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여옥(患難如玉) 1

이 글은 지난해 한국해양재단이 실시한 ‘제8회 해양문학상’ 수상작 중 수필부문 우수상을 수여받은 작품이며, 작가 김종찬씨는 1970년대 해군중위 전역이후 외항선에서 기관장 등 업무로 40년간 승선경력을 가졌다. 그는 2004년 부산시(부산문인협회) 한국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이후 한국해양문학가협회 부회장(2005년)을 역임했으며, 2012년에도 부산일보 해양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김종찬씨의 2014년 해양문학 수상작 ‘환난여옥’의 전문을 2회에 걸쳐 연재한다. 그가 직접 경험했던 승선생활이 사실적으로 기록돼 있는데다가 안전과 직접 연관이 있는 선박의 엔진부문 점검과 고장, 수리를 맡고 있는 기관사의 직무와 애로 등이 잘 기록돼 있어 일독을 권할만 하다.


김종찬
김종찬
그날 부산항 부관페리 부두에는 을씨년스럽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후 5시에 출항한다는 페리는 6시가 넘어서야 뱃줄을 던지며 부두에서 떨어졌다. 환송 나온 아내와 아이들은 그만 돌아가라고 해도 긴 이별이 아쉬워 한 시간 동안이나 비 내리는 부두에서 떨고 서 있었다. 페리는 이튿날 아침 7시에 시모노세끼에 도착했다. 시모노세끼에서 신간센 고다마こだま를 타고 줄곧 세도나이까이瀨戶內海를 따라서 4시간을 달렸다. 도꾸야마-히로시마-미하라-후꾸야마-오까야마-아이오이-아께시-고베-오사카. 목적지 오사카에 도착하니 오후 2시였다. 승선 수속을 마치고 앞으로 일 년 동안 고생할 탈리아Thalia호에 승선하니 저녁때가 다 되었다.

탈리아 호는 일본 신화해운 소속의 1만 톤급 잡화선으로 부정기 원양 화물선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탈리아 호는 선령 20년이 넘은 배로 옛날에 타고 있던 필리핀 선원들이 얼굴 화장만 열심히 했지 기관 정비는 소홀히 해서 속병이 들대로 든 배였다. 그렇게 병치레가 잦은 배인 줄 진작 알았더라면 나는 결코 탈리아 호에 승선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야 말하지만 나는 13개월 동안 탈리아 호를 타면서 하루도 맘 편한 날이 없었다.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는지 전임 기관장은 신경쇠약에 걸려 중도 하선했다. 교대를 하는데도 제정신이 없어 업무인계서도 하나 만들어놓지 않았다. 

“앞으로 이 배에 있는 동안 고생이 좀 많을 겁니다.”
그는 시르죽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업무인계는 이 한마디뿐이었다.  
오사카 항을 출항하자 바로 그 이튿날 새벽에 주기관이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지르며 꺼져버렸다. 각오는 했지만 시련은 너무 일찍 다가왔다.  
- 아직 가방도 다 풀지 않았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가슴이 두근거리며 기관실에 들어서니 배기가스가 가득해서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핸드레일을 붙잡고 더듬더듬 계단을 밟고 내려가는 동안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터보차저 고장이었다. 너무 오래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아직도 뜨거운 터보차저 카버를 뜯었다. 카버를 열고 보니 배기가스 출구 가이드의 고정 볼트 홀 네 개가 몽땅 부러져 가이드가 케이스에서 탈락되어 있었다. 하루아침에 이런 사고가 난 것은 아니었다. 벌써 오래 전부터 서서히 균열이 진행되다가 내가 승선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나자빠지며 신고식을 시키는 것이었다. 책임자가 바뀌면 기계도 사람 신고식을 시킨다는 말이 있다.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닌 듯했다. 

다행히 터빈 날개는 손상이 없었다. 좁은 해협이나 악천후 속에서 이런 대형사고가 났으면 어쩔 뻔했나 싶었다. 이 터보차저는 종종 이런 사고가 나는 모양이었다. 가이드에는 예비의 고정 볼트 홀 네 개가 있어 위치만 바꾸면 다시 부착할 수 있었다. 4시간 동안에 응급수리를 마치고 다시 기관을 시동했다. 항해를 다시 시작한 후 선장이 위로삼아 말했다.

“유이씨UEC 엔진 많이 타 봤습니까? 이 배 주기 아주 골치 아픕니다.”
선장은 내가 지레 겁먹고 이런 배는 못 타겠다고 오자마자 보따리 싸지나 않을까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었다. UEC 엔진은 1기통에 배기변이 3개나 되고 배기변 소손 사고가 자주 발생했다. 그리고 엔진 부하가 조금만 변동해도 터보차저가 서어징Surging을 했다. 탈리아 호 주기는 UEC 8기통으로 출력 8960마력짜리 엔진이었다. 당시 기관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엔진은 시계로 치면 롤렉스라고 하는 Sulzer 엔진이었다.
사고는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주기관은 가스 블로 바이(Gas Blow by) 현상이 심해 랜턴 스페이스(Lantern Space)에서 자주 불이 났다. 응급조치로 실린더유를 증가했지만 이미 실린더 라이너 마모도가 한계치를 넘어 큰 효과가 없었다. 게다가 2등 기관사가 발전기 정비작업을 하다가 손가락을 크게 다쳤다. 

센다이仙台항에 입항하니 공무 감독인 노시다野下씨가 터보차저 메이커 수리 기사들을 데리고 왔다. 노시다 감독은 시모노세끼 수대(下關 水産大學) 출신이었다. 시모노세끼 수대는 태평양전쟁 패전 후에 본국으로 돌아간 부산 수산대학 (1945년 당시는 수산전문학교) 일본인 교수들이 모여 새로 설립한 대학이었다. 그래서 노시다 씨는 나와 대학 동문이나 마찬가지였다. 노시다 씨는 나이도 나와 동갑이었다. 그래서 남달리 반가워하며 위로와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터보차저 메이커 수리 기사들은 선원들이 응급 수리한 가스 출구 가이드 홀에 다시는 균열이 발생하지 않도록 응력 분산용 받침판을 만들어 완벽하게 보강을 했다. 집게손가락이 으깨어진 2등기관사는 그 상태로 선상근무가 불가해 센다이에서 후임자 없이 귀국하고 말았다. 나는 태평양을 횡단하는 동안 기관실 당직까지 서야 했다. 화물 양륙 항은 미국 오대호 안에 있는 여러 항구들이었다. 말썽 많은 배를 타자마자 입항절차가 까다롭기로 이름난 미국 오대호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출항한 지 며칠도 되지 않아 조리장이 근심어린 표정으로 내 방에 찾아왔다. 조리장은 이번에 나와 함께 새로 승선한 사람이었다.
“기관장님,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왜?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기분이 이상해 부식을 점검해보니 고추장 된장 통 밑바닥에 돌을 채워 놓고 그 위에 골판지를 덮어 고추장 된장은 살짝 발라만 놓았지 뭡니까?”

