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길, 조선통신사의 길-

蘇 在 英
(숭실대 명예교수, 연변과학기술대 한국학연구소장)

머릿말
현해탄은 우리 민족에게는 이웃 일본과의 관계에서 역사적으로 애환이 짙게 서린 물길이다.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는 관부연락선은 60만 재일 동포는 물론 한반도와 일본 땅을 드나들던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슬픔을 안겨 주었다.

20세기 말엽 조선의 개화를 주도했던 소위 조선의 세 여성 김일엽 윤심덕 나혜석은 신여성으로 모두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그들의 생활이나 직업에서 적지 않은 스캔들을 뿌리기도 하였다. 특히 윤심덕과 김우진의 현해탄 투신사건은 ‘사의 찬미’라는 노래와 더불어 식민지 조선의 암울을 차가운 현해탄 물길 너머로 토해 내던 민족의 슬픔과 맞닿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나고 이웃 간의 화해를 위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선통신사가 이 현해탄 물길을 오가기도 하였다.

한편 이 현해탄의 물길이 하카다 가라스(唐津)에서 부산으로 이어지면 저 유명한 豊臣秀吉이 20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하던 끔찍한 사건의 현장을 마주하게 된다. 지금은 비록 평화의 뱃길이 오가지만 이 물길을 지날 때마다 우리는 지난 날을 회고하고 양국 간 바람직한 문화 교류의 미래상을 꿈꾸게 되기도 한다.

壬辰倭亂의 길
부산을 떠나 하카다 항까지는 200키로도 채 안 되는 가까운 물길이다. 그러나 이 물길을 따라 일본의 침략으로 발발한 이른바 壬辰倭亂(1592~1599,文祿慶長의 役)은 7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결국 풍신수길의 죽음으로 전쟁이 종료된다. 당시의 출병지였던 이른바 나고야(名護屋) 성적은 지금의 가라스(唐津)시 진사이(鎭西町) 요부고(呼子町) 일대인데 가부도섬이 앞을 가려 마치 활시위처럼 해안선이 은밀하게 가리워진 요새로 4백 여년의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도 현장에 가보면 加藤淸正 小西行長 등 20여 진지의 자취가 방문자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고 있다.

나고야성에 집결시켰던 왜군 만도 15만이 넘었다고 한다. 1592년 4월 12일 바로 이 나고야 진을 출발한 2만 여의 왜군 선발대가 병선 7백 여척에 나누어 타고 동래 부산으로 향하여, 13일 부산진이 함락되고 14일 동래성이 무너지면서 기습적인 임진왜란이 비롯되어 지리한 7년 전쟁이 시작된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 우리는 평화의 배로 갈아타고 다시 이 현해탄 물길을 따라 하카다만으로 향하며 만감이 교체함을 실감한다.

일본인들이 손꼽는 인물에는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히데요시 (豊臣秀吉), 도꾸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 그리고 명치유신의 배후자 사카모토료마(坂本龍馬)가 등장한다. 앞의 전국시대 세 사람의 성격을 말하면서 ‘오다는 꾀꼬리가 울지 않으면 죽여버리라고 하고, 도요토미는 억지로라도 울게 하라고 하고, 도꾸가와는 울 때까지 기다리라 한다’는 비유의 일화가 전한다. 각각 세 사람의 기질을 대표하는 언어로 오다의 무사다움, 도요토미의 고집스러움, 도꾸가와의 인내심을 상징하는 언어들로 일본인들의 기질을 이 세 부류로 나누기도 한다고 한다. 임진왜란도 삶의 바닥에서 일약 통치자로 급상승한 풍신수길의 바로 그 신경질적인 고집스러움의 한 산물이라고 할 것이다.

일본의 대표적 작가 아쿠다가와류노스케(芥川龍之介)의 단편으로 긴쇼군<金將軍>이라는 작품이 있다. 임진왜란을 다룬 작품이다. 그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어느 여름날 삿갓을 눌러 쓴 두 스님(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이 조선 탐정을 나서 평안도 용강의 한 논두렁 길을 지나는데 돌베개를 베고 잠든 범상치 않은 한 시골 아이를 발견한다. 가등은 이 아이가 범상치 않다고 여겨 장차의 후환을 막기 위해 죽여버리자고 하나 소서는 그를 극구 만류한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이 두 왜장은 조선 땅에 다시 나타난다. 소서가 평양에서 계월향과의 사랑에 빠져 있을 적에 김응서는 계월향과 미리 약속을 해두고 소서를 살해하려고 모의를 한 후 그가 잠든 틈을 타 목을 쳤으나 다시 목이 와 붙으려 하므로 미리 준비한 재를 뿌려 그의 목이 다시 붙지 못하도록 한다. 그후 계월향을 데리고 그곳을 빠져 나와 생각하니 계월향이 소서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것 같아서 칼을 다시 뽑아 계월향의 배를 가른다. 그랬더니 뱃속에서 아직 채 자라지 못한 아이가 튀어나오면서 석달만 더 기다리면 이 세상에 태어나 아비의 원수를 갚을 걸 하며 죽어 넘어졌다” 아쿠다가와가 이 소재를 어디서 얻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임란을 상징하는 일본의 두 장수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의 기질을 잘 표현한 작품이라 생각되며, 김응서로 상징화된 조선 영웅의 활약상을 기녀를 매개로 하여 전개하고 있다는 데서 매우 흥미감을 고취시키는 작품이라 하겠다.

