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해운을 창업하다

 
 
필자는 해양대학 교수 직으로 직장을 옮긴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해운사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내가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해운발전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름대로 연재하였다. 그때는 주로 사안을 중심으로 글을 썼는데 이번에는 “한국해운을 만든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 해운발전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고 필자가 판단하는 인물을 중심으로 그와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해양한국에 연재해보고 싶은 마음에서 이 붓을 들게 되었다. 그러나 필자의 개인적인 지식과 자료 및 경험을 바탕으로 기술하는 것이므로 필자의 주견들이 일부 가미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결과 다른 분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빠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표현이 불충분하여 그분의 참가치를 다 나타내지 못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필자의 책임과 잘못으로 생각하고 독자들의 양해를 바라고 싶다.


3. 한국해운의 구조적 개혁의 발판을 마련한 해공 임직원의 대량이직
얼핏 보면 비극이라고 해야 할 해공직원들의 대량이직은 큰 재앙으로 비쳐지기도 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이 큰 틀에서 한국해운의 도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필자는 언젠가부터 기업은 인재가 하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현실이 된 것이다.

하루 아침에 실업자가 된 그들은 살 길을 찾아 나섰다. 그들이 찾아 나선 살 길중 가장 뚜렷한 것은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얼마 안되는 퇴직금을 모아서 새로운 해운회사를 창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회사 중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대한해운,  KSS해운, 두양상선(아진해운의 변신), 중앙상선(아진해운에서 분사) 등이다. 그 외에도 10여개사가 더 있는데 중간에 전업했거나 더러는 망해서 없어지기도 하였다. 이 현상들이 우리나라 해운업계에 긍정적으로 기능한 것은 해운 종사자들에게 자기들도 잘만하면 해운기업을 창업하여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게 되었고, 이것이 그 후 우리나라 해운계의 청년 창업과 그 성공사례를 퇴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두 번째로는 당시 우리나라 해운계에는 범양전용선(현 팬오션) 대한선박, 삼양항해 등 당시 나름의 자산가들이 창업한 회사들이 있었는데 이러한 기존의 회사나 새로 창업하는 회사에 취업하여 이들 회사를 중견급 회사로 키우는 실무주역을 담당하였다. 위에서는 대기업 급만 예를 들었지만 그 외에도 일본 등에서 중고선들을 한 두척 매입하여 해운업을 영위하던 중소선사들도 많았다. 이들 중소선사는 해공에서 퇴출된 임직원을 수용하여 새로 창업하는데 실무주역으로 삼거나 회사를 급성장시키는데 주역으로 이용하였다. 이러한 해운기업만 해도 줄잡아 10여개사가 넘어 한국 경제계에 한국해운업계라는 커다란 그룹을 만들어 오늘날의 세계 5위라는 해운대국을 만드는 기초를 그때 다져놓았다.

셋째 시간이 지나면서 해운의 주업이라 할 수 있는 선박의 보유와 운항을 주축으로 하는 해운업 주변의 제 업무(선박관리업, 항만관련 제산업, 해운대리점업, 복합운송업, 선박보험업, 해운중개업 등)에 파고 들어가 그곳에서 중견 전문인으로 성장하거나 스스로가 이러한 사업을 자영하여 성공하는 사례가 부지기수로 늘어났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해공의 민영화와 이를 계기로 한 대량이직은 재앙이 아니라 전화위복에 의한 한국해운의 급성장이라는 축복이 되어 우리나라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변화는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인 것이다.
 

4. 대한해운을 창업한 이맹기     
1) 박정희 대통령의 배려

이맹기 사장 이하 전 사원이 일치단결하여 탄탄하게 키운 대한해운공사를 갑자기 불하해버린 박정희 대통령은 이맹기 사장에게 미안하게 생각하였다. 그가 어떻게 대한해운공사를 키웠는지를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대한해운공사가 민간인에게 불하되고, 이맹기 사장이 사표를 내고 대한해운공사를 떠난 얼마 후 이에 대한 보상차원이었는지 상당히 탄탄한 국영기업체의 사장직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박정희 대통령이 이맹기 사장에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맹기 사장은 이 제안을 정중하게 사양하였다. 그 이유는 자기를 믿고 따라 주었던 많은 부하들이 실직 상태에서 방황하고 있는데 자기 혼자만 좋은 자리가 났다고 훌쩍 떠난다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2) 대한해운의 창업과 성장
그리고 그 얼마 후, 이맹기 사장과 그를 따르던 대한해운공사의 전(前) 임직원들이 퇴직금 수준의 자금을 출자하여 코리아 라인이라는 새로운 해운회사를 설립하였다. 이 회사는 초기에는 고전하였으나 전 직원들이 노력하여 대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고 그 후 주식시장에 상장하는 대해운회사로 발전하였다.