그 소리를 듣고 나니 나도 어처구니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전임 조리장이 하선하기 전에 부식관리위원들이 재고조사를 했는데 쇼트가 많이 나서 1.500달러를 물고 갔다는 말을 들었다. 주부식비 관리는 선장 소관이라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조리장은 하도 기가 막혀 승선 동기라고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선장에게 이야기하면 왜 인수할 때 확인하지 못했느냐고 꾸중을 들을까 봐. 나는 그때까지 조리장이 인수인계를 할 때 고추장 된장 김치 통 밑바닥까지 확인해본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같은 회사 선원으로서 그 소행이 참으로 가증스러웠다. 사람이 죄를 저지르고 궁지에 몰리면 이렇듯 못하는 짓이 없구나 싶었다.  

“조리장, 선장한테 사실대로 보고하세요. 그리고 부식관리위원들한테도 보여 주고. 설마 인수 잘못 받았다고 조리장한테 책임지라고 하기야 하겠소.”
사실 선원들은 부식비 문제로 선장을 더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선하는 선원들이 주동이 되어 주부식 재고조사를 했던 것이다. 선장은 틈만 나면 골프 연습을 하면서 원하지도 않는 국장한테도 선식업자에게 부탁하여 구닥다리 골프채를 안겨주었다고 했다. 주부식비에 대해 군소리 하지 말라는 입막음이라고 선원들 사이에 뒷공론이 무성했다. 조리장이 내 방에 먼저 찾아왔던 것은 그런 선내 분위기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또 기관원이 포터블 그라인더에 팔목을 다쳤다. 첫 항차부터 무엇 하나 기분 좋은 일이 없었다. 주기 랜턴스페이스에서는 사흘이 멀다 하고 불이 났다. 20여 일의 태평양 횡단 항해는 정신없이 바쁘고 피곤하고 우울하고 암담한 나날이었다. 갑판 기기 유압 파이프는 기름이 질질 새고, 2번 에프오 탱크는 히팅 코일이 누설하여 해수 온도가 낮으면 기름을 사용할 수 없고, 빌지 펌프는 로터가 너무 닳아서 배출도 못하고 헐떡거리기만 했다.  
딱 한 가지 기분 좋은 일은, 탈리아 호 문고실文庫室에는 읽을 만한 좋은 책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너무 바빠서 책 읽을 시간도 없었다.

파나마 발보아 항에 도착했다. 새벽 2시에 파일럿 승선 예정이라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잠결에 전화벨이 울렸다. 밤 11시였다. 기관실에 들어서니 타는 냄새가 났다. 공기압축기 냉각수 펌프 구동 벨트가 끊어졌던 것이다. 공기 감암변이 누설하는 바람에 공기압축기가 멈추지 않고 장시간 꺼지지 않아 벨트가 가열되어 절단되었던 것이다. 당직자의 부주의였다. 장기 항해를 마치고 항구에 닻을 내리자 후덥지근한 기관실을 비우고 시원한 갑판에 나가 야경을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무사히 파나마 운하를 통과했다. 짙푸른 카리브 해를 거쳐서 자메이카, 쿠바, 바하마 제도를 지났다. 아침에 서배너 외항에 도착하여 닻을 내렸다가 오후에 접안을 했다. 기관사용 종료 (Fin/Eng) 신호가 내려오기도 전에 갑판기기 유압파이프가 터졌다는 연락이 왔다. 바쁘게 달려가니 유압유가 갑판으로 흘러 배수구로 코피처럼 한 가닥 타 내리는 참이었다. 부두에는 코스트 가드 요원이 배가 접안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행히 선원들이 바쁘게 닦는 것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배너에서 작업을 마치고 출항하여 델라웨어 만에서 파일럿이 승선했다. 델라웨어 강을 타고 9시간 거슬러 올라가 밤중에 강심에 닻을 내렸다. 파일럿이 타고 있는 동안 주기 랜턴 스페이스에서 불이 날까 봐 나는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이튿날 새벽에 필라델피아 항 부두에 접안을 했다. 기다리던 2등 기관사가 승선하고 빌지 펌프 부속품도 받았다.
 

다음 항구는 캐나다 몬트리올이었다. 캐벗 해협을 통과하여 세인트로렌스 만으로 들어서자 안개가 자욱했다. 시정거리가 너무 짧아 기적을 계속 울리며 항진을 했다. 세인트로렌스 리버 파일럿이 승선했다. 만 하루 동안 강도 아니고 바다도 아닌 넓은 수로를 지나자 점점 폭이 좁아지며 강으로 변했다. 강기슭에는 초록의 언덕 위에 버섯처럼 여기저기 엎드린 집들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반쯤 이지러진 달이 마스트 위에 걸려 있었다. 퀘벡 시가지의 빌딩 숲을 지나며 또 파일럿이 교대했다. 오색불빛이 현란하게 반짝이는 도심을 벗어나 끝없이 뻗어 있는 세인트로렌스 강을 따라 올라갔다. 새벽 4시에 또 파일럿이 교대했다.
미국과 캐나다 사이에 국경을 이루는 오대호. Ontario, Erie, Huron, Michigan, Superior. 겨울철 오대호의 얼음 두께는 1월에 50cm∼1m, 2월에 1m∼2m, 3월에는 2m∼ 3m까지 불어난다고 한다. 11월 말까지 빠져나오지 못하면 이듬해 4월, 해동이 될 때까지 꼼짝없이 얼음 속에 붙잡혀 자연의 포로가 된다고 한다.
몬트리올 항에 접안했다. 저만큼 남북을 잇는 오버브리지 위로 분주히 차들이 오가고 부두 옆 잘 손질된 잔디는 빗물에 촉촉하게 젖어 더욱 푸르렀다. 오대호에 진입하는 갑문(Locks) 통과 검사와 편의취적국인 파나마 검사관의 검사를 받았다. 빨리 이 오대호를 벗어나야 한 시름 놓이겠는데 갈 길은 아득하고 걱정은 태산 같았다.  

