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과 바다

박정혁
박정혁
1. 글을 시작하며 
철없던 유년시절 저의 직업은 다양했습니다. 헐벗음과 굶주림이 시시각각 생명을 위협하는 험악한 세상에서 한 가지 직업으로는 살아가기 힘들었기 때문이죠. ‘고난의 강행군’의 회오리는 전국을 강타하여 대량아사자의 출현이라는 참극이 가득하던 흉흉한 시절이었습니다. 한창 공부해야할 아이들은 먹을 것을 찾아 농사꾼으로, 벌목공으로, 어부로, 도적으로, 불량배로 전락하였고 시장과 역전엔 부랑자들로 가득했지요. 사회에서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던 선생님들도 너나 할 것 없이 교편을 놓고 빵, 국수 등의 음식을 들고 장사 길에 나서던 때입니다. 굶주림은 가족이라는 단란한 울타리를 허물어 부모와 자식, 형제를 갈라놓는 비운의 그림자였고 삶의 순간순간을 고통으로 몰고 가는 괴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 앞에서 빈털터리인 우린 한없이 나약하기만 하였습니다. 어린 저에게도 도적처럼 찾아온 가족해체라는 시련은 화전민과 어부, 채벌공으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던져버립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 힘든 일이 바닷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거대한 자연 중에서도 바다가 제일 무서웠습니다. 농사는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면 그늘을 찾아 더위를 식히고, 폭우와 태풍이 몰아치면 집에서 몸을 숨기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지만 황량한 바다에선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기 때문이죠. 원래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험한 바다일은 나의 삶과 전혀 무관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세월을 잘못만나 어쩔 수 없이 뱃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짧은 인생에서 바다경험은 5년에 불과했지만 가장 고되고 생사를 넘나들던 기나긴 여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역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굳세게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삶의 원동력이었고 일찍 철들게 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온지도 10년이 되어가지만 지나온 삶을 글로 표현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제가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새터민들의 삶을 다룬 작품들의 대부분이 김부자에 대한 이야기, 위험한 탈출과정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그들이 살아온 험난했던 인생사는 어디에도 남겨지지 않는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입니다. 비록 북한사람들은 독재체제에서 살고 있지만 그들의 사회에도 사랑, 이별, 고통, 행복, 기쁨과 슬픔의 감정이 녹아있는 인간사회입니다. 그렇지만 북한사회에서 인간답게 살진 못합니다.
 
자유세상에서 누리는 인간다운 삶이 아닌 암흑세상에서 몸부림치는 인간이하의 삶입니다. 인간이하의 삶을 살아온,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북한사람들의 삶은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오페라일 것입니다. 저의 글은 북한사회의 비극의 한 장면에 불과할 것입니다. 또한 북한의 바다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조명한 작품은 처음일 것입니다. 우연히 해양문학공모전을 접하고 제가 경험한 바다생활이 불현 듯 떠올랐으나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저의 바다스토리가 공모전의 취지에 맞는지에 대한 고민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글을 잘 쓰지 못합니다. 사춘기에 바다를 경험하여 고향바다에 대한 추억은 생생하지만 글로 엮어낸다는 건 어렵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지 많은 고민이 됩니다. 하지만 통일에 대한 열망이 주저하던 저에게 용기를 주어 글을 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비록 지금은 금단의 땅, 금단의 바다이지만 언젠가 우리가 반드시 회복해야 할 우리의 강토, 우리의 바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잊어서는 안 되는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빈약한 저의 이야기가 금단의 동해바다를 대신하지만 우리 모두의 바다가 되는 통일의 그날엔 풍부하고 훌륭한 해양문학들이 우후죽순처럼 탄생할 것입니다. 글을 통해 지금도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북녘동포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확대경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분단은 육지만이 아닌 바다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통일의 열망이 우리의 바다에도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2. 동해의 작은 마을 : 삼해
남쪽에선 동해라고 하면 바로 떠오른 지역은 강원도일 것입니다. 수도권과 가까운 바다휴양지, 정동진일출, 울릉도, 독도,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저의 마음속의 동해는 강원도의 동해가 아닌 삼해입니다. 아마도 생소한 지명일 것입니다. 북한에서도 유명한 지역이 아니어서 북한사람들도 잘 모르는 동해의 조그마한 해안마을입니다. 삼해는 나진-선봉지구가 신설되기 전에는 나진시에 속했고 지금은 청진시 청암구역에 속한 행정구역입니다. 행정구역상 제일 작은 동에 불과하지만 3개포구인 보동골, 가진, 사진 지역이 포괄되어 긴 해안을 가진 지역입니다. 집에서 가까운 동해는 삼해의 한 포구인 보동골이며 철길 따라 30분만 걸어가면 만날 수 있습니다. 저는 동해의 작은 마을인인 삼해에서 태어났습니다. 바다를 지척에 두고 태어났지만 어릴 적 바다와의 추억은 별로 없습니다.

태어나서 형이 열차사로로 운명하고 저의 가족은 내륙인 두만강 근처로 이사를 갔기 때문입니다. 고향에서 다시 살게 된 건  14살이 되던 어느 해 봄입니다. 화목했던 가정은 뿔뿔이 흩어지고 이 세상에 나 혼자 남았다는 괴로움에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불우한 유년시절이었습니다. 고향을 떠날 땐 가족으로 떠났지만 귀향할 땐 혼자였습니다. 혈혈단신으로 고향에 내려가니 제가 태어난 고향집은 팔순을 넘긴 조부모님들이 지키고 계셨습니다. 5년 만에 만난 손자이지만 할머니는 아버지와 꼭 빼어 닮은 저를 금방 알아봅니다. “어구야! 아바지, 오마니는 다 어디가고 너 혼자 왔니?” 깊게 패인 주름, 하얀 머리 발, 다 해진 신발에 누더기를 걸친 꼬부랑 할머니는 야윈 손자를 품에 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소년도 할머니를 부둥켜 펑펑 웁니다. 할머니의 품은 소년이 안기기엔 작았지만 봄의 햇살처럼 따뜻했습니다. 그렇게 가족을 잃고 갈 곳을 찾아 헤매던 어린 소년이 정착한 곳은 동해의 작은 마을인 고향 삼해입니다. 30가구 남짓 모여사는 고향은 심신산골입니다. 밤이면 소쩍새 울음소리와 여우울음소리도 들립니다. 가을이 되면 멧돼지 감자밭과 옥수수 밭을 절단내기도 합니다. 가끔은 곰이 내려와 옥수수를 따갑니다.

