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고은 시인이 발표한 詩가 노랫말 돼

‘세노야’는 멸치잡이어부들이 그물 끌어올릴 때 내는 소리
어원 둘러싸고 논란…같은 제목의 방송드라마, 영화 등 제작

세노야 세노야
산과 바다에 우리가 살고
산과 바다에 우리가 가네

세노야 세노야
기쁜 일이면 저 산에 주고
슬픈 일이면 님에게 주네

세노야 세노야
기쁜 일이면 바다에 주고
슬픈 일이면 내가 받네

통영 앞바다에 펼쳐진 아름다운 모습의 한려해상 전경   (사진-통영시)
통영 앞바다에 펼쳐진 아름다운 모습의 한려해상 전경   (사진-통영시)

중·장년층 이상이라면 한번 쯤 흥얼거려봤을 양희은의 히트곡 ‘세노야’는 선율이 아름다운 가요다. 4분의 3박자, 발라드 곡으로 멜로디가 부드럽고 노랫말에 우리들의 삶이 녹아있어 대중들로부터 사랑 받고 있다. 한국인들의 고유정서인 한恨이 묘사돼 있다. 절제된 슬픔이 절절히 배어있어 통기타, 청바지세대들이 이 노래에 열광했다.

한때 대학생들 MT 때 단골 곡이었던 ‘세노야’는 KBS 2TV ‘불후의 명곡’(양희은 편) 프로그램에서 젊은 가수들이 불러 화제를 모았다. 2012년 6월 16일과 23일 저녁 방송 때 첫 출연한 보컬그룹 노을(강균성, 전우성)이, 2014년 12월 20일 밤 방송에선 다섯 번째 순서의 손호영과 동준도 열창했다.
‘세노야’가 방송(라디오) 전파를 타고 처음 알려지기 시작한 건 1970년 가을이었다. 미국의 매력적인 신세대 피아니스트 짐 브릭먼(Jim Brickman)의 음반에도 들어 있다. 1990년 한겨레신문이 창간 두 돌을 맞아 뽑은 ‘겨레의 노래’로 선정된 적 있는 ‘세노야’는 조영남, 최백호, 조항조, 최양숙, 나윤선, 김란영 등의 가수는 물론 탤런트 겸 배우 최민수도 리메이크해 불렀다.
 

고은 시인, 1960년 말 취중에 즉흥으로 일필휘지
수십 년간 클래식의 반열에 올라 한국인들을 위무해온 이 노래는 외국 곡으로 고은(1933년~) 시인이 1970년 발표한 시가 노랫말이 됐고 김광희 서울대 교수가 우리 정서에 맞게 작곡했다. 방송사에서 프로그램 배경음악으로 쓰기위해 만들어진 ‘세노야’는 고 시인이 “1960년 말 취중에 즉흥으로 일필휘지한 게 노랫말이 됐다”고 언론칼럼에서 밝히고 있다.

노래가 만들어진 건 1960년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8년 봄 고 시인이 미당 서정주 시인과 함께 진해 육군대학 초청 문학강연을 끝낸 뒤 육대 총장이 해군의 도움을 받아 준비한 소형 해군함정을 타고 한려수도를 돌게 됐다. 두 시인은 술과 안주를 실은 군함에서 남해바다를 돌며 밤새껏 잔을 주고받았다. 어느덧 새벽을 맞았다. 통영 앞 바다 저 멀리에서 구슬픈 소리가 들렸다. “세야, 노야, 세노야, 세노야~.” 얼핏 들으면 민요 같기도 하고 해서 가까이 가봤다. 멸치잡이 배 어부들이 그물을 끌어올리며 장단처럼 내는 소리였다. 서늘한 새벽바람을 타고 들여오는 애잔한 선율에 술이 깬 고 시인은 구성지게 내는 “세야, 노야~” 구절을 잊을 수 없었다.

이런 기억을 바탕으로 한 노래가사가 태어난 곳은 서울 종로 5가 동숭동 어느 선술집이다. 1968년 겨울 막걸리 집에서 술에 취한 고 시인이 남해에서 들었던 “세야, 노야~”를 떠올려 시를 한 수 썼다. 한려수도 유람 때 군함에서 서정주는 술에 취해 나가떨어졌고 혼자 남은 고 시인이 흥얼거렸던 “산과 바다에 우리가 살고~ 기쁜 일이면 저 산에 주고 슬픈 일이면 임에게 주리~”란 시 구절이 절창의 노랫말이 된 것이다. 선술집엔 두 여대생이 동석해 ‘세노야’가 만들어지는 데 힘을 보탰다. 서울대 음대생이었던 김광희가 오선지를 채우고 친구 최양숙(성악가, 가수)이 노래를 불렀다.