온타리오 호는 6개의 갑문을 통과하여 해발 246피트, 이리 호는 8개의 갑문을 통과하여 572피트, 휴런 호는 미시간 호와 같은 수위로 578피트. 제일 안쪽에 있는 슈퍼리어 호는 602피트(184미터)나 된다. 배가 슈퍼리어 호까지 들어가자면 해발 184미터나 되는 폭포 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말이다.   
맨 처음 들어선 온타리오 호는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마치 인공으로 만든 호수 위에 분재盆栽를 놓아둔 것처럼 깜찍하고도 올망졸망한 섬들. 앞마당만한 섬 가운데 텐트를 치고 함께 누워 있는 젊은 연인들. 미친 듯이 달리는 스피드보트…….

갑문을 통과하는 동안 대기 부두(Waiting pier)에서 잠시 기다렸다. 세계 각국 선원들이 지나간 기념으로 흔적을 남겨놓았다. 페인트 붓으로.
『고국산천 그리워라 가고 싶은 내 고향. 영신 상운 S. Pearl호 박진무』
『 1984년 10월. P. Eldorado호 김무성이 다녀가다.』
일본, 중국, 필리핀, 그리스 선원들의 낙서도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온타리오 호에서 이리 호로 들어가는 8개의 갑문. 갑문 옆에는 높은 전망대를 만들어 동네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서서 지나가는 배들을 구경했다. 손에 잡힐 듯이 가까운 강둑에는 온갖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나비가 나풀거리고 있었다. 갑판에 대기한 선원들은 핫팬티를 입고 잔디 언덕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며 지나가는 배를 구경하는 오동통한 아가씨의 흰 살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갑문이 닫히면 물은 순식간에 들어차고 선수, 선미의 줄잡이들은 바쁘게 와이어-로프를 감아 당겨야 했다. 저녁 6시에 마지막 갑문인 8번 Lock을 빠져 나왔다.

이리 호에 들어서자 호수는 망망대해로 변했다. 클리블랜드를 거쳐 디트로이트에 도착했다. 소낙비가 쏟아져서 갑판기기 아래 떨어진 유압유가 씻겨 내려가 수면에 무지갯빛 유막이 비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디트로이트는 흑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살벌한 동네라고 선원들은 아무도 상륙하지 않았다.
디트로이트 강을 빠져나와 작은 클래어 호를 지나서 휴런 호에 들어섰다. 휴런 호와 미시간 호는 같은 수위水位였다. 미시간 호 맨 구석에 있는 시카고에 입항했다.
시카고 항에서 하역 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덩치 큰 흑인 한 사람이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으로 선장을 찾았다. 그는 자신이 시카고 해양대학 교수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실습생 30명을 데리고 와서 견학을 했으면 좋겠는데 허락해 주겠느냐고 공손한 태도로 물었다. 선장은 그래도 좋다고, 아무런 의심 없이 말했다.

선장이 갑판에 나가 하역작업 상태를 돌아보는 사이에 흑인 교수는 혼자 배를 둘러보는 척했다. 아무도 그 흑인 교수가 현문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잠시 후에 선장이 방으로 돌아오니 방문을 잠그고 나갔는데도 누군가 들어왔던 낌새가 있었다. 아차! 싶어 확인해보니 캐비닛 속에 보관하고 있는 손금고가 통째로 없어졌다. 외출복 주머니 속에 든 돈도 털어갔다. 온 배를 샅샅이 찾아보니 빈 손금고만 연돌 갑판 구석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 흑인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무도 몰랐다. 현문 당직자는 잠시도 자리를 비우지 않았는데 그가 하선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없어진 돈은 모두 8백 달러 정도였다.
현문 당직자 테이블 옆에는 선장의 지시로 『 강도 조심! 』 이란 팻말이 붙어 있었다.
 

시카고 근처에 있는 케노사(Kenosha) 항은 한적한 항구였다. 해변 공원에는 가족끼리 음식을 장만하여 소풍을 나와서 오순도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별 모양의 사탕 주머니를 만들어 막대 끝에 매달고 아이들에게 맴돌이를 시킨 뒤 방망이로 사탕주머니를 치는 놀이를 했다. 안타를 치면 보너스로 사탕이 후두둑 쏟아졌다. 맑은 물속에 들어가 물놀이도 했다. 우리 선원들도 미시간 호에 뛰어들어 물장구를 치며 잠시 동안 시름을 잊고 놀았다. 한국 교포 한 사람을 만났다. 잠시 인사를 나눈 뒤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혹시 선원들 가운데 미국에 이민 오고 싶은 노총각 없습니까? 이민 온 지 8개월 밖에 안 된 여동생이 있는데 나이는 서른둘입니다. 빨리 시집을 보내야 하는데 영어도 잘 못하고…… 여기는 한국 신랑감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선을 한번 보고 장가만 오겠다면 내가 일자리는 얼마든지 구해 드리겠습니다.”
누군가가 소리죽여 엉두덜거렸다.
“미국이 무슨 천당인 줄 아나, 선원들을 뭘로 보고…….”

케노사 다음으로 기항한 항구는 밀워키(Milwaukee) 그린 베이(Green bay)였다. 그린 베이에서 하역을 마친 탈리아 호는 이제 뱃머리를 돌려 오대호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미시간, 휴런을 지나고 다시 갑문을 통과하여 온타리오 호에 있는 해밀턴(Hamilton)항에 입항했다. 해밀턴 항에서 나이아가라 폭포까지는 약 60Km로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였다. 정박 시간이 짧았지만 당직자만 배에 남고 나이아가라 폭포 관광을 갔다.
평일인데도 많은 관광객들이 붐비고 있었다. 미국 사람들도 차림새를 보면 시골뜨기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폭포는 강심에 섬이 있어 두 부분으로 갈라졌다. 작은 폭포는 벼랑 옆에서 떨어지고 큰 폭포는 반원을 그리며 부챗살처럼 넓게 펼쳐져서 낙하했다. 실로 장관이었다. 벼랑 아래로 떨어지면서 일부는 희뿌연 물안개가 되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가 다시 물방울이 되어 떨어졌다. 폭포 밑 계곡에서는 관람선이 쏟아지는 물줄기 가까이 접근하며 잘게 부서지는 낙하수(落下水) 세례를 즐겼다. 출항 시간에 쫓겨 두어 시간 동안 사진만 몇 장 찍고 돌아왔다. 잠시 동안이지만 구경할 수 있었던 것만 해도 행운이었다.
다시 몬트리올 항에 접안했다. 걱정스럽던 갑문을 무사히 빠져나오니 마치 감방에서 해방된 기분이었다. 갑문을 빠져나오는 도중에 한국 선원들이 승선한 배 한 척이 기관 고장으로 대기 부두(Waiting Pier)에 묶여 있었다. 

