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해운을 만든 사람들(4) : 신성모의 한국해운 발전에의 기여

한국해양대학 취임후 해양대학의 발전

한종길 성결대학교 교수
한종길 성결대학교 교수
필자는 해양대학 교수 직으로 직장을 옮긴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해운사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내가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해운발전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름대로 연재하였다. 그때는 주로 사안을 중심으로 글을 썼는데 이번에는 “한국해운을 만든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 해운발전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고 필자가 판단하는 인물을 중심으로 그와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해양한국에 연재해보고 싶은 마음에서 이 붓을 들게 되었다. 그러나 필자의 개인적인 지식과 자료 및 경험을 바탕으로 기술하는 것이므로 필자의 주견들이 일부 가미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결과 다른 분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빠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표현이 불충분하여 그분의 참가치를 다 나타내지 못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필자의 책임과 잘못으로 생각하고 독자들의 양해를 바라고 싶다.
 

신성모의 학장 취임
영도 신축교사가 준공되어 해양대학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기 시작한 지 1년 쯤 뒤인 1956년 11월 28일 신성모申性模가 해양대학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일이 있기 전인 7월 14일, 해무청의 창설(1955. 2. 17)을 계기로 해양대학의 관할이 교통부에서 상공부로 이관되었던 학교의 관할이 문교부로 이관되었다. 학교의 명칭이 한국해양대학으로 개칭되었고 학장에 대한 인사권도 문교부로 넘어갔다. 그 얼마 후 신성모가 신임학장으로 부임해왔다.  
 

신성모의 개혁
중국과 영국에서 상선사관 교육을 받은 신성모는 군국주의적인 일본의 상선사관교육을 부정하였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해양대학의 교육방향을 서구식으로 개혁하는데 착수하였다. 그 내용이 매우 획기적이었으며, 이로 인하여 한국해양대학이 비로소 대학으로서의 면모를 모두 갖추게 되었다고 관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증언하고 있다. 그 주요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해양대학의 교재와 커리큘럼을 서구제도로 대체
일본식 교육으로는 안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부임한 신성모는 미국의 해군사관학교와 상선사관교육기관인 킹스 포인트의 교재를 구해, 이를 바탕으로 해양대학의 커리큘럼을 근본적으로 개혁하였다. 영어로 된 원서를 그대로 해군의 인쇄창에 부탁, 복사하여 그대로 교과서로 활용하였기 때문에 당시 생래적으로 영어에 약하였던 교수들과 학생들이 공히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이 과정을 거치면서 교수와 학생들이 공히 끙끙 거리면서도 국제어라 할 수 있는 영어실력이 크게 향상될 수 있었다. 특히 학생들의 영어실력을 향상시키고 면학분위기도 조성하기 위하여 취임 후 바로 학생들의 외출을 주말을 포함하여 거의 모두 금지시키고 수업이 없는 시간에도 교내에서 공부하도록 하였다.
 

②교수들의 강의 직접 청강
신성모 학장은 시간이 나는 대로 강의가 진행 중인 교실을 찾아갔다. 교실 뒷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가 수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강의 내용을 들었다. 그리고 강의가 끝날 때 쯤, 강의 내용 중 몇 가지에 대하여 예리한 질문을 하였다. 이 질문에 교수가 자신있게 답변을 하면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나, 그렇지 못할 경우 학생들에게도 정답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수업 중인 교수들과 학생들은 공히 매우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의 질문은 어떤 제도에 대하여 그 내용이 무엇인지만 묻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까지 설명하라는 통에 교수들도 합리적으로 답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 당시 재학하였던 학생들의 전언이다. 그리고 반드시 그 결과였는지는 모르나 많은 교수들이 학장실에 불려가 “공부 좀 더 하고 와” 또는 “배 좀 더타 고 와”라는 권고 아닌 권고를 받고 학교를 떠나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생긴 빈자리에는 해군 사관학교의 교관 등 자기 나름으로 능력과 실력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삼고초려를 해서라도 해양대학으로 영입하였다. 교수들의 면모도 일신되었다. 당시로서는 대학교수라고 해도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이 드물었던 해양대학에 박사학위를 가진 교수들이 늘어나게 되어 전반적인 교육수준이 크게 향상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신성모가 학장을 그만두고 나서도 해양대학 교수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일본 등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해오는 경우가 늘어나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하면서, 그대로 교수들을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대학원에 진학이나 승선경력을 쌓기 위한 승선에도 아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취업을 알선하는 등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지원하였다.
 

