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해양대학 교수 직으로 직장을 옮긴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해운사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내가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해운발전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름대로 연재하였다. 그때는 주로 사안을 중심으로 글을 썼는데 이번에는 “한국해운을 만든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 해운발전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고 필자가 판단하는 인물을 중심으로 그와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해양한국에 연재해보고 싶은 마음에서 이 붓을 들게 되었다. 그러나 필자의 개인적인 지식과 자료 및 경험을 바탕으로 기술하는 것이므로 필자의 주견들이 일부 가미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결과 다른 분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빠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표현이 불충분하여 그분의 참가치를 다 나타내지 못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필자의 책임과 잘못으로 생각하고 독자들의 양해를 바라고 싶다.


1. 대형상선 취항식 선상에서
어린아이 같이 좋아하던 박대통령
1969년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고 기억한다. 약 4~5만 중량톤급 대형선1) 한양호가 우리나라 선박회사에 의하여 유럽에서 건조되어 운항중 첫 번째로 한국의 울산항에 기항해 취항식을 거행하였다. 필자도 대형선이 보고 싶어 울산항까지 찾아가 취항식에 참석하였다. 취항식은 11시 30분 쯤으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취항식이 열리지 않았다 영문을 모르고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주최 측에서는 이렇다할 해명도 없이 그저 기다려 달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예정 시간보다 두어시간 늦어서야 취항식은 거행되었는데 뜨거운 철판 위에서 아무런 해명도 없이 그렇게 기다렸으니 하객들의 불평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기다림 끝에 취항식이 시작되었다. 식중에 예정에 없던 박대통령의 축사가 어나운스되었다. 하객들은 어리둥절하였으나 두어 시간의 기다림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모든 절차가 끝나고 한 참을 지나서야 예정에 없던 박대통령의 축사가 나오게 된 연유를 알게 되었다.

사연인즉, 박대통령은 그 날 그 시각에 부산지역을 순시하면서 헬리콥터로 공중시찰 중 수행 중이던 신동식 수석비서관이 “오늘 이 시각에 울산항에서 한양호의 취항식이 거행됩니다”고 보고하였다. 그 소리를 듣자 박대통령이 “그러면 내가 가봐야지 기수를 울산으로 돌라” 이렇게 해서 갑자기 예정에 없던 박대통령이 한양호의 취항식에 참석하게 되었던 것이다. 갑자기 기수를 돌려 부산에서 울산 오는 것이야 그리 어렵지 않지만 대통령의 행차이니 경호문제 등으로 행사에 차질이 생겼던 것이다.

필자가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박대통령이 축사라는 이름으로 한 연설이다. 박대통령은 재임중 명연설을 많이 하였다. 박대통령의 축사라고 하니 당연히 그러한 명연설을 기대하였는데 그 때의 그 축사는 축사인지 시골 노인의 푸념인지 모를 정도로 내용도 정리되지 않고 뒤죽박죽이었다.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골자를 파악하기도 어려웠다. 다만 확실한 것은 박대통령이 마치 어린아이가 갖고 싶어하던 장난감을 선사받고 싱글벙글하는 얼굴같이 좋아서 어쩔줄 모르는 모습이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좋은 배를 우리가 갖게 되었다니--” 하는 내용의 말을 되풀이 하는 수준이었다. 나는 어느 면에서 잘 다듬어진 명연설보다 그때 그 즉석 축사가 박대통령의 참 모습이 아니었을까 늘 생각하게 되었다. 박대통령은 어쩌면 역대 대통령중 가장 해운에 대한 이해와 열망을 가지고 해운이 잘 되기를 기대하였던 대통령이다. 이 이야기는 대한해운공사 사장인 이맹기 사장의 성공신화의 연장편이라고 해도 될 이야기다.