몬트리올 항에서 윤활유도 받고 새 화물도 실었다.
몬트리올 항을 출항해서 세인트로렌스 강을 타고 내려와 마지막 베이 파일럿(Bay Pilot)이 내렸다. 다시 긴 항해가 시작되었다.

과테말라 산토 토마스 항에 입항했다. 하필이면 더운 지방에서 에어컨이 고장이 났다. 냉매가 누설하는 데 어디서 새는지 찾지 못했다. 냉매누설 탐지기와 비눗물로 축봉(Shaft seal)장치부터 의심스러운 곳을 몇 번이나 시험을 했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실내 온도는 35도를 육박하는데 습도까지 높아 찜통이나 마찬가지였다. 새벽에 또 생각지도 않았던 사고가 났다. 세워 둔 1번 윈치 붐(Boom)이 갑자기 떨어지면서 유압모터가 박살이 나버렸다. 사고는 났지만 붐은 손상이 없고 인명 사고가 없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갑판기기지만 부품 청구 및 보수 정비는 기관부가 해야 했다. 이래저래 죽을 맛이었다.
산토 토마스 항을 출항하여 다시 파나마 운하를 통과했다.

콜롬비아 부에나벤투라 항. 날씨는 무더운데 에어컨이 고장 나니 어디 있을 곳이 없었다. 선원들의 불평이 무더위만큼 내 마음을 압박했다. 특히 독일인 슈퍼 카고(Super Cargo)의 불평은 무더위보다 더 심했다. 도둑 때문에 잠시도 문을 열어놓을 수도 없었다. 배에도 권총을 휴대한 경비 경찰이 지키고 있었다. 나누어주는 말라리아 예방약을 먹었더니 어지럽고 영 맥이 없었다. 날씨는 더운데 에어컨 고장으로 선원들의 눈총까지 받으니 입술에 물집이 생겨 몹시 근질근질했다. 
하역작업 도중에 화물 도둑과 경비 경찰들 사이에 한바탕 활극이 벌어졌다.

작은 거룻배 한 척이 살금살금 노를 저어 다가와 건현乾舷 아래 붙었다. 도둑 두 명은 이미 배에 올라와 있었다. 갑판에서 기다리고 있던 녀석이 재빠르게 화물 상자를 거룻배에 내려 주었다. 욕심을 부려 두 상자, 세 상자 내려줄 때 경비 경찰의 눈에 띄고 말았다. 경찰이 권총을 빼 들고 달려오며 꼼짝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거룻배는 재빠르게 노를 저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경찰은 도망가는 거룻배를 향해 거침없이 권총을 쏘았다. 위험을 느낀 두 명은 거룻배를 버려두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근처에 계류해 있던 터그보트 밑으로 숨었다. 총소리를 듣고 부근에 있던 경찰들이 다 몰려왔다. 터그보트 밑을 겨냥해 여러 발의 권총을 쏘았다. 부두에는 삽시간에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터그보트 밑에 숨었던 두 명이 견디다 못해 손을 들고 나왔다. 한 명은 팔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두 명이 엉금엉금 기어서 안벽 위로 올라오자마자 경찰들이 사정없이 몽둥이질을 하며 어디론가 질질 끌고 갔다. 화물을 던져주던 녀석도 배 위에서 바로 잡혀서 함께 끌려갔다. 총기를 휴대한 무장 경찰이 지키고 있는 데도 화물을 훔치려고 목숨을 걸고 덤비다 붙잡혀 피를 흘리고 끌려가는 도둑들이 측은하기만 했다. 콜롬비아는 강도들이 많아 위험한 나라지만 바람둥이 선원들에게는 놀기 좋은 나라였다.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많다고 했다. 중남미의 여인들은 가난한 동남아시아 여성처럼 돈타령도 심하게 하지 않고 아주 정열적이었다. 열흘 동안 부에나벤투라에 정박하면서 선원들은 너나없이 돈푼깨나 날린 눈치였다. 몇몇 선원들은 써버린 돈이 아까워 고장 난 에어컨을 원망했다. 잠잘 곳이 없어 외박했다고.

바로 근처에 있는 에콰도르 과야킬Guayaquil 항에 입항했다. 박살난 윈치 유압모터를 받았다. 다행히 하역작업에 지장 없이 수리를 마쳤다. 시운전을 하고 나니 새벽 2시였다. 초저녁부터 숙녀들이 하나 둘 우아한 미소를 머금고 배에 올라왔다. 모두 부둣가를 돌아다니며 선원들을 상대하는 매춘부들이었다. 작업이 끝나자마자 기관부 부원들도 숙녀들이 기다리고 있는 부원식당으로 몰려갔다.
아침에 선장과 독일인 슈퍼 카고가 식당에 나타나지 않았다. 밤새 같이 놀았던 불여우들이 술잔 속에 몽환제夢幻劑를 섞었던 것이다. 두 사람 다 지갑을 몽탕 털렸다고 했다. 
에콰도르는 유명한 바나나 수출국이다. 바나나 장사꾼이 몰려왔다. 바나나 한 상자에 담배 3갑을 달라고 했다. 거리에 나가면 한 송이에 2페소. 1달러는 100페소였다.
다음 항구는 페루 카야오Callao 마타라니Matarani 아리카Arica 순이었다.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차례차례 거쳤다. 카야오에서도 부두의 경비는 삼엄했다. 허리에 권총을 찬 군인이 배에 출입하는 하역인부들의 신분을 일일이 확인했다. 아리카에서 한 항차가 끝났다.