고향에 내려가서 처음으로 한 일은 화전을 일구는 농사일이었습니다. 곽지(괭이)로 밭고랑을 내고 손으로 거름을 뿌리고 감자, 보리, 옥수수 등을 심었습니다. 부드러운 밭은 괭이로 다룰 수 있지만 잡초와 돌이 많은 화전은 보습으로 갈아야 했습니다. 북한에서 소는 국유재산으로 개인이 함부로 키우거나 부릴 수 없습니다. 북한의 경제위기를 잘 말해주듯 농장소는 영양실조에 걸려 뼈만 앙상하게 남아 힘도 없었고 밭을 몇 고랑 갈고는 주저앉기 일쑤입니다. 제가 소 대신 밭을 갈았습니다. 농사일 때문에 도시에서 온 숙부가 보습을 잡았습니다. 팬티만 입고 보습 끈을 목에 감고 보습을 끄니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서너 고랑을 갈고 나니 땀은 비 오듯 쏟아졌고 온몸이 쑤시는 듯 아파서 밭고랑에 털썩 주저앉습니다.

숙부는 담배 한가치를 피우더니 “이랴!” 하고 재촉합니다. 순간 “내가 소라니?”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이내 헛웃음만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농사를 지었건만 보릿고개를 넘기기 힘들었습니다. 한 달 내내 초근모피로 연명하니 다리 힘이 풀리고 하늘이 노랗게 보입니다. 소나무껍질과 옥수수가루로 만든 송진떡을 먹으니 변이 굳어 잘 나오지도 않습니다. 제대로 먹지 못하니 내 몸은 농장소처럼 점점 야위어만 갔습니다. 야위고 지친 몸이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를 대신하여 집안을 돌봐야 했지요. 아침 일찍 김을 매고 물을 긷고, 불을 때고, 밥을 짓고(밥이라 해봐야 옥수수죽, 시래기죽, 감자가 전부였다) 집을 청소하고 땔감을 구해왔습니다. 입에 풀칠도 하기 힘들고 종일 집안일로 몸은 고단했지만 저녁이 되면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가족이 그리워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리웠고, 미웠고, 후회로 자신을 자책했습니다. 그렇게 힘든 보릿고개를 넘기며 몇 달을 지내니 동네에도 친구들이 생겼습니다.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난 친구들이 많았고 어릴 적 자주 고향을 방문하여 낯을 익힌 친구들이어서 사귀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고향에서 친구들과 함께 학교도 다시 다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이랄까? 우연의 일치이랄까? 새로운 담임선생님은 아버지와 숙부의 스승이었습니다. 부모님의 소식을 자주 묻는 선생님의 관심이 부담스러워 얼마 다니지 않고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여름방학이 되자 친구들과 바닷가에서 노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당시 친구들과 바닷가에서 놀 때만 해도 제가 바닷일을 하게 되리란 생각을 꿈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바다에서 놀다가도 아버지의 생각이 불쑥불쑥 납니다. 고향에 올 때마다 아버지는 저를 데리고 보동골로 자주 왔습니다. 아버지는 골뱅이, 성게, 조개, 해삼, 삼바리를 잡아주면서 바다에 대해서 들려주곤 했습니다.

명태의 고향이 동해바다라는 사실은 아버지로부터 알게 되었습니다. 동해는 어장이 풍부한 바다여서 해마다 물고기는 풍년이었고 어릴 적엔 집집마다 물고기들로 가득하여 썩은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고향집을 방문할 때 면 할머니는 청어, 고등어, 문어, 이면수, 도루메기, 오징어, 정어리를 소금에 절였다가 손자들에게 구워주시곤 하였습니다. 정어리는 너무 많이 잡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바닷가의 강아지들도 먹지 않아 비료로만 사용했지요. 어릴 적엔 이상하게도 아버지와 바다에 오면 졸음이 밀려왔습니다. 해안가의 넓적한 바위에 걸터앉아 출렁이는 파도에 넋을 빼앗기고 바라보곤 했지요. 그리고 수평선 저 너머엔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 생각에 잠겨 있으며 나도 모르게 잠이 들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소꿉친구가 이 바위에서 잠을 자다 풍에 걸려 손가락이 굳은 채로 살아가고 있다며 나를 혼내곤 하였습니다.

5년 만에 다시 찾은 동해바다는 정말로 아름다웠습니다. 어릴 적엔 무심코 지나쳤던 바다의 모든 것은 새롭기만 합니다. 동해바다는 누가 잉크를 풀어놓은 듯 푸르렀고 흰 갈기를 휘날리며 거침없이 해안으로 밀려옵니다. ‘촤~촤’ 듣고만 있어도 시원한 파도소리는 바다가 살아있음을 알리는 생명의 숨결처럼 느껴지며 귀향한 소년을 반기는 축하의 인사처럼 들립니다. 산란기의 숭어들은 근해에서 마치 내기를 하듯이 물위로 팔딱팔딱 뛰어오릅니다. 푸르른 창공을 가르며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흰 갈매기들은 매의 눈으로 바다를 응시하며 호시탐탐 먹이를 노립니다. 그리곤 쏜살같이 바다에 내리 꽂혀 팔뚝만한 숭어들을 낚아챕니다. 갈매기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날쌔고 영리한 사냥꾼입니다. 밤새 하늘의 별똥별이 모두 떨어졌는지 백사장의 모래불은 금빛, 은빛으로 유난히도 반짝입니다.

언덕에서 바라보는 해안은 더욱 장관입니다. 길고 곧은 해안이 끝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푸른 동해는 티끌 없이 반짝이는 백사장을 만나고 백사장은 울창한 소나무 숲을 만납니다. 바다와 백사장, 소나무 숲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곧고 긴 고향의 해안은 화백이 만들어낸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케 합니다. 송강정철이 이 장관을 보았더라면 아마도 후세에 길이 남을 훌륭한 시조를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언덕에서 해안을 바라보면 가슴은 탁 트이고 영혼이 빠져나간 듯이 머리는 시원해집니다. 잔잔한 파도와 푸른 바다를 굽어보노라면 블랙홀에 이끌려 빨려가는 듯 강한 충동을 느낍니다. 바다에서 미역을 감고 백사장에 누워 있으면 산들바람은 싱그러운 솔잎향기를 몰고 와 코끝을 자극합니다.  모래불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다시 바다에 뛰어듭니다. 한참이나 친구들과 자맥질을 하고 나서는 백사장에서 모래성을 쌓습니다. 힘들게 쌓은 모래성을 장난꾸러기 친구들은 어김없이 바닷물로 무너뜨립니다. 자맥질을 하다가 배가 고프면 모닥불에 감자와 조개를 굽습니다. 한참 지나니 조개껍질이 벌어지고 빨간 조갯살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돕니다. 구은 감자에 구운 조갯살을 결들인 간식은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정도로 꿀맛입니다. 간식을 끝내면 친구들은 숯덩이로 서로의 얼굴에 장난을 칩니다. 명진이는 숯으로 콧수염까지 그립니다. 그렇게 숯덩이로 장난치고 다시 바다로 놀러 갑니다. 숨을 고르고 해변을 보니 멀리서 강아지들이 해안으로 밀려온 미역을 맛있게도 먹습니다. 친구에게 물어보니 강아지들도 염분이 필요해 먹는다고 합니다. 참 귀여운 모습입니다.

