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의 노래

한국해양재단이 주최한 ‘제 7회 해양문학상’ 수상작의 일부를 올해 신년호(1월)부터 주최측과의 협의하에 연재하고 있다. 1월에는 최우수상을 수상한 박정혁씨의 소년과 바다(수필)를 게재했고, 본호에서는 우수상을 수상한 남순백씨의 소설 ‘파도의 노래’을 싣게 됐다. 소설의 특성상 원고분량이 길어서 남순백씨의 수상작은 3회(2-4월)에 걸쳐 연재한다.
‘파도의 노래’는 필자가 △선장의 고독한 독백 △바다와 결혼한 사나이 △구멍난 뱃사람의 주머니 △살아있는 선원의 무덤 △파도의 노래 △하나로 통하는 바다의 신비... 글을 나누어놓았는데, 이중 선장의 고독한 독백과 바다와 결혼한 사나이 부분을 편집했다.                              -편집자 주-  
  

남순백
남순백
나는 선장이다. 아직 거센 바다를 누비고 있는 현직 선장이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한 선장이다. 바다에서는 성공을 했지만 인생에서는 결국 실패를 하고 만 셈이다. 키를 똑바로 잡고 배는 똑바로 몰았다. 그러나 인생의 키는 바로잡지 못했던 것이다. 바닷길에는 해도와 나침반이 있었지만 인생항로에는 네비게이션이 없었다. 밤하늘에 떠있는 별자리만 보고 선원이 인생을 헤쳐 나가기엔 육지의 길은 너무 거칠고 복잡했다.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너무나 빠르게 변하는 것이 또한 세상 물정이었다.

저마다의 인생길에는 운명이란 것이 있다고들 했지만 내가 걸어온 내 길은 항상 내가 선택해야 하는 내 몫이었다. 그러나 내가 배 위에서 선택한 육상의 일들은 결국 올바르지 못한 것이 되고 말았다. 잘 못한 선택도, 선택을 하지 않은 것도 역시 선택은 선택이어서 결과는 고스란히 내 몫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에 와서야 나 스스로에게 조용히 물어본다. 이제까지 둔 바둑을 혼자서 복기하듯 나 자신과의 대화를 나누었다. 아직은 인생이 구만 리처럼 남았고, 실패의 원인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대화는 요즘 새로 생긴 나의 버릇이기도 했다.

나는 지금 그리스 선적의 미국 선박을 몰고 뉴욕 항을 떠나 파나마운하를 향해 가고 있었다. 우리 배는 파나맥스였다. 파나마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가장 큰 배였고 그래서 배의 폭보다는 길이가 아주 길었다. 폭이 좁은 운하를 통과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의 동부와 서부로 상품을 운반하는 데 남아메리카를 두르는 몇 십 배나 먼 길을 돌지 않도록 파나마 운하 통과용으로 만들어진 배였다. 지금은 서해안의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길이었다. 때때로 파도가 가라앉은 바다는 평화롭기 그지없었으며 배는 순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밤이면 중미의 밝은 달빛은 교교하게 선창을 타고 들어와 내 방안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수많은 별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지만 밝은 달빛은 입을 다물라고 그들에게 눈짓을 했다. 이따금 소멸해가던 작은 파도가 아쉽다는 듯이 뱃전에 와서 제 몸을 부딪고는 하얀 포말로 부서지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와의 대화, 잠잠해진 바다보다 차분하고 진지한 얘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주변에 정겹게 얘기를 나눌만한 사람이 없기도 했지만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결국은 나였기 때문이다. 고국을 떠난 지도 1년이 넘었다. 나는 어제도, 열흘 전에도, 한 달 전에도 물 위에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바다의 제왕인 선장으로서 나는 왜 뭍의 인생에서 실패를 하고 말았는가?”
나는 먼저 그렇게 물었다. 그러면 나는 그렇게 묻는 나에게 분명하고 또렷또렷하게 대답했다. 긴 인생길에는 수만 가지 작은 이유들이 올망졸망 많기도 하겠지만 가장 분명한 것은 한 가지 뿐이었으니까.
“뱃사람이 가끔 밟아보는 뭍은 늘 함께 있던 물과는 너무나 달랐으니까”
“말을 둘러 대는군. 속마음을 속 시원히 훌훌 털어놔 보게. 우리 사이는 세상에 둘도 없는 나와 나의 사이가 아닌가?”
“장가를 못 가서. 아니? 장가를 안 가서!”

나는 마지못해 그렇게 대답하는 나에게 다시 묻는다. 순간, 파도도 달빛도 숨을 죽인다.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태도다. 단지 컨테이너를 가득 싣고 마치 어름 위를 미끄러져가는 스케이트처럼 선수(船首)가 가물가물 멀리 보이는 우리 큰 배의 기관의 부드럽고 고른 피스톤 소리만이 은은하게, 고르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평생을 들어온 내 심장의 고동만큼이나 기분 좋은 소리였다.
“그래, 이제야 바른 말을 하는군. 그런데 왜 장가를 못 갔지? 아니? 안 가게 되었지?”
“난 멍청이 바보가 아니니까.”

나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이 대목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커지고 말았다. 많이 화가 난 목소리가 분명하다. 나의 대답은 내 방의 작은 창을 넘더니 컨테이너가 가득하게 포개져 누워있는 갑판을 굴러 곧장 바다로 뛰어나갔다. 잔잔하던 파도가 갑자기 바짝 긴장하던 것으로 그랬다. 달빛이 놀라서 눈을 번쩍 떴다. 별들이 화가 난 나에게 응원의 아우성을 지르며 반짝거린다. 어떤 성질이 급한 별은 환한 긴 꼬리를 밤하늘에 그으며 잔잔한 바다로 곤두박질치기도 하였다. 이때 배는 드디어 파나마 운하로 들어서고 있었다. 2단식 갑문인 미라플로레스 호에 도착한 것이었다. 여기서부터 약 여덟 시간의 항해는 순탄할 것이었다. 이곳은 물은 짜지만 사방이 막혀있는 파도가 없는 호수와 같기 때문이다.
“그럼 자네는 장가를 든 선원은 모두 바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 장가 든 바다 사나이들은 바보가 틀림없다. 바보라는 소리를 들어야 마땅하다. 파도와 싸우며 뼈가 부서지도록 벌어서 바람난 마누라에게 가져다 바치는 사람이 바보가 아니고 무엇인가? 마누라와 재산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고 눈물을 징징 짜대는 장가 든 선원들이야말로 바보요 멍청이라 생각한다. 난 그렇게 당하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을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얼굴은 붉어지고, 맥박이 빨라졌다. 대답도 따라서 빨라지고 있었다. 배는 별빛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어둠 속을 천천히 항해를 계속하고 있었다. 습기가 적어 기분 좋은 건조한 미풍이 아주 부드럽게 불어와 얼굴을 간질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멋진 분위기에 맞지 않게 마음이 바쁘고 흥분한 사람은 나 혼자 뿐이었다. 
“어, 허, 또 그 친구를 생각하는 모양이군. 유양이란 친구 말이야. 자네는 왜 그 친구를 잊지 못하고 그에게 그렇게도 집착하는가?”   