한편, 계월향과 함께 진주 남강의 의암에서 왜장의 목을 껴 안고 함께 죽었다는 論介의 임란 무용담도 애처롭다. 당시의 왜장은 게야무라로쿠스게(毛谷村六助)로 알려져 있다. 그의 후손은 조상의 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규슈의 다가와(田川) 산 기슭에 조상과 논개를 함께 모신 사당을 만들고 해마다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고 전한다.

對馬島와는 50키로의 가까운 물길, 현해탄을 가로질러 하카다만에 이르는 이 물길은 거센 물결처럼 양국 간의 역사적 파랑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일본 땅과는 가장 가까운 이 수로에 언젠가부터 해저 터널이 계획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일본은 대륙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얻기 위해 한반도는 문화 인접국과의 선린과 대륙의 연결로를 위해 필요성의 공감대가 점차 형성되어 가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국경의 개념보다 문화 영토의 개념이 더 우월하다는 생각인지 모를 일이다.

朝鮮通信使의 길
부산에서 시모노세키(下關)에 이르는 물길은 파도가 높고 하카다 길에 비해 물길이 더욱 거세다. 파도가 거센 만큼 역사적으로도 더욱 격랑이 몰아쳤다. 내물왕자 未斯欣(美海)이 인질로 일본에 잡혀 가자 이를 구출하기 위해 일본에 온 朴堤上을 잡아 두었다가 木島에서 잔인하게 화형에 처해진 사건을 두고 이후 모든 한일 간을 오간 [海行摠載]의 통신사 기록들을 보면 일본에 대한 적대감과 원망이 분출하고 있다. 목도가 대마도와 일기도를 지나 현해탄의 어느 작은 섬으로는 추정되나 분명하지는 않다. 임란 7년 전쟁 가운데서도 왜군이 서울을 공략할 때 조선 왕릉인 宣靖陵(中宗 明宗陵)을 파굴하고 방화한 사건은 조선인의 대왜 감정을 촉발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인데, 종전 후 이 사건이 수습되면서 1607년(선조20) 呂祐吉을 정사로 하는 통신사가 일본에 파견된 이래, 열두 차례나 조선 통신사 일행이 현해탄을 오가면서 기술된 海.錄이나 海遊錄에는 조선인의 일본에 대한 감정으로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는 것이 이 박제상의 화형 순절 사건이다.

3~4백 명에 이르는 조선 통신사들의 에도(日光) 왕환은 거의 일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선린 우호가 주된 목적이었으나 이에 따른 부작용도 많았다. 당시의 조선 신사들은 일본에 대해 문화 우위적 입장을 견지했으나 18세기를 지나면서는 양측의 입장이 조금씩 달라지더니 결국 1811년(순조 11년) 金履喬 일행의 통신 사행을 끝으로 통신사 내왕이 중단되고 만다. 30여 편의 통신사 기록 가운데서도 경섬의 [해사록], 김세렴의 [해사록], 남용익의 [부상록], 홍치중의 [해사일록], 신유한의 [해유록], 김인겸의 [일동장유가] 등은 그런대로 시대성을 읽을 수 있는 비교적 훌륭한 기록들이다.

이후 막부제에서 천황제의 부활을 가져온 明治維新은 강제된 이른바 문화의 역조현상을 불러 왔다. 사카모토류마(坂本龍馬)같은 인물은 유신체재의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조선인의 수용소가 있던 일본의 야마구치현(山口縣)의 이른바 ‘松下村塾’은 막부제에서 천황제로 가는 과정에서 伊藤博文 寺內正毅 山方有朋 吉田松陰 등 총리 만도 아홉명이나 배출하였으며 이른바 征韓論의 이론을 창출한 중심이 되기도 하였다.

