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해양한국’이 창간 40주년을 맞았다. 누구나 마찬가지이지만 자신이 관여하여 만든 잡지가 40년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감개가 무량한 일이다. 그것도 우리나라에서는 황무지와 같은 새로운 분야의 첫 번째 편집장이 되어 창간한 잡지였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창간 40주년을 맞아 창간 당시의 겪었던 에피소드를 이 기회에 소개해 달라는 것이 현 편집자의 주문이다. 영광스러운 일이고 모처럼 옛일을 회고할 수 있는 기회라 여겨 선뜻 응낙하기는 했는데, 많은 얘기가 머릿속에 뒤엉켜 있을 뿐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

 

해양한국 첫 번째 편집장
1973년 7월 중순 고 윤상송 박사의 부름을 받고, ‘월간 해양한국’ 첫 편집장이 되어 창간호를 만들기로 하였다. 다른 잡지(월간 현대해양)에 근무할 때부터 윤 박사를 알고 있었지만, 함께 근무했던 김효형金孝亨이라는 친구의 소개에 의해서였다. 그래서 8월 1일자로 편집장 발령을 받았지만, 원래는 김효형이 편집장을 맡기로 되어 있었다.
윤 박사는 이보다 앞선 1971년 4월 1일 해운 관련 학자들과 경영인들의 뜻을 모아 ‘재단법인 한국해사문제연구소’를 설립하였지만, ‘한국해사문제연구소’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윤 박사의 뜻과는 달리 해운연구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전무하였거니와, 해운업계의 형편도 연구를 지원할만한 여유를 아직 갖지 못한 때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에서 윤 박사는 당시 소공동에 있던 천경해운의 김윤석 회장(당시는 사장)이 자신의 사무실 반쪽을 할애하여 마련해 준 사무실에서 찾아오는 사람들과 맞아 한담으로 소일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 때 ‘월간 해양한국’의 창간을 권유한 사람이 김효형이었다. 그래서 김효형이 초대 편집장을 맡기로 했던 것인데, 김효형이 잡지 편집에 대한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나를 추천한 것이다.
첫 번째 편집장이 된 나는 간행물 등록 등 잡지 발간에 필요한 행정적 절차부터 밟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나 역시 ‘월간 해양한국’의 창간을 맡기에는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학교에서 해운과 관련된 공부를 한 일이 없거니와 해운에 대한 올바른 지식도 갖지 못하였다. 오늘날에도 젊은이들의 취업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되어 있지만, 그 때에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건설 현장의 잡부로부터 전매청 벙커 시bunker C유 탱크의 제작감독까지 온갖 일을 하다가, 어찌어찌하여 ‘월간 교육연구’라는 잡지의 편집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 뒤 계속해서 ‘월간 현대해양’, ‘코리아 쉬핑 가제트’ 및 ‘포트 뉴스’ 등의 편집장이 되어 창간실무를 맡았지만, 모두 1년 내지 1년 반 정도씩 근무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이처럼 한 직장에서 오래 견디지 못한 것이 나에게 문제가 있었던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당시의 사회에는 직장 내 상하관계에 바람직한 관행이 정착되어 있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 뒤 ‘월간 해양한국’의 모체인 한국해사문제연구소에서 정년을 맞았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고 믿는다.

 

문외한 편집장
어쨌든 나는 해운에 관한 아무런 지식도 갖지 못한 채 ‘월간 해양한국’의 편집장직을 맡았다. 그 때만 해도 나는 나의 그러한 행동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몰랐다. 그만큼 당시의 나는 편집이 무엇인지? 해운이 무엇인지? 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였음은 물론, 깊이 알고자 하지도 않았다.
물론 편집이라는 것이, 일정한 계획 아래 여러 가지 재료를 모아 엮어서 책이나 신문, 잡지 따위를 만드는 일, 또는 영화 필름이나 녹음테이프 따위를 엮어서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일, 신문, 잡지, 서적 등의 제작 과정에서는 원고정리, 제목작성, 지면구성 따위의 일을 말하며,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는 녹화나 촬영한 필름을 잘라내어 재구성하는 것 따위를 말한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러나 그러한 외형적인 것에 대한 막연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을 뿐,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더욱이 해운에 관하여서는 그러한 인식조차 갖지 못하였다. 막연히 여러 잡지의 편집을 맡아 본 경험이 있고, ‘월간 현대해양’이라는 잡지에서 수산과 더불어 해운에 관한 원고도 다루어 보았고, ‘코리아 쉬핑 가제트’나 ‘포트 뉴스’에서 선박 스케줄도 다루어 보았다는 점에서, 해운이 무엇이라는 것 정도는 웬만큼 아는 것으로 착각했다.


