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박건조에 관한 선수금환급보증금 지급청구와 권리남용

-대법원 2015. 7. 9. 선고 2014다6442 판결-

한국선급 박범식 회장
한국선급 박범식 회장
Ⅰ. 사안의 개요
(1) 원고 P, A는 파나마 공화국 법률에 따라 설립된 회사로서 선박의 소유를 목적으로 하는 회사, J해운 주식회사는 원고들의 모회사, 피고는 대한민국 은행, 주식회사 O조선은 선박건조회사이다.
(2) J해운은 2007. 8. 9. O조선과 사이에 1006호 선박 및 1009호 선박에 대하여 대금을 각 미화 34,200,000달러로 하는 선박건조계약(이하 ‘이 사건 계약’)을 체결하였다. 선박건조의 주요 공정은 ① 강재 절단,1) ② 용골 거치, ③ 진수, ④ 시운전, ⑤ 완공, ⑥ 인도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건조자는 최초 공정인 강재절단 이전에 미리 강재를 구입하고 다른 자재를 준비해야 하는 등 초기 투입비용이 전체 선박건조비용의 30% 이상에 해당하고 공정 진행 과정에서 계속적으로 비용이 투입되므로, 선박건조계약은 일반적으로 선박건조가 완공되고 선박이 인도된 후에 선박대금을 일시에 지급받는 것이 아니라 각 공정마다 선박건조대금을 분할하여 지급받는 형태로 진행된다.2)

(3) O조선은 피고에게 선수금환급보증을 의뢰하였고, 피고는 2007. 9. 20. 수익자를 J해운으로 하는 선수금환급보증서(Letter of Guarantee, 이하 ‘이 사건 보증서’)를 발급하였다.3)
(4) J해운은 이 사건 보증서 발급 이후인 2007. 9. 27. O조선에게 이 사건 선박들에 대한 1차 선수금을 지급하였고, 2007. 11. 19. J해운, O조선과 원고들은 1006호 선박에 대한 선박건조계약의 매수인 지위를 원고 P로, 1009호 선박에 대한 선박건조계약의 매수인 지위를 원고 A로 각 변경하는 계약을 체결하였으며, 원고 P는 2008. 7. 30. O조선에게 1006호 선박에 대한 2차 선수금을 지급하였다.

(5) 원고들이 이 사건 선박들의 후속 선수금을 지급하지 아니하자, O조선은 2009. 10. 8. 및 2009. 10. 9. 원고들에게 이 사건 계약상 채무불이행default에 해당한다고 통지하고, 2009. 10. 16. 원고들에게 이 사건 계약을 모두 해제한다고 통보하였다. 이에 대하여 원고들은 2009. 10. 20. O조선에 위 계약해제가 적법하지 않으므로 이 사건 계약은 유효하고 적절한 용골거치 및 강재절단 절차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취지의 공문을 보냈다.

(6) 원고들은 2011. 8. 26. O조선에게 ‘O조선의 채무불이행을 이유로 이 사건 계약을 해제하므로 이미 지급한 선수금을 환급하라’고 요구하였으나, O조선은 위 선수금을 반환하지 아니하였다. 그러자 원고들은 2011. 11. 25. 피고를 상대로 이 사건 보증서에 기한 선수금환급보증금의 지급을 청구하는 소를 제기하였다.

(7) 피고는 이 사건 계약이 원고들의 후속 선수금지급의무 불이행을 이유로 O조선에 의해 이미 적법하게 해제되어 원고들이 선수금환급을 청구할 권리가 없음이 명백함에도 이 사건 보증서에 기하여 청구하는 것은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원고들은 O조선의 선수금지급청구가 그 요건을 갖추지 못하였거나 권리남용에 해당하고 또 불안의 항변권을 이유로 선수금지급청구를 거절할 수 있으므로 O조선의 위 계약 해제가 부적법하다고 주장하였다.
 

Ⅱ. 재판의 경과
1. 제1심4) 및 항소심5)

제1심 및 항소심은 아래와 같은 이유를 들어 원고들의 청구를 모두 기각하였다.
(1) O조선이 1006호 선박에 관한 용골거치, 1009호 선박에 관한 강재 절단을 시행하였음에도, J해운으로부터 1006호 선박의 매수인 지위를 인수한 원고 P가 위 선박에 관한 3차 선수금을, 1009호 선박의 매수인 지위를 인수한 원고 A가 위 선박에 관한 2차 선수금을 지급하지 아니함에 따라, O조선이 이 사건 계약을 적법하게 해제하고 기왕에 지급받은 1006호 선박에 관한 1, 2차 선수금 및 1009호 선박에 관한 1차 선수금을 손해의 전보에 충당한 이상 원고들로서는 O조선에 대하여 선수금의 환급을 청구할 권리가 없다.