2012년의 일본 국세 자료에 의하면 국토의 총 연장은 3000키로에 이르고 총 면적은 37만 2924평방키로이며 총 인구는 1억 2752명으로 나와있다. 국토는 북해도 본주 사국 구주의 네 섬과 약 7000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외국인 인구는 203만, 그 가운데 재일동포의 수는 26프로를 차지한다. 그중에서도 규슈의 전체 인구는 후꾸오카 500만을 포함해 1500만의 인구가 분포되어 있다. 선박 입항량은 요코하마, 나고야, 고오베, 오사카의 순이며, 규슈에서는 기다규슈, 하카다의 순이다.(2012년 통계)

한편 규슈를 언급하면서 옛 규슈의 통치 기구였던 다자이후(大宰府)와 문화 교류의 집산처였던 홍려관(鴻.館)에 대하여 언급 않을 수 없다. 다자이후는 당시 규슈의 아홉 주와 對馬島 壹岐島 種子島를 통괄하여 다스리는 행정 기관이었다. 다자이후는 외교 업무도 담당하여 견당사를 보내고 신라의 사신을 맞이할 때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편 다자이후는 외국 접빈의 내왕과 접대를 관장하는 鴻.館이라는 기구를 따로 설치하였는데 그 자취가 근래 새로 발굴되어 화제가 되었었다. 홍려관은 당시 나가고 들어오는 제 국가의 빈객과 문화의 집산처 역할을 하였던 곳으로 장보고의 청해진, 적산 법화원과도 직접 내왕 교섭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다자이후 시기에 하카다항으로 침입한 몽골군의 침략은 일본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혔다. 일본은 이를 ‘元寇의 침략’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원과 고려의 연합군 형태였으며, 당시 몽골군은 육지에 진을 치지 않고 모두 정박시켜 놓은 배에서 자다가 폭풍이 불어 배를 모두 함몰시켜 연합군을 몰살시킨 소위 가미가제(神風) 사건은 너무나 유명하며, 일본의 역사물 작가 이노우에야스시(井上靖)는 이를 소재로 [풍도(風濤)]라는 작품을 써 장안의 지가를 올리기도 하였다.(유홍준 참조)

아리다의 李參平과 사쓰마의 沈壽官규슈지방을 답사하다 보면 임진왜란 때 잡혀온 도공 이삼평과 심수관의 삶의 자취를 빼놓을 수 없다. 이삼평은 정유재란 당시 사가 지역의 번주였던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잡혀온 도공이다. 그는 금강 출신으로 계룡산 지역에서 잡혀 왔다고 하여 가나가에삼페(金江三兵衛)라고 이름하였으며 지금의 아리다 지역에서 도자기를 만드는 점토를 발견하고 이곳에 정착하여 일본 최초의 백자를 생산하기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생산된 도자기는 이웃 이마리(伊万里)를 거쳐 가라스항(唐津港)을 통하여 유럽으로 수출될 정도로 명성을 얻게 된다. 이삼평은 나중 도잔진자(陶山神社)의 신으로 모심을 받는다. 도산신사는 임란 이후 17세기 경 이곳 주민들에 의해 천황 번주와 함께 모셔져 우러름을 받기에 이르는데 신사의 위에는 ‘陶祖 李參平’이라는 석비를 세워 지금에 이른다.

한편 이삼평의 모습은 돌에 새긴 조각상을 만들어 석장신사에 모시게 되었고 신사를 오르는 길에는 낡은 석재에 ‘高麗神’의 석자를 새겨 모시기까지 하였으니 그에 대한 이곳 주민들의 숭앙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곳 공동묘지에 묻힌 그의 무덤에는 그의 수계 명인 ‘月窓淨人’으로 비석이 새겨지고 1655년 8월 11일로 사망한 일시까지 새기고 있다고 한다.

사쓰마야끼(薩摩燒)의 도조가 된 심당길은 시마스요시히로에게 잡혀와 규슈의 남단인 미산(日直市美山町)에 자리를 잡아 이른바 사쓰마야끼의 시조가 된다. 이곳에서도 역시 도자기를 굽는 흙을 찾아 헤매다가 고향을 닮은 미산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심당길은 치열했던 남원성 전투에서 살아 남아 시마스가 데려온 포로의 한 사람으로 지금의 심수관은 그 14대 째가 되며 , 심수관은 이후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본향인 청송에도 다녀 오고 서울대 등에서 강연회를 여는 등 한국에서는 명사로 대접받고 있다. 필자는 일본의 교환교수 시절에 처음 그곳을 방문한 이래 두 차례나 다시 방문하여 심수관을 만나 본 적이 있다.

