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고동 울어 울어 연락선은 떠난다~”

일제강점기 때 관부연락선에 얽힌 대중가요
1937년 발표된 장세정 대표곡…전형적 엔카풍

쌍고동 울어 울어 연락선은 떠난다
잘 가소 잘 있소 눈물 젖은 손수건
진정코 당신만을 진정코 당신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눈물을 삼키면서
떠나갑니다 울지를 말아요

파도는 출렁출렁 연락선은 떠난다
정든 님 껴안고 목을 놓아 웁니다
오로지 그대만을 오로지 그대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한숨을 삼키면서
떠나갑니다 울지를 말아요

바람은 살랑살랑 연락선은 떠난다
뱃머리 부딪는 안타까운 조각달
언제나 임자만을 언제나 임자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끝없이 지향 없이
떠나갑니다 잊지를 말아요


 
 
박남포 작사, 김해송 작곡, 장세정 노래의 ‘연락선은 떠난다’는 1937년 2월에 발표됐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36년간 지배하면서 대륙침략도구로 이용했던 관부연락선(1905~1945년 부산~일본 시모노세키를 오간 배)에 얽힌 노래다. 전형적인 일본의 단조음계로 된 엔카풍演歌風이다. ‘부웅~’하는 슬픈 뱃고동소리가 깔린 전주곡과 함께 여가수 장세정의 애조 띤 음색이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사람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가슴속의 억울함과 답답함을 쓸어내렸다. 한 잔 술에 취해 이 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면 삶에 대한 힘이 솟구치곤 했다.
 

노래 배경지는 만남과 이별의 부산항
이 노래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대중가요 ‘귀국선’과 함께 일제강점기 시절 힘들게 산 우리 겨레의 애환과 한을 소리로 더듬어볼 수 있는 것이어서 의미가 크다. 일제강점기 때 대한해협을 오가는 연락선은 우리 민족에겐 사지死地로 끌려가는 눈물의 뱃길로 비애의 대상이었으나 일본인들에겐 기쁨과 희망의 교통수단이었다. ‘연락선은 떠난다’는 이런 서민들의 감정을 나타낸 감성적 가요로 식민지 조선의 어려웠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노래로 평가되고 있다. 오케레코드에서만 활동한 장세정의 대표곡인 이 노래는 월북작가 작품이란 꼬리표가 따라 붙여 1950년 말 가사를 손질, 1960년대 다시 취입해야만 했다. 1939년 2월 나온 장세정의 또 다른 곡 ‘항구의 무명초’도 항구를 소재로 한 것으로 인기를 끈 불멸의 가요다.

이들 노래의 배경지 부산항은 시대와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와 해석을 달리하는 만남과 이별의 창구다. 일제강점기 땐 조선과 대륙으로 나가 새로운 기회를 잡으려는 일본사람들의 입구였지만 생활터전에서 내쫓긴 우리 조선인들에겐 어쩔 수 없는 출구였다. 부산항을 통한 조선인들의 출향이 이주와 이산이라면 후기엔 일본의 전쟁획책과 인적 동원에 따른 강제출향이 이어졌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기쁨은 잠시 뿐 전국은 혼란에 빠졌다. 고국을 떠났던 수많은 조선인들이 돌아온 부산항은 더욱 그랬다. 1947년까지 약 250만명이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그 무렵 부산인구는 28만여명이었지만 1949년엔 50만명쯤 됐다. 20여만명이 고향으로 가지 않고 그곳에 산 것이다.

‘연락선은 떠난다’에 얽힌 에피소드 몇 가지가 있다. 먼저 개사곡이 나왔다는 점이다. 이 노래는 단순히 이별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었지만 그 무렵 조선인들은 ‘무엇을 원망하나 나라가 망하는데 / 집안이 망하는 것도 이상할 게 없구나 / 실어만 갈 뿐 실어만 갈 뿐 / 돌려보내 주지 않네 / 눈물을 삼키면서 떠나갑니다 / 연락선은 지옥선’으로 바꿔 부르며 강제동원과 망국의 슬픔을 노래했다.
다음은 일본가수도 이 노래를 불렀다는 점이다. 1951년 일본의 인기여가수 스가와라 쓰즈코菅原都都子가 ‘연락선의 노래連絡船の唄’란 제목으로 취입해 유행시켰다. 그러나 작곡자이름을 가네야마金山松夫로 표기한데다 엔카풍이라 지금도 일본에선 그들의 작품으로 잘못 알고 있다.
조선악극단에서 활동한 장세정의 서명이 담긴 ‘연락선은 떠난다’(작가 박영호·작곡 김송규·노래 장세정·1937년) 친필서명음반도 발견돼 눈길을 끈다. 우리나라 대중가요사의 최초 사인음반으로 2014년 6월 18일 오후 서울 광화랑에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자료원 주최로 열린 ‘원로예술인의 증언으로 보는 그때, 우리의 노래 : 한국 대중가요 고전 33선’ 전시회 때 선보인 것이다.
노래와 같은 제목의 영화 ‘연락선은 떠난다’도 만들어졌다. 로맨스멜로물로 1964년 개봉됐다. 감독 김진섭, 출연 박노식, 이경희, 김승호, 신카나리아 등이 나온다.
 