2. 박정희 대통령의 사신
1973년 4월 20일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김신(金信) 당시 교통부 장관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편지 한 통이 왔다.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고, 농경지가 부족한데다가, 자원도 별로 없다. 그렇지만 인구는 많다. 이러한 경제구조에서는 외국에서 원자재를 수입하고 이를 가공하여 생산된 완제품을 수출하여 그 차액으로 국민이 먹고 살 수밖에 없다. 외국에서 원자재를 사오고, 완제품을 외국에 수출하기 위해서는 이를 운송할 선박이 필요하다. 따라서 해운업의 발전이 시급하다. 그런데 들리는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 해운이 잘 안 되고 있다고 하니 대통령으로서도 안타깝기 짝이 없다. 지난 1967년에 4대 국영기업체를 불하할 때 대한해운공사는 가장 좋은 회사의 하나였다. 이 회사가 지금 잘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4대 국영 기업을 불하할 때 가장 경영상태와 재무구조가 나빴던 대한항공은 불하받은 분이 열심히 하여, 지금은 세계적인 항공사가 되었다. 그런데 대한해운공사는 왜 잘 안되는지 알 수가 없다. 교통부장관은 그 이유를 조사해서 그 원인을 고치는 안과 동시에 획기적인 해운발전방안을 마련하여 나에게 직접 보고해 주기 바란다. 꼭 필요하다면 社主를 바꾸거나 새로운 국영회사를 신설하는 방안도 포함해서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필자도 청와대 비서실에서 가지고 있던 사신의 복사본을 보았는데 그 편지 속에는 정말 경제발전에서의 해운력의 필요성 등을 아주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었다.
박 대통령이 교통부 장관에게 왜 이러한 서신을 썼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당시 우리나라 해운의 현황 및 당면과제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 해운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주로 한일항로와 동남아 항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원양항로의 경우, 대한해운공사가 국영기업체였던 시절에 미주 원양항로를 개설하는 등 활기차게 발전하였으나, 대한해운공사의 민영화 이후 그 회사의 발전은 정체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민영화 시기가 국제 정기선항로가 재래정기선 체제에서 컨테이너선 체제로 급속하게 전환되는 시기였다는 점이다. 대한해운공사를 불하받은 새로운 사주는 컨테이너화를 위해서는 거대한 규모의 신규투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투자를 망설이다가 투자 적기를 놓쳐버렸다. 다른 한편 우리나라의 산업화가 급속하게 진전되면서 대량의 원자재들을 외국으로부터 수입하게 되었는데, 그 대부분의 운송권을 차관선(借款先)을 비롯한 외국 선사들이 장기운송계약으로 장악하고 있어서, 국적선사는 운송에 전혀 참여하지 못하거나 외국선사의 하도급으로 부분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두 가지 문제는 당시 우리나라 해운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였다. 아마도 어떤 경로를 통하여 누군가가 이러한 우리나라 해운 발전상의 문제점을 박 대통령에게 정확하게 전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3.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캐비넷 속에 잠잔 보고서 
이를 계기로 교통부가 만든 것이 외항해운육성방안(부제, 대단위해운회사 지정 및 육성)이라는 안이었다. 당시 100만 총톤도 못되는 선복을 보유한 우리나라 선복량을 1980년까지 600만 총톤으로 증강하겠다는 것과, 이 사업을 추진할 주체로 대단위 해운회사를 지정 육성한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그러나 이 안에서 대단위 해운회사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600만 총톤으로 선복을 증가시키기 위한 자금계획에 대한 내용은 결여되어 있었다.

이 보고서가 교통부에서 작성되어 청와대 비서실에 접수된 것이 1973년 8월말 9월초 쯤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시기에 필자는 교통부 해운국 외항과장으로 발령을 받아 바로 이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시점에 중대한 정치적인 사건이 발생하였고, 정국이 대혼란을 겪게 된다.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한일관계는 극단적으로 악화되었고, 정국은 회오리 바람을 맞은 듯 소란스럽게 되었다. 해운발전계획과 같은 실무적인 안건이 다루어질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이 보고서는 청와대 비서실(경제수석) 캐비넷 속에서 잠자게 되었다. 담당인 교통부도 청와대에서 더 이상 언급이 없으니 물 건너간 것으로 보고 잊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정국이 안정되었고 한일관계도 정상화되었다. 해가 바뀌어 1974년 4월 20일이 되었다. 이 날은 박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무역진흥확대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이 당시는 매월 한 차례 이러한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관계 장관 등 정부요인과 대외무역과 관련되는 업계 요인들이 모두 참석하는데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를 직접 대통령 주재 하에서 토의하고 해결하는 중요회의였다.
이 회의가 끝나면 관례상 대통령과 주요 관계자들이 남아서 점심을 같이 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더 하였다. 이때 점심은 거의 칼국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만 점심에 참여하는 멤버만은 매번 달랐고, 대통령이 지정하였다. 그 날은 이 지정멤버에 교통부 장관이 포함되었다. 간단한 점심이 끝나자 박대통령이 정색을 하고 발언하였다. 박대통령 “교통부장관! 내가 작년 오늘 교통부 장관에게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그런데 만 1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 답장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대통령의 편지를 이렇게 묵살하는 게 될 말입니까? 하고 힐책하였다. 순간 회의장은 싸늘하게 식었고 교통부 장관은 대답을 못하였다. 그 서류가 어떻게 되었는지 확실하게 기억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회의후 장관 전용차에서 필자(외항과장)를 비서실에서 대기하라는 지시가 날라 왔다. 장관이 도착하여 따라 들어가니 그 서류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 첫 질문이었고 필자가 경제수석에게 전달하였다고 하니 사색이던 얼굴이 약간 풀리는 듯 하였다. 그 순간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다. 경제수석이었다 경제수석 : “급히 돌아와서 찾아보니 그 서류가 제 케비넷 속에서 잠자고 있는 것을 깜빡하였습니다. 대통령께 직접 찾아가서 사과드리겠습니다. 기다려 주십시오”