고향의 해안은 넓지만 포구는 협소합니다. 도보로 10분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포구가 건넨 첫 인사는 짭짤하고 비린 냄새입니다. 작은 포구엔 서너 명이 탈 수 있는 나무배들이 드물게 있고 녹 쓴 철배들도 있습니다. 철배는  중국산입니다. 작은 포구 한 구석엔 성게양식장과 해삼양식장도 있습니다. 모두 수산협동조합에서 관리하지요. 포구를 따라 하모니카집(다세대주택)들이 늘어져 있습니다. 지붕은 푸른 페인트칠을 한 양철로 되어 있습니다. 한국에선 덕장으로 생선을 말리지만 고향에선 집지붕이 덕장입니다. 어머니들은 지붕에서 갓 잡아온 오징어를 건조하느라 분주합니다. 고향에선 오징어를 낙지라고 합니다. 그리고 갑오징어를 오징어라고 부릅니다. 한국의 낙지는 무엇이라고 부를까요? 제 기억엔 동해에서 낙지를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낙지를 보면 작은 문어나 꼴뚜기처럼 보입니다. 이외에도 고등어를 고마이, 망둥이를 망채, 도루묵은 도루메기, 가자미를 가재미라고 부릅니다. 생선 중에서도 망둥이가 제일 억울하지요. 어른들과 아이들은 말썽꾸러기 들을 못난 망둥이에 비유하여 망채라고 놀립니다. 저도 어렸을 때 말썽꾸러기였습니다. 거기에 작은 키와 배가 불룩 튀어나와 똥망채로 불렸습니다.

어머니들의 일하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면 오징어를 먹기가 꺼림직 합니다. 힘이 약한 어머니들은 손에 침을 바르며 오징어의 크기를 늘리고 있습니다. 힘에 부치면 발등으로 오징어를 누르고 손으로 잡아당깁니다. 오징어를 크게 말려서 상품가치를 높이려는 것이지요. 어머니들이 힘들게 오징어를 말리고 있는데 동네꼬마들이 장대를 이용하여 덜 말린 오징어를 훔치는 모습도 보이네요. 한창 자라는 아이들이 마음껏 먹지도 못하니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서 그럴 겁니다. 어머니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아이들을 쫓아가지만 아이들은 훔친 오징어를 걸신들린 듯 먹어치웁니다. 오징어 한 마리 가지고 난리라고 하겠지만 말린 오징어 한 마리는 50원으로 식량 1kg을 살 수 있고 4인 가족이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돈입니다. 당시 장마당에서 하루 종일 품을 팔아도 150원(미화 1달러)을 겨우 벌수 있었고 100원으로 가족의 하루 끼니를 해결하던 어려운 시기이니 오징어 한 마리는 적은 돈이 아닐 수 없지요.

오후 되면 새벽에 고기잡이를 나갔던 배들이 들어옵니다. 대부분 발동선이 달린 나무쪽배입니다. 어부들의 모습은 TV에서 보던 억세고 늠름한 모습은 아닙니다. 햇볕에 그을려 까맣게 탄 얼굴은 피곤함과 힘겨움으로 가득하고 깊게 패인 주름은 그들의 애환을 대신해줍니다. 그리고 어부들의 몸에선 술과 담배, 비린 냄새가 함께 풍겨 지독한 고린내가 코를 찌릅니다. 언제 세탁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때가 반들반들한 옷을 입은 어부들이 배에서 내리는 모습은 마치 피난민을 보는 것 같습니다. 엄마 손에 이끌려 마중 나온 아이들은 아버지를 찾습니다. 아버지들은 지친 몸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을 품에 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가슴이 먹먹합니다. 나에게도 아버지가 있었지, 고향을 떠나지 않고 아버지가 배꾼이 되었으면 나도 지금쯤 저렇게 아버지의 품에 안기고 있었을 텐데... 

고깃배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포구는 분주합니다. 집집마다 굴뚝엔 연기가 피어오르고 밥 냄새,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포구에 물씬 풍깁니다. 강아지들도 밥시간을 아는지 짖어댑니다. 장사꾼들은 많은 물고기를 확보하려고 벌써부터 포구에서 대기합니다. 한국에선 잡은 생선을 수산물경매를 통해 가격이 낙찰되고 전국으로 유통되지만 고향에선 수산물경매가 없습니다. 대부분 도매업자들이 직접 어부와 거래하여 도시로 유통시킵니다. 수산물가격은 어부와 도매업자와의 흥정에서 결정되지요. 수산물유통망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고 특히 운송수단이 부족하여 도매업자들의 폭리가 심합니다. 수산물저장고도 여의치 않아 어부들은 일정한 가격이면 그 자리에서 다 넘기지요. 잡은 생선은 현찰로도 바꾸고 술이나 담배로도 바꿉니다. 고깃배가 들어오면 물고기를 손질하는 건 전부 여자들의 몫이죠. 생선의 내장을 손질하고 말리고, 절이고, 판매하고, 남편들의 식사를 차리고, 빨래를 하고... 뭍의 어머니들이 농사를 짓고 가사를 돌보며 고단한 하루를 보내지만 바다어머니들의 삶도 그에 못지않게 힘듭니다.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의 삶이겠죠. 그러나 바다의 어머니들은 삶은 더 힘듭니다. 육신의 고단함보다 망망대해로 나간 남편들과 자식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바다어머니들의 하루는 살얼음판과도 같을 것입니다.

보동골포구가 분주할 때면 저도 집으로 가야 할 시간입니다. 오늘도 집에선 할머니가 손자를 애타게 기다릴 것입니다. 해가 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오라고 할머니는 신신당하셨지만 저는 해질녘에야 집에 갈 채비를 합니다. 솔직히 집에 가기 싫습니다. 귀향하여 반년 만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어 저의 마음은 더욱 착착하기만 하여 집에 가기 싫습니다. 푸른 바다를 보고 있으면 조금이나마 가슴이 트이고 바다에 몸을 담그면 잠시나마 그리운 가족을 잊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홀로 계신 할머니를 생각하며 주섬주섬 옷을 주어 입습니다. 바다에서 건진 조개, 섭, 미역, 해삼을 챙깁니다. 하지만 저는 쉽게 집으로 가지 못합니다. 석양을 보기 위해서이지요. 동해의 일출은 황홀하지만 일몰은 더욱 장관입니다. 저녁이 되면 수평선으로 커다란 태양이 붉은 빛을 발산하며 떠 있습니다. 태양은 푸른 동해와 창공, 해변을 붉게 물들입니다.

저의 마음도 붉게 물듭니다. 이젠 눈물도 말라버려 메마른 가음, 좌절 속에 방황하는 나약한 마음을 석양만이 따뜻하게 감싸는 것 같습니다.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소리는 힘들면 언제든지 동해를 찾아오라는 속삭임으로 느껴집니다. 바다와 태양은 상처받은 어린 소년을 위로하고 따뜻하게 반겨주는 오래된 친구와 같았습니다. 고향의 해변은 소년이 온갖 시름을 잊고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와도 같습니다. 보동골포구에서 바다가족들이 상봉하는 모습은 가족을 그리워하는 소년에게 잠시나마 가족의 따뜻함을 느끼게 해주는 정든 집과도 같았습니다.
 