칠레 안토파가스타Antofagasta에 입항했다. 다시 용선주가 바뀐 것이다. 온 하이어(On hire) 벙커 서베이어를 하고 동광석銅鑛石 13,000톤을 적재했다. 온 배가 새까맣게 광석 먼지를 뒤집어썼다. 짐을 싣는 동안 먼지 때문에 기관실 통풍도 정지했다.
저녁에 상륙을 해서 오랜만에 집에 전화를 했다. 거리의 목로주점에서 안나 바바라(Anna Babara)라는 거리의 댄서를 만났다. 포도주 두 병을 마시며 그녀의 슬픈 이야기를 들었다. 
안나 바바라는 눈이 큰 미인으로 아버지는 칠레인이고 어머니는 이태리 계였다. 정변政變이 일어나기 전에는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그런데 아버지도 남편도 정변에 연류되어 총살을 당했다. 그래서 혼자 이 도시로 피신해 왔다.
칠레는 여성 학대가 아주 심한 나라다. 남편의 폭력으로 죽은 불쌍한 아내들의 신발을 모아서 거리에 늘어놓고 이름을 써 붙여 사진을 찍어 전시하며 희생자의 억울한 영혼을 위로하는 행사를 열기도 했다. 나는 헤어지면서 주머니에 남은 몇 푼 안 되는 돈을 몽땅 털어 안나 바바라에게 주었다.
 

이튿날 아침 탈리아 호는 안토파가스타 항을 출항했다. 양륙 항은 캐나다 서북부에 있는 몽 루이스(Mont Luis)였다. 출항 하자마자 배는 무거운 동광석을 실은 데다 옆바람을 받아 심하게 롤링을 했다. 칠레 해안을 따라 길게 뻗어 있는 메마른 산맥은 늙은 인디언 노파의 주름살같이 황량하기만 했다. 그 해안에서 치일레! 치일레! 하고 운다는 ‘트리레스’라는 물새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이른 아침에 발보아에 도착해서 다시 파나마 운하를 통과했다. 몽 루이스 항은 캐나다 세인트로렌스 강 입구에 새로 신설된 항구라 아직 포트 엔트리(Port Entry)에도 등재登載되지 않았다. 북대서양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기온은 쌀쌀해지고 파도는 거칠었다.  
정오에 몽 루이스 항에 도착했다. 배 한 척밖에 접안할 수 없는 아주 작은 시골 항구였다. 항구를 에워싼 배후의 산들은 노랗고 빨갛게 단풍진 나무들로 한 폭의 멋진 풍경화를 그렸다. 날씨만 좋다면 오래 머물고 싶은 항구였다. 그런데 저기압이 지나가며 시속 50노트의 강풍이 주변을 뒤흔들었다. 오목한 포구라서 피항避航은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운전을 못했던 에어컨은 새로 받은 샤프트 씰(Shaft seal)을 교환하자 정상 상태로 운전할 수 있었다. 화물을 하역하는 동안 뒷산으로 단풍 구경을 갔다. 사춘기 소녀처럼 예쁜 단풍잎을 한 움큼 땄다. 내려오는 길에 밭에서 감자를 캐는 부부를 만났다. 인사를 건넸다가 싱싱한 감자를 한 소쿠리나 얻었다.
탈리아 호는 몽 루이스에서 빈 배로 출항했다. 플로리다 해협을 돌아 멕시코 만을 통과했다. 미시시피 강을 따라 올라가 번사이드Burnside 부두에 접안하여 짐을 실었다. 번사이드는 가난한 흑인 동네라 불량배가 많았다. 흑인 불량배들은 칼을 감추고 덤불 속에 숨어 있다가 상륙했다가 돌아오는 선원들의 주머니를 털었다. 청바지까지 벗겨가는 악질도 있었다. 곡물 부두의 비둘기 떼들도 흑인 불량배만큼 성질이 고약했다. 사시장철 먹을 것이 풍부한 곡물부두는 비둘기들의 천국이었다. 먹을 것이 많으니까 적도 많았다. 까마귀와 갈매기와 참새 떼들이었다. 그래서 곡물부두 비둘기는 입방아만 찧고 놀고먹으면서 성질은 아주 포악해졌다. 외적이 나타나면 외적들과 싸우고 외적이 없으면 자기들끼리 사랑싸움을 했다.
뉴올리언스 번사이드에서 미시시피 강 하구까지는 약 170마일이다. 강을 타고 오르내리는데 15∼20시간이 걸린다. 파일럿이 몇 번이나 교대를 한다. 뉴올리언스에 입항할 때마다 나는 마크 트웨인과 <미시시피 강의 생활>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 같은 작품들이 생각났다. 지금도 미시시피 강에는 커다란 물레방아 바퀴를 돌려서 배를 움직이는 관광선이 있다.
 

탈리아 호는 미시시피 강을 빠져나와 멕시코 만으로 들어섰다. 바다에는 여기저기 수십개의 유정油井이 불길을 토하고 있었다. 화물은 옥수수였고 양륙揚陸항은 인도였지만 항구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항로는 멕시코 만-플로리다 해협-버뮤다 삼각해역-대서양-적도-희망봉-인도양-인도. 40여 일의 장기 항해였다. 인도에 도착하면 외항에서 얼마나 대기를 해야 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래서 뉴올리언스에서 기름, 청수, 주·부식을 충분히 실었다.
미시시피 강을 빠져 나온 지도 열흘이 지났다. 갑자기 주기 윤활유 압력이 떨어졌다. 기관을 정지하고 점검을 해보니 8번 실린더에서 피스톤 쿨링 오일이 새고 있었다. 피스톤 크라운과 스커트 사이의 오-링이 노화되었던 것이다. 잠시도 지체할 수 없는 사고였다. 새벽 1시부터 피스톤 오버홀을 시작했다. 피스톤 크라운도 교환을 했다. 커피 타임도 없이 꼬박 12 시간이 걸렸지만 피로한 줄도 몰랐다. 수리 작업을 마치고 나니 기분이 홀가분했다. 

희망봉에 가까워지니 바다가 점점 거칠어졌다. 꿈속에서 요괴에게 홀려 미로를 헤매고 있는데 끼익! 끼익! 하고 주기 터보차저 서징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돼지 멱따는 소리처럼 듣기 싫은 소리였다. 후다닥 기관실에 내려가니 주기 랜턴 스페이스에 불이 났다. 3번에서 발생하여 4번까지 번졌다. 장기 항해를 하는 동안 연소 잔유물이 많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한 시간 동안 숨 막히도록 답답하고 뜨거운 랜턴 스페이스 안에 들어가 기름 찌꺼기를 소제하고 다시 시동했다. 소제를 하던 중에 나이 많은 오일러가 다리에 쥐가 나서 비명을 질렀다. 급히 시원한 컨트롤 룸을 이송해 차가운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전신을 주물러 가까스로 회복했다.     
파도는 흰 물거품을 내뿜으며 어깨동무를 하고 와르르 밀려와서 앞길을 가로막았다. 물마루가 선수루를 후려치면 선체는 쿵덕쿵덕 디딜방아를 찧었다. 파도가 후려칠 때마다 선체는 전신을 바르르 떨며 경련을 일으켰다. 선수루를 뛰어넘은 백파는 하늘 높이 치솟으며 무수한 물방울이 되어 브리지 프런트 글라스까지 날려 왔다.