③해양대학 예산의 획기적인 증액
신성모가 한 두드러진 일의 하나가 한국해양대학의 예산을 크게 늘렸다는 것이다. 그 때까지 한국해양대학 학생들에게는 관비학교로서 수업료가 면제되며 학생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하고 정부가 숙식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비슷한 여건에서 교육을 받는 사관학교와 비교할 때 매우 낮은 처우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신성모가 취임한 이후 이것이 사관학교 수준으로 격상되었다. 뿐만 아니라 학교 운영과 관련된 다른 교육예산들도 크게 증액되어 교직원들의 복지에도 힘썼기 때문에 학교의 경제적인 상황이 크게 개선되었다. 그래도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국영기업체 등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업체들에 부탁하여 예산부족을 메웠기 때문에 가난에 찌들었던 학교에 윤기가 돌게 되었다. 당시 재학하였던 학생의 증언에 의하면 신 학장 부임 전에는 급식이 너무 부실하여 학생들의 영양실조문제가 크게 문제되었는데 신 학장 부임 후에는 급식이 남아돌고 당시로서는 기대하기 어려웠던 고기국이나 돈가스 등이 자주 배식되었으며 학생들의 영양실조 문제도 자동적으로 해결되었다.
 

④해군예비원령의 제정시행
해군예비원령을 제정하여 해양대학 재학생들이 재학 중 군사훈련을 정식으로 받도록 하고 졸업과 동시에 해군 소위로 임관시켰으며 동일자로 예비역으로 편입시키도록 하여 해양대학을 졸업한 상선사관들이 해군예비역 장교 신분을 갖도록 해 해양대학 졸업생들의 병역문제도 말끔하게 해결하였다.
 

⑤실습선 반도호의 확보
해양대학은 그때까지도 실습선을 보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학생들의 선박에 대한 현장감 있는 이론과 현장 실습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예산을 확보하고, 국영기업체였던 대한해운공사와 교섭하여 동사 소속 선박 한 척(김천호)을 매수해 실습선으로 개조, 반도호로 명명하여 운항하도록 하였다.
이 실습선 반도호는 그 후 1970년대 중반에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실습선 한바다호를 신조할 때까지 해양대학의 학생들의 교육용으로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주 연료로 사용하던 무연탄을 산지인 묵호에서 부산, 인천 등 해안에 위치한 대도시로 운송하여 우리나라 연료난의 해소에도 크게 기여한 바 있다.

 

-신성모에 대한 평가-
신성모에 대한 이승만대통령의 절대적 신임

흔히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그 후 국난인 6. 25 사변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을 건국한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으면서도 그의 정치인생의 평가에서는 인의 장막에 가려 여러 가지 실정을 저지른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 주변의 둘러쳐진 인의 장막의 구성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이승만 대통령과 소통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사람이 신성모였다. 이러한 필자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다음과 같은 것이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일반국민들이 인식하기로는 신성모는 이승만 대통령에 의하여 전격 발탁되어 내무부장관과 국방부장관을 역임하였고, 국무총리 서리도 겸하였다가 거창양민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한 정치적인 책임을 지고 물러난 아주 무능한 인물로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전부일 것이다. 필자도 이 글을 쓰기 이전까지는 이러한 일반국민들의 신성모관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상술한 바와 같이 신성모는 국방부 장관을 정치적인 사유로 사임한 후에도 ①주일 특명전권공사, ②해사위원회 위원장, ③한국해양대학 학장을 역임하여 하루도 이승만 대통령과 떨어져 살지 아니하였다. 그 동안 그가 한 일은 평화선의 설정과 평화선의 수호체제의 정비, 한국해양대학의 발전의 기틀을 다져서 한국해운의 발전을 뒷받침할 인적자원을 양성하는 기반을 다지게 하였던 것이다.

흔히 이승만 대통령을 평가할 때 ‘외교에는 귀신, 인사에는 등신’이라고 평가하는데, 신성모의 정치입문 실패후 신성모에 대한 인사를 보면 신성모의 최대 장점인 해양법과 해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장 적절히 활용한 적재적소를 잘 갖춘 모범인사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둘째, 이승만 대통령의 신성모에 대한 신임이 대단히 두터웠다. 그 증거로는 신성모가 해양대학에 재임하던 기간중 해양대학에 재직하였던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자유당시절 인의 장막의 정점에 위치하면서 이를 이용하여 2인자의 지위를 굳힌 상태였던 국회의장이었던 이기붕이 부산을 방문하게 되면, 가장 먼저 찾은 곳이 한국해양대학이었고, 학장인 신성모를 예방하고 안부를 묻었으며, 이번에 무슨 일로 부산에 오게 되었습니다고 인사를 정중하게 드린 후, 자기 출장목적을 위하여 떠났다고 한다.