3. 소년 잠수부 
북에서는 잠수부를 무엇이라고 부를까요? 바로 ‘머구리’라고 합니다. ‘머구리!’ 참 생소한 표현이죠. 저도 고향에서 머구리가 되었어도 무슨 뜻인지 잘 몰랐습니다. 한국에 와서 알게 된 머구리는 일본어 ‘모구리’에서 온 말이라고 합니다. ‘물속에 잠겨들다, 잠수하다’의 ‘모구루’ 명사형으로 ‘법을 어기거나, 허가를 받지 않고 몰래 영업을 함’이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북에서도 잠수부는 힘든 직업 중 하나입니다. 두꺼운 가죽복장을 입고 쇠투구를 쓰고, 20kg짜리 납덩어리인 연추를 허리에 차고 심해에서 성게, 문어, 해삼을 잡는 심해잠수부의 유일한 생명줄은 산소 공급기뿐입니다. 목숨을 담보로 하는 위험하고도 고된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돈을 벌 수 있기에 무모한 청년들이라면 도전해볼만 한 일이기도 하지요. 한국에선 심해잠수부 일이 많지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첨부터 심해잠수부가 될 생각은 없었습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꿈도 꾸지 않았지요. 대신 해녀처럼 근해에서 조업을 하였습니다.

제가 바다에서 일하게 된 건 돈 때문이었습니다. 돈이 필요함을 알고 스스로 벌 생각을 한다는 건 아이가 어른이 되어간다는 신호겠지요. 이젠 고향에 온지 1년이 흐르고 15살이 되면서 누구나 겪는 사춘기를 맞이합니다. 목소리도 굵어지고 코밑에 수염도 자랍니다. 가늘던 손가락도 굵어지고 연약하던 몸도 제법 어른처럼 골격도 커졌습니다. 아이들은 사춘기가 되면 어른들의 행동을 많이 따라합니다. 어서 커서 어른이 되길 바랍니다. 하지만 저는 보고 따라할 어른이 없습니다. 집에서 유일한 어른은 평생 농사일로 허리가 휜 할머니뿐이었습니다. 할머니는 궁핍한 살림 때문에 손자에게 신발하나 사주지 못한다고 못내 미안해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불평하지 않습니다. 할머니마저 없다면 저는 정말로 고아의 몸이 되기에 할머니가 건강하게 살아계시는 것이 저를 위한 것이라고 할머니를 위로합니다.

하지만 요즘 들어 할머니가 자주 아픕니다. 농사로는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어 할머니의 약을 살 형편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녁을 밝힐 석유, 비누, 기름, 간장, 된장, 성냥 등 생필품도 다 떨어져 갑니다. 가끔 숙부께서 생필품을 가져다주지만 요즘 들어 자주 방문 하지 않습니다. 특히 제 몰골은 말이 아닙니다. 신발은 밑창이 다 닳아 구멍이 났고 터진 앞부분은 쇠줄로 동여매고 다닙니다. 옷은 교복하나뿐입니다. 그새 키도 훌쩍 자라서 교복은 어깨가 좁고, 팔도 짧고, 팔꿈치는 다 해졌습니다. 간신히 보릿고개는 넘겼지만 가을까지 살아가는 것이 걱정입니다. 친구 명진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제 고민을 들고 명진이는 성게 잡이를 같이 하자고 제안합니다. 귀가 번쩍이고 구미가 당기는 제안입니다. 당시 고향친구들은 성게 잡이로 생계에 큰 보탬을 주고 있었지요. 근해조업이기에 위험도 없습니다. 친구들이 하는 성게 잡이를 ‘빤스사도리’라고 합니다. 팬티를 입고 스노클링을 하면서 성게, 해삼, 조개를 잡기 때문이죠. 날이 밝으면 성게 잡이에 나갑니다.

성게만 많이 잡으면 돈을 벌 수 있고 돈을 벌면 쌀도 사고  할머니 약도 살 수 있으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할머니가 걱정할 까봐 바다에 놀러 간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오늘 따라 아침햇살은 유난히도 따사롭습니다. 따뜻한 햇살은 처음으로 성게 잡이에 나서는 저에게 성게를 듬뿍 안겨줄 것 같은 예감 같습니다. 나무에 매단 감자도시락을 달랑거리며 친구들과 함께 잰 걸음으로 바다를 향합니다. 그냥 놀러가던 때와는 달리 기분이 들떠있습니다. 영식이가 앞서가는 저를 부릅니다. 명식이 왈 “야! 정어리(별명)! 돈 벌면 머 살거니?” “일단 신발부터 사야지” “바보! 니 빤스(팬티)부터 사라! 빤스에 때가 많아 성게들도 더러워서 다 도망간다야!” “오! 맞다!!! 히히히” 어른스러운 명진이가 한 마디 합니다. “돈 벌면 먼저 물안경부터 사라! 며칠은 내꺼 빌려줄 수 있지만 계속하려면 수경이 필요하니까!” “응! 고마워!” 한쪽에선 영식이가 투덜댑니다. “오늘은 많이 잡히려나? 요즘 통 신통치 않단 말이야!” 명진이 왈 “가보면 알게 되겠지! 근데 쟤가 걱정이다. 개발 헤엄에 겁도 많아서!” 영식이 왈 “정어리! 물에 들어가서 살려달라고 고함치면 난 모른다!” “걱정 마! 명진이가 살려주겠지!” 아직 바다의 무서움을 모르는 천진한 소년은 마냥 즐겁기만 합니다. 그렇게 소년들이 떠드는 동안 어느새 발걸음은 동해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조업할 장소는 긴 해안 끝에 위치한 곳입니다. 바위가 많은 해안으로 이 근해에 성게가 많다고 합니다. 조업장소에 도착하자 우리 일행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많습니다. 족히 20명은 넘어 보입니다. 모두 처음 보는 얼굴들입니다. 손자와 함께 온 할아버지도 보이고 40을 넘은 아저씨, 20대로 보이는 형들까지 ... 친구에게서 들으니 타지 사람들이 많답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출신지도 가슴에 맺힌 사연도 각양각색입니다. 나이 많은 아저씨는 황해도 연백에서 왔는데 부인은 아기를 낳고 굶어죽었다고 하네요. 그때 태어난 아이이름이 경호여서 우리는 경호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나이도 많고 한때 심해잠수부로 활약하여 성게 잡이 경험도 많아 경호아버지는 무리의 두목이나 다름없습니다.