코리아 라인의 첫 출범은 매우 초라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어 거리로 나 앉은 사람들이 가진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해운기업을 설립하려면 선박을 확보하여야 하는데 선박을 구입할 자금도 없고, 지금과는 달리 국제해운시장에서 신용으로라도 외국선박을 용선할 수 있는 능력을 그 당시는 갖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창업에 자본을 참여한 사람도 그리 많지 아니하였다. 이맹기 본인 이외에 해군에서 예편하여 약간의 경제적인 여유를 가지고 해공에 참여하였던 몇사람, 그리고 해공에서 경리과장을 역임하였던 손광철, 비서실장을 역임하였던 조상욱, 해양대학 출신으로 해공에서 선원노정과장직에 있었던 박종규1)등이었다. 자금을 조금이라도 출자한 사람도 20여명을 넘지 못하였고, 주식보유 비율도 이맹기 회장을 제외하고는 10% 이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관한 자료가 전해진 것은 없다. 이 추정도 비서실장이었던 조상욱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보유주식이 10%였고, 그후 이맹기 회장이 계속 사장직을 유지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상욱은 10%를 출자하고 상무이사 직을 부여받았으나 그가 실제 출근하여 근무한 일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상근 직원으로는 해공시절의 회계과장이었던 손광철이 같은 회계과장 타이틀로 모든 것을 총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3) 선원송출
코리아 라인이 창업이후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선원송출업이었다. 1960년대 초 일본의 고도성장으로 일본선원들의 임금이 급상승하자 일본 해운업의 국제경쟁력이 극도로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급해진 일본해운업계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보유선박을 급히 편의치적국에 이적하여 일본 선원들을 하선시키고 그 자리에 국제경쟁력을 가지고 있던 한국선원을 충원하였다. 그 결과 한국선원들의 해외취업 붐이 일기 시작하였다. 당시는 이러한 상황이 계속해서 발전 중이었다.
 

4) 이맹기 사장의 해군예비역의 상선 사관화
이에 관하여는 약간의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1960년대에는 많은 군인들이 예비역으로 편입되어 사회로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다. 군도 인사 물갈이가 필요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사회에 나와서 갈 데가 없었다. 해군에서 예편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해군 예비역들은 바로 이 선원 해외송출 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해군의 주 임무는 군함에 승선하는 것이므로 선박운항 기술은 상선사관이나 해군이 대동소이하다. 그래서 해군에서의 승선경력을 내세워 상선에 승선하려 하였으나 상선사관 면허가 없었다. 그래서 이 문제의 해결을 이맹기 전 해군참모총장이자 대한해운공사 사장에게 요청하였다. 부탁을 받은 이맹기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벗고 나섰으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해양대학 출신 해기사들이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들은 상선사관과 해군사관은 직역이 상선과 군함으로 갈려 다를 뿐만 아니라 필요한 전문지식도 다르기 때문에 꼭 필요할 경우 별도로 교육을 더 받고 상선해기사 면허시험을 다시 보아 합격하라는 것이다. 일리 있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나이가 40대에 접어들어 머리가 굳을대로 굳은 그들이 새로 교육을 받고 해기사 시험을 쳐서 합격한다는 것은 안된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이맹기는 이 문제를 해결하면 해군을 예편하는 많은 인력의 일자리를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해운계에 당시 부족하기 시작한 해기사 공급부족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박정희 대통령과 교통부 장관, 그리고 이맹기 사장이 동석하여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왔다. 이맹기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이 해군예비역의 상선 사관화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교통부 장관이 예의 상선사관과 해군사관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며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하였고, 이맹기는 교통부 장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40대 중반이 된 영관급 예편장교가 필기시험에 합격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특별 조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자 박대통령이 이 의견을 받아들여  “그래. 40대의 영관급 장교 예편자에게 필기시험 치르라는 것은 좀 무리다. 우리도 사관학교를 졸업하였지만 우리에게 지금 사관학교 시험을 치라면 합격할 수 있겠나” 라고 하면서 특별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렇게 해서 해군예비역들이 예편 후 상선 해기사가 되어 선박에도 승선하고, 해운회사에 취업하여 해운인이 되기도 하였다. 당연히 대한해운공사에도 많은 해군예비역들이 들어가게 되었다.
 