(2) O조선의 선수금지급청구의 요건, 원고들의 채무불이행 요건, 원고들이 어떠한 분쟁이나 불일치를 이유로도 선수금지급을 지체할 수 없음은 O조선과 사이의 이 사건 계약서에 명문으로 기재되어 있는 점, O조선의 용골거치 및 강재절단 시행 통지, 선수금지급청구, 원고들에 대한 채무불이행 선언 및 계약 해제의사표시는 모두 서면으로 통지되었고 그 기재에서 오해의 여지도 없는 점, 원고들은 O조선이 먼저 해제통지를 한 사실을 알면서도 계약상 근거 없는 주장을 하면서 그 해제통지의 효력을 부인하고 선박건조대금의 감액만을 요구해 온 점, J해운은 외항화물운송, 선박용선 및 매매업 등을 목적으로 하는 회사로서 선박건조계약 및 공정단계에 대해 잘 알고 있거나 손쉽게 알 수 있는 지위에 있음에도 이 사건 계약서에 존재하지 않는 조건을 O조선에 요구하고 분쟁해결을 위해 중재를 신청하지도 않은 점 등을 고려하면, 원고들이 O조선에 대하여 선수금환급을 청구할 아무런 권리가 없음이 객관적으로 명백하고 원고들은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음에도 이 사건 보증서의 추상성 및 무인성을 악용하여 이 사건 청구를 한 것이므로 권리남용에 해당한다.
 

2. 상고심 : 대상판결6)
대법원은 “이 사건 보증금 청구 당시의 사정, 즉 이 사건 소 제기 전에 이루어진 원고들과 O조선 사이의 회생채권조사확정재판에서도 O조선의 위 계약 해제가 적법한지 여부가 쟁점이 되어 1년여에 걸쳐 심문절차가 이루어졌음에도 결론이 내려지지 못한 채 회생절차폐지로 종결된 점 등을 고려하면, 이 사건 소 제기 당시 원고들이 O조선에 대하여 선수금환급청구권이 없음에도 이 사건 보증금을 청구하는 것임이 피고에게 객관적으로 명백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이유로 원심판결을 파기하였다.
 

Ⅲ. 독립적 은행보증의 법리
1. 의의

은행이 보증을 하면서 보증금 지급조건과 일치하는 청구서 및 보증서에서 명시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서류가 제시되는 경우에는 그 보증이 기초하고 있는 계약이나 이행제공의 조건과 상관없이 그에 의하여 어떠한 구속도 받지 않고 즉시 수익자가 청구하는 보증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정하였다면, 이는 주채무에 대한 관계에서 부종성附從性을 지니는 통상의 보증이 아니라, 주채무자인 보증의뢰인과 채권자인 수익자 사이의 원인관계와는 독립되어 원인관계에 기한 사유로는 수익자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수익자의 청구가 있기만 하면 은행의 무조건적인 지급의무가 발생하게 되는 독립적 은행보증(first demand bank guarantee)이다.7)
 

2. 경제적 효용
독립적 은행보증은 국제거래에서 채권자가 직면하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고려하여, 보증인으로 하여금 보증금을 일단 지급하고 나중에 다투도록 함으로써(pay first, argue later), 주채무자가 무자력 상태에 빠지게 될 위험과 국제분쟁해결절차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불확실성 및 비용부담으로부터 채권자를 보호하려는 것이다.8) 또한 채무자에게 수익자와의 거래를 성사시키게 하고, 비경제적인 현금예치를 대치함으로써 거래비용을 줄이는 역할을 한다.9) 독립적 은행보증은 지급구조의 단순성과 신속성에 힘입어 확고한 국제거래관행으로 자리 잡았다.10)
 

3. 추상성과 무인성
독립적 은행보증의 보증인으로서는 수익자의 청구가 있기만 하면 보증의뢰인이 수익자에 대한 관계에서 채무불이행책임을 부담하게 되는지를 불문하고 보증서에 기재된 금액을 지급할 의무가 있으며, 이 점에서 독립적 은행보증에서는 수익자와 보증의뢰인 사이의 원인관계와는 단절되는 추상성 및 무인성이 있다.
 

