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소리 들리는 쓸쓸한 바닷가에~"

박춘석 작사·작곡, 안다성 노래…1960년대 패티김도 취입
독립운동가로 국회부회장 지낸 사람 회고담 듣고 만들어

파도소리 들리는 쓸쓸한 바닷가에
나 홀로 외로이 추억을 더듬네
그대 내 곁을 떠나 멀리 있다 하여도
내 마음 속 깊이 떠나지 않는 꿈 서러워라

아 ~ 새소리만 바람타고 처량하게
들려오는 백사장이 고요해
파도소리 들리는 쓸쓸한 바닷가에
흘러간 옛날의 추억에 잠겨 나 홀로 있네

 
 
박춘석 작사·작곡, 안다성 노래의 ‘바닷가에서’는 전통가요 중 불후의 명곡으로 꼽힌다. 세미클래식풍의 4분의 4박자, 슬로리듬으로 애잔한 느낌이 든다. 노래 시작 전 전주 도입부에선 해변에 파도가 잔잔히 밀려오는 배경음이 돋보인다.
1958년 만들어진 이 노래는 파도소리가 들리는 쓸쓸한 바닷가에서 옛 사랑의 추억을 더듬는 모습을 서정적인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가요다. 노랫말처럼 사랑하는 연인을 멀리 보내고 해변에 혼자 서서 그 옛날의 로맨스를 떠올리는 장면이 그림처럼 다가온다.

 
 
이 노래는 박춘석이 1958년 8월말 독립운동가로 국회 부회장을 지낸 사람의 회고담을 듣고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여학생을 희롱하던 일본 남학생을 때려 혼을 낸 조선 남학생이 쫓기는 신세가 돼 어느 어촌마을의 영애란 아가씨 도움으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뒷산 동굴에서 두 달간 숨어 지내면서 무사했던 그 청년은 사랑이 싹터 결혼까지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닷가에서 물장난을 치며 놀고 있던 중 일본 경찰이 들여 닥쳐 청년은 도망치게 됐고, 중국으로 가 사업에 성공했으나 빨리 돌아오지 못했다. 도피자금은 바닷가에서 헤어질 때 영애 아가씨가 쥐어준 금가락지였다. 그 반지는 그녀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 물려준 것으로 사랑의 징표였다. 영애 아가씨는 일본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고, 그녀는 청년이 돌아오지 않자 동네 총각(유씨)과 결혼해 살다 세상을 떠났다. 그런 가운데 세월은 흘러 일제로부터 해방이 돼 청년은 그 옛날 바닷가를 찾아 영애 아가씨 아들과 함께 뒷산에 묻힌 산소를 찾으며 그 옛날을 떠올린다는 내용이다.       

이 노래는 특유의 미성으로 감미로운 노래를 주로 부른 안다성이 KBS-1TV ‘가요무대’ 등에서 가끔 부르기도 하지만 젊은 후배가수들도 리메이크해서 부른다. 2012년 3월 3일 오후 방송된 KBS-2TV ‘자유선언 토요일-불후의 명곡2 : 전설을 노래하다’에서 첫무대를 장식한 임태경이 ‘바닷가에서’를 클래식음악 분위기로 열창해 큰 박수를 받았다.
 

1963년 개봉된 영화 ‘유랑극장’에도 등장
일반인들 중 이 노래를 패티김의 대표곡으로 아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 노래를 맨 처음 취입한 사람은 안다성이다. 그 후 한참 지난 1960년대 후반 패티김이 이 노래를 불러 여름에 그의 노래 ‘하와이 연정’과 함께 방송전파를 자주 타면서 그렇게 알려졌다.
‘바닷가에서’는 1963년 개봉된 영화 ‘유랑극장’(강범구 감독)에도 등장한다. 박노식, 이경희, 엄앵란 등이 출연한 영화장면 중 안다성의 노래 ‘사랑이 메아리칠 때’와 함께 ‘바닷가에서’가 흘러나와 노래홍보에 보탬이 됐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건 같은 제목의 프랑스영화 ‘바닷가에서’가 있다는 점이다. 2002년 제55회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쥘리 로페스-퀴르발)을 받은 이 영화엔 자갈이 길게 깔린 작은 해변마을이 나온다. 겨울엔 사막 같은 마을이지만 여름엔 색색의 오두막집이 늘어선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휴가를 즐긴다. 그 해변 끄트머리에 예쁜 소녀 마리가 일하는 자갈공장이 있다. 식료품장사를 하는 그녀의 남자친구 폴은 늘 연금을 빼앗기는 어머니 로즈를 걱정하느라 마리의 꿈을 이해하지 못하고 서투른 사랑으로 그녀를 질식시킨다. 마리는 휴가 오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을 동경하는 내용이어서 안다성의 ‘바닷가에서’와는 작품의 맛과 흐름이 사뭇 다르다.