그러나 막상 착상작업에 착수해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무엇을 특집으로 할 것인지는 물론, 어떻게 계획을 세운다 한들 그에 알맞은 원고를 누구에게 청탁할 것인지 등등......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인 원고를 어떻게 다듬어서 배열할 것인가? 따위와 그것을 인쇄소에 넘긴 다음, 문선文選과 조판組版 과정을 통해 가인쇄된 교정지의 오자나 탈자를 찾아 교정하는 일이 전부였다. 즉 소프트웨어로서의 편집edit이 아니라, 하드웨어로서의 편집layout에 종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말하자면 몇 달이 지나도록 편집장이라는 역할을 수행한 분은 윤상송 박사였고, 나는 그의 보조자 역할밖에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자질문제가 창간호에서부터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1973년 10월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마침내 인쇄소에서 나온 창간호를 받아들었다. 창간호를 몇 번 만들어 보았지만 창간호를 받아든 순간, 나는 다른 때에는 미처 느껴보지 못한 전율 같은 것이 손을 통해 팔로 전해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건 잠깐이었을 뿐이다. 이내 엄청난 잘못을 발견하고 그 결과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암담함을 느꼈다. 표지에 광고로 실린 해운공사 보유 철광석운반선 浦項號를 浦港號라고 잘못 기재한 것이다. 창간호를 인쇄소에 넘길 때나, 창간호를 받아든 때나 浦港이라는 말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무언가 느낌이 이상해서 지도를 살펴보니, 틀림없이 틀려버린 결과였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잘못을 이실직고하였다. 그러나 윤 박사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아니하고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는 일이라며 껄껄 웃으며, 무슨 방법이 없는지 생각해보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용기를 가져보니 해결책이 저절로 머리에 떠올랐다. 잘못된 글자 위에 은색을 인쇄하고, 그 은색 위에 다시 인쇄하는 방법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대한해운공사는 자기네들 광고를 돋보이도록 한 것인 줄 알고 더 만족스러워 했다.

 

좌담회로 메운 지면
그래도 해운에 관한 나만이 무식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해운에 대한 지식을 자신 있게 피력할 수 있는 필자가 거의 없었다. 누구에게 어떤 원고를 청탁해도 곧바로 응낙을 받기 어려웠다. 당시 해운기업에 몇 년간 근무한 경험으로 실무처리에 능숙한 사람은 제법 있었지만, 해운경영, 해운경제, 해운정책 등의 업무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해운업계에 전문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해양대학을 졸업하고 선박에 승선하여 근무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항해사나 기관사로서 선박운항에 관한 전문가들이었을 뿐이다.


이러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고작 80쪽 밖에 안 되는 해양한국의 지면을 채울 수 있는 원고를 청탁하여 받아들여, 한 달에 한 번씩 간행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판매하는 책의 쪽수를 줄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강구해 낸 방안이 어떤 특정한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그 사안에 관련된 사람을 모아 좌담회를 하고, 그것으로 지면을 메우는 일이었다. 그 결과 초창기, 그러니까 1980년 이전까지의 해양한국의 지면은 거의 좌담회 기사로 채워질 수밖에 없었다.


편집자들만이 느끼는 일이지만, 좌담회에서 오간 얘기를 글로 정리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편집자가 그 옆자리에 앉아 소형 녹음기를 켜 놓고, 백지 위의 좌담회에서 오가는 얘기를 열심히 받아 적지만, 오가는 얘기를 모두 완벽하게 받아 적을 수는 없는 일이다. 어쨌든 현장에서 받아 적은 얘기를 바탕으로 원고지 위에 정리하면서, 미처 받아 적지 못한 부분에 대하여서는 녹음기를 틀어 보충하고는 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은 현장에서 분명히 무슨 얘기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이, 녹음기에서는 전혀 정확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말하기나 글쓰기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나머지 자기의 생각을 정확히 전달하는 능력을 갖지 못하였는데, 글쓰기의 경우 자신을 갖지 못한 사람이 더 많았다.


