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보고와 이순신 조류의 흐름을 이용했다-

 

얼마 전 모방송사에서 방영한 장보고와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를 보고 필자는 조금이나마 긍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필자가 근무하는 국립해양조사원은 지난 60년간 우리나라 관할해역의 해양조사를 담당해온 기관으로서 각종 해양조사를 실시하여 해양정보를 제공하는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데, 이러한 해양정보가 나라를 구하고 해상권을 장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정확한 해양정보가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는 기회를 갖게 하였다.


그래서 필자는 새해벽두에 우리 선조들이 바다를 어떻게 이해하고 활용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인류의 문명은 대하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이전의 인류는 바다를 생활의 터전으로 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 증거로서 우리가 흔히 조개무지라고 하는 패총의 존재이다. 인류가 농경문화를 영위하기 전에 인류는 해안가에서 수렵과 채취에 의존해서 생활을 해왔다는 말인데, 왜 인류의 문명은 해안가를 떠나 강가에서 탄생했을까? 해안에 널린 어패류를 손쉽게 구할 수 있고, 강과 바다가 만나는 강의 하류에는 먹을 물도 풍부하고 비옥한 토양을 이용한 농경도 가능했을 텐데..., 필자의 소견으로는 계속되는 바다와의 싸움(?)으로 인해 문명의 싹을 키울 여력이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수시로 찾아오는 태풍, 해일 등의 자연재해와의 싸움이 인류를 지치게 했을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인류의 문명은 다시 바다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바다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나 지혜가 생겼고 바다건너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왕래의 필요성이 절실했을 것이다.

 

극동의 해상권 장악한 장보고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측면에서 위대한 개척자가 있었다. 지금 한창 복원계획이 진행 중인 청해진을 개척한 장보고가 바로 세계사에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위대한 바다의 개척자인 것이다.


근래 들어 장보고에 대한 평가는 다소 장황하고 과장된 느낌이 들 정도지만 청해진의 발굴과정에서 드러나는 그의 해양활동 흔적을 살펴보면 그 치밀함과 해양이용의 지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장보고의 활동시기인 9세기 무렵 신라는 당나라와 일본과의 바다를 통한 무역과 인적 교류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당시 장보고가 이끄는 우리 수군은 월등한 조선술과 항해술, 그리고 바다에 대한 이해도를 무기로 극동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해상권 장악의 첫째는 뱃길의 개척과 장악일 것이다.


장보고는 이러한 뱃길의 개척과 이용을 통해서 당시 극동의 해상을 주름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신라와 당나라, 일본간의 뱃길은 백제인들에 의해 이미 개척되었고 이용되었다. 그러나 장보고는 양국간 교역의 전초기지를 청해진으로 삼아 백제인들보다 진일보된 전략적 측면의 바다이용 지혜를 발휘하였다.


이러한 바다이용의 지혜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하는 다도해 백성들의 오랜 세월 바다생활을 통한 지혜와 경험이 큰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의 당나라와 신라, 일본 간의 뱃길은 당나라와는 청해진에서 명량수도(올돌목)을 지나 서해연안을 거슬러 당진 또는 옹진에서 서해를 횡단하는 뱃길을 가장 많이 활용한 것 같은데, 해양학적으로 이 루트는 우리나라 남서해안의 조류의 흐름을 이용하면 당시의 무동력선(범선)으로도 그리 힘들이지 않고 도달할 수 있는 최적의 경로이다.

 

그 이유는 청해진 부근의 조류의 흐름은 주로 동-서방향으로 주기적으로 흐르지만 명량수도를 지나면서 우리나라의 서해연안은 남-북의 주기적인 조류흐름을, 당진과 옹진 부근의 백령도 부근에서는 북서-남동방향의 흐름이 주된 조류흐름 방향으로 적절한 시간대만 맞춘다면 별 어려움 없이 양국을 오갈 수 있는 천혜의 바닷길이 열리는 것이다.

현대에도 이 조류의 흐름은 선박의 경제적인 항로 유지를 위해 아주 중요하게 활용되고 있다.