‘바닷가에서’를 만든 박춘석(1930년생, 본명 박의병, 작고)과 가수 안다성(84, 본명 안영길)은 신흥대학(현 경희대) 영문과 동문이자 같은 또래로 음악의 호흡을 맞췄다.
1931년 5월 25일생으로 청주중학교 6학년 졸업(1950년, 청주고 22회), 1951년 1102 야전공병단 군예대원으로 입대한 안다성은 신흥대 영문과 출신(1957년 3월 졸업)의 ‘학사가수 1호’다. 그는 대학을 다니던 1955년 서울중앙방송국(KBS 전신)의 전속가수공모에 합격해 1956년 입사, 가요계에 데뷔했다. 영문학도였던 그가 가수시험을 친 건 그 무렵 서울중앙방송국 전속악단장 손석우씨 권유에서였다. 손씨는 서울 종로의 한 카바레에서 흥에 겨워 우연히 무대에 올라 가수 현인의 히트곡 ‘서울야곡’을 부르는 안씨를 보게 돼 가수의 길을 권했다. 손 단장 권유로 가수가 된 안다성은 1956년 오아시스레코드를 통해 선배가수 송민도와 듀엣으로 부른 라디오드라마주제곡 ‘청실홍실’이 크게 히트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청실홍실’은 우리나라 드라마주제곡 1호로 인기가 대단했다. 안다성은 금세기 최고의 흑인여성 앨토이자 흑인영가의 1인자로 불리는 마리안 앤더슨(Marian Anderson)의 깊고 맑은 영혼의 노래를 사모해 ‘앤더슨’에서 따온 안다성安多星이란 예명을 지어 부르게 됐다. 특유의 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무드 있는 노래를 자주 부른 안다성은 ‘사랑이 메아리칠 때’ ‘바닷가에서’ ‘에레나가 된 순이’ 등으로 유명세를 탔다.
세상일이란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가수로서 한창 이름을 날릴 때 건강이 나빠진 것이다. 급기야 1967년 위궤양수술을 받았다. 불규칙한 가요계생활에 지나친 흡연이 문제였다. 하루에 담배를 두 갑씩 피웠던 그는 그때부터 금연했다.
그는 요즘도 무대에 선다. 봉사단체의 자선공연, 지방의 효도잔치, 노래자랑대회 등이 주 무대다. 대회에선 초청가수 겸 심사위원 역할을 맡는다. 지난해 5월엔 신곡도 냈다. 사단법인 한국음악발전소장인 가수 최백호가 작사·자곡한 ‘그때가 옛날’을 불러 노익장을 보였다. ‘그때가 옛날’은 조용하고 유장한 멜로디의 세미클래식풍이다.
 

노래 만든 박춘석, 2700여곡 작곡
‘바닷가에서’를 만든 박춘석은 가요계 거목으로 통한다. ‘비 내리는 호남선’ 등 숱한 히트곡들을 만들며 1950~1980년대 가요계를 이끈 그는 오아시스레코드사·지구레코드사 전속작곡가, 한국음악저작권협회장, 거성레코드사 사장을 거쳤다. 국내 대중가요사상 개인 최다인 2700여곡을 작곡했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도 1152곡이 등록돼 개인이름으론 가장 많다.

서울서 태어나 4살 때부터 풍금을 자유자재로 치며 ‘신동’소리를 들었던 그는 봉래소학교, 경기중학교를 거치는 동안 피아노, 아코디언을 홀로 익혔다. 1949년 피아노전공으로 서울대 기악과에 입학, 1년간 다니다 이듬해 신흥대 영문과에 편입해 졸업했다. 경기중 4학년(고교 1년) 때 길옥윤, 베니김 등의 권유로 서울 명동 황금클럽 무대에 오르면서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알렸다. 1954년 백일희가 부른 ‘황혼의 엘레지’로 작곡가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아리랑 목동’(박단마) ‘비 내리는 호남선’(손인호) ‘삼팔선의 봄’(최갑석) ‘사랑의 맹세’(패티김) ‘바닷가에서’(안다성) ‘밀짚모자 목장아가씨’(박재란) ‘호반에서 만난 사람’(최양숙) 등을 발표하며 인기작곡가로 떠올랐다.

고인의 이름 뒤엔 늘 ‘사단’이란 말이 따라다녔다. 1960~70년대 패티김, 이미자, 남진, 나훈아, 문주란, 정훈희, 하춘화 등이 ‘박춘석 사단’ 멤버였다. 특히 1964년부터 이미자와 콤비를 이루며 전성기를 누렸다.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빠’ ‘흑산도 아가씨’ 등 500여곡을 같이 했다. 이미자에게 ‘엘레지의 여왕’이란 별칭을 붙여준 이도 박씨다. 그의 히트곡 4분의 1을 이미자가 불렀고, 이미자의 히트곡 3분의 1을 박씨가 만들었다. 그러나 박씨는 1994년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움직이지도, 말도 제대로 못했다. 뇌졸중으로 16년간 투병했던 그는 2010년 3월 14일 80세로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음악과 결혼했다”며 홀몸으로 살아온 그를 돌보는 일은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인 동생 금석(81)씨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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