고향에 두고 온 아들이 저와 같은 나이라고 하면서 저를 무척이나 아껴주던 생각이 납니다. 할아버지와 함께 온 성민이 형은 니켈광산의 광부였던 아버지를 갱도가 붕괴될 때 잃었다고 합니다. 아오지(온성)에서 온 영수형은 온 가족이 굶어죽다고 합니다. 작살에 베인 상처 때문에 험상궂은 모습이었지만 언제나 밝은 미소를 잃지 않던 잊지 못할 사람입니다. 동상으로 약지와 새끼손가락이 잘려나간 광혁이 형도 부모를 잃고 누나와 단둘이 산다고 합니다. 술에 취하면 곱사춤으로 모두를 웃기던 사람입니다. 군에서 탈영하여 영창을 갔다 온 상철이 형은 어머니가 많이 아픕니다. 상철이 형의 친형은 억울하게 절도범이 되어 교화소(교도소)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나무를 베다가 부러진 톱날이 튕기면서 눈을 다친 정철이는 왼쪽 눈이 이상합니다. 눈은 이상했어도 마음만은 착한 사람입니다. 제가 바다에서 새로 사귄 친구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의 사연을 책으로 묶어낸다면 가장 가슴 시린 드라마일 것입니다. 가슴 아픈 상처를 지닌 우리들의 모습은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찬 암울한 시대의 자화상이 아닐 런지요. 저마다 걸어온 인생사는 다르지만 성게를 잡겠다는 목적 하나로 뭉쳤기에 어렵지 않게 친하게 되었습니다.

성게 잡이가 처음이어서 모든 것이 서툽니다. 물안경을 끼고 호흡하며 잠수하는 것부터 바다풀과 바위에서 성게를 찾는 것까지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네요. 첫날은 깊은 바다로 들어가지 못하고 근해의 바위를 뒤지며 성게를 잡았습니다. 그것도 종일 뒤져 달랑 2개를... 그래도 친구들은 첫날치곤 수확이 괜찮다며 저를 응원합니다. 그렇지만 그물 가득히 성게를 잡는 친구들을 보면 부럽기만 합니다. 성게 2개로 번 돈은 40원(미화30센트)입니다. 바다가 소년에게 베푼 첫 선물입니다. 작은 손에 10원짜리 지폐 4장을 쥐고 너무 좋아 파도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나 돈 벌었다 ~ 아 !” 소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큰돈을 만져서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정겨운 바다가 이렇게 감사하게 다가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리고 파도와 바위, 갈매기, 포구, 저녁놀, 해변, 조약돌까지 바다와 관련된 모든 것이 너무도 사랑스럽기만 합니다. 15년이 흘렀어도 그때의 감격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40원은 쌀을 사서 할머니와 저녁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2달 동안 감자만 먹다가 밥을 먹으니 기운이 샘솟고 행복하기만 하네요 ...

성게 잡이 2달을 하니 소년도 이젠 어엿한 바다사람이 되었습니다. 햇볕에 그을려 얼굴도 몸도 까맣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성게를 잡아 잠수경도 수영팬티도 그물망도 새로 장만했습니다. 그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한 친구들은 친형제처럼 끈끈한 정을 쌓았습니다. 모두들 이름 외에 바다동물의 이름을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얼굴이 둥글둥글 하여 친구들이 참성게라고 부릅니다. 머리카락이 억센 명진이는 말성게. 머리가 납작한 정식이는 밥조개(가리비), 눈이 몰린 영식이는 넙치, 물위로 솟구치는 높이가 남다른 경호아버지는 날치와 같아 날치형으로 부릅니다. 함께 모여앉아 서로의 별명을 부르면 바다동물이 육지에 다 모인 것 같아 친근함이 묻어납니다. 고향에선 성게를 말성게와  참성게로 구분합니다. 검붉고 가시가 긴 성게가 말성게, 녹색에 가시가 작은 성게는 참성게입니다. 한국에선 말성게는 보라성게, 참성게는 말똥성게로 부르지요. 성게 중에서도 참성게(말똥성게)는 알도 풍부하고 맛과 향이 뛰어나 비싼 값에 팔립니다. 제가 잡는 성게도 당연히 참성게입니다. 말성게는 가격이 저렴해서 잡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게를 잡을 땐 조심해야 합니다. 맨몸으로 잠수하기에 말성게의 가시가 몸을 찌를 수 있으니까요. 가끔은 말성게가 머리에 꽃에 따라 나오기도 합니다. 성게 가시가 몸에 박혀 있으면 특별한 약으로 처방합니다. 바로 오줌입니다. 오줌으로 가시 박힌 상처를 씻어내고 며칠이 지나면 가시가 나온답니다. 바다경험이 많은 날치형이 가르쳐준 믿기 어려운 방법이죠. 그런데 그렇게 했더니 정말로 가시가 저절로 나오네요. 문제는 성게가시가 머리에 박힐 때입니다. 이럴 땐 형들이 신이 나서 제 머리로 오줌을 쏟아냅니다. 난감하지만 가시를 뽑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 눈을 감고 참습니다.

이젠 출렁이는 파도도 두렵지 않고 심해도 무섭지 않습니다. 성게 잡이도 능숙합니다. 바다풀이 곧게 뻗은 곳엔 성게가 없습니다. 덩굴진 바다풀과 미역, 섭조개가 있는 곳엔 어김없이 성게가 있습니다. 그런 곳을 발견하면 마치 갈매기가 숭어를 사냥하듯이 성게를 찾아 바닷물 밑으로 내리 꽂힙니다. 양팔을 1번 저으면 2m, 2번 저으면 4m를 내려갑니다. 3번 저으면요? 심해 7m입니다. 깊은 곳엔 성게가 많지만 상당한 용감성이 요구됩니다. 심해의 큰 성게는 손바닥만큼이나 됩니다. 무게도 상당하죠. 가끔 친구들과 욕심을 부리고 심해까지 내려갑니다. 양손에 성게를 가득 들고 나오지만 코피가 줄줄 터집니다. 위속의 쓸개즙까지 다 토하고 숨을 헐떡거립니다. 그래도 그물망에 잡혀 있는 성게를 보면 힘이 불끈 오릅니다. 바다에선 성게뿐 아니라 해삼, 조개도 채취합니다. 바다의 산삼이라고 불리는 해삼은 모양이 요상합니다. 잡히는 장소에 따라 모양이 변하기 때문이죠. 바위틈새에선 공처럼 동그랗기도 하고 모래에선 신발만큼이나 축 늘어져 있습니다. 처음 해삼을 잡았을 땐 미끄러워서 놀래기도 하였지요. 조개 잡는 일은 정말로 재밌습니다. 물위에서 바닥에 2개의 금빛 구멍이 보이면 틀림없이 조개입니다. 잠수할 땐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으로 바닥에서 조개를 파냅니다. 주로 잡은 조개는 대합이었습니다. 큰 놈은 두세 번 자맥질을 해야 잡을 수 있지요. 2시간만 잡으면 작은 자루 한 가득 잡을 수 있습니다. 잡은 조개는 백사장 모래불에 열병종대처럼 세워두고 휘발유를 뿌려 구워먹습니다. 바다 별미 중에 으뜸입니다.

