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사문제연구소의 이전과 각오
한국해사문제연구소가 사무실을 이전했다. 명동 입구 을지로에서 정치와 역사의 중심 광화문 주변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들었던 을지로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광화문시대를 열었다. 양적 질적으로 성장하는 미래지향적 이동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1971년 4월 연구소 창립자 윤상송 박사의 공덕동 자택에서 개소하여 업무를 보다가 천경해운 김윤석 회장의 배려로 시청 옆 백남빌딩의 사장실 절반을 사무실로 꾸며 사용하였고, 1975년 2월 사옥을 매입하여 이전하는 천경해운을 따라 을지로 보승빌딩에 둥지를 튼 지 40년 만에 한국선주협회가 있던 세종빌딩의 10층 일부를 매입하여 이사를 오게 되었다. 모두가 발전적인 이전이었다. 그간의 일들을 돌이켜보니 감회가 남다르고 감개무량하다.

좋은 일과 함께 궂은 일도 있었으나 지나고 보니 전부 아름다운 추억이다. 열악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우리 연구소가 조금씩 발전하며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저런 일로 연구소와 관계를 맺은 분들의 도움 덕택이다. 정말 많은 분들의 은덕을 입었다. 설립자 고 삼주 윤상송 박사의 혜안과 열정, 천경해운 김윤석 회장을 비롯한 해운업계 인사들의 관심과 후원, 해사재단과 선주협회, 고려해운과 천경해운을 비롯한 해운단체와 기업들의 지원으로 가능했다. 건강 때문에 은퇴하는 창업자로부터 연구소를 물려받아 오직 사명감과 인내로 창업보다 어렵다는 수성을 해낸 묵암 박현규 이사장의 헌신적인 노력도 자체 사무실을 마련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해운불황으로 인해 어렵고 힘들 때에도 창업자의 당부를 기억하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우리 연구소를 음으로 양을 도와준 모든 분들께 지면을 빌어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우리들은 협조해주신 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더욱 힘쓰겠으며, 아울러 연구소 내에 있는 해운물류학회, 한국해법학회와 같은 해운관련 학회와 한국해외취업선원납세조합과 연계하고 협력하여 산학연 센터로서의 기능을 계속 발전시켜 나갈 것이다. 이제는 광화문시대! 을지로시대의 경험을 살려 더욱 성장하여 해사문제연구소 본연의 사명을 다하고 해운업계와 함께 발전하는 도약기 광화문시대를 열어갈 것을 다짐한다.

짐을 싸던 날, 떠나기가 아쉬워 보승빌딩 주변의 을지로와 명동 일대를 거닐었다. 오늘도 명동엔 서울1번지답게 국내외의 수많은 사람들이 활보한다. 생동하는 거리, 사람들이 진정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발걸음을 서서히 옮겼다. 타임다방이 있던 곳, 레스토랑 누리에, 기념행사를 열던 로얄호텔, 정신적 휴식처 명동성당과 영락교회, 대한음악사와 예술극장, 따로국밥집, 명동교자, 안동장, 평래옥 등등 이름만 들어도 정겹다. 지금까진 명동근처에 직장이 있어 타인의 부럼을 사고 은근히 뻐기기도 했는데...... 이젠 모두 좋은 추억으로 돌리련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광화문에서의 새로운 만남과 추억을 만들어 가야겠다.
 

느림과 쉼의 미학
성하의 8월을 보내고 가을의 길목 9월을 맞으려니 까닭 모를 안도와 함께 회한에 휩싸인다. 지난 몇 달 동안 참으로 험한 세상을 살아왔다. 세월호 참사, 윤일병 폭행 치사, 지검장의 음란행위에다가 서아프리카의 에볼라 바이러스 공포까지 정말 기억하기 싫은 시간들이었다. 한 여름의 이글거리는 태양은 삶의 의욕과 생명력을 느끼게 하지만, 이번 여름은 참혹과 참담의 연속이었다. 가을이여, 어서 오라! 가을은 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는 스산하고 쓸쓸한 계절이지만, 결실의 보람과 수확의 기쁨이 있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땀 흘려 일한 농부가 가을을 기다리는 까닭은 수확의 기쁨을 알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파종하는 수고와 폭염 속에서도 가꿈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사계(四季)가 뚜렷한 우리나라 좋은 나라, 계절이 바뀔 때마다 계절의 기쁨을 선사한다. 사색의 계절 가을엔 자신과 주변을 살펴보게 된다. 혹한의 겨울이 오기 전에 대비하라는 자연의 가르침이다. 마감과 헤아림의 시간이다. 작은 관심, 작은 친절, 작은 사랑이라도 행했는지 손꼽아 보자.