 
 
장세정은 화신백화점 점원출신
1921년 평양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집안(부친 장한무)의 딸로 태어난 장세정(창씨개명한 이름 : 하리모토 세이테이, 張田世貞)은 1936년 평양 가요콩쿠르에서 우승컵을 차지하고 1936년 11월 평양방송국 개국방송에 출연, 가수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이듬해 ‘연락선은 떠난다’를 발표, 정상급가수가 됐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를 여의고 조부모 손에서 자란 그는 가수가 되기 전엔 평양 화신백화점의 악기상점원으로 일했다. 1946년부터 KPK악극단 전속배우로 뮤지컬 ‘샤로매’, ‘카르멘’, ‘춘희’ 등에도 출연했던 그는 ‘눈물 젖은 두만강’으로 유명한 김정구와 듀엣으로 부른 ‘만약에 백만원이 생긴다면’과 ‘처녀야곡’, ‘눈물’, ‘항구의 무명초’, ‘역마차’, ‘울어라 은방울’, ‘고향초’ 등 800여곡을 남겼다.

1973년 미국으로 간 뒤에도 현지에서 해외교포위문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1996년 8월 신나라레코드는 일제강점기시대 SP판을 ‘유성기로 듣던 불멸의 명가수’란 이름의 CD전집으로 만들면서 13편의 독집편 중 장세정편을 선보였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던 그는 2003년 2월 16일 오후 5시31분(현지시간) 미국 LA에서 지병으로 별세, 미국 할리우드 포레스트 론 공원묘지에 잠들었다. 향년 82세. 유족으론 3남1녀(한영, 한웅, 한세란, 한성)가 있다.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는 서울 마포구 도화동 사무실에 빈소를 마련, 추모식을 가졌다.
이 노래를 작사한 박남포(본명 박창오)는 마산출신으로 진방남, 반야월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는 ‘연락선은 떠난다’의 노랫말을 맨 처음 쓴 작사자 박영호(1911~1953년)가 8·15광복 후 월북하는 바람에 1950년 말 가사를 손질해 다시 만들었다. 박영호는 조명암(1913~1993년)과 함께 일제강점기 때 가요계를 이끈 양대 작사가로 꼽힌다. 강원도 통천태생으로 광명보통학교, 일본 와세다대를 나온 그는 극작가·작사가(유행가·신민요)로 활동했다. 예명은 처녀림處女林, 불사조不死鳥, 김다인金茶人. ‘낙화삼천’, ‘항구의 선술집’, ‘유랑극단’ 등의 작사가로 유명하다. 콜럼비아음반, 빅타음반, 풀리돌음반에 여러 유행가를 남겼다. 표현주의적 색채가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한국근대연극사에서 무대상연된 작품을 가장 많이 창작한 작가 중의 한 명이다.
 

작곡자 김해송은 이난영의 남편
‘연락선은 떠난다’ 작곡자 김해송(본명 김송규)은 K.P.K악단이란 쇼단을 만들어 미국의 재즈음악과 우리나라 민요를 접목시킨 음악으로 개성 있는 무대를 꾸몄다. 1911년 평남 개천에서 태어나 1935년 가수로도 데뷔한 그는 우리나라 뮤지컬역사에서 선구적 위치에 있었다. 소년시절 평양 숭실전문을 다니다 집안연고에 따라 공주로 내려와 공주고보를 졸업했다. 재학시절부터 기타연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조선악극단 지휘를 맡고 있던 작곡가 손목인을 찾아가 오케레코드사 전속연주자로 뽑혔다. 그는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가수 이난영의 남편으로 ‘오빠는 풍각쟁이’, ‘팔도장타령’, ‘나무아미타불’, ‘다방의 푸른 꿈’, ‘코스모스 탄식’, ‘우러라(울어라) 문풍지’, ‘화류춘몽’, ‘잘 있거라 단발령’, ‘어머님 안심하소서’, ‘요즈음 찻집’, ‘경기 나그네’, ‘고향설’ 등 유명한 곡들을 남겼다. 그는 6·25전쟁 때 납북돼 생사를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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