성게 잡이를 하면서 술도 배웠습니다. 가끔은 담배는 피웠습니다. 무리생활을 하면서 어른의 행동을 배웠지요. 형님들은 바다와 싸우려면 담력이 커야 하고 술은 담력을 키우는데 제일 특효라고 설교합니다. 영수형은 도시락 뚜껑에 가득 담아 저에게 건넵니다. 처음으로 술을 마시니 쓰고 독했습니다. 이렇게 쓴 술을 왜 마실까하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몇 번 마셔보고 취해도 보니 그 기분을 알겠더군요. 종일 파도에 시달린 고단한 심신을 달래주는 데는 술만큼 좋은 건 없습니다. 술에 얼큰하게 취할 때면 광혁의 곱사춤이 바다를 배경으로 해변을 무대로 펼쳐집니다. 모두들 흥이 나서 따라합니다. 상처받은 영혼들의 얼굴엔 바다와 함께한 희로애락이 묻어납니다. 여름도 저물어가는 오늘 해변의 파티는 내년에도 성게를 많이 잡게 해주어 삶이 조금 더 풍요로워지길 염원하는 모두의 바램도 담겨있습니다. 저도 바다사람에서 뭍사람으로서 농사꾼으로 돌아가서 옥수수를 수확해야 합니다.

16살이 되던 다음 해 드디어 심해잠수부가 되었습니다. 1달이 지났지만 돈벌이가 예전보다 시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심해잠수부가 된다고 합니다. 저는 겁이 났습니다. 근해수심보다 2배나 더 되는 20~30m의 수심에서 작업을 하기 위해선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야 했기에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하지만 형들과 친구들의 설득에 허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성게를 많이 잡아야 살림살이도 펼 수 있습니다. 작년 겨울부터 고향집엔 사촌이 되는 큰 숙부의 자식들도 와 있습니다. 큰 숙부와 숙모는 모두 병으로 돌아가시어 사촌들은 나진역전과 시장에서 유량하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어 할머니와 저랑 2살터울인 사촌누나와 사촌동생까지 가족이 만들어지게 되었지요.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저의 어깨가 무겁습니다. 농사일과 집안일은 사촌들에게 맡기고 저는 본격적으로 바다에서 조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숙식도 포구에서 하게 되었고 매일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습니다.

5명이 간신히 탈 수 있는 나무배엔 소년잠수부 2명과 20살을 갓 넘긴 젊은 잠수부 2명, 그리고 선주가 탔습니다. 심해조업은 근해조업보다 엄청 힘이 들었습니다. 작은 몸보다 큰 두꺼운 잠수복장과 쇠투구, 허리엔 무거운 남덩어리를 차니 여간 무겁지가 않네요. 거에 왼손엔 갈고리를 오른손엔 그물망까지 드니 몸이 느리기만 합니다. 바위틈새를 이 잡듯 뒤집니다. 돈이 될 만한 성게, 해삼, 문어를 잡습니다. 심해바다동물들의 크기는 확실히 다릅니다. 심해의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집니다. 심해의 웅장함은 마치 용궁에 온 느낌을 줍니다. 검푸른 바위와 해초, 미역이 가득한 심해는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사방은 조용하고 거친 숨결만이 흐릅니다. 머릿속으로 ‘성게야, 해삼아, 문어야 어디 있느냐? 너를 찾아 내가 왔다! 너를 잡아 앓는 할머니 약값을 벌어보자꾸나, 째지게 가난한 우리네 살림 좀 펴보자꾸나!’를 곱씹으며 조업을 합니다. 심해조업을 할 때 산소공급 줄이 바위에 걸리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꼬이거나 바위에 걸리면 바로 황천길이니까요. 그리고 조심해야 할 바다동물은 심해문어입니다. 심해문어는 힘이 여간 세지 않습니다. 바위에 흡반을 단단히 붙이고 있어 잘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자칫 목이나 손, 발을 감으면 심해격투를 벌어야 합니다. 한번 심해격투를 벌이면 온몸에 힘이 빠져 나른합니다.  그리고 20kg을 넘으면 잡아도 힘에 부쳐 물위에까지 옮기기 힘듭니다. 그럴 때면 동료의 도움으로 간신히 잡습니다. 심해작업은 대략 30~40분쯤 하고 교대를 합니다. 심해엔 수산물이 많지만 할당량을 채우기가 어렵네요. 초보자이고 힘이 약해 오랜 조업을 못하기 때문이죠. 하루 오천원 이상 벌지 못하면 그날은 공치는 날입니다. 배 기름 값에 산소공급기 대여비용에 바다출입증을 떼고 나면 남는 것이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를 악물고 다시 심해로 들어갑니다. 공치는 날도 많고 횡재하는 날도 있습니다. 잠수일은 주로 새벽에 합니다. 바다동물들의 영혼이 꿈나라로 가 있을 때 급습하지요. 돈을 벌면서 저의 마음도 변합니다. 예전엔 귀엽고 친근하게 느껴졌던 바다동물은 제 눈엔 생명이 아니라 돈으로 보입니다.

푸른 바다는 시원한 자연으로 정겨운 친구가 아니라 정복해야할 대상으로 보입니다. 매일 바다를 보니 지겹기도 합니다. 동이 트는 것이 싫습니다. 그때면 저는 심해에서 바다동물들을 무차별적으로 사냥하는 약탈자가 되어있으니까요. 돈은 마음뿐 아니라 몸도 변하게 합니다. 잠수일을 오래 하면서 온 몸이 아픕니다. 비가 오거나 날이 흐리면 무릎이 쑤십니다. 예전보다 코피를 흘리고 쓸개즙을 토하는 날이 많습니다. 몸이 아프면 약 대신 술로 달랩니다. 이젠 술도 잘 마십니다. 저녁이 되면 동료들과 양동이에 술을 사서 함께 진탕 마십니다. 그러면 피곤이 풀리고 아픔을 잊고 고단함이 잊혀 집니다. 주량이 늘자 잘 취하지 않고 정신만은 또렷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면 저를 두고 사라져 버린 부모님이 원망스러워 혼자 흐느낍니다. 2년 전만해도 학교에서 학자의 꿈을 키우던 소년이었습니다. 지금은 바다의 약탈자가 되어 하루하루를 희망 없이 살아가는 수전노가의 나락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몸부림을 쳐봐도 헤어날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창밖에 별빛만이 외로움에 젖어 있는 소년을 달래줍니다.

다음해엔 가진포구에서 잠수일을 합니다. 가진쪽 동해바다는 보동골보다 어장도 풍부하고 허가된 배들만이 조업을 할 수 있기에 경쟁자들도 별로 없습니다. 그동안 함께 동고동락을 한 바다친구들은 절반도 남지 않았습니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며 어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들어 잠수일이 재미있습니다. 매일 성게풍년입니다. 푼돈이 아니라 목돈이 들어옵니다. 여름 내내 이렇게만 번다면 저는 금방 부자가 될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집을 수리하고 싶습니다. 초간삼간 고향집이 장마 때문에 붕괴될 위험에 놓여 있어서죠. 오늘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심해를 정처 없이 헤집고 다닙니다. 매의 눈으로 성게를 찾습니다. 밤새 태풍이 불어 심해에 숨어있던 성게들이 무더기로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해초덩굴과 미역이 가득한 곳엔 성게들이 빼꼭히 있습니다. 순간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것은 ‘돈 봤다!’입니다. 명진이에게 여기 오라고 손짓합니다. 둘은 입가엔 웃음이 가득합니다. 점심도 잊고 성게를 잡습니다. 마치 가랑잎을 긁어모으듯이 그물 가득히 쓸어 담아서 쉬지도 않고 퍼 나릅니다. 심해도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10번도 넘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돈을 버려둘 순 없으니까요. 뱃전엔 디딜 틈도 없이 성계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오늘따라 산소공급기가 말썽을 일으킵니다. 선주는 걱정 말라며 재촉합니다.