탈리아 호는 밤중에 ‘Cape of Good Hope’를 통과했다. 희망봉을 통과하면서 길게 기적을 울렸다. 인도양에 들어섰다. 한낮의 열기는 후끈거리는데 바다는 빙판같이 잔잔했다. 사뿐히 내려서서 걷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로. 선수가 푸르른 바다를 가르며 새하얀 안개꽃을 피울 때마다 물속에서 놀다 깜짝 놀란 날치 떼가 수면 위로 떠올라 방아깨비처럼 하얀 날개를 파닥이며 죽어라고 도망을 쳤다. 멸치처럼 작은 놈부터 정어리만큼 큰 놈도 있었다. 지겨운 항해도 며칠 남지 않았다. 양륙 항구는 인도 남쪽의 투티코린Tuticorin으로 정해졌다.
 
밤중에 투티코린 외항에 닻을 내렸다. 42일간의 긴 항해였다. 투묘지에서 10일 정도 대기했다가 2천 톤을 하역한 뒤에 부두에 접안한다고 했다. 물도 아껴야 하고 싱가포르까지 갈 기름도 충분하지 못했다. 보일러는 밥할 때만 증기를 공급했다. 보트를 타고 잡상인들이 몰려들었다. 여러 가지 보석들을 늘어놓고 좌판을 벌였다. 사파이어, 블루사파이어, 타이거아이, 캐츠아이, 에메랄드, 알렉산드리아, 스타루비……. 원석原石은 맞지만 한국 보석상에 가져가면  “아저씨 배 탑니까? 어디서 이런 못난이를 주워 왔습니까? 이런 물건은 가공비가 아까워서 취급 안 합니다”하고 핀잔을 주는 조악粗惡品들 뿐이었다.

투티코린에는 물고기가 아주 많았다. 아침마다 고기를 잡아 돌아가는 돛단배를 탄 어부들이 팔뚝만한 학꽁치, 도미, 가오리, 오징어 같은 물고기를 들어 보이며 사라고 야단이었다. 선원들은 저녁마다 낚시질로 지루한 줄을 몰랐다. 고기는 잘 잡혔다. 선미 갑판이 건어장乾魚場이 되었다. 바다 위에서 또 한 해가 지났다. 섣달 그믐날 밤에는 시효가 지난 신호탄으로 불꽃놀이를 하며 망년회를 했다.
하역작업이 시작되었다. 작업을 시작하자마자 윈치 유압 파이프가 세 군데나 터졌다. 산소, 아세틸렌이 불충분해 또 걱정이었다.

하역 인부들은 무려 2백명이나 올라왔다. 하루 목표가 2백 톤이라고 했다. 모두 맨발에  사롱Sarong을 두르고 티셔츠, 그리고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차림이었다. 선미 갑판에 주방廚房을 차렸다. 갑판에 모래를 깔고 삼발이를 세워 놓고 드럼통 같은 솥을 세 개 걸었다. 그 솥에 밥을 하고 국을 끓이고 고기를 삶았다. 밥은 죽 끓이듯 물을 많이 붓고 주걱으로 저어가며 끓였다. 쌀이 퍼졌다 싶으면 받침을 한 삿자리 위에다 퍼 놓고 물이 다 빠질 때까지 다른 삿자리로 덮어 놓았다. 풀뿌리, 백가지, 풋고추, 감자, 바나나, 토마토, 양파, 카레 따위를 넣고 끓인 국을 밥 위에 부어주었다. 사위어가는 불 위에 전어, 정어리 같은 작은 생선을 구워 탱자만한 레몬 한 조각과 함께 식반에 담아주기도 했다. 땔감은 잘게 자른 장작이었다. 인부들의 하루 노임은 15루피(1300원) 포어맨(반장)은 30루피(2500원)라고 했다.   

외항 작업이 끝나고 부두에 접안을 했다. 1월 26일은 인도 독립 기념일이라고 작업을 쉬었다. 휴일이라고 주민들이 가족끼리 부두로 배 구경 하러 왔다. 양말 신은 사람은 구경할 수 없었다. 대부분 맨발에 샌들을 신고 다녔다. 한국 배가 많이 입항하는지 “안녕하십니까”하고 재미로 인사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올라오면 성가시게 해서 아무도 배에는 못 올라오게 했다. 눈만 마주치고 웃었다 하면 담배 달라, 옷 달라, 신발 달라, 뭐든 달라는 소리였다.  

인도는 어느 항구를 가나 인부들의 도둑 근성은 똑같았다. 놋쇠라는 놋쇠는 보이는 대로 훔쳐가려고 했다. 엿 한 가락 값어치도 안 될 작은 버터플라이 너트도 감쪽같이 없어졌다. 출항이 가까워지면 더욱 심했다. 일할 때는 늙다리소처럼 느릿느릿해도 도둑질 할 때는 번개같이 빨랐다.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때 이집트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며칠 동안 배에서 허드렛일을 해주고 비누, 담배를 얻어가던 ‘루비’라는 아이가 도둑질하려다가 들켜 다시는 배에 오지 못했다.
 