공적으로 보면 이기붕과 신성모는 직접적인 관계는 아무것도 없다. 사회적인 신분도 이기붕은 국회의장이고, 실질적인 2인자였고, 신성모는 일개 단과대학의 학장이다. 누가 보아도 이기붕이 일부러 찾아와 인사하여야 할 위치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일부러 찾아와서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신성모가 그들이 쳐 놓은 인의 장막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과 임의롭게 만날 수 있는 관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이 신성모의 이야기를 경청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청렴강직이 몸에 배인 신성모
자유당이 판을 치던 독재정권 체제하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그 최정점에 있는 이승만 대통령과 비교적 자유스럽게 접촉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은 대단한 권력(?)이 아닐 수 없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 관계를 이용하여 크게 출세하거나, 치부도 할 수 있을 것이나 신성모는 그런 흔적이 전혀 없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그랬기 때문에 대통령과 오랫동안 소통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자기에게 주어진 대통령과 친숙하다는 권한 아닌 권한을 국가 목적을 위하여 활용한 흔적들은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사례들을 살펴보자.

①신성모가 해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평화선의 일선 수호기관인 해양경찰대를 창설할 때 해군의 장비(경비정)와 인력을 할애받아서 사용하여야 하였다. 이 일은 공무원의 조직 이기주의 때문에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당연히 해군이 저항하였을 것이나 이 일을 거뜬히 무리 없이 단시간 안에 이룩하였다.

②평화선의 관리기구로서 해양경찰대만으로는 어렵다고 판단하여 해사관계 중요정책을 총괄하는 해무청을 만들 때에, 교통부 해운국의 핵심요직이라 할 수 있는 부산지방해사국장을 전화 한통화로 불러올려 한 달 가까운 기간 동안 해무청 조직안을 작성하도록 하였다는 것도 역시 보이지 않은 권력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③그가 해사위원회 위원장직에서 해양대학 학장직으로 직장을 옮기고 나서 해양대학을 개혁할 때, 그가 한 개혁 행위의 대부분이 많은 정부 예산과 국가 관련기관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안들이었다. 이러한 것을 비교적 쉽게 이룰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이러한 보이지 않는 실력이 가져다 준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성모의 주어진 권한의 행사는 항상 국가발전과 관계되는 분야에만 사용되었지 자기나 자기 가족, 그리고 심지어 자기의 일을 충실하게 도운 아래 직원에게도 이러한 권한을 행사하여 이익을 준 일이 한 번도 없다는 점을 유의하여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신성모의 학장직 재직시에 해양대학에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 몇 가지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④전술한 바와 같이 해무청의 설립을 준비할 때 당시 부산지방해사국장을 불러 올려 한 달간의 작업을 시켰다. 대개의 경우, 이렇게 공무원에게 가외의 일을 시키고 나면, 일을 한 사람에게 인사상 특혜(승진 또는 원하는 자리로 보직 이동)를 주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는 것이 관직사회의 관행이다. 그러나 신성모는 한 달간 고생한 사람을 보내면서 “수고했다”는 한마디로 대신하고 말았다. 그로서는 자기도 국가를 위하여 일하고 그도 국가를 위하여 일하는데 다른 보상을 바라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하였던 모양이다.

⑤역시 학장 재직 때, 그의 아들이 현역 육군 소령이었다고 한다. 한번은 그가 군 업무용 차량을 타고 아버지 관사를 방문하였다. 이를 본 신성모는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오는 것을 사무인데 어떻게 군무에 쓰라고 정부에서 내어준 군용차를 타고 왔느냐고 매우 심하게 꾸지람을 하였다고 한다. 그 뒤로도 그 아들은 해양대학 관사까지 가는 버스가 없던 시절이므로 할 수 없이 군용차를 이용하여 아버지를 찾아왔지만, 아버지의 꾸중이 무서워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차를 주차하고 아버지를 찾아뵈었다고 한다.