전북 옥구군 미면米面(지금의 군산시 미룡동)에서 태어난 고 시인은 1958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1960년 첫 시집 발표 후 시, 소설, 평론 등 155권의 저서를 냈다. 그의 작품은 20여개 외국어, 50여 권으로 번역됐다. 스님생활도 했던 그의 시들 중 ‘세노야’, ‘작은 배’, ‘가을 편지’는 대중가요 노랫말로 변신했다.
서울대 명예교수인 작곡가 김광희는 서울대 음대와 대학원을 나와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숙명여대, 세종대, 경원대 강사로 뛰었고 독일,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 등지에서 작품을 발표했다. 명지대 초빙교수, 운지회 회장, 통영음악재단 이사, 한국작곡가협회 이사로도 활동 중이다. ‘나 돌아가리라’ 등의 노래를 부르기도 한 그는 이화여중 때부터 성악을 공부했으나 고교 때 목에 탈이 나 작곡을 전공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물을 끌어올리고 있는 어부들
그물을 끌어올리고 있는 어부들
뱃노래(어업노동요)의 흥겨운 앞소리
‘세노야’는 무슨 뜻일까. 특별한 의미가 없는 뱃노래(어업노동요)의 흥겨운 앞소리다. ‘세노야’란 말의 유래는 여러 설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 어선들이 우리나라 남해바다에서 멸치잡이 때 그물을 끌어올리면서 하던 어로요漁撈謠의 후렴구란 설이 많다. 무거운 짐을 들어 올릴 때 다 함께 ‘어기여차!’, ‘어야디야!’라고 소리 내는 것과 같은 말이다. 멸치잡이 그물을 후리고 끄는 배에서의 작업은 노래 없이는 쉽게 할 수 없다. 요즘이야 그물을 기계로 오르내리지만 옛날엔 손으로 했다. 멸치가 많이 잡히는 날이면 뱃전이나 바다에서 그물을 당기며 “세노야 세노야 어기어차!, 세노야 어이야차!, 세노야” 등의 앞·뒤 그물질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군산에선 한 때 고래잡이와 멸치잡이가 성행해 ‘세노자차’란 소리를 장단삼아 내며 작업했다고 그곳 본토박이들은 들려준다.

멸치잡이는 우리나라 동해, 서해, 남해바다에서 이뤄졌다. 따라서 이 노래가 동해나 서해에서도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멸치잡이는 난류가 흐르는 남해가 주어장이어서 일본 배를 타고 품팔이를 해본 어부들 증언에 따르면 부산 기장, 거제, 마산, 남해, 여수 등지에서 들을 수 있다. 일본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세노야’는 아무 뜻이 없는 말이라고 한다. 일본 멸치잡이 배 선원들이 내던 그물 당기는 소리엔 ‘세노야’ 말고도 ‘써서야’, ‘세노자차’ 등이 나온다. 그런 소리는 우리 민요의 음계와 다른 일본민요음계를 갖고 있다. 남해바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갈수록 우리 민요의 메기는 소리와 일본민요의 후렴구가 결합되는 식으로 일본 어로요와 우리 민요가 섞이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렇게 볼 때 ‘세노야’는 일본 어로요에서 나온 것 같다는 주장도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다.

한겨레신문 2012년 10월 26일자 ‘말글살이’란엔 ‘세노야’가 우리말이 아닌 게 확실해 보인다는 강재형 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글이 실렸다. 그는 ‘세노야’가 일본 뱃노래에서 왔다는 최상일 민요전문PD의 말 때문에 ‘세노야’의 역사와 존재를 더듬게 됐다며 조사취지를 밝혔다. 강 소장은 ‘한국민요대전’을 엮어낸 최PD가 자신의 누리집에 “세노야가 일본말이란 사실은 민요취재를 하면서 알게 됐다”는 글을 올렸다고 소개했다. 강 소장은 ‘세노야’ 노랫말인 고 시인의 시를 언급하며 그가 자란 곳은 군산시(당시 옥구군)라 그물질소리 뿌리가 일본이란 것을 몰랐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고 시인은 그해 10월 31일자 한겨레신문에 ‘말글살이를 읽고’란 제목으로 ‘세노야’에 대한 다른 사연을 밝히는 글을 썼다. “이것은 반박문이 아니다”로 시작한 그는 ‘세노야’가 일본말이란 사실을 모르고 노래제목으로 삼은 게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는 군산 앞바다 어부가엔 ‘세노야’가 없다며 남해 난바다에서 이 단어를 들었다고 했다. 1968년 남해 난바다에 나갔을 때 어부가 부른 ‘어부가’ 후렴에서 ‘세노야 세노야’란 낱말이 뇌리에 박혔다고 했다. 그는 또 한국 근대어가 일본의 조어를 그대로 받아들인 사실을 언급하며 “우리 언어의 한 부분은 일본에 빚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세노야는 오랜 공해상의 흥취를 담은 고대한국어이자 지금 국제어로서의 한 낱말이기 십상이다”며 글을 마쳤다.

이처럼 노래 ‘세노야’와 어원이 알려지면서 같은 제목의 방송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김혜수, 변우민이 출연한 일일연속극 ‘세노야’는 1989년 방영됐고 가수 남진과 하춘화가 주인공을 맡은 영화 ‘세노야’는 1973년 개봉했다. 곽재구 시인은 1990년 ‘서울 세노야’를 발표했다. 미국 시카고에 가면 ‘세노야senoya’란 뷔페식당까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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