5) 잘 되어가던 선원송출에 제동
코리아 라인은 선원송출에 성공하여 회사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코리아 라인의 경우, 그때까지 국내선사에서 별 인기가 없던 해군예비역을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사업이 더 번창하였다. 거래선도 일본이외 미국 등도 개척하는 등 잘 나가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 사업은 해기사를 위시한 선원을 조직화하여 외국 해운회사에 선박 단위로 취업시키는 것이므로 외화벌이도 되고, 일자리도 창출하고 해운에 대한 전문지식과 경험도 배워오는 등  일석삼조의 사업으로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여기에 비상등이 켜지게 되었다. 일본에 이어 가장 먼저 편의치적제도를 도입하였던 미국이 한국선원을 고용하기 시작하였고, 다른 나라에서도 너도나도 한국선원의 고용에 나서게 되었다. 해기사를 중심으로 한 선원들은 황금기를 맞이하였지만, 그때 막 꽃이 피기 시작한 한국 해운업자들이 국내에서 해기사를 구할 수 없게 되자 한국선주협회가 문제를 제기하고 나왔다. 해기사를 구하지 못하여 해운업을 할 수 없으니 해기사의 해외취업을 금지시켜달라는 것이다. 정부도 고심 끝에 이 건의를 받아들여 더 이상의 해외취업을 금지하게 되었다.

잘 나가던 코리아 라인의 앞날이 잘 안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기회는 이런 변화과정에서 나타난다. 한국에서 더 이상 선원을 구할 수 없게 되자 일본선주들이 보유선박을 매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맹기 사장도 한국해운 발전을 위하여 해기사의 해외취업을 제한하는 정부조치에 이의를 달기도 어려웠다.
 

7) 선원 송출업에서 해운업으로의 변신
그래서 일본선주들을 찾아갔다. 선원을 송출해주던 일본의 고객사에 한국정부의 방침을 전하고 미안하다고 인사하고 선원이 없어 팔 선박이 있으면 샀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전하였다. 반응은 의외로 빨리왔다. 일본 고객으로부터 좀 낡았지만 관리만 잘하면 운항에 지장이 없는 선박을 팔려고 하는데 선박구입자금의 융자까지 알선해줄테니 사라고 권유하였고, 코리아 라인은 이 선박을 바로 구입하였다. 선박명은 ‘자스민호’로 정하였다. 1972년의 어느 날 코리아 라인은 낡은 선박이기는 하지만 한 척의 선주가 되었다. 선박의 크기는 2만톤급으로 제법 대형선이었다. 당시 해운시황은 아주 좋았다. 이 선박을 인수하여 대미항로에 한 항차를 운항하고 결산해보니 비용을 전부 제하고 순이익으로 다른 중형선도 한 척 살 수 있는 자금2)이 되었다.

이 자금으로 또 한 척의 선박을 샀다. 이렇게 되면서 코리아 라인의 선대는 불어났다. 처음에는 노후선에서 시작하였지만 선박도 좋은 것을 사들였다. 보유선박 척수도 늘어났고, 수입도 좋아졌다. 자스민을 사들인 후 1년 정도 후에는 코리아 라인은 잘나가는 선사로 발전하였다.
 

8) 포스코 원료를 수송하는 대형선사로 발전
코리아 라인은 거래선이 늘어나서 원목선 운송선박을 많이 보유하기도 하였고, 조금 지나서는 대망의 대형선을 보유하게 되어 우리나라의 포항제철과 제철원료의 장기운송계약도 맺게 되었다. 포스코 제철원료의 장기운송계약은 우리나라 선박회사라면 모두가 꼭 맺고 싶어하는 운송계약이다. 특수한 사정이 없으면 절대 적자가 날 이유가 없는 안정된 일감이기 때문이다.

이 운송계약도 이맹기 사장의 인품이 가져다 준 산물이다. 누누이 강조한 바와 같이 박정희 대통령과 이맹기는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아마도 제법 잘나가는 국영기업체 사장 자리를 제안해도 자기를 따르던 임직원들을 외면할 수가 없다고 사양하던 이맹기가 글자 그대로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훌륭하게 해운기업을 일궈낸 것을 보고 박대통령이 자랑 삼아 많이 이야기한 것으로 보인다. 포스코의 창업자로 우리나라 경제 발전사의 거목인 박태준이 이맹기에게 자기네 회사의 제철원료를 운송해달라고 요청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되자 선박회사명도 대한해운주식회사로 개명하게 되었다.
 