나는 우선 바다를 닮은 선장답게 좀 더 너그러워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긴 숨을 토해내며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 잔잔한 호수가 되어버린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바다에는 또 하나의 파란 청아한 하늘이 들어있었다. 한국에서 보던 것과 똑 같은 밝은 달과 반짝이는 별들도 어느새 하늘과 함께 바다 밑에 와서 머물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단 한 점의 부끄러움이나 거짓도 없어보였다. 나는 이 순간, 호수가 된 바다처럼 나에게 더 솔직하여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에게 조용히 다시 물었다.
“결혼의 다른 면 즉 부정적인 면에만 너무 집착한 것이 아닌가? 모든 선원들의 아내가 불륜을 저지른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건 그럴지도 모른다. 나도 불완전한 사람 중의 한 명이기 때문이다. 곁에 있던 동료들, 특히 가장 좋아하던 유양의 처지가 너무 비참하여 감정이 그렇게 치우쳤을 수도 있다. 나는 유양의 마누라를 안다. 결혼식 때도 봤고 그 뒤에도 아이를 업고 있는 그녀를 본적도 있다. 내가 본 그녀는 분명히 보통의 수수한 여자였다. 내 친구에게 그렇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만큼 악처로는 보이지 않았었다. 유양의 경우뿐만 아니라 난 너무 자주 내 주위에서 그런 사고를 봤다. 가슴에 상처를 입은 그들은 지금이라도 아지트에 가면 얼마든지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차라리 보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고 그 후유증도 보고 말았다. 보통 여자가 악처로 변해버리는 세상은 보통 세상이 아니다. 결국에는 나 역시 그렇게 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이건 여지가 없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동일시의 예감이었다.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기로 단단히 작정했다. 호되게 당하고 난 뒤에 후회를 하는 남자가 되기는 싫었다. 나는 여자들에게 항거를 하고 싶었다. 그것은 여자들에게 선수를 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바다에 있었다. 내 옆에는 여자라고는 씨도 없었다. 항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일찌감치 여자와 상종하지 않고 결혼을 포기하는 것뿐이었다. 그게 여자에게 복수하는 상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나에게 당당했다. 무척 당당한 척 하는 나였다. 그렇다고 켕기는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여자를 싫어해서, 믿지 못해서 장가를 안 간다고 큰소리를 치면서도 좋아할 뻔했던 한 여자가 있었다. 그래서 맞선까지 보았던 것이다. 
“네가 좋아하는 여자가 없어서 혹은 너를 죽도록 좋아하며 따르는 여자가 없어서 여자에 대해 그렇게 큰소리를 치는 것은 아닌가? 애당초 있지도 않은 여자를 마치 포기한 것처럼 말이야?”
나는 나에게 이렇게 되물어 볼 수밖에 없었다. 그간 내 마음의 한 구석에 도사리고 있어서 나를 떳떳하지 못하게 하던 찜찜한 것, 구린 것을 이번에는 말끔히 털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럴지도 모르긴 해. 좋은 여자가 있었어. 없었다고는 말 못하지. 절대로…, 그 때는 솔직히 여자에게 무시를 당했었지. 여자와의 첫 만남에서 말이야. 처음 만난 그녀는 외모부터가 내 마음에 쏙 들었어. 들고도 남음이 있었지. 지금까지의 각오를 버리고, 사람들에게 공표했던 나의 주장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그녀를 취하고 싶을 정도였어. 그런데 그녀가 나를 싫다고 하더군.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내 직업이 싫다고 하더군. 그건 나를 싫다고 하는 소리보다 더 듣기 싫었어. 바로 나와 내 직업을 싸잡아 모독하는 소리로 들렸어. ‘하필이면 맞선을 보는 여자의 입에게 이런 소리를 듣다니?’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그녀와 헤어졌나? 단지 그것뿐이었어?”

이러는 사이에 우리 배는 파나마 운하의 첫 갑문을 지나고 클레브라 수로로 통하는 입구의 일단 식 갑문인 페드로미구엘 갑문을 막 들어서고 있었다. 주위에 함께 갑문을 통과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여러 척의 선박들이 멀리서부터 차례를 기다리며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갑문이 열릴 때마다 우리 배와 같이 큰 파나맥스는 한 척씩, 작은 배들은 두 세척씩 한꺼번에 통과하도록 조정하고 있었다. 날씨는 더 없이 맑았으며 긴긴 항해 끝에 만나는 항구의 불빛처럼 아름다운 야경이 눈 가까이 다가왔다. 오랜만에 보는 육지의 모습이었고 오랜만에 맡아보는 사람과 흙의 냄새였다. 그러나 나는 나와의 대화를 계속해야 했다. 뱃사람에게 넘쳐나는 것이 시간이었지만 이렇게 자신과의 조용하고 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잡기는 좀처럼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뿐이었다고 하면 미흡한 점이 있겠군.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었으니까. 두 번째 이유가 그녀와 헤어진 더 중요한 이유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야. 허허허…, 알고 보니 그녀는 무식했던 거야. 지겹도록 무식한 여자였어. 지독한 무식이 빙산처럼 물위로 점점 더 드러나는 그 순간, 마음에 쏙 들었던 그녀에 대한 생각이 금방 바뀌더군. 가을 바다처럼 급히 바뀌던 것이 바로 내 마음이었어. 앞에 앉은 그녀를 다시 쳐다보니 덕지덕지 바른 그녀 얼굴의 짙은 화장에서부터 무식함이 철철 흘러내리는 것 같더군. 그녀의 입에서는 시궁창처럼 여러 가지 악취가 진동하는 무식들이 한데 섞여서 줄줄 흘러나왔어. 그녀의 뱃속에는 마치 무식의 강이 흐르고 있다는 듯이 말이야!

무식의 첫 시작은 그녀가 바다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것이었어. 그녀는 역사를 바꿔 온 선원들의 위대함에 대해서 몰라도 한참 모르더군. 아주 깜깜했어. 그 정도로 무식하니 러일전쟁을 단번에 일본의 승리로 이끌어 대국 러시아를 벌벌 떨게 했던 해전의 명장 도고 헤이하찌로는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손치더라도 그가 숭배해 마지않던 이순신 장군이야말로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말이야. 그가 남긴 유명한 한 마디 ‘이순신에 비하면 난 그의 발가락의 때에 불과하다’, 그건 유명한 말이잖아? 그 여자, 해군제독 이순신 장군을 아직도 육군인 줄 알고 있더라고. 그 지경이니 트라팔가 해전의 승장인 영국의 넬슨 제독에 대해서야 들어보기나 했겠어?”
“결국 그녀의 무식함 때문에 헤어진 게로군?”

“아냐. 꼭 그것 뿐만은…. 무식이 그 씨앗을 뿌렸다고나 할까? 그 주제에 그녀는 선원을 매우 저평가 하고 있었어. 수준 이하의 직업이라고 괄시를 하더라고. 그녀는 지금 그녀가 홀짝홀짝 마시고 있는 커피며, 그 커피에 찍어서 오물오물 맛있게 먹고 있는 케이크의 원료인 원당과 밀가루며, 그녀가 펑퍼짐한 엉덩이를 내려놓고 있는 원목 의자까지도 우리 선원들이 험한 파도를 뚫고 머나 먼 나라에서 옮겨온 것이란 걸 전혀 눈치도 채지 못하고 있었어. 그런 지독한 무식을 더 드러내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이 그녀는 오직 항해사라는 내 직업을 무시하려고만 설쳐댔지. 항해사를 무시하는 것이 마치 자신의 승리가 되고, 나를 만난 목적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야. 아니면 전에 어떤 야무진 선원에게 오지게 당한 적이 있어서 그에 대한 앙갚음을 이번 기회에 하려는 듯이 말이야…”
 

나는 흥분이 되어 다른 나에게 계속 그녀에 대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때쯤 여명이 희뿌옇게 밝아오면서 파나마 운하의 도크의 위용과 운하를 따라 발달한 멋진 도시의 모습들이 실루엣처럼 나타나기 시작했다. 남북 아메리카의 결절점을 이루는 파나마 지협(地峽)은 그 보기 드문 오밀조밀한 바위산이 이어지는 기묘한 자연풍광과 그 사이를 뚫은 거대한 난공불락의 토목공사를 통해 만들어낸 끝이 보이지 않는 가물가물한 큰 수로 그리고 여기에 세워진 현대식 도시가 어우러져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나는 그 장관을 여러 번 보았지만 볼 때마다 새롭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지금 눈으로는 이런 기막힌 풍경을 보면서 입으로는 그녀의 구역질나는 무식을 되씹어 보는 것은 썩 어울리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나와의 대화를 멈추었다. 이건 장엄한 이 풍경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늘 피와 땀을 흘리는 나는 인간의 엄청난 노력과 땀과 피가 얼룩진 이런 대역사를 경외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또 오늘 밤과 같은 조용한 시간이 언젠가 온다면 그때 다시 나와의 진지한 대화를 나누어보리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렇게 다짐을 할수록 새록새록 생각나는 것은 그녀였다. 그녀와의 맞선이라고 하는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그녀의 무식은 내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혔고 내 직업에 대해 먹칠을 당한 것 같아 나는 두고두고 그녀의 징글맞은 인상이 지워지지 않았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무식한 그녀가 나와 내 직업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를 하던 간에 내겐 꿀릴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내 항해사의 직업에 대해 만족하고 있엇고, 무척 당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씨알도 먹히지 않는 나를 향해 그녀는 마지막으로 중얼대듯 이런 말을 했었다.