두 달 동안 머물렀던 투티코린 항을 출항했다. 렁 업(Rung up) 엔진을 하고 전속으로 회전수를 올리자 주기관의 상태가 아주 나빴다. 연료 핸들을 올려도 회전수는 상승하지 않고 배기온도는 한계치를 넘었다. 블로 바이(Blow by)도 심해 랜턴 스페이스 사이트 글라스를 들여다보면 소기공掃氣孔에서 불비가 쏟아지는 듯했다. 이 상태로 싱가포르까지나 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주기 회전수를 낮추어도 배기관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뉴올리언스에서 받은 기름으로 인도까지 항해하는 동안 배기 온도가 조금씩 상승해 인도 도착 전에는 400℃까지 올라갔다. 투묘를 할 때는 심한 노킹을 일으켰다. 그래서 투티코린에서 전 기통 연료 분사변을 교환하고 연료 분사 펌프도 모두 오버홀을 했다. 그러나 플런저 배럴은 예비품이 없어 교환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터보차저 입구 온도는 580℃까지 올라갔다.
회사에서 회신이 왔다. 뉴올리언스에서 수급한 에프오 속에 실리카, 알루미나 (Silica-Alumina)성분이 다량 함유 되어 연료 분사펌프 플런저 배럴을 마모시켜 이런 현상이 발생한 것 같다고 했다. 그때까지는 FCC유油 사용으로 인한 기관 손상 사고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연료유 분석검사를 의뢰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그 항차는 정말 내 인생에 최악의 항해였다. 

 
‘인간은 약할 때야말로 강하게 되나니 이럴 때일수록 절망하지 말라!’

10개월이 다 되었지만 마음을 다잡아먹고 연가 신청은 하지 않았다. 
일본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엔진을 세워 랜턴 스페이스를 소제했다. 좁은 수로에서 불이 날까봐. 밤중에 붕고수도豊後水道에 들어섰다. 아침에 마쓰야마松山에서 입항 수속을 하고 고요幸陽 드라이독에 들어갔다. 배가 선거船渠에 앉자마자 노시다野下 감독과 함께 NK 검사관, 그리고 조선소 측 담당자들이 들이닥쳤다. 먼저 기관효력검사(Performance Test)부터 시작했다. 입거 후 8일 동안 나는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빴다.

수리를 마치고 드라이독에서 빠져나와 시운전을 했다. 시운전을 할 때 몇 가지 사소한 말썽이 있었지만 그 정도는 어느 배나 마찬가지였다. 시운전을 마치고 히메지姬路에서 철제를 실었다. 가고가와加古川를 거쳐 오사카에서 마지막 짐을 싣고 출항했다. 
출항 후 기관 상태는 많이 좋아졌으나 4번 6번 기통의 블로 바이는 완전히 잡히지 않았다. 실린더유 급유율給油率을 조금 더 증가시켰지만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이미 실린더 라이너 마모율이 한계치를 넘었기 때문에 라이너를 갈지 않고는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 닥치지 않은 일에 너무 걱정하지 말고 담대한 마음으로 지내자고 속다짐을 했다. 태평양을 횡단하는 동안 랜턴 스페이스에 불이 나서 두 번 엔진을 세웠다.  

발보아에 도착해서 다시 파나마 운하를 통과했다. 카리브 해를 지나자 대서양에 저기압이 발생하여 바다가 거칠었다. 2시 방향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과 물결을 받아 회전수를 내렸는데도 7번 기통에 불이 났다. 거친 파도 속에서 주기관을 정지하니 선체는 무섭게 흔들렸다.  청수를 뿌려 불을 끄고 10분 만에 다시 주기관을 시동을 했다. 미국 서부의 남쪽에서부터 차례로 잭슨빌, 서배너를 거쳐 필라델피아 외항에 도착했다. 그 동안 8번 기통에서 두 번이나 불이 났다. 필라델피아 항에 접안해서 기관부는 상륙도 못하고 주기 8번 기통 피스톤 오버홀을 했다. 

필라델피아 항을 출항해서 뉴헤이번(New Haven) 항에 도착할 때까지는 계속 파일럿이 승선하고 있었다. 나는 또 비상이 걸릴까 봐 기름투성이의 머리도 감지 않고 소파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일요일 꼭두새벽에 외항에 닻을 놓았다. 휴일은 하역작업을 하지 않고 월요일 새벽에 접안을 한다고 해서 투묘지에서 또 6번 피스톤을 오버홀 했다. 뉴헤이번 항에서는 한 이틀 걸릴 줄 알았는데 3천 톤이 넘는 화물을 7시간 만에 다 부렸다. 피스톤 작업을 하느라고 기관실 빌지가 많이 차서 주기 플라이휠(Fly wheel)에 닿아 하는 수 없이 윤활유 침전沈澱 탱크에 넣고 출항을 했다. 뉴헤이번 항 입구에 있는 항로표지 해상부표에는 종과 종 채를 양쪽으로 매달아 부표가 흔들릴 때마다 땡그랑 땡그랑 종소리가 났다. 

 
미국을 출항한 탈리아 호는 베네수엘라 오노리코Onorico 강 하구에 도착했다. 시 부이(Sea Buoy)를 통과하여 14 30시에 리버 파일럿이 승선했다. 그때 잠시 엔진을 정지했다가 다시 시동하려니 시동이 되지 않았다. 연료 펌프 래크Rack가 빡빡해서 잘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도 기관이 말썽을 많이 부리니까 선장이 화가 나서 전화기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조류가 빠르고 구불구불한 강을 164마일이나 거슬러 올라가야 되는데 처음부터 시동 실패를 하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빡빡한  펌프 래크에 이지오일(Easy oil)을 치고 손으로 몇 번 움직이니 작동이 잘 됐다. 강을 따라 올라가다가 68번 부이 근처에서 닻을 내렸다. 어둠이 깔리는데 부표에 등燈이 점등되지 않아 파일럿이 배를 몰고 갈 수 없다고 했다. 
이튿날 새벽 5시에 다시 파일럿이 승선해서 오후 4시30분에 부두에 접안을 하니 용선주 측에서 난리가 났다. 그 시간에 다른 배들은 다 들어왔는데 왜 탈리아 호만 못 들어왔느냐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선장은 밤을 새워 ‘Master Protest’를 만들어 제출했다.

강안江岸에는 밀림처럼 숲이 울창했다. 강을 타고 들어오는 동안 불빛을 보고 날아든 풍뎅이의 시체가 갑판위에 빈틈이 없을 정도로 많이 쌓였다. 부두의 이름은 뿌에르또 크루즈(Puerto Cruez). 아연공장의 사설부두였다. 마을은 작은 읍 정도였다. 집집마다 망고 나무가 몇 그루나 되었다. 담장 밑 길가에는 떨어진 망고가 수두룩했다.

