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선 오고가는 부산항구 제2부두~”

1961년 고봉산 취임, 뱃사람들 삶·사랑 노래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금지곡 판정’ 받기도

무역선 오고가는 부산항구 제2부두
술 취한 마도로스 이별이 야속더라
닻줄을 감으면은 기적이 울고
뱃머리 돌리면은 사랑이 운다
아아아~ 항구의 아가씨
울리고 떠나가는 버리고 떠나가는
마도로스 아메리칸 마도로스

꽃물결 넘실대는 부산항구 제2부두
한 많은 마도로스 항구가 무정더라
깃발을 올리면은 기적이 울고
등대불 깜빡이면 사랑이 운다
아아아~ 항구의 아가씨
울리고 떠나가는 버리고 떠나가는
마도로스 아메리칸 마도로스

 

부산항 전경
부산항 전경
항구는 떠나고 돌아오는 곳이다. 이별의 아쉬움과 눈물, 다시 만나는 기쁨과 웃음이 함께하는 곳이다. 하지만 이별과 재회의 무게는 다르다. 항구의 사랑은 달콤했지만 이별은 길고도 무척 쓰다. 특히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 항구, 부두, 선창, 포구를 드나드는 뱃사람들이 그렇다. 그래서 바다와 항구엔 가지 말아야할 곳, 뿌리쳐야할 유혹, 조심해야할 것들이 적잖다. 이런 항구의 사랑과 만남, 이별을 노래한 곡들 중 빼놓을 수 없는 게 1960년대 초 선보인 추억의 대중가요 ‘아메리칸 마도로스’다.
‘아메리칸 마도로스’는 뱃사람들의 삶과 사랑을 노래한 곡으로 유명하다. 6·25전쟁이 끝난 뒤 1950년대 후반 김진경이 작사하고 고봉산이 곡을 만들어 1961년 본인이 직접 불렀다.

고봉산은 그가 평소 연습해 취입하려던 이재호(무적인) 작사·작곡의 ‘울어라 기타줄’이 오랜 지방공연으로 당시 인기가수였던 손인호에게 넘어가자 분한 마음에 만든 가요이기도 하다. 자신이 취입할 줄 알았던 곡을 다른 가수가 부르자 울화통이 터진 그는 자신이 작곡을 못해서 생긴 일로 생각하고 작곡공부에 전념했다. 틈만 나면 피아노 앞에 매달린 그는 짬짬이 부산시내와 부두를 왔다 갔다 하며 항구의 정서를 익히며 노래 만들기에 온힘을 쏟았다.
 

 
 
노래 덕분에 ‘부산항 제2부두’ 유명해져
그 무렵 부산은 6·25전쟁을 겪고 전국 팔도민이 모여들어 힘든 삶을 이겨내며 다시 일어서려고 애썼던 국내 최대 피난지이자 ‘제2의 서울’이었다. 가요계에선 “부산서 뜨면 전국에서 뜬다”는 말이 돌았을 만큼 내로라하는 음악인들이 몰려들었다. 고봉산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아메리칸 마도로스’는 1961년 고봉산에게 출세 길을 열어준 곡으로 음반이 나오자 인기는 대단했다. 노래가사 중 ‘닻줄을 감으면은 기적이 울고, 뱃머리 돌리면은 사랑이 운다’는 대목은 절창으로 꼽혔다. 항구의 아가씨를 울리고 떠난다는 마도로스의 주마등같은 삶도 노래 맛을 더해준다.

그러나 1975년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방송금지곡이 됐다. 가사가 저속하고 주체성이 없는 곡이란 판정을 받은 것이다. 이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마다 노래가사가 조금씩 다른 건 금지곡을 비껴가기 위해 나름대로 손을 본 것이다. 이 노래는 백야성, 나훈아, 현철, 주현미, 문희옥 등 여러 가수들이 리메이크해서 불렀다.
특히 항구의 사랑과 이별을 절묘하게 나타낸 이 노래 덕분에 ‘부산항구 제2부두’는 두고두고 추억의 장소가 됐다. 부산항 제2부두는 부산시 중구 중앙동 4가에 있다. 월남전에 싸우고 돌아온 군인들의 환영장소였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등 많은 영화들이 이곳에서 촬영되기도 했다. 부두 뒤로는 용두산, 부산탑(120m), 고층건물 등이 우뚝 서있고 부근 뒷골목엔 술집과 식당들이 즐비하다. 1876년 개항한 부산항의 두 번째 부두이지만 지금은 부산신항 쪽으로 기능과 관련 업무들이 많이 옮겨가 노래 속의 옛 모습을 찾아보긴 어렵다.