“선원은 목숨이 위험한 직업이고, 가족이 함께 살 수도 없고, 보고 싶을 때 볼 수도 없고, 뿌리도 없이 그냥 물위에 금방 지워질 이름을 쓰며,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것이 또 안타깝고…”
그녀는 무엇보다도 그런 것 때문에 나의 선원이란 직업을 애써 무시하려고 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것 때문에 나의 직업이 자랑스럽기만 했다. 우선 세계를 유람할 수 있었기 때문에 외항 선원이란 직장에 긍지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번쩍이는 까만 구두에 새하얀 항해사의 제복을 입고 들리는 항구마다 나는 그곳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금발의 늘씬한 아가씨들은 굶은 짐승같이 달려들어 나를 뜨겁게 포옹했다. 뜨거운 항구의 짧은 밤이 꿈같이 흘러가 버리고 그녀들의 포옹은 내가 항구를 떠날 때 부두 가에서 더 격렬해졌다. 내 손을 꼭 잡고 그만 눈물을 글썽거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이별의 뱃고동이 뿌우웅, 뿌우웅…, 연이어 울리며 나의 승선을 재촉할 때면 닭똥 같은 굵은 눈물방울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녀들을 지켜보는 것이 행복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직업의 남자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멋진 직업으로 인해 벌어들이는 짭짤한 수입에 나는 흡족해 했다. 수개월을 하루같이 늘 배안에서 자고, 배안에서 먹고…, 이렇게 생활하다 보니 돈을 쓸 데도, 쓸 시간도 없었다. 배를 타다 항차가 되어 나의 텅 빈 집으로 돌아오면 통장에는 월급이 원금은 물론 이자에 이자가 새끼를 치면서 꼬박꼬박 쌓여갔다. 육지에서 일하는 친구들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돈이었다. 그 많은 돈이 쌓여가는 통장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해서 난 푹 빠지기 일쑤였고, 그 때문에 해상생활의 고달픔 같은 것은 눈 녹듯 사라졌다. 해산의 고통을 귀여운 아이를 보며 곧 잊고 마는 어머니와도 같았다.
“뭐니 뭐니 해도 돈이 최고야! 돈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어? 돈이야말로 최고의 능력자이고, 만물의 어머니이기도 해. 돈이 있으면 안 되는 일이 없고, 모든 것을 살 수도 있거든, 돈이 별 것 아니라고 하는 축들이야말로 정작은 돈이 없어 지갑이 텅 빈 작자들이지 뭐야?….”

나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통장을 가슴에 꼭 안고 잠을 잤다. 자는 동안에도 그 통장으로 인해 행복한 꿈을 꾸었고, 새벽녘이면 눈을 떠서 통장에 찍힌 숫자들을 다시 세어보곤 했다. 그 적잖은 숫자들은 도망가지 않고 밤새 주인을 기다렸다는 듯 더 선명하게 빛나는 것이었다. 나는 얼마 후엔 더 큰 집을 사고, 더 멋진 승용차를 사고,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모두 사서 행복한 삶을 누리며 살아갈 것이라고, 계란 바구니를 안고, 계란을 팔아 양을 사고…, 장차 농장으로 키워보겠다고 꿈꾸는 소녀처럼 가슴이 부풀곤 했다.
 
어디 그뿐이랴? 나는 선원의 제대로 된 몸을 타고 났다. 물고기는 아니었지만 물에서 살 수 있도록 맞춤형으로 만들어진 신체 같았다. 단 한 군데도 배에서 생활하는데 부족함이 없었고 그에 대해 나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내 몸은 운동선수처럼 울퉁불퉁 근육질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배에서 일하는데 불편한 곳 한군데 없이 배에만 가면 더 건강해졌다. 처음 승선을 했을 때부터 그랬다. 멀미 때문에 고생하는 선원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어떤 이들은 너울 파도가 일어 배가 롤링과 피칭을 해대면 노란 똥물까지 토해내며 음식물 가까이 가지도 못했고, 눈이 퀭하도록 쫄쫄 굶으면서도 곡기를 입에 대지도 못했다. 얼굴이 치자 물을 들인 것처럼 노랗게 변하여 잠을 자지도 못했다. 누워도, 앉아있어도 속이 울렁거려 괴로워했고, 종내는 다리가 휘청거려 걸어 다니지도 못했다.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라도 배 멀미 때문에 배를 못 타겠다고 했다. 그런 배 멀미가 나에게는 처음 배를 타던 똘기 실습생 때 잠깐 왔다가는 영영 사라져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선원체질이 맞는 것이다. 폭풍우 속에서 배가 가랑잎처럼 흔들려도 누웠다 하면 코를 골기 시작하는 이가 바로 나였다.

세계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만나게 되는 온갖 전통음식이 나에게는 마치 어머니가 끓여주던 된장찌개처럼 맛이 있었다. 거센 파도가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 선원들은 며칠 동안 음식을 입에도 못 대었지만, 밤새워 비상 당직을 서다가도 출출하면 식당으로 가서 맛있게 배를 채우는 나를 보고 주방장은 굶어서 퀭한 눈으로 부러운 듯이 혀를 내둘렀던 것이다. 이번 파도에는 제대로 식사를 한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파도 속에 사는 물고기가 파도 좀 높다고 먹이를 먹지 않을 줄 아는가?”

나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던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중국에 가면 카오야가 맛이 있었고, 동남아에 가면 파타이와 수끼가 입에 맞았고, 아프리카에 가면 에티오피아의 인제라, 케냐의 우갈리…, 입에 대는 음식마다 우러나오는 독특한 맛을 즐길 수 있었다. 진한 향내에 절인 것이나 발효로 역한 냄새가 풍겨도 곧 즐겨 먹던 삭힌 홍어처럼 입맛에 맞는 것이 바로 세계의 갖가지 음식들이었다. 이런 특산 음식들은 가는 곳마다 음식백화점처럼 나를 위해 즐비하게 차려졌고, 나는 그 맛을 찾아서 여행을 하는 미식가요 식도락가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왜 지금, 지천명을 넘긴 이 나이에 와서야 인생에서 실패를 했다고 생각하는가? 그만하면 멋진 인생이 아니었는가? 정말 실패자가 맞는가? 겸손해서 하는 말은 아닌가? 그 정도면 꽤 성공한 삶으로 보이는데?”
순간 나는 깊은 생각에 빠진다. 어딘가 있을 답을 찾아서 생각은 점점 더 깊이 골똘해진다. 이만하면 성공한 인생일진데 도대체 나는 왜 뭍에서의 인생이 실패하고 말았다고 자꾸 생각하는가? 이 바쁜 생활, 이 험난한 생활에서도 패배의식은 왜 난데없이 나의 깊숙한 내부로부터 빚쟁이가 찾아오듯 문득문득 고개를 드는가? 그래서 나의 기를 죽이고 의욕을 감퇴시키는가? 내가 지금 그렇게 느끼고 있는 그것은 현실인가 아니면 잠재의식인가? 구름 속에서 삐죽이 창백한 얼굴을 내밀고 나를 내려다보는 달님처럼 돌이킬 수 없는 낭패감이 왜 자꾸 나를 노려보는가? 나는 나에게 다시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롭다. 쓸쓸하다. 허전하다. 허무하다.…, 전에는 느끼지 못하던 이런 감정들이 요즘에는 부쩍 나를 감싸고돈다. 마치 예전부터 가까이 있었다는 듯이…. 오랜 항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도 반기는 사람이 없다. 오라는 곳도 없고, 마땅히 갈 곳도 없다. 나이가 들어가는 인생에서 이것보다 더 비참한 것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애초부터 없었던 가족이란 존재가 그리워진다. 일을 해도 보람이 없다. 나는 과연 누구를 위해 일하고 있는가? 젊을 때 자랑스럽게 외치던 ‘국가를 위해서’라는 목표는 내가 지금 주장하기엔 너무 멀리 있는 너무 막연한 목표인 것이다. ‘처자식을 위해서’와 같이 구체성이 없는 목표는 나의 정체감에 짙은 회의만 일게 할 뿐이다…”
“장년의 깊은 회의라? 단지 그뿐인가?”