한참 신나게 조업 중인데 장대비가 쏟아지네요. 바람도 거칠고 파도도 사납습니다. 수평선에선 우레가 치고 번개가 번뜩입니다. 태풍이 올 조짐입니다. 고향엔 해상예보가 잘 갖추어지지 않아 날씨를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그날그날 운에 맡길 수밖엔 없죠. 서둘러 떠나야 합니다. 하지만 바다에 들어간 영수형이 나오지 않았네요. 모두들 급히 심해로 들어갑니다. 한참이나 심해를 뒤져 영수형을 찾았습니다. 명진이는 형의 허리에서 납덩어리를 풉니다. 동료들과 겨우 형을 심해로 끌어올리니 형은 숨이 없습니다. 정신이 멍하고 아무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선주는 뱃전엔 형의 시신을 눕힐 곳이 없다며 끈으로 묶으라고 합니다. 선주에겐 사람보다 돈이 중요한가봅니다. 사나운 파도로 배가 심하게 흔들립니다. 돈의 희생양으로 바다약탈자들에게 잡혔던 성게들도 바다로 돌아갑니다.

장대비로 온몸이 젖고 심한 배 멀미로 온몸은 천근만근 무겁습니다. 숙소에 돌아가 영수형의 짐을 정리합니다. 옷가지 몇 벌과 사진 한 장이 전부였습니다. 결혼을 약속한 애인과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결혼도 하지 못한 사람이라 장례식도 없습니다. 관도 없어 잠수복장을 한 채로 쌀가마니에 싸서 묻었습니다. 동료들은 성게를 그 위에 올려놓습니다. 하늘로 가는 노잣돈입니다. 애인의 곡소리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마을의 어르신은 바다사람이니 바다가 데려갔다며 흐느끼는 우리를 달랩니다. 형을 그렇게 보내고 많이 후회했습니다. 제가 성게밭을 찾지만 않았더라면 그래서 욕심을 내지 않았더라면 형이 그렇게 되진 않았을 겁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결국 제 대신 형을 죽게 했습니다. 2년간 동고동락했던 영수형을 그렇게 허무하게 보내고 두려움과 후회 때문에 술로 허송세월을 보냈습니다. 바다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바다가 두렵고 제 욕심이 무서웠습니다. 바다에서 사고가 났다는 소문이 퍼져 집에서 할머니와 사촌누나가 저를 찾아옵니다. 제가 살아있는 것을 보고 할머니는 눈시울을 붉힙니다. “다신 바다 나가지 마라, 나가지 마라! 벌써 아들 둘씩이나 잃었다. 손자까지 죽으면 난 못산다. 약도 필요 없다!  쌀도 필요 없다! 바다에 나가지 마라! 살아서 아바지 오마니는 봐야 할 것 아니니!” 할머니의 간곡한 부탁에 소년은 서럽게 웁니다.
 

4. 어부가 되다
심해잠수를 그만 둔지도 1년이 되어 갑니다. 저는 다시 농사를 짓고 삽니다. 우리 집 살림은 여전히 가난에 쪼들립니다. 감자밥이 목에 잘 넘어가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바다가 그립습니다. 아니 어쩌면 돈이 그리울지도 모르지요. 성게를 잡아 마음껏 고기도 먹고 술도 먹고 좋은 옷을 사 입던 지난날이 그립습니다. 작년엔 장마 때문에 농사는 망쳤습니다. 걷어 들인 옥수수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저는 또다시 바다로 나갈 궁리를 합니다. 그렇지만 할머니의 완강한 반대가 걱정입니다. 고민 끝에 할머니에겐 비밀로 하고 바다로 나갔습니다. 할머니에겐 외가로 간다고 했지요. 저는 고향 삼해의 옆 지역인 관해로 갔습니다. 관해엔 영식이 친척들이 살았고 그의 숙부는 선장입니다. 작은 중국산 철배 선장입니다. 영식이도 함께 탔습니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기에 나이를 속이고 어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17살에 오징어잡이 어부가 되었습니다. 첫 출항을 앞두고 고사를 지냅니다. 돼지머리, 떡, 과일로 상을 차리고 배위에서 오징어풍년이 들게 해달라고 고사를 지냅니다. 고사를 지내고 모든 음식들을 바다에 던집니다. 바다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죠. 한참 지나서 선장은 작살로 돼지머리를 찍어 물위에서 건집니다. 건져낸 돼지머리를 안주삼아 술을 마십니다. 선장은 바다사람은 태어난 날은 달라도 죽는 날은 다 똑같기에 바다에선 모두 친구라고 하며 저에게 술을 권합니다. 마셔보니 엄청 독합니다. 고사가 끝나고 첫 출항을 합니다. 다시 돌아온 바다이지만 이젠 아무런 느낌도 없습니다. 그저 예전으로 돌아간 느낌이라고 할까요?

2달이 지나고 이젠 오징어잡이가 익숙합니다. 오징어를 잡아 올릴 때면 펄럭이는 지폐가 올라오는 것 같습니다. 배를 타면서 저도 돈을 벌어서 선주가 되려는 꿈도 키웁니다. 배에서 조업을 하니 심해보단 덜 위험한 것 같습니다. 긴장하던 모습도 사라졌죠. 뱃사람이 되니 저도 이 사회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바다보다 더 무서운 건 관리들의 횡포였죠. 해안경비대의 허가가 있어야 출항할 수 있습니다. 출입증을 조건으로 경비대는 많은 뇌물을 요구합니다. 힘들게 잡아온 물고기는 물론 돈, 술, 고급담배, 옷을 요구합니다. 해안 초소장은 제대할 때 부자가 돼서 집으로 간다고 합니다. 뭍에선 경찰과 보위원들이 불법조업을 운운하면서 뇌물을 요구합니다. 바다에선 해군이 뇌물을 요구합니다. 아니 그냥 배에 올라 애써 잡은 물고기를 맘대로 퍼갑니다. 선장과 갑판장 어느 하나 그들의 횡포에 대응하지 못합니다.
 
특히 바다에 쳐놓은 그물을 걷으러 갈 때면 해군들은 경비정으로 물고기와 그물까지 다 약탈해 갑니다. 바다에선 해군들이 해적입니다. 뭍에선 경비대와 경찰이 산적들입니다. 선군정치는 군인을 공공연한 무법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등쌀에 뱃사람들의 고충인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군인들은 민가에 와서 사정없이 약탈해 갑니다. 잠시라도 집을 비우고 있으면 가산은 물로 입던 옷가지들도 다 털어가죠. 어린 아이들을 보면 주머니에 있는 모든 것을 강탈해 갑니다. 돈부터 옷가지, 신발까지. 저도 돈을 지키려다 군인이 휘두른 개머리판에 코뼈가 나갔습니다. 어디에도 하소연할 데가 없죠.