이처럼 글쓰기에 스스로 서툴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말하기에는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았다. 문제는 그런 사람이 하는 말을 녹음기로 들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별 무리 없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말만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표정과 몸짓, 그리고 분위기까지 한 데 아울러 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이 하는 말이란 비논리적이다. 하기야 당시에는 문장도 오늘에 비하면 도대체 무얼 쓰려고 했는지 알 수 없는 내용이 태반이었다.

 

전화 돌리기
몇 달이 지나면서 어슴푸레하게나마 해운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수준으로 특히 전문분야에서 일정한 개념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는 해운용어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용어에 부딪칠 때마다, 해운공사의 관련 부서에 전화를 걸어 그 용어가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 묻고는 하였다. 왜냐하면 1970년대에는 그래도 몇 개의 외항 해운업체가 활발하게 영업활동을 전개하고 있었지만, 무엇인가에 대하여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해운공사 사람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운공사에서도 단 한 번의 통화로 만족할만한 대답을 들은 기억이 없다. 예컨대 “웨이버 제도가 강화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요, 웨이버 제도라는 게 무엇인가요?” 하고 물으면, “잠깐만 기다리세요.” 하는 대답이 아주 친절한 대답이었다. 짐작하겠지만, “잠깐만 기다리세요.”라는 말은 자신은 잘 모르므로 전문가를 바꾸어주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돌려진 전화는 또 다른 사람에게, 심지어는 열 사람이 넘는 사람들에게 돌려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럼에도 끝내 올바른 대답을 듣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므로 ‘전화 돌리기’가 아니라 ‘송수화기의 돌리기’라고 해야 맞는 말일 것이다. 당시는 이처럼 해운에 관한 전문가가 없던 시대였지만, 아주 친절한 시대였다.

 

바다 위에서 송부된 원고
그러던 어느 날 바다 위를 항해하는 선박에 승선한 어떤 이등항해사가 원고를 보내왔다. 더없이 반가운 일이었다. 그러나 봉투를 뜯어보고는 당황하지 않을 없었다. 항해생활의 즐거움이나 외로움 따위를 쓴 에세이가 아니라 나름대로의 주장을 담은 논설이었다는 점에서 더없이 귀중한 글이었다. 원고지에 쓴 글이 아니라, 노트를 쭉 짖어 볼펜으로 빼곡하게 써 내려간 글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토씨를 제외하고는 모든 낱말이 영어였기 때문이다.


이름을 대면 누구인지 알 만한 사람이었는데, 그 때 그가 모든 명사를 영어단어로 썼던 것은, 그가 아는 어떤 일과 관련된 해운 용어가 우리말로 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저러나 그 원고를 받아들고 당황했던 것은 그것이 어떤 내용의 원고인지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원고에 대한 모든 책임을 필자가 지는 학술지의 경우와 달리, 상업지는 편집자가 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해야 하는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훌륭한 편집자라고 해도 자신이 모르는 내용을 독자들에게 제대로 전달할 재주는 없는 일이다.


이처럼 편집자로서의 책임에 대하여 통감한 나였지만, 지금에 와서도 그때의 그 일을 생각하자니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른다. 편집자로서의 책임을 통감한다는 것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일 뿐이다. 어쨌든 영어로 된 낱말 하나하나를 콘사이스를 찾아가며 우리말로 옮기기 시작하였다. 특수 분야의 용어를 일반 콘사이스에 나와 있는 뜻으로 옮길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그렇게나마 하는 것이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지키는 것으로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수없이 나오는 시퍼shipper라는 말의 뜻을 사전에 찾아보는 것이 몹시 귀찮아 배ship라는 말에 ‘이알’er이 붙은 것으로 보고, ‘선주’로 옮겨놓았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음에도 그 뒤 누구도 이를 지적한 사람이 없었다. 이야말로 더욱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니었는가 생각한다.

 

하수인, 하송인
요즈음에는 하수인荷受人이니 하송인荷送人이니 하는 용어는 생명을 잃은 것 같다. 무역에서 화주貨主, 곧 우리말 ‘짐주인’을 뜻하는 말하는데 짐을 보내는 사람shipper과 짐을 받는 사람consignee을 구분하여 그렇게 불렀다. 해운에 대하여 무언가 아는 사람의 지식은 일본의 서적이나 잡지를 통하여 배운 것들인, 일본책에 나오는 용어가 하수인이었고, 하송인이었다. 한자를 쓰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한자말이었다. 우리나 일본이나 한자漢字를 빌어 만든 조어를 많이 쓰지만, 말을 만드는 방법이 같지 않기 때문에 한바탕 소란이 빚어졌다. 많은 사람이 하수인이나 하송인이라는 용어를 썼지만, 무언가 어색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수하인이나 송하인이라고 했고, 나아가서 수하주나 송하주라고 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수화주나 송화주라고 했다.