나는 다시 나에게 묻는다. 지극히 단순한 질문이지만 나는 만감이 교차한다. 어느 사람이 자기 인생의 실패와 성공을 어찌 한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다시 나를 향해 대답해야 한다. 과거를 더듬으며 좀 더 정확한 답을 찾기 위해 애쓴다. 그것은 나에게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질투다. 아내와 자식들을 가진 동료들에 대한 질투다. 그들은 나와 똑같은 상황에서도 장가를 들었고, 아내를 믿었으며,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제는 어엿한 가정을 가졌다. 흐르는 세월과 함께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화목한 가정을 지금 그들은 이루고 있다. 그 가정에서 며느리를 맞이하고, 사위를 맞고 있다. 어떤 친구는 손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재미로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산다. 내가 바보라고 손가락질했던 그들은 이제 보니 바보도 아니고 멍청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나보다 더 현명했던 것이다. 그들이 이룬 보금자리가 그들을 기다린다. 그래서 그들은 갈 곳이 있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즐겁게 갈 수가 있는 것이다. 난 지금 그것이 부러운 것이다. 질투가 나도록…”

그러나 나는 선장이다. 젊은 암사자처럼 날뛰는 성난 파도를 길들이는 선장이다. 이까짓 철 지난 후회쯤은 털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가볍게 이겨낼 수도 있다. 시시각각으로 닥쳐오던 폭풍우의 위험을 당당히 이겨낸 내가 아닌가? 거친 파도도 내 앞에서는 맥을 못 추지 않았던가? 이까짓 사소한 감정쯤은 저 멀리 던져버릴 수도 있고, 남들 앞에서는 감쪽같이 숨겨버릴 수도 있다. 나는 짐짓 태연한 척 해보기도 하고 잊어버리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이건 낭패였다. 숨기려 하면 할수록 그 후회란 놈이 먼저 눈치를 채고 찰거머리처럼 끈질기게 달려들었다. 그놈은 물러설 줄 모르는 아주 집요한 놈이었다. 바짝 독이 오른 늦가을 독사처럼 고개를 바짝 추켜들고 습격해왔다. 눈을 부릅뜨고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허장성세를 부리며 막아보려 했지만 그놈은 어느새 나의 허전한 마음속에 미리 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만 그놈 앞에 고개를 숙이고야 말았다. 그놈에겐 도저히 배겨낼 재간이 없었다. 그건 이마에 나이테가 쌓여갈수록 젊을 때는 제법 뻣뻣했던 모가지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으로 그랬다.

항복이다. 나는 후회란 놈에게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순종할 것을 서약했다. 계속 항거를 하다가는 내가 자랑하는 선장의 임무 수행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후회란 놈이 일면 이는 그대로, 사라지면 사라진 그대로 초연하겠다고 단단히 다짐을 하고 있는 나였다. 이렇게 일단 작정을 하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머리도 개운해져서 당장 큰 바다로 나가서 파도를 가르며 달리고 싶은 왕성한 욕망이 일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의 본능이자 뱃사람의 기질이었다. 때마침 우리 배는 파나마 운하의 마지막 단계인 3단식의 카툰 갑문을 막 빠져나오고 있었다. 이제 남미와 북미를 잇는 중미의 카리브만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만에 위치한 미항인 발보아 항에 들러서 유류를 보충하고, 선식을 채워 넣으면 곧바로 태평양을 거슬러 올라가 목적지인 샌프란시스코를 향하여 항해를 계속하면 되는 것이다. 후회와 패배의식 따위는 태평양 바다 깊숙이 수장시킬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바다와 결혼한 사나이
나는 바다가 좋았다. 날이 갈수록 오래 묵은 친구처럼 더 좋아지는 것은 바다였다. 바다와 친구가 된지도 오래되긴 했다. 그러나 바다가 좋은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어릴 적에도 바닷가를 좋아했고, 저절로 밀려오는 파도가 신기했고, 바다를 보면 가슴이 툭 터였고, 물속에서 나오는 조개가 이상했고…, 바다만 보면 큰 희망으로 가슴이 뛰었었다. 수평선 저 끝까지 가보는 것이 꿈이었고, 저 푸른 바다물 밑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바닷가에만 가면 끼니때가 되어도 돌아올 줄 모르는 어린 나를 보고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너를 잉태하고부터는 어미는 바다 근처도 가지 않았는데 아마도 너는 해신(海神)이 들렸나보다”
어릴 때의 바닷가는 나의 놀이터였다. 바다에 가면 내가 할 놀이는 무진장으로 늘려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아이들이 노는 그런 단순한 재미를 쫓는 하찮은 놀이는 하지 않았다. 게딱지를 신발 그득 잡고, 바위에 다닥다닥 붙은 굴을 따거나 하다못해 새끼 조개라도 줍는 것이 나의 놀이였다. 나는 저절로 배워진 개헤엄과 개구리헤엄으로도 멀리까지 갈 수 있었다. 물질을 하는 해녀 아줌마들을 따라 자맥질을 해보기도 했다. 이렇게 바다에서의 놀이는 지루하지 않았고 즐겁기만 했다.

바다를 좋아하는 것은 커서도 변하지 않았고 선원이 된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다만 바다를 좋아하는 그 방법만 조금씩 바뀌어 갔을 뿐이다. 나의 마음이 커가듯 좁은 바닷가에서 넓은 난바다로 대상이 바뀌더니 지금은 세계의 바다, 오대양의 굽이치는 구석구석이 모두 좋은 것이다. 사람들이 오르는 산이 봉우리마다 계절마다 특색이 있듯이 내가 날마다 접하는 바다도 장소에 따라 계절에 따라 자세히 보노라면, 시간에 따라서도 각기 다른 모습들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런 각양각색의 바다가 온통 좋았는데 그건 바다 그 자체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바다! 그 중에서도 이른 새벽에 잠에서 눈을 비비며 깨어나면 뱃전을 그득 채우고 출렁대는 물결이 좋았다. 이슬을 머금은 새벽의 파도는 힘차고 싱싱했다. 싱그럽게 출렁대는 물결은 우리 논에 푸르게 자라는 나락이었고, 우리 집 곳간에 그득 쌓인 곡식과도 같았다. 아침부터 바다를 보면 나는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내가 부자가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훗날 핀란드에 갔을 때 곧 증명이 되었다. 푸른 청정 바다에서 가을에 곡식을 추수하듯이 그물이 찢어지도록 무진장으로 걷어 올리는 양식 연어의 퍼덕거리는 모습이 그랬던 것이다. 연어의 푸른빛으로 빛나는 비늘을 보자, 늘 바닷물을 보며 부자라고 느끼던 나의 감정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바다는 온통 돈다발이었던 것이다.