물론 당나라만을 생각했다면 예전 백제인들이 사용했던 당진 정도가 적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과의 중계를 생각하면 청해진이라는 위치가 얼마나 해양학적이나 지정학적으로 중요한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일본과의 뱃길은 당나라와의 뱃길과는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두 가지의 해양학적인 현상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기적인 흐름인 조류와 지속적인 흐름을 보이는 해류가 그것이다.


우리나라 남해 연안의 해수의 흐름은 동-서로 흐르는 조류의 흐름이 지배적이지만 남해와 제주도사이의 연근해는 우리가 흔히 대마난류(쓰시마해류)라고 일컫는 동쪽으로 지속적으로 흐르는 흐름이 지배적이다. 이와 같이 조류의 흐름을 이용한다면, 일본 또한 그리 멀지 않은 나라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청해진 부근은 복잡한 해안선과 섬들 사이의 복잡한 수로에 흐르는 조류의 변화무쌍함을 이용하면 언제 어느 곳이든 떠날 수 있고 또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를 생각할 때 일본과 중국의 상선들이 극동지역을 왕래함에 있어 청해진은 그야 말로 길목인 것이고, 장보고는 그 길목을 지키며, 미국의 역사학자 라이샤워가 말한 세계 해양사에서 가장 찬란했던 해양 상업제국의 선봉에 서있었던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지금의 도선사가 당시의 장보고 시대에 최초로 생기지 않았을까 한다. 왜냐하면 당나라나 일본이 청해진을 경유해서 해상을 왕래하기위해서는 우리나라 연안의 복잡한 조류 흐름, 굴곡이 심한 해안선과 변화 그리고 낮은 수심 등에 정통한 신라인이 없어서는 안전한 항해를 보장할 수 없었고, 모든 상황을 아는 장보고가 그냥 놓아두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사적으로 해로가 막혀 해양진출이 부진할 때 그 나라의 국력은 쇠퇴했고 왕성할 때 그 나라의 국력은 신장해왔다. 우리의 경우도 적극적으로 바다를 경략하고 장악했던 백제와 장보고시대 이후 신라는 몰락의 길로 들어섰고, 일본과 당나라 송나라의 극동 해상권 장악 이후 자유로운 해상활동을 통해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의 국력신장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13:130의 불가사의 명량해전
장보고 시대는 다양한 해양정보를 이용하여 극동아시아의 해상권을 장악했다면 이순신은 해양정보를 이용하여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운 조국을 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서 “호남이 없었으면 나라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 의미는 호남에 살고 있는 바닷사람들의 바다에 관한 경험과 바다를 이용한 지혜가 나라를 구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당시에 명량해전을 비롯한 여러 해전에서 조석과 조류의 흐름을 작전에 이용하여 일본 수군을 물리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시 과학의 발달수준이나 여러 가지 상황에 비추어 보았을 때 군 작전에 사용할 만큼의 정확도 높은 예측이 가능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참으로 놀랄만하다. 명량해협 부근은 조석변화와 조류의 흐름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하고 복잡하여 예측이 어려운 해역으로 현재도 이 해역의 조석과 조류의 흐름을 예측하기는 쉽지 않은 지역이다.


필자는 우리나라의 조석과 조류를 총괄하고 예보하는 기관인 국립해양조사원의 예측자료를 활용하여 세계 해전사에 불가사의한 해전으로 남아 있는 명량해전 당시의 명량해협(울돌목)의 조석과 조류의 상황과 전투상황을 재조명해보기로 하겠다.


명량해협은 조류의 흐름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한 지역으로 최강유속이 12노트에 이르는 지역으로 지금의 동력선으로도 역류를 거슬러 올라가기 힘든 해역이다. 그리고 지형적으로 그 폭이 좁아 가장 좁은 폭이 120m 정도로 물이 가장 많이 빠지게 되는 저조(간조)시에는 80m로 그 폭이 감소하는 지형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해양환경은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우리 수군뿐만 아니라 일본의 수군도 파악하고 있을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된다. 일본의 수군은 조선에 파병된 거의 모든 수군을 집결하여, 이 올돌목을 지나 서해의 당진이나 한강을 통하여 수도 한양진입을 목표로 수송선을 포함한 300여 척의 함대를 어란진에 대기시키고, 시간과 조류의 흐름을 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 명량해전 당일인 1597년 음력 9월 16일 올돌목의 시간별 조류의 흐름을 계산해 보면 아침 6시부터 조류의 흐름은 올돌목을 통해 서해로 빠지기 시작하여 8시~9시경에 올돌목의 유속이 제일 강하게 흐르게 되며, 이후 유속이 점차 감소하여 12시경까지 지속되다가 12시경에 흐름의 방향이 반대로 바뀌어 18시까지 남동쪽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그리고 12시경에 올돌목은 해수의 높이가 가장 높아지는 고조(만조)가 된다.