탈리아 호는 뿌에르또 크루즈 항에서 아연 괴(Zinc Ingot) 1만3천톤을 싣고 구불구불한 오노리코 강을 빠져나왔다. 리버 파일럿이 내리고 시 부이(Sea Buoy) 를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나는 주기 랜턴스페이스에 불이 날까 봐 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청수 호스를 준비해놓고 불이 났다 하면 금방 끌 대비를 하고 있었다.  
오전에 파나마 크리스토발에 도착했다. 운하를 통과하기 전에 연료펌프 래크가 잘 움직이도록 손질을 했다. 이튿날 새벽 5시에 운하를 통과하여 태평양에 들어섰다.
로스엔젤리스 외항에 닻을 내리고 벙커링을 했다. 태평양 날짜 변경선을 통과했다. 이제 일본에 도착하면 나는 연가年暇로 하선할 예정이었다. 전임 기관장이 골머리가 아파 중도 하선 하는 바람에 나는 인계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하지만 각 기기의 현상現狀이라도 기록해 놓아야 했다.

한밤중이었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전화기가 울렸다. 또 무슨 일인가 했더니 연돌에서 불비火雨가 쏟아진다고 했다. 밖에 나가보니 캄캄한 밤하늘에 수없이 많은 불똥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배기가스 보일러Economizer와 연돌 내부에 부착된 그을음에 불이 붙었던 것이다. 항해 중에 연돌 내부의 그을음에 불이 붙으면 어쩔 수가 없다. 몇 시간만 지나면 다 타고 꺼지게 마련이었다. 그 동안 갑판에 떨어진 불똥이 다른데 옮겨 붙지 않는지 감시하고, 특히 선미 무어링 윈치 뱃줄Hawser에 불똥이 떨어져 흠집이 생기지 않도록 물을 뿌려주어야 한다.  

일본 도야마富山 외항에 도착했지만 부두가 빌 때까지 내항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해상오염 문제 때문에 양식장 어민들이 반대를 하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어디를 가나 어민들의 권세가 대단했다. 외항에는 수심이 깊어 닻을 놓을 수가 없었다. 밤새도록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드리프팅Drifting을 하고 이튿날 아침에 부두에 접안했다. 회사에 전화를 하니 교대 계획은 아직 미정이라고 했다. 하역 작업을 시작하자마자 2번 토핑 윈치 유압 파이프가 터졌다. 비가 오는 가운데 천막을 치고 수리를 했다. 저녁에 도야마 항을 출항해서 관문關門에 도착하니 안개 때문에 바로 통과할 수가 없었다. 짙은 안개 속에서 기적을 울려가며 3시간이나 기다렸다가 가까스로 통과했다. 복잡한 세도나이까이瀨戶內海를 통과해서 오사카 항에 도착했다. 귀국 가방은 진작 꾸려 놓았지만 오사카에서도 교대 소식은 없었다. 윤활유를 받고 당일 밤에 오사카를 출항을 했다. 요꼬하마를 거쳐 기미쯔君津에 접안했다. 아연 괴의 양륙 항은 여섯 군데나 되었다. 기미쯔 다음은 구레吳였다. 다시 통행이 복잡한 비산세토備讚瀨戶와 울돌목만큼이나 물살이 센 구류시마 해협來島海峽의 우마 시마馬島 여울을 통과해야 한다. 세토나이까이 안에서 여기가 제일 위험한 곳이다. 여울 가운데 작은 섬이 있다. 이곳을 통과할 때 운 나쁘게 기관고장이 났다 하면 배는 언덕 위로 올라가고 만다. 작업복 바람으로 잠시 소파에 누웠다가 그만 깜빡 잠이 들었다.

나이 많은 후임 기관장이 왔다. 인계를 하려고 같이 기관실로 내려가는데 밑에서 연기가 뭉클뭉클 치솟았다. 아이구! 이를 어쩌나.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전임 기관장처럼 나도 어느새 노이로제 환자가 된 것이다. 배는 비산세토를 빠져나와 확 트인 빈고나다備後灘를 지나고 있었다. 곧 구류시마 해협이었다.
 

구레에 도착해서 오랜만에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아내는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집에 이상한 전화가 하루에도 몇 번이나 걸려 와요. 어떤 여자가 전화를 하는데 받으면 여보세요? 하고는 그냥 끊어버리고…… 전화기가 울릴 때마다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라고요. 늦으면 늦다고 왜  전화를 안 하는 거요? 진작 담가 놓은 물김치는 이제 시어빠져서 못 먹게 됐다고요!” 
내가 귀국할 날이 다 됐는데 이상한 전화가 자꾸 오니까 아내는 내가 숨겨 놓은, 좋아서 죽고 못 사는 여자라도 있는 줄 지레짐작했던 것이다. 의심암귀疑心暗鬼라고 했다. 그 여자한테만 언제쯤 귀국한다고 연락해놓고 집에는 전화도 안 하는 줄 알고 화가 났던 것이다. 나는 초긴장 속에서도 쿡쿡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랜만에 즐거운 웃음이었다.

한 시간이 지겨운데 구레에서는 비가 추적추적 내려 출항이 또 하루 늦어졌다. 구레를 출항하여 관문 입구에 도착하니 안개가 지척을 분간할 수 없도록 짙게 깔렸다. 닻을 내리고 안개가 걷히기만을 기다렸다. 세 시간이 지나자 시정 거리가 조금씩 멀어지고 투묘한 배들의 형체가 어슴푸레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파일럿을 부르는 뱃고동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오전 10시에 파일럿이 승선했다. 고꾸라小倉에 접안을 하니 12시가 다 되었다. 부두에 배를 붙이고 나니 소나기가 주렴처럼 세차게 쏟아졌다. 갑판의 유압기기가 비에 씻겨 빗물 위에 유막이 번들거렸다. 걱정도 팔자다. 바다에 유막이 비칠까 봐 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인계서를 펼쳐놓고 한시가 지루해서 우리 속의 곰처럼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후임자들이 승선했다. 업무 인계를 마치고 오후 6시에 하선을 했다. 세관 수속을 마치고 스테이션 플라자 호텔에 들어서니 저녁 9시였다. 침대에 벌렁 드러누우니 몸과 마음이 하늘로 붕 뜨는 기분이었다. 탈리아 호에서 보낸 세월이 꿈만 같았다.
이튿날 오전 11시 후꾸오까 발 KAL 기를 탔다. 비행기가 김해 공항에 착륙도 하기 전에 기창 아래로 펼쳐진 고국 땅이 그렇게 정겹게 보일 수가 없었다. 강산의 풍경은 변함이 없지만 내가 고생한 만큼 고국산천이 아름답게 보인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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