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이은상, 1932년 고향인 마산 앞바다 배경지로 作詩
김동진 이듬해 작곡…‘내가 좋아하는 가곡 1위’ 뽑혀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릴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 간들 잊으리오 그 뛰놀던 고향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얼려 옛날같이 살고지고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 웃고 지내고져
그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찾아가자 찾아가 가고파라 가고파

 
 
기차를 타고 마산역에 내리면 가곡 ‘가고파’ 가락이 잔잔하게 흐른다. 학교시절 배웠던 노래에 대한 추억과 가사에 취해 마산이란 정서가 피부에 물씬 와 닿는다. 마산이 지금은 창원시로 들어갔지만 올해로 개항 115년이 넘는 유서 깊은 항구도시다. ‘가고파’와 ‘3·15의거’의 민주화 텃밭이자 공기, 물이 맑은 고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산엔 ‘가고파’와 ‘3·15’, 노래배경지 ‘합포’가 들어가는 간판, 상호, 단체이름, 행사들이 많다. 가고파횟집, 가고파통술집, 가고파꽃집, 가고파초등학교, 가고파새마을금고, 가고파봉사단, 가고파산악회, 가고파국화축제 등이 있고 마산고재경동창회 소식지도 ‘가고파’다. ‘마산’하면 ‘가고파’이고, ‘가고파’하면 ‘마산’으로 통할 정도다.

김동진 작곡, 이은상 작사의 가곡 ‘가고파’는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로 나가는 10절의 가사를 가진 통절형식(通節形式)의 곡이다. ‘가고파’의 바다는 노산 이은상 선생이 나고 자랐던 마산 앞 합포만(현재 마산만)을 가리킨다. 진해만과 이어진 이곳엔 바다를 가로지르는 창마대교(길이 1.7㎞), 국내 최초 해상유원지 돝섬랜드가 있고 마산항, 마산자유무역지역, 국립마산병원, 어시장과 맞닿아있다. 마산산호공원, 마산 자산동 통일공원, 마산 석전동 무공수훈자 기념비 자리, 마산역 앞, 돝섬에 ‘가고파’ 노래비가 있다.

 
 
‘가고파’ 노랫말은 이 선생이 29살 때인 1932년 1월 이화여전 교수로 있을 때 썼던 시조다. 1932년 1월 5일 서울에서 탈고, 1월 8일자 동아일보에 실려 처음 알려졌다.
작곡은 1933년 이뤄졌다. 김동진이 평양 숭실전문대 문과 2학년 재학 때 현대시조를 가르치던 무애 양주동 선생으로부터 시를 배우면서 악상이 떠올라 단숨에 4장(1~4수)까지 작곡했다. 양 선생이 한 때 일본 동경 유학시절 함께 지낸 동갑내기이자 벗인 이은상의 ‘가고파’ 시를 소개하자 김동진의 마음을 크게 움직인 것이다. 가장 먼저 떠오른 악상은 “어디간들 잊으리요 그 뛰놀던 고향동무 / 오늘은 다 무얼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였다고 전한다. 김동진은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1973년 나머지 6장을 마무리했다. 후편은 전편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경쾌하면서도 무게가 있는 작품으로 평가됐다. 젊었던 20대의 작품을 60대에 와서야 완성한 김동진은 ‘최고의 가곡작품”이라고 회고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가고파’는 평양 신암교회와 신정교회에서 불리다가 테너 이인범에 의해 널리 소개됐다. 이 곡은 김동진의 ‘내 마음’, ‘수선화’와 비슷한 정서가 노랫말에 스며있다. 이들 가곡은 우리나라 가곡의 방향성을 규정하는 나침반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고향을 떠올리는 애상감과 마지막 부분의 남성적 중후함이 많은 사람들의 애창곡이 되게 했다. 지난 1984년 MBC 조사 때 ‘내가 좋아하는 가곡 1위’로 뽑히기도 하다. 몇해 전 작곡가, 성악가 100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에서도 우리나라 최고 가곡으로 ‘가고파’가, 최고작곡가는 김동진 선생이 선정됐다. ‘가고파’가 널리 불리고 전국에 알려지자 1967년, 1984년에 같은 제목의 영화 2편이 나왔다.
 