4. 독립성의 예외
가. 미국

미국에서는 독립적 은행보증과 유사한 보증신용장(standby letter of guarantee)이 많이 사용되는데,11) 판례는 보증서가 요구하는 형식적 요건에 부합하는 보증금지금청구가 있는 경우 사기fraud가 명백한 경우가 아니면 독립성의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다.12)
 

나. 영국
영국에서도 사기의 경우에는 독립성의 예외가 인정된다. 그러나 단순한 사기의 의심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수익자의 사기가 명백하게 증명된 경우가 아닌 한 보증금의 지급거절은 불가능하다.13)
 

다. 독일
독일 판례는 독립적 은행보증의 독립성과 추상성을 유지하면서도 명백히 권한 없는 지급요구에 대한 보호라는 보증의뢰인의 이익을 조화시키기 위하여 권리남용의 항변을 허용하고 있다.14) 수익자와 주채무자 사이에 즉시 대답할 수 없는 실질적·법적 다툼이 있는 경우라면 이는 모든 사람에게 명확하게 인식될 수 있는 권리남용이라고 볼 수 없다.15)
 

라. 우리나라의 경우16)
(1) 독립적 은행보증의 경우에도 신의성실 원칙이나 권리남용금지 원칙의 적용까지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니므로, 수익자가 실제로는 보증의뢰인에게 아무런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은행보증의 추상성과 무인성을 악용하여 보증인에게 청구를 하는 것임이 객관적으로 명백할 때에는 권리남용에 해당하여 허용될 수 없고, 이와 같은 경우에는 보증인으로서도 수익자의 청구에 따른 보증금의 지급을 거절할 수 있다.17)

(2) 그러나 원인관계와 단절된 추상성 및 무인성이라는 독립적 은행보증의 본질적 특성을 고려하면, 수익자가 보증금을 청구할 당시 보증의뢰인에게 아무런 권리가 없음이 객관적으로 명백하여 수익자의 형식적인 법적 지위의 남용이 별다른 의심 없이 인정될 수 있는 경우가 아닌 한 권리남용을 쉽게 인정하여서는 아니 된다.18)

(3) 한편 보증의뢰인과 보증인 사이의 은행보증서의 발행을 위한 보증의뢰계약은 그 보증에 따른 사무처리를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 위임계약에 다름 아닌 것으로서, 보증인은 그 수임인으로서 상대방인 보증의뢰인의 당해 보증서에 관한 이익을 보호하여야 할 의무를 부담하게 되고, 따라서 보증인은 특히 수익자의 보증금 지급청구가 권리남용임이 객관적으로 명백할 때에는 보증의뢰인에 대한 관계에서 그 지급을 거절하여야 할 보증의뢰계약상 의무를 부담한다.19)
 

Ⅳ. 대상사안의 검토
(1) 독립적 은행보증인 이 사건 보증서에 기한 원고들의 청구가 권리남용에 해당하기 위해서는, 원고들이 이 사건 소 제기를 통하여 보증금을 청구할 당시 O조선에 대하여 아무런 선수금환급청구권이 없음에도 독립적 은행보증의 수익자라는 법적 지위를 남용하여 청구하는 것임이 독립적 은행보증인인 피고에게 객관적으로 명백하다고 인정되어야 한다.20) 또한 권리남용 여부에 관한 판단은 분명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당장 확보할 수 있는 증거에 의하여 기초하여 이루어져야 하고, 원인관계상의 분쟁에 관한 자세한 심리를 통하여 비로소 알 수 있는 사정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21)

(2) 그런데 원심은 원고들과 O조선 사이의 선박건조계약관계를 세밀하게 판단하여, 독립적 은행보증에서 권리남용 여부의 판단을 마치 원인관계상 분쟁에서 당사자의 책임소재를 밝히는 것처럼 취급하고 있다. 이는 추상성·무인성이라는 독립적 은행보증제도의 특성에 반하는 것이고, 독립적 은행보증이라는 거래수단을 선택한 당사자의 의사와 은행보증이 국제상거래에서 수행하는 기능을 간과한 것이어서 부당하다.22)

(3) 대상판결은 세계 조선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선박건조계약과 관련한 선수금환금보증금 청구사건에서 독일의 판례와 유사하게 권리남용 법리의 적용을 엄격하게 제한함으로써, 선박발주자 보호를 위한 독립적 은행보증제도의 실효성을 보장하였다는데 의의가 있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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