따라서 어떻게 하든지 이를 통일해서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수하인이나 송하인으로 쓰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할 근거가 나에게는 없었다. 다만 한자를 바탕으로 한 우리말 조어법으로는 학교에 가는 것을 등교登校라 하고,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것을 하교下校라고 하듯이, 동사의 뜻을 지닌 글자(예컨대 登, 送이나 受)를 명사의 뜻을 지닌 글자(예컨대 校나 荷) 앞에 둔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수하인과 송하인이라고 할 때 하荷라는 글자가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즉 수하인과 송하인을 뭉뚱그려 화주, 짐주인이라 하지 않고, 하주荷主라고 하였는데, 그렇게 말하는 경우 무슨 특별한 뜻이 있는가? 의문이었다. 그래서 여러 옥편을 찾아보았는데, 하荷라는 한자는 ‘짐을 어깨 따위에 메다’라고 말할 때의‘메다’라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일본인들이 ‘니모츠’荷物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러하다고 해도 하주라는 말은 아무래도 우리의 관습에 익숙한 말이 아니었다.


사전을 찾아보면 ‘하주荷主란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해 꾸려 놓은 물건인 하물의 주인을 일컫는 말이고, 우리가 관용적으로 써 온 화주貨主라는 운반할 수 있는 유형의 재화나 물품을 통틀어 이르는 화물의 임자를 가리키는 말이므로, 하주나 화주란 같은 뜻을 지닌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습을 따라 화주로 통일하여 쓰기로 마음먹고 그렇게 썼다. 위에서 얘기하였듯 나름대로의 고집이었다. 그러나 끝내 송하인이나 수하인이라는 말까지 송화인이나 수화인으로 바꾸어 쓰지는 못하였는데, 그만큼 자신을 갖지 못한 탓이었다. 이 점 확실한 연구가 있기를 기대한다.

 

책이 나왔으니 찾아 가시오
‘월간 해양한국’이라는 특수 전문지를 편집하는 편집자가 느끼는 가장 큰 애로는 책이 간행될 때마다 다루어야 할 이슈issue를 과연 제대로 다루었는가? 에 대하여 스스로 검증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물론 당시의 현실에서는 대중성을 지닌 다른 잡지라고 해서 무슨 과학적 검증 방법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대중적인 잡지들은 수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어서 독자의 의견을 들을 수 있었지만, ‘월간 해양한국’의 경우에는 독자도 다른 잡지에 비하여 소수였고, 그나마 ‘월간 해양한국’의 내용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독자도 거의 없었다.
그만큼 ‘월간 해양한국’ 독자의 가장 큰 부분을 구성하고 있으리라 생각되는 해운업계 종사자의 수 자체가 적었다. 따라서 그들은 잡지의 지면을 뒤져보기도 어려울 만큼 자신의 업무를 처리하는 데에 바빴고, 혹 잡지를 뒤지다가 어떤 의문 사항에 부딪친 경우에도, 그러한 의문이 과연 타당한 의문인가에 자신을 갖지 못하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덧붙여두어야 할 사항은 ‘월간 해양한국’이 창간된 이후 석 달인가 넉 달이 지나기까지, 책이 나오면 그것을 독자들에게 배달하든가 우송해야 마땅한 일이었음에도, 해운회사에 전화를 걸어 책이 나왔으니 찾아가라고 통고했다는 웃지 못 할 일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월간 해양한국’에 종사하는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발행인인 윤상송 박사를 비롯하여 상술한 김효형이 업무부장을 맡고 있었고, 자격이야 있든 없든 편집장을 맡은 나에게도 보조 직원 한 사람 없었다. 이외에 경리를 맡은 여직원 한 명 등 도합 4명이 전체 인원이었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지만, 책이 나오면 윤 박사가 해운회사의 높은 사람(최저 부장급)에게 책이 나왔다고 전화를 하면, 그 회사 사람들이 찾아와 책을 들고 가는 웃지 못할일이 서너 달이나 계속되었다.