9) 대한해운의 상장과 포스코 장학회
시간이 많이 흘렀다. 박정희 대통령도 서거하였고, 포스코의 창업자인 한국의 강철왕 박태준도 정계로 입문하였다. 회사가 잘 되자 기업의 사회적인 책임을 계속 강조해왔던 이맹기는 대한해운주식회사를 공개하여 상장하였다.

한편 포스코는 회사가 잘되자 포스코 장학회를 설립하여 장학사업을 전개하게 되었고, 이 장학회에 장학금 재원을 마련할 기반을 마련해줄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포스코는 이러한 취지를 설명하고 대한해운 주식의 상당부분을 포스코장학회에 팔 것을 권고하였고, 대한해운의 주주들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주식을 양도하였다. 1980년대 중반이었던 일로 기억한다.
 

5. 최장 한국선주협회장을 역임한 이맹기
이맹기는 1954년 11월 대한해운공사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전임사장이 담당하였던 한국선주협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이 한국선주협 회장직은 우리나라 해운업계 전체를 대표하는 자리이고, 정부와 해운업계 간을 연결하는 통로역할과 해운업계와 다른 업계 간의 대화를 책임지고 우리나라 해운을 대표하여 국제활동을 하는 매우 중요한 자리다. 한국선주협회는 창립후 계속해서 대한해운공사 사장이 당연직 비슷하게 맡아왔다. 해공이 우리나라 해운업체중 가장 크고 전문성도 높고, 국영기업체이기 때문에 정부와의 소통도 원활하기 때문이다. 이맹기는 해공 사장시절 이 자리를 충실히 지켜왔고, 해공을 포함한 대한민국 해운 전체를 대변하고, 보호하고, 이끄는데 소홀함이 없었다. 회원사들도 이러한 회장을 환영하고 그를 전적으로 믿고 잘 따랐다. 

그러나 대한해운공사가 민영화되고 사장직을 사임하게 되자. 다른 사람이 회장직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 몇 년이 지나고, 전술한 바와 같이 이맹기가 코리아 라인을 창업하고. 해운기업으로 훌륭하게 성장하게 되자, 어느 날부터인가 해운업계에서는 대한해운공사가 이제는 국영기업체도 아니고, 전 회원사를 대변하기 보다는 자사의 이익 챙기기에 더 전념하는 것이 아니냐는 소리가 나오게 되었고, 이것이 어느 날 현실이 되었다.

한국선주협회의 연초 정기총회에서 회장 선출 안건이 상정되자, 회원사 중 한사람이 발언권을 얻어 회장을 선출하는데 회원사들 간의 투표에 의하여 결정하는 것이 좋으니 그렇게 하자고 제안하였다. 토의 끝에 후보를 전 회장(해공사장)과 이맹기 회장 두 사람으로 정하고 무기명 비밀투표를 실시하였고, 투표 결과 이맹기가 새로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이맹기는 1981년까지 약 6년간 선주협회 회장으로 재직하였다. 이맹기 회장의 업무자세는 시종여일하므로 일은 잘 되어나갔다. 6년이 지나자 한사람이 너무 오래하는 것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라는 이맹기 회장의 강력한 주장으로 총회에 이맹기가 추천한 범양전용선의 박건석을 새로운 회장으로 선출하였다.

후임 회장도 무난하게 협회를 이끌었으나 그의 재임기간 중 해운시황이 너무 악화되어 소위 해운산업 산업합리화라는 업계 통폐합 조치가 이루어지면서 업계가 갈팡질팡하게 되자, 정부가 이맹기에게 선주협회 회장을 다시 맡아 해운업계를 이끌어달라고 부탁하여 할 수 없이 이맹기는 다시 선주협회장으로 취임하게 되고, 그 자리를 1992년까지 유지하면서 우리나라 해운업계를 재생시키는 구원투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렇게 해서 이맹기는 1984년에 회장을 맡은 후 1992년에 조상욱 두양상선 사장에게 회장 자리를 물려주기까지 27년간을 해운업계에 종사하면서 18년간 선주협회장을 역임하였다. 이맹기의 공인 정신의 발로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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