⑥한번은 어느 자리에서 육군 참모총장을 만났는데, 그가 신성모의 아들 이름을 대면서 “아무개 소령을 이번에 중령으로 승진시키기로 하였습니다”라고 말하자, 크게 화를 내면서 군인사는 군사비밀에 속하는데 어떻게 그런 군사비밀을 민간인인 내게 발설하느냐고 하였다고 한다.
아마 신성모의 이러한 생활 자세를 이승만 대통령이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국방부장관으로 실정을 하였음에도 그 후 그를 중용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해운계의 큰손이었던 신성모
아래 글은 이시형 학장밑에서 해양대학 학생과장으로 있으면서 이시형을 보좌하여 신성모와 자주 만났던 이준수 전해양대학장의 회고이다.1) 
원래 이시형은 영국의 엑스트라 마스터(Extra Master)인 신성모를 흠모하고 존경하였다. 신성모가 가지고 있던 영국의 엑스트라 마스터라는 자격은 당시 우리나라 고급해기사들로서는 감히 넘보기 어려운 권위있는 해기사 자격증이었다. 구태여 이야기하자면 영국의 선장 중의 선장자격증이라고 해야 할 것이고, 이 자격증을 가진 사람만이 영국정부의 선박검사관, 해기사시험관 및 상선학교의 교원이 될 수가 있다고 할 정도로 같은 선장이라도 엑스트라 마스터는 특별히 존경의 대상이 될 만한 자격증이었다. 전통과 권위를 존중하는 영국사회에서는 이 자격에 대한 사회적인 대우는 대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권위 있는 자격증이었기 때문에 유색인종인 동양인이고 더구나 국권을 상실하여 일본의 식민지 상태 하에서 신음하는 우리나라 사람이 그러한 자격증을 갖는다는 것은 대단한 영예였고 자랑이었다고 할 것이다.

신성모의 이 자격증 획득과 관련하여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신성모는 엑스트라 마스터 시험에 응시하기 위하여 무척 많은 공부를 하였고, 충분히 합격할 수 있다는 자신이 붙었을 때 응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면접시험에서 시험관이 우리는 동양인에게 엑스트라 마스터 면허를 줄 생각이 없으니 포기하라고 하였다. 이에 신성모는 “당신이 시험관 자리를 물러난 뒤에 다시 와서 엑스트라 마스터가 꼭 될 것입니다.”라고 하고 물러나왔고, 실제로 그 후 다시 응시하여 합격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신성모에 대한 존경심은 당시 고급 해기사 사회에서는 공통적이었다. 이시형은 광복 얼마 뒤 신성모가 귀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신성모를 찾아갔다. 그리고 자신이 맡고 있던 해양대학의 학장직을 맡아달라고 간청하기도 하였다. 신성모도 이에 대하여 큰 관심을 나타냈으나, 신성모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발탁되어 내무부장관 및 국방부장관 등 정부의 요직을 맡게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이시형은 그 뒤에도 계속하여 해양대학 학장으로 있으면서 신성모를 대선배로 깍듯이 모셨다. 신성모는 국방부 장관을 물러난 얼마 뒤 일본 주재공사를 거쳐 해사위원회海事委員會의 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해사위원회는 해운 관련문제에 대하여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시형은 정부의 도움을 요청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신성모를 방문하여 정중한 예절을 갖추어 보고하고 협조를 요청하였고, 그 때마다 신성모도 가능한 범위 안에서 최선의 도움을 주었다.

해무청장 자리는 정부내 직급으로 차관급인데 전직이기는 하지만 신성모는 국방부 장관과 국무총리 서리를 역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의 측근 중의 측근이었으므로 상공부 장관으로서는 자기 소속하의 외청장에 이러한 거물이 있게 된다는 것은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꾀를 낸 것이 교통부 해운국 산하에 있던 해기사 양성을 위한 특수대학이었던 해양대학을 대학 교육기관이라는 이유로 문교부로 이관하였다. 그리고 이 대학의 학장으로 신성모를 추천하였던 것이다. 신성모의 여러 가지 경력으로 보아 이 인사는 적재적소의 인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신성모는 해양대학 학장으로 와서 해양대학의 교육제도의 정상화와 발전에 온 힘을 기울여 오늘날 한국해양대학의 기틀을 마련하다가, 1960년의 4. 19 혁명으로 이대통령이 하야하자, 그 충격으로 병을 얻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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