‘가고파’ 영화 2편 나와…이은상 친일파 시비도
이처럼 유명한 ‘가고파’에도 문제가 있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노랫말을 쓴 이은상이 친일파이자 비민주적 사람이란 것이다. 이승만을 “이순신 장군 같은 분”이라며 칭송하고 3·15의거와 4·19항쟁을 “무모한 흥분” 내지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 “불합리, 불합법이 빚어낸 불상사”란 표현을 썼다는 지적이다. 4·19혁명이 성공하자 서울 수유리 묘지의 4·19학생혁명 기념비에 4·19를 찬양하는 비문을 쓰고 전두환이 군사쿠데타를 일으키자 “한국의 특수한 상황으로 보아 무엇보다도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는 것이 거의 일반적인 여론”이란 글을 쓴 기회주의자란 주장도 있다. 마산시민들은 마산이 4·19혁명의 단초가 된 3·15의거와 유신정권을 무너뜨린 부마항쟁의 숨결이 서린 곳으로 친일·친독재인물이기도 한 그를 비난했다. 마산역 앞의 ‘가고파’ 노래비에 페인트를 뿌리고 이은상을 비난하는 현수막까지 내걸렸다.

 
 
물론 반론도 만만찮다. “마산과 조국을 사랑한 이은상 선생은 3·15를 폄하하지 않았다” ‘마산이 낳은 문인’ 등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많다. 시조시인이자 사학자인 이은상은 1903년 10월 22일 마산서 태어나 1982년 9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20년대 후반 일어난 시조부흥운동에 참여한 뒤 시조의 현대화에 힘썼다. ‘가고파’, ‘봄 처녀’ 등의 작사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18년 아버지가 세운 마산창신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다니다가 1923년 그만뒀다. 창신학교 교원으로 일하던 중 1925년 일본 와세다대 사학과에서 공부했다. 귀국해선 1931~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지낸 뒤 동아일보·조선일보에서 일했다. 1945년 호남신문사 사장을, 1950년 이후 청구대학(지금의 영남대)·서울대 교수로 몸담았다. 1959년부터 충무공이순신장군기념사업회장, 안중근의사숭모회장 등을 맡았다. 1967년 시조작가협회장, 한글학회 이사를 지냈고, 1969년 독립운동사 편찬위원장, 1972년 숙명여대 재단이사장이 됐다. 1976년 성곡학술문화재단 이사장, 총력안보국민협의회 의장, 시조작가협회 종신회장, 1978년 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추대됐고 1981년 국정자문위원을 지냈다. 그의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치러져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혔다. 1976년부터 노산문학상 운영위원회에서 노산문학상을 제정, 시상하고 있다.

작곡가 김동진은 1913년 3월 22일 평남 안주에서 목사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찬송가 등으로 서양음악을 접했다. 평양 숭실중학교를 다니면서 바이올린을 배우고 5학년 때 ‘봄이 오면’(김동환 작시)을 작곡했다. 숭실전문학교 문과에 다닐 땐 ‘발자욱’, ‘뱃노래’ 등을 작곡해 재능을 인정받았다. 1936년 숭실전문학교 졸업 후 일본 도쿄음악학교에서 공부하고 귀국, 1939년 만주 신경교향악단원으로 일하다가 해방이 되자 중앙교향악단을 만들어 활동했다. 평양예술문화협회에서도 주도적으로 활동하다 해산되면서 월남했다. 6·25전쟁 땐 육군 종군작가단원으로 뛰면서 수십 곡의 군가를 작곡했다. 휴전 뒤 서라벌예술대에 있으면서 국방부 정훈국 주최 연주회 때 ‘조국찬가’를, 정부수립경축음악회 땐 ‘승리의 길’을 작곡·지휘했다. 1963~1978년(정년퇴임) 경희대 음대 교수, 음대학장을 지냈고 개교 25주년 기념 칸타타로 ‘목련화’를 발표했다. 1979년부터는 신창악연구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주요 작품은 가곡 ‘봄이 오면’(1931년), ‘가고파’(1933년), ‘내 마음’(1940년), ‘수선화’(1941년), ‘목련화’(1974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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