8월엔 콤파스도 방학했다. 휴식하며 충전하라는 뜻이다. 삶의 자세를 고추 세우고 삶의 의욕을 되살려 보는 기간이다.
만년유호정(晩年惟好靜) 만사불관심(萬事不關心) 자고무장책(自顧無長策) 공지반구림(空知返舊林) 송풍취해대(松風吹解帶) 산월조탄금(山月照彈琴) 군문궁통리(君問窮通理) 어가입포심(漁歌入浦深)
“나이 드니 고요한 게 좋아 / 만사에 관심이 없네 / 머리를 써도 생각이 안 나 / 옛 숲으로 돌아와 / 솔바람에 허리띠 풀고 / 달빛 비추는 산중에서 거문고 타네 / 세상이치 깨달았냐는 물음에 / 포구 깊이 들려오는 어부들 뱃노래.”

당나라 시인이자 화가 왕유가 장소부(酬張少府)에게 화답한 한시 ‘어부들의 뱃노래’이다. 세파에 지친 심신을 쉬고자 늘그막에 고향 집에 돌아와 달빛 비추는 숲속에서 거문고를 타는데, 세상이치를 깨달았냐고 누가 묻는다면, 깊은 포구에서 울려 퍼지는 어부들의 뱃노래가 답이라는 뜻이다. 이 글은 스님의 선문답 같지만, 한 폭의 수묵 산수화처럼 시간이 멈춘 고요함과 한적함이 느껴진다. 쉼은 느림과 멈춤이다. 바삐 가던 걸음을 늦추고 멈춰 자연과 자신이 하나가 되는 물아일여(物我一如)를 경험하는 것이 진정한 휴식이다.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삶의 여유와 온전한 휴식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9월이다. 휴식을 끝내고 일터로 돌아가야 한다. 세월호와 그간의 아픔과 갈등을 봉합하고 이젠 일상으로 돌아가자. 쉼과 일상은 단절된 것이 아닌 하나로 이어져 있다. 
 

‘민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와 명량(鳴梁)
윤치호의 일기 제4권 1896년이라는 부제가 붙은 ‘민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 왜 당시의 그들은 러시아에 갔으며, 어떤 임무를 수행했는가?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있은 후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고종을 구해 내려는 춘생문 사건이 일어났고, 이 사건으로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옮기는 아관파천이 단행되었으며, 곤경에 처한 고종은 특사 민영환과 그의 수행원 윤치호에게 밀명을 내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보내 러시아의 힘을 빌려 돌파구를 찾으려 한다. 이들 특사는 인천에서 배를 타고 상하이, 나가사키, 요코하마, 밴쿠버, 뉴욕, 리버풀, 베를린을 거쳐 러시아의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긴 여정을 일본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풍전등화 같은 대한제국의 명운을 걸고 특사의 임무를 감행한다. 당시에 통역관 역할을 맡은 윤치호가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어 불어에 능통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일기에 인용한 해박한 그의 지식에 감탄했다.

다만,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과 사사건건 갈등을 빚었다는 사실은 의외였다. 그에 대한 불만과 폄하가 도를 넘었고 급기야 귀로를 달리할 정도로 심각했다. 권문세가 민문(閔門)으로 황후의 총애를 받은 민영환은 국내에서 유학을 공부했기에 미국에서 신학문을 공부하고 새로운 문화를 접한 윤치호와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대관식에서는 황제 외에는 모자를 벗게 되어 있음에도 민영환은 벗을 수 없다며 버티다 입장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특사의 중요한 임무 중의 한 가지를 못한 셈이다. 그러나 불리한 조건과 교묘한 방해 속에서도 외교관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한 두 특사의 노력은 평가할만하다. 의견차이로 민영환은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귀국한데 비해 윤치호는 프랑스, 지중해, 수에즈운하, 홍해, 콜롬보. 싱가포르, 베트남, 홍콩을 거쳐 상하이와 조선으로 돌아왔다. 결과적으로는 세계 도처를 다니며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일기는 당시의 긴박한 국제정세와 악조건에서도 분투한 외교관들의 활동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특히 애국가의 작사자가 윤치호였다는 기록은 연구해볼만하다.