황해도출신 고봉산, 가수하고 싶어 월남
‘아메리칸 마도로스’를 작곡하고 취입한 고봉산은 1927년 황해도 연백 안악출신으로 본명이 김민우이다. 그는 가끔 남석일이란 예명도 썼다. 젊은 시절 품었던 가수의 꿈을 이루려고 서울로 내려왔지만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그는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4년 금성좌(金星座) 전속단원으로 데뷔했다. 처음엔 본명으로 트롬본을 불다 무대가수로 섰다. 해방 후 박단마악단에서 활약한 그는 1954년 오리엔트레코드, 1958년 도미도레코드에 들어가 가수로 활동했지만 빛을 보지 못했다.
박시춘, 문호월, 손목인, 김해송 등 이름 있는 작곡가들에게 줄을 대어봤지만 허사였다. 그래서 마도로스 테마를 갖고 악극단 가수로 뛰었다. 1973년엔 하춘화와 ‘잘 했군 잘 했어’를 불러 히트하며 본격 가수의 꿈을 펼쳤다. ‘잘 했군 잘 했어’는 해방 전에 김주호와 선우일선이 듀엣으로 부른 ‘영감타령’에서 형식을 빌려온 노래다. 1962년 이철수가 작사하고 고봉산이 작곡 및 노래를 부른 ‘등대불 사랑’도 히트하지 못했다.

고봉산은 가수로서 크게 재미를 보지 못하자 작곡을 많이 했다. ‘막 내린 인생극장’(최무룡), ‘용두산 엘레지’(고봉산), ‘물새 한 마리’(하춘화), ‘유달산아 말해다오’(이미자), ‘꽃 한 송이’(이미자), ‘섬 처녀’(이미자), ‘항구’(정재은), ‘선창 아가씨’(박재란), ‘목포의 연가’(남진), ‘방앗집 처녀’(하춘화), ‘영암아리랑’(하춘화), ‘추억의 꽃나무’, ‘남포동 밤 0시’(고봉산), ‘내 고향 마산항’, ‘거제도 아가씨’(신경자) 등 그가 작곡한 노래들은 서정적이다. 반야월이 작사한 ‘막 내린 인생극장’은 빚을 갚지 못해 아내를 남기고 자살한 영화감독 노필의 일생을 노래로 만든 것이라 눈길을 끈다.

그렇게 의욕과 집념이 강했던 고봉산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사람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쇠약해졌다. 말 내용에 뻥이 세다고 해서 ‘고대포(高大砲)’란 별명을 얻었던 그는 노후엔 아주 겸손해졌다. 대중가요 작곡가 겸 가수로 심성이 착한 고봉산은 1990년 6월 22일 60세의 나이로 지병(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술 한 잔도 마실 줄 모르지만 노래를 잘 부르던 그의 애창곡은 “어디서 왔는지, 흘러 왔는지 / 돌아갈 고향 없는 서러운 가슴~”으로 나가는 ‘철새’였다. 정두수 작사, 고봉산 작곡의  ‘철새’는 남진이 처음 취입하고 나중에 나훈아가 리메이크해 불렀다.

‘아메리칸 마도로스’ 노랫말을 만든 대중가요작사가 김진경은 1919년 4월 3일 함경남도 단천 태생이다. 고봉산과 함께 같은 북한 출신으로 부산서 피난생활을 하며 힘겨운 삶을 살았다. 영화 주제가이기도 한 남진의 노래 ‘미워도 다시 한 번’을 작사해 유명해졌다. 김상진이 부른 ‘고향 아줌마’(작곡 정민섭), 나훈아·강진이 부른 ‘고향으로 가는 배’(원곡명 오진일, 작곡 정민섭) 등의 노랫말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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