약 10분 후 경제수석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요지는 대통령의 화가 어느 정도 풀렸다는 것과 내일(74년 4월 21일) 오후 2시에 그 안건을 주제로 관계장관 회의를 소집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니 준비하고 참석해 달라는 것이었다. 다음날 정확하게 회의가 열렸고 박대통령은 편지에서 쓴 것과 유사하게  해운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획기적인 대책을 강구하라고 하면서 무엇보다 해운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해운회사를 빨리 정하고 이 회사를 강력하게 지원 육성하라고 강조하였다. 회의 직후 청와대 비서실에서 필자를 들어와 달라는 연락이 왔다. 급히 들어가니 대통령께서 오늘 회의 결과를 대통령 지시각서로 작성하여 정부에 전달하라고 해서 대통령지시각서라는 문서를 최초로 작성해보았다. 비서실 직원들도 박 대통령의 의지가 매우 강력한 것을 알고 필자가 초안한 각서안을 한자도 안 고치고 그대로 들고 들어갔는데 바로 대통령이 서명하였다.
 

4. 김종필 총리에 의한 대단위 해운회사의 선정
박 대통령에게 보고한 후에도 대단위 해운회사를 어떻게 정할 것인지는 여전히 숙제였다. 회의를 주재하였던 박대통령도 그 계획을 추진할 업체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 문제는 어찌 되었든 우리나라 최대선사인 대한해운공사의 사활이 걸린 문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큰 이권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 관료출신 장관들이 이권문제에 흔적을 안 남기려 너무 몸을 사리는 것을 보고 실망하였다.

보다 못한 김종필 총리가 나섰다. 이것이 김 총리가 스스로 판단하고 나선 것인지 아니면 박대통령이 총리가 주재하여 결정하여 보고하라고 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필자의 느낌으로는 전자일 가능성이 높다. 총리실에서 장관에게 연락이 왔다. 실수요자를 결정하기 위한 회의를 할 것이니 후보사들을 정하여 보고하면 관계 장관회의에서 결정하고 대통령에게 결재를 올리겠다는 것이다. 교통부 장관은 심사숙고 끝에 대한해운공사(김연준), 현대그룹(정주영) 한진그룹(조중훈) 3사를 올리기로 하였다. 이러한 교통부 안을 전화로 알게 된 어느 날 위에서 거론한 3개사 외에 범양전용선을 더 추가하라는 총리 의견을 전해왔다. 그렇게 해서 4개사 중에서 한사를 선정하여 집중육성하기로 하였다.    

관계 장관회의가 총리주재로 열리고. 관계 장관 등 7~8명이 앉은 자리에서 안건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브리핑은 필자가 하였다. 간단한 설명이 끝나자, 총리가 “설명을 잘 들었으니 장관들께서 의견을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필자는 선 채였다. 그 말이 떨어지자 참석자 전원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어리둥절하였으나 알고 보니 이 문제에 대하여 발언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자, 총리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설명하신 분, 설명을 잘해주어 잘 알겠는데, 범양전용선이라는 회사가 어떤 회사입니까?”라고 질문하였다. 그래서 아는대로 간단히 설명하니, “아 그래요 우리나라에 그렇게 훌륭한 해운회사도 있군요! 또 한 가지 묻겠는데 해운업을 크게 분류하면 어떻게 분류됩니까?” 답변은 해운업의 영업형태로 보아 정기선과 부정기선으로 분류됩니다. 정기선은 항로를 미리 정해놓고 운항스케줄에 따라 운항하는 것이고, 부정기선은 항로를 정하지 않고 그때 그때 운송할 화물을 찾아서 운송하는 형태로서 우리나라에서 말하면 대한해운공사가 정기선 위주이고, 범양전용선이 부정기선 위주입니다.