또 저 멀리 수평선을 붉게 물들이는 바다의 여명을 나는 무척 좋아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태양의 부상(浮上)을 보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다는 확인이자 바다가 싱싱하게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바다가 부글부글 끓는 해의 기운을 힘차게 공중으로 밀어 올릴 때면 나는 내 가슴이 희망으로 용솟음치며 내 몸의 근육들이 꿈틀대며 힘차게 아우성을 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다는 나와 남이 아니었다. 신해불이(身海不二)! 바다가 맑을 때면 나의 기분도 날아갈 듯 했고, 바다가 구름에 싸여 우울한 울음으로 슬퍼할 때면 나도 우울증을 앓는 환자처럼 우울해졌다. 

바다는 밤은 밤대로 좋았고 낮은 낮대로 좋았다. 밤바다에 떠 있는 외로운 배 한 척! 내가 가는 길을 아는 것은 밤하늘의 별들뿐이었다. 유리구슬을 뿌려 놓은 듯이 반짝이는 은하수 계곡에도 하얀 쪽배 한 척이 떠 갈 것만 같았다. 나는 그 쪽배의 사공과 외로움에 대해서 얘기하기 위해 무던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심술궂게 뱃전을 때리고 제 몸을 부수어 하얀 포말로 사라지는 파도 소리 때문에 사공의 얘기는 잘 들리지 않았다. 파도는 저와 얘기하자며 나와 사공의 얘기를 방해하기 위해 쉬지도 않고 밤을 새워가며 철썩이고 있었다. 나는 파도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워야 했다.

닭이 울지 않아도 어김없이 새벽이 오고, 날이 밝는다. 바다의 새벽에는 닭울음소리가 없었다. 나는 빨갛게 충혈이 된 눈으로 먼저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바다의 어머니였다. 하늘이 바다를 낳았는지도 모른다. 바다는 여지없이 하늘을 닮았기 때문이다. 하늘이 맑으면 바다는 쪽빛 물결로 넘실대며 환희의 아우성을 질러댔고, 하늘이 검은 구름으로 얼굴을 궂게 찌푸리면 바다도 제 몸을 검게 물들이며 신음소리 같은 우울한 노래를 낮게 불렀다. 구름 낀 하늘만이 하늘이 아니듯이 맑은 바다만이 바다는 아닌 것이었다. 바다는 심술궂은 시어머니처럼 갑작스럽게 변화를 거듭해서 더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바다가 새벽이면 나를 불렀다. 바다는 나보다 먼저 깨어서 이웃집 봉창을 두드리듯이 뱃전을 두드려 나를 깨웠다. 나는 바다가 부르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내가 잠들어 있을 동안 바다는 외로웠던 게 분명했다. 넓고 어두운 바다에는 우리 배 외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별은 너무 높이 떠 있었고, 바람은 어디론가 멀리 가서 깊은 잠이 들었던 게 분명했다. 내가 잠이 깬 것을 확인한 바다는 나의 방 가까이 다가왔다. 바다는 갑자기 처녀처럼 설레는 젖가슴을 내밀고 밀어를 속삭이기 시작했다.
“잘 잤죠? 밤에는 죽은 사람처럼 깊은 잠에 떨어져 꼼짝도 하지 않더군요?”
“물론이오. 당신이 고운 목소리로 자장가를 불러주지 않았소?”

바다는 저를 좋아하는 사람을 알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다 사랑이 확인되면 바다는 연인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어 했다. 잔잔한 파도며 시원한 바람이며 높은 하늘과 맑은 날씨는 바다가 연인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었다. 바다는 사랑하는 사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기도 하고, 아주 먼 데서 들어가지고 온 사랑의 이야기를 속삭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가슴 가득 흥분이 일면 연인을 끌어안고 몸부림을 쳤다.

바다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나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바다가 독백을 하듯이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꿈만 먹어도 배가 부르던 고등학교 3학년의 햇병아리 실습 항해사로부터 지금의 백전노장인 선장이 되기까지 근 사십여 년을 오로지 배에서 살았다. 바다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바다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 긴 세월을 어떻게 견디어 낼 수 있었을까? 물고기도 아니면서 물에서 지낸 세월이 뭍에서보다 훨씬 더 많았다. 쉼 없이 넘실대는 검푸른 파도 위에서 청춘을 불태웠다. 잔잔한 바다, 춤추는 바다, 진노한 바다, 질투의 바다, 미쳐 날뛰는 바다…, 바다는 자신의 온갖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바다는 그녀의 속살까지도 부끄러움 없이 나에게 드러내었다. 바다는 그녀가 나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려고 하였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너무나 오랜 친구였기 때문이다.

나는 바다를 사랑했다. 나는 바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기도 했다. 사랑하는 바다를 쫓아서 바다가 있는 한 그 끝까지라도 갈 작정이었다. 추운 겨울에도 북극해의 날 선 눈보라에 맞서서 항해를 계속했다. 둥둥 떠다니던 얼음덩이가 쿵쿵 소리를 내며 뱃전에 와서 부딪쳤다. 갑작스레 함박눈이 내려 갑판위에 수북하게 쌓이기도 했다. 그 속을 무소의 뿔같이 뚫고 항해는 계속되었다. 사랑하는 바다가 있었기에 견디어 낼 수가 있었다. 갑판에 나서면 속눈썹이 얼어붙어 눈을 뜰 수가 없었고, 코가 얼어서 코를 만지면 얇은 과자조각이 부서지는 것처럼 바삭거리는 소리가 나는 지독한 추위였다.

이렇게 꽁꽁 언 몸을 녹일 여가도 없이 우리 배는 어느새 아프리카 케이프반도의 끝자락인 희망봉 근처를 항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막에서나 볼 수 있는 이글거리는 뙤약볕이 내리쬐어 갑판을 프라이팬처럼 달구었고, 발을 내디딜 때마다 구두 뒤 굽이 녹아 철판에 쩍쩍 달라붙었다. 금방 갈아입은 속옷은 물론이고 겉옷까지 땀으로 흠뻑 젖어 물에서 갓 헹구어 낸 빨래처럼 땀이 뚝뚝 흘러내렸다. 정말 모진 더위였다. 몸은 아직 더위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흐느적대고 있었다. 엿가락처럼 늘어진 몸뚱어리는 냉수에 각 얼음을 넣어 들이켰으나 금세 땀이 되어 흘러내렸다. 그럴수록 몸은 햇볕에 던져진 해파리처럼 더 쳐졌다. 입맛도 없고 잠도 오지 않았다. 북해에서는 더운 여름을 그리워했듯이 여기서 그리워지는 것은 북해의 추위뿐이었다.

이렇게 신대륙을 찾아 헤매는 콜럼버스처럼 나는 쉼 없이 항해를 계속했다. 가는 곳마다 짐을 올리고 또 짐을 내리다 보면 어느새 이렇게 여러 바다를 거치고 배는 둥근 지구를 뺑뺑 돌게 되는 것이었다. 이 바다를 횡단하기도 하고 저 바다를 종단하다보면 결국 바다는 서로 하나로 연결이 되었고, 우리 배는 그 바다에 떠있는 섬인 육지와 육지를 연결하는 연락선이었다. 오대양 육대주 모두가 바로 내가 노는 무대였다. 바다와 연결된 곳, 우리 배가 접근할 수 있는 항구가 있는 곳이라면 이 긴긴 세월동안 가보지 않은 곳이 과연 얼마나 될까?

나는 고향이 그리우면 항구를 찾아 달렸고, 사랑이 그리울 땐 파도 속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바다에서 살았다. 바다의 사나이였기 때문이다. 바다는 내 마음을 알아주었다. 그래서 나의 괴로움, 쓸쓸함, 외로움 그리고 때로 가슴에 이는 슬픔의 조각까지도 위로해 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바다에 크게 의지하고 있었다. 오지랖이 넓은 바다는 언제나 나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래서 바다는 나의 연인이요. 바다는 바로 나의 아내였다.
 