일본의 유명한 작가 시바료다로(司馬遼太郞)는 그곳을 방문하고 [고향을 어찌 잊으리까]라는 표제로 심수관 가의 역사와 일본 도자 문화의 공헌을 기술하고 있다.(文春文庫) 시마스의 조선 포로선이 표착한 구시기노 시마비라 해변에는 ‘薩摩燒開祖着船上陸記念碑’가 바닷가에 세워져 있다. 지금도 이곳을 나에시로가와(苗代川)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이곳은 단군을 모신 사당이 있으며 일년에 한 차례 이곳에서 축제 겸 제사를 지내고 있다. 모셔진 신상을 유심히 본 적이 있는데 단군 모습을 한 석상이었다. 그들은 玉山神宮이라 부른다. 축제의 주문은 ‘오늘이 오늘이소서 내일도 오늘이소서 저물지도 새지도 말고 마양 당직에 오늘이소서’(번역)로 시작되며 그들의 생활에서 이 축제가 가장 소중함을 말하고 있다. 14대 심수관은 와세다 출신이고 아버지인 13대 심수관은 명문 교도대를 나왔으나 모두 천직으로 알고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이 도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400년에 이르는 조상들의 도예 작품들을 전시관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수 많은 조선 도공 포로들 가운데서도 아리다의 이삼평과 미산의 심수관 일가는 임란 이후 4백년이 넘도록 일본 땅에서 조선 도예 문화를 활짝 꽃피운 자랑스런 도예 가문들이다.

맺음말
고대의 바닷길은 계절풍과 해류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한반도를 에워 싼 중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한국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관계가 여의치 않을 때는 몽고의 난, 임진왜란, 병자호란, 식민 지배 등 수많은 역사적 수난을 겪어 왔다. 중국을 내왕한 연행사, 일본을 내왕한 통신사들은 바로 상대국과의 이해관계 문화적 수위 조절이 그 중요한 역할이었다. 그러나 한반도는 지형학적으로 북은 대륙과 연결되어 있지만 서쪽은 황해 동쪽은 동해의 물길이 가로막고 있어 바닷길은 역사적으로 양국과의 교역 수위 조절의 창구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임란 당시 일본에 피로되었다가 절강 땅으로 들어가 북경 심양 압록강을 건너 고향으로 돌아온 금계 노인의 체험(錦溪日記), 제주 앞바다에서 표류하여 절강 땅에 표착 노인과 같은 길을 밟아 고향에 돌아온 錦南崔溥의 체험(錦南漂海錄)은 우리에게 바다 밖에 드넓은 세계가 존재함을 알려준 최초의 표본적 체험이었다 할 것이다.

연행사들은 해로로 登州(蓬萊) 물길을 많이 이용하였다. 발해만을 가로질러 大連口를 거쳐 長山島 宣沙浦로 육지를 따라 한반도의 연해로 들어오는 먼 물길이다. 때로는 산동반도 남쪽 密州(膠州)를 떠나 남양만쪽으로 들어오는 직항로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근래 徐兢의 [宣和奉使高麗圖經]을 읽다가 송나라 때 물길을 보니 남송 무렵부터는 남방의 明州(寧波) 항로를 이용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寧波(明州)에서 사신을 태운 배가 계절풍을 이용하여 명주를 떠나면 40여일 만에 고려의 도읍인 禮成江 碧瀾亭에 상륙할 수 있었다. 그 사이 40여 개의 섬을 지나거나 정박하고 있는데 [고려도경]이야말로 麗宋關係 무역과 문화 교류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한편 통신사의 길은 대마도와 일기섬을 거쳐 玄海灘을 지나는데, 이 현해탄의 물은 한반도를 따라 남하하는 리만 해류가 태평양에서 들어오는 구로시오(黑潮)의 한 줄기와 합류하여 이 물이 다시 현해탄에서 감돌아 역상하므로 물살이 거세고, 그 해류를 따라 들어가면 한반도에서 건너다니던 고대 원시적 물길 시마내(島根) 돗도리(取鳥)방향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 고대의 이주민들이 일찍 시마네 나라(柰良) 지역에 정착한 것도 그러한 바다의 흐름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할 것이다.

지금까지 필자는 玄海灘의 두 물길이 하나는 전쟁의 길, 하나는 평화의길 통신사의 길이었음을 언급하고 그 물길이 닿는 지역을 중심으로 역사 문화를 살펴 보았다. 그리고 연행사의 길 통신사의 길 그 물길이 가져다 준 문화의 성격과 장차 바람직한 문화 교류의 길을 탐색해 보았다.

오늘 부산을 떠나 하카다만으로 향하는 이 여행도 한일 양국 간의 진지한 문화 교류의 한 장이 되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참고문헌>
△소재영 [동아시아문화교류론] 제이앤씨 2011 △소재영 [한국문화의동아시아적탐색] 태학사 2008 △양우뢰 [연행과중조문화관계] 상해사서출판사 2011 △최관 [문록경장의역] 강담사 1994 △유홍준 [나의문화유산답사기(규슈)] 창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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