMC FILE RATE와 당사(삼영)의 지불 운임액의 차이가 너무 커서 리베이트 수수 의심을 받게 된 것인데, 이는 리베이트를 받지 않고 디스카운트를 받아 운임을 지불한데서 발생한 문제였습니다. 당시 회사는 자금난으로 PENALTY 부과시 사무소를 폐쇄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는데, 다행히도 페널티 지불없이 문제가 잘 종료됐습니다. 이 업을 영위하며 가장 보람있는 일은 국내외에서 성공한 삼영출신 포워딩 경영자를 만날 때입니다.

 

67년 교통부 항정계장으로 해운과 인연, 무연탄 파동 바지선 8척 건조로 정상화

 
 
최재수 전무= 저는 1962년 교통부에 사무관으로 발령을 받았으며 처음 육상운송을 담당했다가 67년에 항정계장으로 자리를 옮겨 우리나라 항만관리업무를 총괄하게 되었습니다. 항정계는 지금의 항만운영국 업무와 같은 기능을 했어요. 이것이 제가 해운업계와 인연을 맺은 계기가 됐습니다. 그이후 해운업계와의 인연은 계속됐습니다. 73년부터 3년간 교통부에서 외항과장을 지내며 외항해운과 인연을 맺었고 그 이후 79년부터 86년초까지 선주협회 전무이사를 역임했고 86년부터 2년간은 두양상선의 부사장을 지내며 해운업 경영에도 참여했어요. 이후 88년에는 한국해양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해운관련 학문과의 인연을 쌓기도 했습니다. 또한 교수 정년이후에는 한국해사문제연구소의 소장직을 역임하며 과거 해운항만 관련 정부해운정책 입안경험, 선주협회 임원, 해양대학 교수로서 얻은 경험과 학문적인 소견을 바탕으로 한 많은 글을 해양한국을 통해 관련업계에 전달해왔습니다.


처음 해운을 시작했을 시절 서울에 무연탄 파동이 났는데 그때 당국자로서 도움을 준 것이 보람된 일로 기억납니다. 묵호에서 인천과 부산으로 무연탄 가져와야 하는데, 무연탄을 배로 실어와도 하역을 못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난리가 난 거죠. 서울은 화차에 싣어왔서요. 어느 토요일 오후 퇴근길에 우연히 장관을 만나 수행하게 됐는데 당시 무연탄 파동 대책마련을 위한 경제장관회의가 긴급소집된 자리였고, 인천항과 부산항의 경우 무연탄을 하역할 수 있는 적절한 부두가 없었기 때문에 본선에서 바지선에 하역해서 연안으로 운송하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지가 없어서 하역이 늦어져 400톤급 철 바지를 8척을 만들어 4척은 부산, 4척은 인천에 배치하라는 결더 정이 그 회의에서 이루어져서 제가 그 업무를 담당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바지에 대해서 전혀 몰랐어요. 그래서 인천에 가서 “바지 필요한 사람이 누구있나”고 공고를 했더니 선광공사의 심명구씨가 이유를 묻더라고요. 이러저러한 여러 사연을 겪으면서 산업은행의 자금으로 바지선 8척을 건조해서 인천항과 부산항의 무연탄 하역의 물꼬를 텄습니다. 이것이 제가 바다와 항만, 선박과 인연을 맺은 계기가 된 것입니다. 당시 이 일을 추진했던 장기영 장관은 오픈마인드를 가지고 있었으며 추진력도 대단한 분이었어요.