 

두 사람의 독자
이러한 상황에서 언제부터인가 두 사람의 열렬한 독자가 나타났다. 무슨 일이고 간에 실명實名을 거론하기 어려울 만큼 오해가 유발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사회이지만, 이 두 분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실명을 거론할 수 있다. 한 분은 당시 한국선주협회 상무이사로 있던 김선모金善模씨이고, 다른 한 분은 동지상선東志商船을 막 설립한 서병기徐丙機씨이다. 책이 나온 다음날 아침에 출근하면 두 분 중 어느 한 분이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끊으면 바로 뒤를 이어 다른 분이 나를 찾았다.


김선모씨는 일제강점기에 중국에서 공부를 한 분이지만 해운과 관련된 부분을 연마한 학자는 물론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운계에서는 그를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그는 자신이 처리해야 할 업무에 대해 철저히 공부하는 분이었고, 일을 처리한 뒤에는 그 과정을 메모로 남겨두는 분이었다. 이 분이 공부하는 방법은 상술하였듯 해운에 관한 일본 서적, 그 가운데 해운전문지인 ‘카이운’海運 등을 선원이나 해운회사의 주재원을 통하여 수집하여 철저히 습득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어떤 이론의 원리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는 일이 많지만, 당시의 국제 해운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가장 빠르고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 분이 나에게 전화한 내용은 해양한국 몇 쪽 몇 단 몇 행에 어떤 글자가 오자誤字가 있다는 지적이었다.


서병기씨 역시 일제감정기에 중국에서 공부한 분으로, 조국이 광복을 맞은 뒤 한국해양대학 항해과 2기생으로 입학하여 졸업한 분이다. 한국해양대학을 졸업한 이후 해기사로 여러 해 승선하다가, 한국해양대학 교수가 되어 종사하였다. 그 뒤 1970년대 초 우리 선원의 해외취업을 개척한 분 가운데 한 분으로 일본의 산코기센三光汽船의 선박에 승선하였고, 그 뒤 한국 선원 담당 육상 직원으로 발탁되어 일하다가 귀국한 분이었다. 귀국 뒤에 한국선원 송출회사 동지상선東志商船을 설립하여 경영하였다. 그 한참 뒤 한국해기사협회 회장으로 선원의 권익을 위해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 분이 나에게 지적한 내용은 누구의 어떤 글에 실린 어떤 내용이 사실에 어긋난 것이라거나, 해석이 틀렸다는 지적이었다. 편집장이라면 그처럼 사실과 다른 내용이나 해석이 잘못된 글을 마땅히 걸러내어 게재하지 않을 능력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뒤이어 그만한 능력이 없다면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옳다는 사족蛇足까지 덧붙이고는 했다.
김선모씨의 전화는 틀린 것을 틀린 것이라는 지적이었으므로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서병기씨의 지적은 필자의 잘못된 인식이나 해석까지 편집자가 책임져야 하고, 나아가서 그런 글은 싣지도 말라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서병기씨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나에겐 그만한 능력도 없지만, 능력이 있든 없든 그런 글을 실었다고 해서 무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월권越權이라고 생각되어 불쾌감을 느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배우는 처지에 서 있는 나로서는 그저 꾹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떤 날은 퇴근 무렵까지 우울한 기분을 수습하지 못하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때 저녁이면 나를 찾는 전화벨이 어김없이 울렸다. 서병기씨의 전화였다. 전화를 받으면 “이형이요? 아침에는 미안했소.” 말투까지 달랐다. 나보다 훨씬 연세가 많은(15세 정도) 분이었지만, 부하직원을 다루는 것 같은 아침의 말투와 달리, 저녁의 말투는 한 사람의 친구를 대하는 말투였다. “기분 나빴겠지만, 우리 소주나 한 잔 합시다.” 어느새 이 두 분의 독자 가운데 김선모씨는 고인이 되셨고, 서병기씨는 마음의 병을 얻어 사람 만나기를 거리끼고 계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마무리에 가름하여
편집자의 청탁에 즐겁게 응낙했으나 무슨 얘기를 써야 할지 제대로 정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앞에서 얘기하였다. 컴퓨터 자판을 두들겨 나가면서도 필요한 매수를 다 채울 수 있는가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어느 정도 써 나아가자 무언가 써야 할 일이 마치 샘이 솟듯 머릿속을 가득 맴돌고 있다. 그런 얘기들이 얼마나 쓸모가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고, 기회가 생긴다면 어떤 형태로든 계속 써서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치솟는다. 막상 기회가 생긴다면 귀찮게 여기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우선은 다음 기회를 기다리기로 하고 이만 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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