이러한 조류의 상황과 병력의 규모를 놓고 볼 때 일본 수군의 입장에서 6시경에 어란진을 출발하여 순류를 타고 해수면의 높이가 어느 정도 높아져 조금이라도 많은 함선이 올돌목을 횡으로 빠질 수 있는 10시경에 우리의 수군과 전투를 개시하여, 물량공세와 역류로 버티기 불리한 우리 수군을 상대로 조류의 방향이 바뀌는 12시까지 전투를 마무리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고 기동력과 수적인 우위를 지키기 위해 규모가 큰 안택선보다는 소형전함 세끼부네를 선봉으로 130여 척의 함대로 올돌목으로 진격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의 우리 수군은 일본 수군의 이러한 전략을 간파하고 있었으며 일본군이 대략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조류의 흐름보다 정확하고 미세한 흐름을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선 이순신장군은 조류의 흐름이 가장 강한 올돌목 보다 흐름이 어느 정도 약해진 후방에서 빠른 조류를 이용하여 좁은 올돌목을 통과하는 일본함대의 선봉을 함포로 겨냥했다.


올돌목 주변의 조류의 흐름은 좁은 올돌목의 좁은 수로에서는 전투 당일8노트(4.1㎧) 정도의 유속을 보이지만 이 지점에서 500m 정도만 벗어나면 1.5(0.7㎧)노트도 안 되는 유속의 세기를 보이는 지점별 편차가 그 어느 곳보다 큰 지역인 것을 이미 우리 수군은 알고 함대를 포진시키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수군은 좁고 빠른 물살이 흐르는 올돌목을 빠르게 빠져나와 접근전을 펼치기 위해 서둘렀을 것이다.


그러나 만반의 준비를 하고 대기하는 우리 수군의 함포가 일본 수군 선봉에 선택적으로 집중포화를 가했고 선봉이 무너진 뒤의 상황은 빠른 조류와 뒤엉켜 어떻게 되었을지는 명약관화한 일이다. 이러한 전투양상은 12시까지 계속되었을 것이고 운명의 시간인 12시 이후 일본함대의 선수(배앞쪽)의 방향은 돌아가게 되고 우리 수군의 추격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상황은 종료된 것으로 봐야할 것이다.


물론 전투개시 초반의 우리 수군은 역류를 버티며 있어야 한다는 불리함이 있었다. 그러나, 10시 이후의 물의 흐름은 급격히 약화되어 노젓는 병사들의 체력적인 부담은 그 만큼 보충될 수 있었고, 일본군을 대기하고 있던 우리 수군의 방어선이 올돌목을 통과한 강한 물의 흐름이 약화되는 지점이었기에 일본 수군이 생각했던 것처럼 우리 수군이 역류를 버티며 전투를 지속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 일본수군의 결정적인 패인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모든 전황은 이 지역의 바다를 경험하고 알지 못하면 불가능했던 일이고, 또 이러한 경험과 지식을 전투에 활용한 이순신 장군의 지략과 판단력에 다시 한번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바다를 장악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바다를 알고 이용하는 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또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 바다의 조사를 책임지고 있는 기관의 대표로서 필자는 새해벽두에 바다에 관한 정보의 중요성을 새삼 되새기면서 우리나라가 해양강국으로 거듭 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바다를 새롭게 이해하고 바다에 관한 정보를 적극 활용해 나가야만 할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필자 주요약력>
△‘83. 2. 성균관대학교 △‘94. 2. 미국 오레곤대(경제학 석사) △‘82. 3. 행정사무관 임용, 서울시 및 해운항만청 △‘94. 2. 기획예산담당관실(기획담당) △‘96. 2. 미국 포틀랜드 오클랜드 항만청 △‘98. 3. 기획관리실 법무담당관 △‘05. 6. 현재 국립해양조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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