한일해운협정체결을 백지화해 웨이버제도를 지킨 것이 자랑거리

또다른 저의 자랑거리는 한일해운협정문제 처리건입니다. 박현규 이사장님과 신태범 회장님도 잘 아시는 이야기입니다. 한일국교 정상화가 되고나서 1965년에 한일 해운협정문제가 시작됐습니다. 한국선사의 성장에 중요한 정책이 웨이버제도인데 한일간 웨이버는 65년에 시작했는데 한일간 국교가 정상화되자 일본이 이에 항의하면서 한일해운협정을 체결하자고 나왔어요. 해운협정에 자유적취의 원칙을 두어 웨이버를 무력화시키자는 것이지요. 저는 그 문제와 전혀 관계가 없었는데, 한번은 해운국장실에 갔더니 선주협회 회장단이 한일해운협정 체결을 반대하기 위해 해운국장을 찾아왔어요. 해운국장이 해운자유의 원칙이 국제법과 같은 원칙이고 그에 따라 일본과 한일 해운협정을 체결하려 하는데, 이것을 반대하는 무식한 자가 있느냐며 야단을 치더라고요. 선주협회 회장이 해운국장실에서 논의하는 것으로 보아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이튿날 해운국장이 350명의 익사자를 낸 ‘남영호’여객선 사고로 인해 경질됐고, 정용훈씨가 신임 해운국장으로 부임해왔습니다. 당시 저도 해운국의 서기관이었기에 정 국장께 선주협회 회장을 꼭 만나보라고 진언을 했습니다. 해운국장이 부임한 이튿날 담당사무관이 일본에서 한일해운협정에 싸인을 하러가기로 됐있었어요. 그런데 그것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 선주협회 회장단을 만나 내용을 들어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래서 정영훈 국장이 회장단을 소집해서 내막을 다 듣고는 담당자에게 일본에 가서 해운국장이 바뀌었는데 도장 찍지 말라더라며 싸인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고 한일간 해운협정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어 2-3년이 지나갔습니다.

 

그 이후 73년 8월에 제가 외항과장 발령받아서 와보니까 당시 그 문서가 곧 싸인을 앞둔 사안으로 제 책상에 와있더군요. 잘못하면 제가 매국노가 될 소지가 있는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고심하고 있던 차에 김대중씨 납치사건이 발생해 일본과의 대화가 단절되어서 한달 가량 이 문제가 공전이 됐어요. 그러던 중 하루는 해운공사에 근무했던 김지수씨를 통해 “해운자유원칙은 선진국이 고집하는 원칙이지 국제적 원칙이 아니다”라는 일본의 ‘카이운’이라는 잡지 기사를 접하게 됐습니다. 그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니 라이너 코드가 있어서 해운동맹 쉐어링에 4:4:2 원칙이 있었는데 그걸 제네바에서 그 다음달에 채택회의를 하게 돼있었어요. 4:4:2원칙은 개도국이 해운동맹 때문에 피해를 받고 있다면서 선진국을 공격하고 있고 이에 선진국은 이러저러하게 방어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가지고 난생 첫 해외여행인 일본에 갔습니다. 서명할 생각은 없이 참석했는데 간단한 안건이기 때문에 우리측에서 나 혼자 갔고 일본 측은 7~8명이 나왔더군요. 일본은 이 협정을 통해 웨이버제도를 폐지하도록 할 속셈이었지만 제가 그간 관련문서를 검토해보니 일본이 해운자유의 원칙이 국제원칙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고 아직 제네바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데 어떻게 국제원칙이라고 할 수 있느냐며 따져 묻고는 제네바회의에서 결정되는 원칙에 따라 한일해운협정을 맺자고 역 제안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들끼리 의견조율할 일이 있다며 정회를 요구하고 30분후에 회의를 재개하자고 해놓고 3시간 후에 회의장으로 다시 돌아와서 회의가 성과가 없을 것 같으니 끝내자고 하더군요.

 

이렇게 해서 한일해운협정은 백지화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 오늘날까지 한일해운협정은 없었습니다. 그로인해 우리나라 해운은 적어도 한일 구간에서는 나중에 조사해보니 98%를 한국선박이 싣었고, 2%는 미국에서 들어오는 선박이 일본을 경유하는 선박이었어요. 그 이후 1990년대까지는 100% 한국선박이 운송했습니다.


제가 해운관련업과의 인연 속에서 일을 해오면서 어려웠던 때는 불황으로 업계가 도산할 때 정부로부터 불황대책을 이끌어내던 시절이었습니다.