그후 총리가 4개사에 대하여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하였다. 설명자료에는 현대그룹 정주영, 한진그룹 조중훈, 대한해운공사 김연준, 범양전용선 박건석으로 되어 있었다. 총리는 그 순서에 따라 의견을 개진하였다. 이하는 총리의 발언요지이다. 맨 위의 “현대그룹 정주영! 아주 훌륭한 기업가이지요, 어려울 때 중동에 나가서 많은 돈을 벌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조선의 신화를 만들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고, 우리나라의 이름을 세계에 날리게 했습니다. 아주 훌륭한 기업가인데, 총리로서 고마움과 함께 이 분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운 것이 아닌가 해서 염려되는 요소도 있습니다. 그래서 총리로서는 이 분에게 더 이상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우기 보다는 지금하고 계신 중동건설과, 현대조선의 발전에 전력을 기울여 주실 수 있도록 기회를 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 분에게 기회를 드리기 위하여 제외하였으면 합니다.” 처음 시작과는 달리 부결이었다. 그 다음이 한진의 조중훈이었는데 이도 정주영의 설명과 마찬가지였다. 칭찬을 잔뜩 늘어놓은 후, “이 분에게도 지금하고 계신 사업만 성공적으로 수행하시면 총리로서는 만족하겠습니다. 그러니 이 분도 제외하였으면 합니다.” 다음이 대한해운공사였다. 사주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이 사람은 학원모리배니 우골탑(牛骨塔)이니 하는 용어를 만들어 낸 장본인으로 총리로서 이런 분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는 이번 케이스만은 정보부의 xxx란 x이 사업계획을 만들어 찾아갔는데 당신은 절대하면 안 된다고 내쫓았다고 합니다.

정부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하겠다는 것을 못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니 사람은 마음에 안 들지만 한번은 기회를 드리는 것이 정부의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이래서 끝난 줄 알았는데 총리는 이어서 “오늘 보니 대한해운공사만 있는 줄 알았는데 범양전용선이라는 아주 훌륭한 회사가 있는 줄 처음 알았습니다. 이런 훌륭한 회사가 있다면 그 분에게도 기회를 한번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각하께서는 한 사만 말씀하셨는데 두 사라고 안 될 것 없다고 생각되니 대한해운공사와 범양전용선의 두 사로 정하여 경쟁시키면 어떻겠습니까? 그럴 경우 과당경쟁이 생길 우려도 있고 하니 아까 실무자 설명대로 대한해운공사는 정기선 해운 전담회사, 그리고 범양전용선은 부정기선 전담회사로 육성하였으면 합니다. 제 의견에 대하여 의견이 있으면 말씀하여 주십시오.” 약 10여분에 걸친 총리의 설명이 진행되는 동안 참석자 전원이 고개를 깊이 숙인 채 총리 얼굴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실무자인 필자 혼자만 서서 총리와 간간이 이야기할 뿐이었다. 약 2~3분이 지나자 총리가 “다른 의견이 없으면 오늘 회의는 그렇게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안은 민감한 안이니 빨리 처결하여야 합니다. 그러니 교통부 장관과 실무자는 오늘 회의 결과를 정리하여 각하의 결재를 올릴 수 있도록 준비하여 내일까지 여기 참석한 사람 전원의 서명을 받아 내게 가져오시면 내가 각하를 만나서 결재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총리의 의견대로 정리하여 당시 참석자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서명을 받는데 어제 그 문서입니다. 하니 아무도 결재서류를 들여다보지 않고 어디다 서명하지? 라고 묻고는 그대로 서류를 필자에게 전하였고, 지시대로 총리실에 전달하니 며칠 후 박 대통령이 결재한 예의 문서가 교통부로 돌아왔다.
 