어느 날, 항해사 십년 차쯤 되었을 때였다. 달빛이 교교한 한밤중에 나는 긴 갑판을 예식장의 예식 무대인양 사뿐히 걸어서 맨 앞쪽 배가 물결을 가르며 나아가고 있는 선수로 나갔다. 바다와 혼인식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바다는 혼인식을 앞둔 아가씨처럼 푸른 물감을 뒤집어쓴 듯 온통 푸른 면사포를 쓰고 짙푸른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온통 환희에 싸여 있었다. 내 마음을 알았다는 듯 바람도 물결도 곧 잔잔해졌다. 잔치 집처럼 소란하던 주위가 온통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달과 별들과 은하수…, 그들을 가슴에 가득 담은 하늘이 예식장인 바다로 내려와 그대로 잠겨 있었다. 그들은 거기서 오랫동안 신랑인 나를 기다린 게 분명했다. 주인공인 내가 나타나자 그들이 일제히 빛을 발해 우리의 결혼식을 축하해 주고 있었다. 수많은 돌고래와 꽁치와 고등어 떼가 물결 위로 솟구쳐 오르며 달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파도가 부르는 결혼 행진곡이 은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로 신부인 바다가 나의 가까이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속삭이기 시작했다.

“당신만을 사랑했어요. 나는 외로웠단 말이에요. 아무도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았다구요. 그래서 당신만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를 떠나지 않을 거죠? 영원히…”
“물론이오. 이제 당신은 나의 아내이니까. 언제나 당신과 함께 하겠소. 저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수많은 하객들 앞에서 맹세하겠소. 당신을 사랑하겠다고…. 영원히…”
“나는 당신을 믿어요. 믿고말고요. 당신은 언제나 굳센 바다의 사나이였으니까. 이제까지 믿어온 것처럼…”

바다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서서히 그녀를 보듬으며 애무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녀의 봉긋한 젖무덤을 주무르기 시작하자 그녀는 더욱 자신의 몸을 나에게 밀착해 왔다. 그녀는 경험 있는 여자처럼 전혀 반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하던 바다가 거대한 몸뚱어리를 꿈틀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미끈한 바다의 아랫도리를 더듬어 나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바다가 더는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흥분에 젖은 신음소리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우리 배는 계속해서 나의 아내의 부드러운 가슴을 가르며 달리고 있었다. 흥분으로 땀과 바닷물로 범벅이 된 나는 마침내 바다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 기다리고 고대하던 아늑한 품이었다. 그리고 나는 소리쳤다. 

“바다여! 사랑하는 바다여! 드디어 나는 너의 남편이 되었다. 너는 나의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아내다. 포세이돈이여! 넵투누스여! 그대들은 지금 보고 있는가? 오늘은 잠깐이라도 바다 밑의 너의 궁전에서 나와서 우리의 결혼식을 축하하라! 그리고 황금 갈기를 가진 말을 신랑인 나에게 보내다오…. 나는 오늘 바다를 맘껏 달리며 무진장 즐기고 싶다.”

그러나 알고 보니 내가 안긴 바다는 나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나를 훈련시켰다. 잔잔한 바다에서는 훌륭한 뱃사공이 될 수 없다면서 자상한 바다는 높은 파도를 보내 나를 호되게 단련시켰다. 그러다가 때로는 살랑대는 봄바람을 보내 상한 마음을 위로해 주기도 했다. 나는 언제나 아내이고 어머니인 바다에 순응했다. 그렇기 때문에 뭍에서보다 물 위에서 깊은 잠을 이룰 수 있었다. 배 위에 누워야 비로소 마음이 놓이고 아름다운 꿈을 꿀 수가 있었다. 바다가 등을 토닥이며 바다의 오래된 자장가를 불러줘야 나는 엄마 품에 안긴 어린 아이처럼 깊은 단잠에 빠질 수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바다와 사랑을 나누는 사이에 나는 나도 모르게 바다에 갇히고 말았다. 나를 가둔 바다는 한없이 넓고, 깊고 그래서 자유로웠다. 물속에 갇혀야 자유로워지는 물고기처럼 나도 물에 갇혀서 자유를 찾기 시작했다. 내가 찾는 자유는 사방이 끝없는 바다로 둘러싸이고,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오직 파도의 무리뿐이고, 그 파도가 나를 사정없이 흔들어대어 파도 끝 높이 들려진 내가 탄 배, 그 배의 프로펠러가 윙윙윙…, 공회전 소리를 울려댈 때에야 비로소 찾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나는 물에서 자유인이 될 수 있었다. 내가 갇힌 바다는 세상의 어느 것보다도 더 넓고 더 컸다. 끝없는 수평선 앞에 설 때 가슴이 트이고 진정한 자유가 찾아왔다.

큰 바다 위에서 내가 차지한 공간이 좁을수록 나는 평안함과 아늑함을 맛볼 수 있었다.배안에 있는 작은 내 방과 좁은 통로, 희미한 전등 빛, 흔들리는 선체, 기관의 일정한 울림, 파도가 뱃전에 부딪히는 소리…, 이런 갖가지 조건이 골고루 갖추어져야 비로소 나는 자유를 만끽한다. 그것이 내가 찾던 참 자유인 것을 알게 되는 것이었다. 나 자신이 이제야 내가 있던 자리, 내가 있어야 할 자리 그리고 앞으로도 내 인생을 가꾸어 나갈 수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와 있음을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럴 때 눈을 감은 것처럼, 육안(肉眼)을 초월하여 영안(靈眼)을 얻은 것처럼 시야는 더 넓어지고, 꿈은 훨훨 나래를 편다. 거기, 바로 바다에 갇히고 배에 갇힌 생활에 적응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느 모로 봐도 나야말로 바다와 결혼했고, 바다에 미쳤었고, 선원 생활에 푹 취해버린 속속들이 짠 바닷물로 꽉 찬 뱃사람이 분명했다.
 

3학년 여름방학이 되자 교정은 어수선 했다. 보통 일반 실업학교의 졸업시즌보다 더 우왕좌왕하는 하는 것이 무더운 방학을 맞은 우리 해양학교 학생들의 마음이었다. 무더위쯤이야 느끼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다들 배 밑창에 물이 새들어오듯 눈 코 뜰 새도 없이 바빴지만 정작은 왜 바쁜지도 몰랐고, 그 해결 방법은 더욱 몰랐다. 그냥 모두들 허둥댈 뿐이었다. 다른 사람이 허둥대고 있으니 덩달아서 나도 같이 바쁜 춤을 추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투였다. 이제는 여름 방학이 끝나서 학교에 다시 오더라도 더 이상 수업이라곤 없는 것으로 해서 그랬다. 학생에게 수업이 없다는 것은 더 없이 자유로운 것이었지만 또 그것만큼 허무맹랑한 것이 있을 수도 없었다. 바로 고삐가 풀린 망아지와 같은 꼴이었기 때문이다.

수업이 없다는 것은 학교에 더 이상 나오지 말라는 말이기도 했다. 이건 어린 나이에 사회란 곳으로 쫓겨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특히 우리에겐 사회란 곳이 지금 발을 딛고 서 있는 땅이 아니라 바다였던 것이다. 그것도 고향의 끄트머리도 보이지 않는 아주 먼 바다였다. 그러나 그 바다로 나가는 방법은 생뚱맞게도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내몰리는 것이 바로 지금,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때부터인 것이다. 더구나 함께 공부를 하던 친구들 중 몇 명은 벌써 연줄을 잡고 배를 나갔다는 소문이었다. 공부를 썩 잘하던 유양이 같은 친구는 예외라고 인정을 하더라도 말이다. 유양이는 원체 특별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유복자로서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지만, 같이 아버지가 없는 나와는 달리 그는 활달했다. 홀어머니의 아들이라는 트라우마가 전혀 없었다.