영화 명량(鳴梁)의 관객이 1,600만을 돌파했다. 가히 놀라운 기록이다. 요즘의 화두는 명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와 이를 수습하는 정치권에 대한 실망감이 절대절명의 위기를 극복한 충무공 이순신의 리더십과 비교가 되어 인기가 치솟는 것 같다. 칠천량의 참패를 딛고 공포를 용기로 바꾸어 울돌목에서 12척으로 330척의 왜선을 격퇴한 충무공의 리더십은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였다.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이순신의 비장한 각오가 이러한 기적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충무공의 말처럼 천운(天運), 하늘이 도왔다. 백성들도 그를 믿고 따르고. 지도자가 리더십을 발휘하려면 지성과 덕성 같은 품성에다가 판단력 추진력 포용력 통솔력 같은 능력도 겸비해야 한다. 이 모두를 갖춘 이순신은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와 백성을 구하라고 하늘이 보내준 진정한 리더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과 명동고(明洞考)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나라를 찾아왔다. 그리고 낮춤과 섬김을 몸소 실천하며 평화와 화해를 전하고 갔다. 가르침의 큰 울림을 남기고...... 광화문광장에서의 시복식 집전과 해미와 서소문 순교지, 솔뫼성지와 음성 꽃동네 방문 등 평화의 사도로서 큰 사랑을 베풀고 떠났다. 용서와 하나 됨의 실천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 프란치스코 하면 아시시의 성자 프란치스코 주교가 생각난다. 평생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살며 사랑과 평화를 실천한 사제이다. 특히 “주여 나를 평화의 사도로 써 주소서”로 시작하여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치유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심게 하소서”로 끝나는 김마리아가 작곡한 이 노래는 청소년시절 가슴에 깊은 울림을 주며 삶의 목적을 되새기게 해주었다. 동족상잔과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사는 우리 민족, 최근 세월호 참사로 가슴앓이를 하며 그 후유증으로 갈등을 빚는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와 일치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다. 그의 격의 없는 자세와 행보는 존경할 대상을 찾지 못하는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정의의 결과가 평화이며, “산에 오르라고 전할 수 있지만, 대신 올라갈 수는 없다”는 교황의 말은 ‘행하는 믿음’을 뜻하리라.

교황방문으로 분주했던 명동성당, 단장한 신부 같이 온화하게 명동거리를 내려다본다. 교황방한을 맞아 명동성당 주변이 새 단장을 하였다. 진입로와 조경 부속건물 신개축 등 몰라보게 달라졌다. 명동은 언제나 분주하다. 명동거리를 걷는 사람들, 일본인, 중국인 그리고 동남아와 러시아 사람들까지 인종전시회를 방불할 정도다. 명동 근처 사무실에서 보낸 긴 세월. 한 곳에서 한 우물만 팠으니 인생의 절반 이상을 연구소가 있는 명동에서 보낸 셈이다. 해양한국을 연말까지 발간하기 위해 야근하다가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밤, 명동성당의 11시 종소리를 들으며 퇴근하던 시절이 문득 그립다. 통금시간에 쫓기면서도 명동성당에 올라가 눈이 내리는 명동거리를 바라보던 순간은 잊을 수 없는 나만의 추억이었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연일 터진 시위로 몸살을 앓았다. 시국데모가 명동성당 계단에서 시도 때도 없이 발생했다. 시위대가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 전경과 몸싸움을 하며 일진일퇴하다가 투석과 최루탄 발사로 번지는 일이 당시엔 명동의 일상이었다. 인근의 상인과 직장인들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최루탄가스와 화염병 속에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신들이 코리아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혹평한 배경이다. 이제는 세월이 흐르고 민주화도 이루어져 그들도 한국의 민주화와 선진화를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으니 세상 많이 변했다. 세계의 도움을 받던 우리나라, 이젠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바뀌었다는 대통령의 연설이 실감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도처에는 가난과 질병과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종족간, 종교간, 계층간의 이념 분쟁이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시리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아프리카....... 특히 아이들과 부녀자들이 처참하게 희생되는 뉴스가 매일 보도되지만, 우리의 마음은 침착할 정도로 무감각하다. 양심마저 마비된 것일까? 아니면 신의 영역이라고 체념하고 포기한 것인가? 현대인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인간성의 회복이다. 함께 아파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인류애가 절실하다. 이런 때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은 시의적절 했다. 진정한 어른을 만난 것이다. 잃을 것이 없다며 테러를 무릅쓰고 마피아를 파문하고 약자와 빈자 편에 선 교황이야말로 정의로 평화를 사랑으로 용서와 화해를 만들 분이다. 자신의 인기는 고작 2년이 못 갈 것이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이 소박하다. 김수환 추기경이 자신을 바보예수라고 부른 적이 있듯 프란치스코 교황을 짝퉁예수라고 교황청 수행원이 웃으며 말하였다. 목자는 양과 함께 어울려야 하므로 양의 냄새가 나야 한다고도 말했다. 말은 쉬워도 실천하긴 어려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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