50년 해운공사 입사로 입문, 선원과장 3년 공정한 직무

 
 
신태범 회장= 저는 1950년 3월 10일 해양대학을 졸업해서 그해 5월 해운공사에 입사했어요. 12년간 해운공사에 근무했는데 6년은 배를 타고 6년은 육상에서 근무했습니다. 해운공사 재직시 남궁연 사장 시절에 선원 1계장으로 임명됐는데, 당시 그 자리는 전임자들이 단기간에 자주 바뀌었던 직책이었습니다. 저는 공정하고 깨끗하게 해보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선원 1계장 자리를 맡아서 했으며 이후 1년 6개월이 지난 후에 자진해서 그 자리를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나 그 1년 뒤 회사에서 다시 선원과장으로 발령을 받음으로써 또다시 1년 반을 선원관리업무를 했어요. 해운공사에서 선원관련 업무만 3년을 했던 것이죠, 당시 해운공사에서 관리하는 선원이 1,300여명에 달했습니다. 처음에 마음먹은대로 사심없이 청렴 공정하게 직책을 수행했으며 좋은 평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이후 해운업계에서 좋은 사람들과 많은 일들을 이루어내고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는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이후 1962년 해운공사를 퇴직할 당시 직책은 부산지역의 선원과장이었어요. 해운공사에서 선원과장을 그만둘 당시 묵호에 ‘군산호’라는 배가 있었는데, 그 배를 수리하게 됐어요. 당시 해운공사 사장은 해운과 선박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사장실에 가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곤 했습니다. 당시 조선공사는 일감이 없는 시절이었기에 군산호의 수리는 가장 큰 고객이었습니다. 수리기간은 보통 3개월인데, 군산호 수리과정에서 국내에 수리검사를 할 기술이 없어서 미국선급인 ABS에 입급해서 수리 검사를 받았어요. 당시 ABS의 박남석 검사관의 검사하에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새로운 시스템아래 선박수리가 진행됐고 별 문제없이 잘 처리됐습니다.


그 시절 일본은 2차대전이후 선박 확보를 위해 계획조선을 시작했고, 계획조선을 통해 조선소에서 건조한 선박을 해운회사에서 인도받아 해상운송에 투입함으로써 해운과 조선이 동반 발전하더군요. 이를 보고 저는 우리나라도 계획조선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이를 제안하기로 하고 함께 추진할 동지를 수소문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박현규 이사장이 당시 김철수 조선과장과 초등학교 동기라고 해서 우리 3인이 모여 합의한 것이 우리나라 ‘계획조선의 태동’이었습니다. 조선공사(당시 이영진사장)에 계획조선을 제의해 성사는 됐는데, 그 당시 다른 선주들은 신조선 건조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어요. 그래서 계획조선은 하기로 했는데 신청자가 아무도 없었던거죠. 당시 우리나라의 선복량이 총톤수 2,600톤 정도였으니 그럴 수 밖에요. 그렇게 신청자가 없어서 그럼 내가 해보자는 생각을 하고는, 동남아해운의 양재원씨를 찾아가서 계획조선 신청을 제안했어요. 그리고 부산에 계셨던 신중달씨를 합류시켰습니다. 이 둘이 자금을 대는 걸로 하고 저는 상공부 승인관련 업무를 담당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자금을 가장 많이 조달한 신중달씨 개인 이름으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상공부 승인을 받아 조선소에서 배를 건조하게 됐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계획조선의 1차선인 ‘신양호’입니다. 그러던중에 하루는 고려해운 이학철 사장이 계획조선에 대해서 문의해왔고 상세히 가르쳐주고 당시 조선공사 김철수씨에게로 데려갔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고려해운이 2차 계획조선을 승인받았습니다. 그러나 1차 계획조선 자금은 결정이 되었는데 2차 자금은 예산문제상 단기간에 성사되지 않으니 1.2차를 동시에 추진하자고 해서 함께 진행했습니다.