그런 만큼 그가 학교의 소개로 실습을 나갔던지 아니면 여러 가지 소문으로 그를 잘 아는 어떤 선사(船社)에서 그를 발탁하여 데려갔던지 그의 빠른 출항에 관하여 이의를 제기할 학생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같은 처지의 동급생들은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슴은 덜커덩 내려앉고 초조감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때가 바로 이 때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조금 낌새가 다른 지나가는 바람 같은 말만 귀에 들어와도 화들짝 놀라며 그냥 허둥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학생들은 갑자기 부닥친 현실의 벽에 기가 찼지만 하소연을 할 곳은 없었다. 배를 타서 남보다 돈을 더 벌어보겠다고 수월찮은 경쟁을 뚫고 해양학교를 온, 딴에는 우수한 학생들이었지만 집안 배경에는 쥐뿔도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또 아직은 혼자서 세상의 물정을 알기에는 너무 어린 우리들이기도 했다.

별도로 실습선이 없는 우리 학교는 학생 스스로 알아서 실습할 배를 찾고 스스로 실습을 마쳐야 했다. 이론 공부를 훌륭하게 마쳐 주었으니 실습은 전적으로 학생의 책임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요 수십 년째 내려온 전통이며 선배들도 다 그렇게 했다는 선생님들의 앵무새 같은 설명이었다. 구하면 구할 것이요 열심히 두드리면 바다로 가는 넓은 문이 열릴 것이라는 학교 측의 확고한 입장이기도 했다.
“유양이를 봐라. 얼마나 멋지게 큰 배에 실습을 나갔냐? 실습을 나간 애들이 어디 한두 명이냐? 똑똑한 애들은 개나 소나 다 나갈 수 있는 것이 실습 아니냐?”

“너희들이 아무리 떠들어 대도 저렇게 실습을 잘 나가는 친구들이 있는데 학교가 무책임하다는 너희들의 주장은 패배자들의 불평불만일 뿐이요, 바로 너희들이 못난 무지렁이라는 증명일 뿐이다. 너희들이 입학 할 때부터 어디 학교에서 실습까지 책임진다고 약속한 일이라도 있었느냐?”
학교는 실습을 못나가 안달하는 우리를 마치 버린 자식 취급하며 윽박지르기만 했다. 선생님들의 야멸친 인연 끊기가 야박하기는 했지만 스승을 하늘같이 생각하는 우리들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더 할 말은 없었다. 모든 것은 나의 책임이었고, 더 기가 막힌 것은 학교 측도 알고 보면 뾰족한 방법도 없었고, 그런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실습을 못가서 답답한 쪽은 학교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6개월간의 실습을 마쳐야만 을종 3등 항해사란 해기사 면장시험에 응시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인정하는 면장을 취득해야만 이제까지 공부를 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선박을 운행하는 한 축인 항해사라는 정식 사관으로 대접을 받으며 취업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국가고시여서 군대 문제 등 여러 가지 함께 걸린 문제들이 해결 될 수가 있기도 했었다. 일반 선원으로 배를 타기 위해서는 3년 꼬박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며 이렇게 공부를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단 몇 개월이면 마치는 속성 선원 양성기관이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실습은 사회로, 성공으로 나가는 첫 관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없이 자란 나와 같은 사람은 어른들, 특히 남자들의 세계에 대해서는 참으로 문외한이었다. 선박회사 사람들과 인연이 있을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애당초 선원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에 들어가듯이 이 학교를 졸업하면 당연히 순탄하게 배에 취업이 되는 줄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학교를 다니면서 부두에 정박해 있는 수많은 선박들 옆을 지나다녔지만 저 배가 나의 직장이 될 것인지도 몰랐고 그래서 그 배 안에 한번 들어가 볼 넉살조차도 없었다. 당장 교실을 떠밀리듯 나오자 허허벌판에 버려진 것처럼 막막하기가 졸지에 부모를 잃은 고아 같았다.

그래도 기댈 데라고는 선생님뿐이었다. 남자 어른으로서 아는 사람이 오직 선생님뿐이기도 했다. 실습에 대해서 한 마디라도 자세한 정보를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거기 밖에는 없었다. 수업시간마다 선생님들은 배를 타던 자기의 무용담을 곧잘 늘어놓기도 했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찾아간 선생님의 집은 으리으리했다. 멋진 집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도 단연 제일 뛰어났다. 닭의 무리 속에 섞인 학의 모습과도 같았다. 나는 주눅이 들어 감히 초인종을 누를 수조차 없었다. 해양대학을 졸업하고 십여 년간 외항선을 타다가 우리 학교로 오신 분이었다.
“어 그래. 자네. 집안은 살만한가?”

긴 망설임 끝에 겨우 선생님의 집으로 들어가긴 했지만 그 집의 내부에 비해 나의 행색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 발을 더 이상 내딛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고만 있었다. 그런 나에게 선생님이 불쑥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나는 선생님이 나의 성적을 묻지 않고 우리 집 형편을 묻는 것이 이상했다. 시골 중학교에서 우등생을 하던 그대로 고등학교에서도 성적이 우수했기 때문에 성적이라면 자신이 있었는데 말이다.
“예! 그냥 농사 몇 마지기 지어서 식구들의 일용할 양식은 되는 편입니다. 아버지는 국가유공자지만 상이군인으로 계시다가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가 사는 곳에서는 춘궁기에 양식을 꾸어서 먹지 않을 정도면 부자 축에 속했다. 더구나 이 먼 객지까지 때때로 빚을 낼망정 유학을 시킬 정도면 우리 시골에서는 여간 자랑스러운 집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요즘 선박계통이 전에 없이 심한 불경기여서 실습할 자리가 없어. 새 자리는 아주 싹이 말라버렸어…. 가물에 콩 나듯 한자리씩 생기면 서로 먼저 가겠다고 난리를 피운다네. 자네도 알다시피 해양, 수산계 고등학교와 전문학교가 그간 얼마나 많이 생겨났는가?”
나는 선생님의 입만 쳐다보고 있다가 더럭 걱정이 되었다. 자칫 잘못하면 객지에 나와서 이렇게 공부를 마치고 다시 시골로 가서 옛날처럼 고기나 잡고 농사를 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정신이 아찔했다. 주위에서 그런 경우를 몇 번 봤는데 내게 그건 죽기보다 하기 싫은 노릇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빨리 배를 타서 돈을 많이 벌어 홀어머니를 모시고, 동생들을 공부시키고, 집안을 일으켜야 하는 막중한 책임과 목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실습이 그렇게 간단치가 않아서 말이야. 웃돈을 내고라도 나가야겠다는 사람들이 자네 반에서만도 여러 명이라네. 나도 성실한 자네를 추천하고 싶지만 이거 맨입으로 부탁을 할 수도 없고. 매겨진 공정 가격이 있는데…. 홀어머니에 동생들, 살림이 그렇게 어렵다니? 이거 참 큰 낭패로군. 아무리 생각해도 낭패야…”
선생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매우 난처한 입장인 모양이었다. 얼굴에 수심이 가득히 이는 것으로 봐서 그랬다. 적어도 나의 눈에 비친 선생님의 고뇌는 안쓰럽기만 했다. 그러나 여기서 더 이상 물러설 수는 없었다. 나는 낭떠러지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 저는 남보다 먼저 배를 타서 빨리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 공정가격과 웃돈을 말씀하시면 어떻게 해서라도 구해 보겠습니다.”
“그게 말이야.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값이 치솟아서 말이야…”