2001년 여름으로 기억합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바다로 나갑니다. 식량, 성냥, 그물, 오징어잡이기구, 그리고 어부들을 선적하여 오징어 잡으러 나갑니다. 새벽에 출항하여 3시간 가까이 멀리도 나갔습니다. 오늘은 오징어가 신통치 않습니다. 선장은 다시 2시간을 뱃머리를 돌려 이동합니다. 드디어 그토록 기다리던 오징어떼가 나타났습니다. 모두들 신이 나서 오징어를 잡기 시작합니다.  한꼬챙이(10마리)를 잡으면 500원이요, 2꼬챙이는 천원이요,  콧노래가 절로 나옵니다. 돈을 낚이니 더 없이 기쁩니다. 그렇게 오후가 다 돼서야 조업이 끝나고 식사를 합니다. 오늘은 만선이네요. 하지만 기쁨도 수평선에선 번개가 번쩍이며 우레 소리는 귓전을 때립니다. 몇 번이고 태풍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오늘은 기분이 달랐습니다. 서둘러 귀항준비를 하는데 기관이 말썽을 일으킵니다. 워낙 낡은 배라 자주 고장을 일으켰는데 큰일입니다. 삽시에 파도는 커다란 물기둥을 만들어 내면서 배를 덮칩니다.

금방이라도 배가 뒤집힐 것 같습니다. 칼날 같은 빗줄기는 병든 배를 마구 강타합니다. 선장이 소리칩니다. ‘밑창에 들어가 빨리 들어가!’ 급히 배 밑창으로 몸을 숨겼지만 몸을 가늘 수 없습니다. 모두 헛구역질을 하며 방금 먹은 식사를 다 토해냅니다. 바닥에 바짝 몸을 붙이고 눈을 감습니다. ‘오늘은 내 제삿날이구나! 모르겠다. 영수형 만나러 가야지!’

정신을 차렸을 쯤에는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밑창에 나와서 하늘을 보니 태풍이 언제 왔나 싶을 정도로 별들이 반짝입니다. 망가진 배는 바다위에서 파도에 밀려 정처 없이 떠다니고 있습니다. 모두의 얼굴은 심각합니다. 배위엔 긴 침묵이 흐릅니다. 조타실엔 갑판장만이 있습니다. 그때서야 깨달았습니다. 조타실에 있던 선장이 태풍 때문에 바다에 떨어진 것이 분명했습니다. 겁에 질려 흐느껴 우는 영식이를 품에 안고 아무 말 없이 다독이기만 합니다. 그렇게 바다에서 5일이나 떠 있었습니다. 고장 난 배는 우리를  어디로 가는지 데려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식수도 음식도 다 떨어져 잡은 생선으로 목숨을 연명했습니다. 너무 목이 말라 바닷물을 마셨지만 금방 토해냅니다. 끓여서 먹어봐도 별 차이가 없습니다. 결국 오줌을 마시며 버텼습니다. 이렇게도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떨쳐지지 않습니다. 배전의 나무도 다 뜯어 태워서 이 모닥불도 마지막입니다. 태울 수 있는 건 모두 태웠습니다. 파도가 잔잔하고 고요합니다.

며칠 전까지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괴물같은 바다는 너무 조용합니다. 어딘 선가 사이렌소리가 울립니다. 해안경비정입니다. 경비정은 우리 배를 견인하여 해군기지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누구하나 반가운 기색이 없습니다. 지금은 본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무런 기운도 없기 때문입니다.  ... 조사를 끝내고 보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니 저희가 죽은 줄 알고 고향에선 장례식이 열렸다고 합니다. 마을 어르신은 살기 전에 장례식을 받았으니 명줄 한번 길겠다며 위로 합니다. 영식이 숙모는 남편의 죽음에 무덤덤합니다. 아버지도 바다에서 잃고 처녀뱃사공으로 산 바다사람의 강인한 의지겠죠.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섭리를 바다사람들은 담담하게 받아들이나 봅니다.

바다는 천의 얼굴을 한 자연입니다. 때론 포근하게 때론 시원하게, 거칠고, 난폭하게, 심술도 부립니다. 그렇지만 바다는 인간이 무차별적으로 정복해거나 우리의  노예로 삼을 수 있는 존재는 아닙니다. 우리가 욕심으로 바다에 다가선다면 바다는 진노합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파멸하는 길이죠. 요즘 바다의 적조현상이 심상치 않게 들립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과 즐거움을 주던 바다는 우리의 욕심으로 피폐해지고 있습니다. 피폐해진 바다는 자연이 아니라 괴물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저도 바다에서 일을 했지만 욕심 때문에 동료를 잃었습니다. 욕심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겼죠. 그래서 욕심 없는 자세가 바다를 대하는 우리의 진정한 모습과 자세라고 생각됩니다. 

남쪽으로 내려와 속초에서 배를 타고 러시아를 간적 있습니다. 그때 선장은 우리배가 북쪽 동해를 에돌아서 간다는 말을 듣고 고향이 생각났습니다. 새벽에 북한영해를 지나치고 있는데 멀리엔 티끌만한 작은 배가 보이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고향의 포구도, 해안도, 하지만 언제든 다시 가고 싶은 고향입니다. 저에게서   바다는 동해입니다. 그리고 동해는 삼해입니다. 제가 태어난 고향이고 험난했던 사춘기 시절이 고스란히 남겨있는 잊지 못할 곳입니다. 그렇지만 고향으로 갈 수 없습니다. 개성공단으로 육로는 열렸지만 한번 굳게 닫힌 동해 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갈수는 없지만 저의 가슴에 남겨있는 바다의 추억으로 고향을 생각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습니다. 육로도 열렸으니 언제든 뱃길도 열리겠죠.

가끔은 바다에서 춤추는 물고기들이 부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유롭게 고향을 오갈 수 있으니까요. 인간의 힘이 아무리 강해도 바다를 막을 수 없습니다. 육지엔 분계선을 만들 수 있지만 바다엔 분계선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가장 쉽고 빠르게 열릴 수 있는 길은 바다라고 생각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해역과 어장은 풍부해지겠죠. 북한의 동해는 어장이 풍부하지만 배들이 낡아서 어업양이 많지 않습니다. 한국의 풍부한 해양기술이면 통일된 동해는 보물바다가 될 것입니다. 요즘 우리의 어장을 중국선단들이 침범하는 일이 잦습니다. 한국의 어민들에게도 좁은 우리의 어장을 놓고 지금도 각축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통일이 되면 바다는 넓어져 어장 때문에 고민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특히 남쪽 동해엔 명물인 명태를 볼 수 있겠네요. 동해는 지금도 자유롭게 출렁입니다. 국경도 분계선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욕심을 버린다면 동해는 금단의 바다가 아니라 모두의 바다, 진정한 대한조국의 바다가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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