당시는 조선공사가 신조선 경험이 없었기에 배를 어떻게 지을지도 잘 몰랐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일본잡지를 통해 조사해 보니, 설계에 비용이 많이 들었어요. 일본 조선의 경우로 당시 설계비가 1건에 4만 9,000엔정도였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그러한 배가 많이 건조돼서 부산에도 많이 들어왔습니다. 일본 배가 많이 들어올 때는 3~4척이 함께 입항해 있을 때가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조선공사의 기사를 대동하고 부산항에 입항한 일본 계획조선 건조 선박을 찾아가 주엔진과 양하기 등을 상세히 조사해 그중 가장 많이 쓰는 엔진을 이용하는 것으로 했어요. 그리고 신양호 건조과정에서 ABS와 한국선급(KR) 두곳에 모두 입급했습니다. 신양호는 KR 입급 1호선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양호 건조과정에서 ABS와 듀얼로 입급 검사를 받음으로써 KR도 기술습득에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렇듯 우리나라 계획조선을 처음으로 제안하고 성사시킨 일은 지금 생각해도 뿌듯하고 보람있는 일이었습니다.

 

계획조선 제안, 인천급수료 정상화, 도선료·선급비 정상화에 기여 보람
당시는 밤만 되면 도둑들이 페인트를 훔쳐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 선장이던 서병기씨와 제가 둘이서 밤잠을 안자고 페인트 감독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다음에 계획조선 2차선인 ‘동양호’에 대해서 이학철씨가 혼자 감당하지를 못하고 지분의 반을 내놓았습니다. 그래서 이왕 시작한 거 2척 가지고 하자고 결정하고 그 지분의 반을 우리가 매입했습니다. ABS 검사관의 검사를 통해 만든 배가 잘 지어졌습니다. 1964년 4월에 ‘신양호’가 준공되고 6월에 ‘동양호’가 준공되었어요. 당시 진수식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처음 시작을 신중달씨 이름을 시작하고 사업이 잘 되면 상호를 짓기로 했는데 마침 고려해운의 지분을 매입했던 터라 고려해운 상호를 쓰기로 결정했어요, 이 선박이 나오자 마자 환율이 급등했습니다. 당시 130원이었던 환율이 변동환율로 두배인 255원이 됐고 고려해운은 호황을 맞았어요. 그것을 보고는 우리 해운업자들이 우리 조선소에서 배를 만들어 운용하니 해운이 된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1차 계획조선으로 건조한 신양호는 1,600gt 2,600dwt급 선박이었고, 이어서 2차 계획조선은 고려해운이, 3차에는 조양상선이 ‘남성호’를 건조했습니다. 당시 남성해운과 천경해운도 1차 계획조선에 합류해 500톤gt, 850dwt급 선박을 신조했고,  여기 박 이사장께서도 4차 계획조선에 참여했으며, 5차 계획조선은 범양상선의 1만 5,000톤급 선박입니다. 조선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서 계획 조선의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이 보람있었던 입니다.


그 이후 고려해운을 보고 많은 선박회사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습니다. 조양상선은 결국 부도가 나서 아쉽습니다. 선박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조양의 대표였던 박효원씨와 함께 선주협회를 통해 많은 일을 추진했고 성사시켰습니다. 당시 해운당국자였던  정영훈 해운국장과 최재수 당시 외항과장은 우리의 정책제안을 적극 수렴해서 많이 실천해주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매달 조찬회를 통해 해운조선정책의 발전방향을 모색했습니다. 그 두분은 해운조선정책이 부재했던 당시 많은 해운조선정책을 이뤄준 공로가 매우 큽니다.


한편 당시 인천에서는 급수를 하는데 부산서는 급수가 안됐어요. 그래서 여수에 들러서 급수하고 인천에서 급수해야 하는데, 인천의 급수회사는 부산이나 여수보다 4배나 가격이 비쌌기에 이의 시정을 추진해서 인천급수 비용을 정상화시켰어요. 또한 도선비의 경우도 미국과 같이 받고 있어서 문제를 제기하고 도선비를 인하하도록 해 정상화시켰으며 선급의 비싼 입급비용도 정상화시켰습니다. 이러한 활동이 지금까지도 참 보람있었던 일로 기억됩니다. 또한 관세협회 회장과 주선업협회 회장, 하역협회 회장 등 3개 해사관련업계 협회장을 지낸 것도 보람된 일이었습니다.  <(2)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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