말끝을 맺지 못하는 선생님이 모기소리 만하게 말씀하신 액수에 나는 그만 턱뼈가 덜컥 빠질 만큼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순간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자그마치 3년간의 공납금을 합친 금액과 맞먹는 액수였던 것이다. 달리 돈이 나올 데가 없는 어머니가 그간 분기마다 돌아오는 공납금을 마련하기 위해 쩔쩔 매던 모습은 너무나 처절했었다. 그 모습은 생생하여 마치 아침에 일어난 일처럼 항상 기억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선생님은 대단했다. 며칠 후 선생님의 주선으로 실습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자갈치 앞바다 수산센터 옆에서 생전 처음으로 배에 올랐다. 2천 5백 톤 급 모선이었다. 이 배는 적도 부근의 어업기지에서 어선들이 잡아 놓은 참다랑어를 주로 일본으로 실어가 수출을 하고 극히 일부분, 내장과 머리와 꼬리부분 등 부산물만 남겨서는 우리나라에 가지고 와서 판매하기 위해 잠깐씩 들리는 냉동 수송선이었다. 그때는 그랬다. 좋은 것은 모두 나라 밖으로 팔려나가고, 못나고 상처 나고 맛없는 것만 우리가 먹던 시대였다. 한 푼의 외화라도 더 벌기 위해 수많은 우리 어선들이 원양에 나가 명태를 잡아도, 오징어를 잡아도 씨알이 굵고 물거리가 좋은 것은 모두 수출을 하고 외국 사람들이 잘 안 먹거나 품질이 떨어지는 것만 우리가 먹었다.

줄줄이 서 있는 비슷한 고만고만한 선박 중에서 내가 탈 배를 찾아서 배에 올라보니 바깥에서 볼 때와는 달리 그 안이 엄청나게 넓은데 그만 놀라고 말았다. 그런데 더 놀란 것은 이 배에는 나와 같은 실습생이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기관과를 다니던 동창생인 준효였다. 그는 부산 사람답게 성격이 활달하고 늘 명랑했다. 공부를 썩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도시사람답게 늘 자신감에 차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은 이 모선에서 항해와 기관의 실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적도 부근에 위치한 사모아 기지에 가서 고기를 낚는 일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그래서 이 배에서는 당장 아무런 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브리지로 가고 그는 기관실로 가서 눈으로만 톡톡히 실습을 했던 것이다. 실제로 어선에서 고기를 낚는 일을 도우는 것은 배를 타고 있으니 실습으로 인정은 해주었지만 항해사나 기관사로서의 실습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배는 내가 승선을 해본 그 이튿날 새벽에 출항을 했는데 그 친구나 나를 위해 마중을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실습생은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는 신세였다. 혹시 출항 시간을 놓칠까봐 자취방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것은 나에게는 가난한 식구들에게 많은 빚을 지우고 천신만고 끝에 얻은 소중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나는 아침도 굶은 채 간단한 짐을 챙겨서 2시간이나 일찍 출발했다. 혼자서 눈을 부비며 떠나는 쓸쓸한 출항이었지만 나는 큰 기대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배는 벌써 불을 대낮같이 밝히고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도 희뿌연 새벽의 물안개 속에 싸인 부산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바닷물 속에 육지의 불빛이 잠겨서 일렁대는 부산의 새벽 풍경을 배 위에서 바라보니 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시간쯤 달리자 찬란한 새벽의 태양이 먼 바다로부터 주위를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고 있었다. 바다에서 처음 대하는 장엄한 해돋이였다. 때를 같이하여 백지 위에 찍힌 자그만 한 점처럼 가물거리던 육지는 드디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육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보이는 것은 출렁대는 파도뿐, 그 파도를 가르며 달리는 우리 배 이외에는 넓은 바다에 아무 것도 없었다. 갑자기 거대한 자연에 대한 외경과 함께 막막한 두려움 같은 것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돼지가 한 마리 더 있다더니 바로 너였구나!”
이때 때를 맞추기라도 한 듯이 동창생 준효 녀석이 나타나 나를 반기었다. 학교에서는 별로 친하지도 않았고 얘기를 나눈 적도 없는 고만고만한 친구였으나 지금은 오랜만에 만난 죽마고우처럼 와락 달려가 얼싸안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로 반가웠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었다. 이 친구와는 이후에도 갑작스레 만난 이번의 경우처럼 참으로 인연이 깊었다.
“뭐? 돼지라고? 이렇게 날씬한 내가?”

“그래. 회사에서는 실습생을 돼지라고 부르지. 태워주기만 하면 마치 돼지처럼 버릴 것이 전혀 없이 이득이 많으니까. 고기는 삶아서 수육으로도 먹고, 구워서도 먹고, 창자는 순대나 곱창을 만들어서 먹고, 발은 잘라서 족발을 해 먹고, 뼈는 고아서 먹고…, 우리 실습생도 마찬가지야. 월급 한 푼 안주고 일만 시키면 되는데다 순진하고 한창 힘이 넘칠 때니 힘든 일도 척척 잘하고, 시키는 일마다 고분고분하니 회사로서는 이보다 더 큰 이득이 없거든. 그래서 우리들은 배에서 큰 인기가 있어서 서로 데려가려고 야단들이라고…”

준효는 실습생 예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실습생 생활을 여러 해나 해 본 사람처럼 실습에 대해서 방물장수처럼 자질구레한 것까지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뒷돈을 주고 실습을 나온 나와는 대조적으로 그는 실습생으로서 당당했고 대단한 자부심까지  가지고 있었다. 역시 도회지서 자란 놈은 그 값을 하는 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을 들을수록 내가 알던 것과는 너무나 판이한 내용이어서 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회사에 큰 이득이라고 했나? 우리들이 배에서 큰 인기가 있다고? 그런데 실습하는데 왜 그렇게 큰돈을 실습비로 달라고 하지?”
“미쳤어? 회사에서 무슨 실습비를 달라고 한다고? 회사에서 소개비를 주던데?”
“뭐? 실습생 소개비를 준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복덕방도 아니고…”

“그래. 나를 이 회사에 소개해 준 친척 형님이 소개비로 받았다며 큰돈을 나에게 주던데? 필요할 때 쓰라고 하면서…, 나는 그 돈을 물론 부모님께 드리고 왔지만 말이야! 배에서 돈 쓸 일이 뭐가 있겠어? 특히 고기잡이배에서…. 생각해 봐라! 우리 실습생은 노동법이나 선원법에도 적용을 받지 않아서 만일의 사고를 당해도 한 푼 보상도 못 받는 이 싱싱한 젊은 놈들인데 말이야, 이 비좁아 터질 듯 한 배에 갇혀서 장장 6개월 동안이나 노예처럼 중노동을 해 주는데, 그 소개비 정도야 회사로서는 약과지 않겠어? 이 친구야. 나보다 좋은 머리로 후딱 계산이라도 해 보라고…”

준효는 두 손으로 손가락 여섯 개를 펴 보이며 일장 연설을 했다. 그의 이야기는 긴 새끼줄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나는 친구의 말이 더 이상 귀로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으리으리한 고대광실에 앉아서 곧 임종을 앞둔 환자처럼 죽을상을 해 가지고, 불쌍한 제자를 위로하는 척하며 귓속말로 소곤대던 선생님의 성자 같던 모습만이 주마등처럼 떠오를 뿐이었다. 그리고 그와는 반대로 갑자기 큰 빚을 진 걱정에 아무 것도 모르고 쌔근쌔근 잠든 동생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홀로 잠 못 이루고 있을 어머니의 얼굴도 떠올랐다. 

“사기꾼 선생님, 그래! 좋아.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면서 참으로 비싼 인생 공부를 하는구나.…. 탁 트인 바다지만 그 바다로 나가는 길은 여간 어렵지 않군 그래…”
내가 이렇게 중얼거렸으나 친구 역시 자기 말에 도취되듯이 열중한 나머지 내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실습에 얽힌 이야기들을 마치 자신이 직접 겪은 무용담처럼 줄줄 늘어놓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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