5. 필자의 졸견
그 후 이 문서는 그대로 시행되었는데, 그 결과는 그렇게 좋지 못하였다. 사족이지만 필자의 졸견을 피력해보고자 한다. 이미 기술하였지만 필자는 이 문제를 직접 담당하였지만 실무자에 불과하였다. 서기관에 불과한 실무자가 대통령과 국무총리, 그리고 수많은 각부 장관이 참여하는 중요정책 결정에 내 의견을 직접 피력할 기회는 없었지만 서류를 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다 보니 어느 정도 맥이 잡히기도 하였고, 그 결과에 대한 어렴풋한 예견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거의가 적중하였다. 가장 강하게 와 닿은 느낌은 김 총리가 전술한 바와 같이 스스로가 실수요자를 혼자 결정하였는데 관련 장관들이 한결 같이 고개를 숙이고 한 번도 들지 않았다는 대목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김 총리의 생각과 결정이 박 대통령의 의중을 100% 반영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느낌으로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후일에 혹시 튈 불똥이 자기에게 날라올 것이 아니냐고 염려하였던 것이다. 이하에서는 근거는 없지만 그 후의 이 정책의 진전과 관련된 필자의 졸견을 정리한다.    
 

첫째 이 안은 박 대통령의 의중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니었다. 누가 콕 찍어 말한 것은 아니지만 필자의 느낌으로는 박 대통령의 의중에는 현대의 정주영이 만든 현대조선 신화나 한진의 조중훈이 만든 KAL과 같은 세계적인 해운회사를 만들라는 취지였다고 생각되는데(박대통령의 사신을 읽고 그렇게 느꼈다) 국영기업체를 불하받아 운영하면서 실패한 사람을 다시 선정하여 올렸으니 그게 마음에 들 리가 없다. 더구나 그럴 것이 어렵사리 다시 선정되었으면 심기일전(心機一轉)하여 박 대통령의 마음에 쏙 들도록 발전시켰으면 모를까, 일단 선정되고 나자 다시 이 핑계 저 핑계로 전혀 사업을 확장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정부가 하라”고 하였으니 정부가 어떤 지원을 할 것인지를 먼저 약속하라고 들고 나왔다.

둘째 이 결정이 있고나서 총리실에서 해운발전과 관련하여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 메시지를 전해왔으나 실현성이 없는 안이어서 실적이 별로 나지 아니하였다. 특히 정기선 부문을 담당하기로 한 대한해운공사는 돈이 없다는 이유로 전혀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그래도 부정기선부문에서는 총리실의 적극적인 지원과 범양전용선 측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여서 비료삼사의 원료인 인광석과 유황 농림부가 주도하던 수입 밀및 사료용 곡물인 옥수수와 밀의 운송권을 확보하는 등 성과를 거두었으나,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수입 원유와 포스코 제철 원료인 철광석과 원료탄의 운송권은 이미 외국선사와 계약이 되어 있으므로 그 계약기간이 끝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유로 실질적으로 거부하여 실적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도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고 해도 된다. 국내 정유사나 포스코가 외국선사와의 계약을 핑계로 미루었지만 정부가 계약기간이 만료되면 반드시 개입하여 자기들의 이권이 침해될 것을 미리 짐작하고 아예 선수를 쳐서 자기들과 잘 맞는 선사를 선정하여 조금씩 운송권을 국내선사에게 내주어 범양전용선은 아니지만 국적선사의 운송체제가 비교적 쉽게 열리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하였다. 그런 면에서 이 정책은 어느 정도 성공한 정책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셋째로 이러한 조치가 이루어지고 반년쯤 지난 어느 날(1975년 중반?) 국무총리가 갑자기 경질되었다. 이 소식을 호외로 본 필자의 뇌리 속에 이 사건(박대통령의 의중을 거스른 김총리의 결정)이 번개같이 지나간 것은 나만의 과민 반응이었을까?
이 결정은 전술한 바와 같이 박대통령의 강력한 의지로 시작된 정부주도의 해운정책이었으나 총리의 개입으로 방향이 약간 어긋났다고 볼 것이나 아주 실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찌 보면 이것을 계기로 한국해운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성과는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이 문제는 김종필 총리가 물러나고 약 1년이 지나 해운항만청이 신설되어 그 청장직에 강창성 청장이 취임하면서 강창성 청장과 박정희 대통령 간에 손발이 척척 맞아 돌아가면서 아주 다이나믹한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이에 관하여는 후술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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