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 없이 물류 없다

우리 역사 속의 물류 발자취와 물류 선인들의 행적을 ‘물류’라는 프리즘으로 살펴본 책 ‘역사속의 물류, 물류인’이 올초 발간됐다. 민생경제 차원에서 역사속 물류의 흔적을 훑어본 이 책의 내용중 장보고를 비롯한 박지원, 김정호, 정약용, 최봉준, 임상옥, 정주영, 조중훈 등을 물류선인으로 소개한 내용이 주목할만하다. 대중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인물들의 물류에 대한 의지와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역사속 물류선인’ 대목이 더욱 흥미롭다.
이에 필자와의 협의를 통해 관련내용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북학파, 즉 중상주의 경제학파의 핵심 사상가였다. 북학파 학자들을 ‘연암 그룹’이라고 부르는 이유 역시 이들이 박지원을 중심으로 사상적인 사제師弟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학파는 ‘청나라의 선진 문명과 과학기술을 배우고 받아들여 조선을 부국강병의 나라로 개혁하는 것’을 학문의 모토로 삼았다. 박지원을 중심으로 한 ‘북학파 그룹’을 조선 후기 중상주의 경제학파의 산실로 여기는 까닭은 그들이 누구보다 ‘상업의 자유와 상공업의 진흥’을 앞장서서 부르짖었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중상주의 경제학파의 리더답게 ‘상업의 자유’를 철저하게 옹호하고, 선박과 수레의 적극적인 이용을 통한 유통경제의 활성화를 주장했다. 박지원이 상업 활동의 자유와 유통경제의 활성화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에 관해서는 ‘선박과 수레의 이용’에 관한 그의 견해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박지원이 청나라 여행길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보았던 풍경 중 하나는 바로 ‘선박과 수레의 활발한 이용’이었다. 심지어 그는 중국의 부유함과 조선의 가난함의 차이가 ‘선박과 수레를 이용한 유통 경제’에 있다고까지 주장했다.
박지원은 선박과 수레는 어떠한 멀고 험준한 곳이라도 이를 수 있다고 하면서 선박과 수레가 다니다 보면 교통로와 상업 활동이 자연스럽게 발전해 나라의 물자는 풍부해지고 백성의 생활은 윤택해진다고 했다. 일상의 경제생활에서는 서로 필요한 물자를 바꾸어 사용해야 하는데 이 지방에서 흔한 물건이 저 지방에서는 귀한 까닭은 선박과 수레를 이용한 교통 및 유통경제가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래서 나라 경제나 백성의 생활은 궁색함을 벗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지원은 “수레는 天理로 이룩되어서 땅 위로 가는 것이며, 땅 위를 다니는 배요, 움직일 수 있는 방이다. 나라의 쓰임에 수레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설파했다.
그가 목격한 바에 의하면, 중국의 물화가 풍족할 뿐 아니라, 이것이 한 곳에 지체되지 않고, 골고루 유통되고 있었던 것은, ‘모두 수레를 사용하는 이로움’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반면 당시 조선에서는 수레가 잘 이용되지 못한 점을 대비하였다. 박지원은 조선 백성의 살림살이가 가난한 것은 나라 안에 수레가 통행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는 수레와 같은 利器를 보급하는 데 소홀했던 사대부 층의 책임이라고 지적했다.
 

운송수단 부재의 유통구조 문제 지적
박지원은 중국에 비해 취약한 조선의 유통구조도 문제 삼았다. “영남 어린이들은 새우젓을 모르고, 강원 사람들은 열매를 절여 간장을 대신하고, 바닷가 사람들은 새우나 정어리를 거름으로 밭에 뿌리지만 서울에서는 한 움큼에 한 푼씩 하니 이렇게 귀함은 무슨 까닭일까”라고 반문하면서, 국내 상품 유통의 부진함을 지적했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교역해 써야 할 여러 지방의 산물이 제대로 거래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멀리 운송할 수단이 없는 데 있다고 보았다. 수레가 통행하면 국내 각 지역 산물의 극심한 가격차를 해소하여, 물가를 안정시키고, 민간의 살림에 이익이 되고 나라를 부유하게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조선은 운송수단이 발달되지 않아서 생산된 재부는 항상 일정한 수량에 머물게 된다고 했다. 나라의 재부를 잘 다스리고자 한다면, 화폐의 가치를 헤아려 물가를 조절하며, 막힌 것은 소통시키고 넘치는 것은 막아서, 화폐의 가치가 너무 오르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함으로써 물건이 지나치게 비싸지거나 지나치게 싸지는 경우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암 박지원
연암 박지원
전철을 밟다- 수레 제도의 표준화
박지원 또한 국내의 지형조건이나 도로 사정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도로 사정이 열악한 것은 사실이지만, 수레가 통행하면 자연히 도로가 정비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중국의 수레 제도에서 일정한 규격화가 적용되고 있었던 점에 관해서는 “수레의 제도는 무엇보다도 궤도를 똑같이 하여야 한다.”고 했다. 두 바퀴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유지되도록 표준화하면 수레가 통행하는 도로의 바퀴자리는 하나로 통일될 것이므로, 앞 수레의 전철을 밟아서 뒤 수레가 통행하는 순조로운 흐름이 이루어진다고 본 것이다. ‘전철前轍을 밟는다.’는 말이 바로 이와 같이 앞 수레가 다져놓은 길로 뒤 수레가 따라갈 때 이르는 말이다.

수레 제도의 표준화는 수레 보급의 선결과제라고 보았다. 수레바퀴 간격의 규격화는 도로 운행의 편리성뿐 아니라, 도로의 규격화, 제조 공정의 표준화에 이어질 수 있었다. 장차 수레의 대량생산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항목이었다. 그는 중국의 발달된 수레를 연구하고 도입해야 한다고 보았다. 탑승용 수레인 태평거, 짐수레인 대차, 작은 외바퀴 수레인 독륜거, 소방용 수레인 수총거 등의 특징을 소개하였다. 특히 타는 수레, 싣는 수레는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어서, 시급히 연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박지원은 ‘선박과 수레를 이용한 유통경제의 활성화’가 나라 경제와 백성의 생활을 풍요롭게 만드는 가장 바람직한 경제 정책이라고 보았다. 특히 박지원은 <허생전>에서 일본과의 해외통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재물의 이로움을 보여주었는데, 이 경우 가장 중요한 문제 역시 선박을 이용한 자유로운 해외무역이었다. 그는 상업 활동이 자유롭게 허용되고 또한 선박과 수레를 이용한 재화의 유통이 활성화되면 자연스럽게 국내의 농업과 공업의 발달은 물론 해외통상의 길도 뚫릴 수 있다고 본 듯하다.

물자의 생산과 유통이 활발해지고 나라와 백성들의 물품 수요 욕구가 넘쳐나다 보면 해외무역은 불가피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수레, 선박 등 대량유통을 가능하게 하는 물류수단의 강구가 중요하다고 주장하여 실학자 중 물류의 중요성을 무엇보다 중시하였고, 이러한 정신은 동료 학자들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
그러나 17세기 중엽 이후 박지원을 비롯한 개혁론자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수레 보급의 논의가 전개되었으나, 수레가 민간에서 널리 보급되지 못한 것이 실상이었다. 그것은 수레 보급론이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관심사에 머물지 않고, 조정의 정책 논의로 이어졌지만, 조선후기의 보수적 관료층은 전국적 범위에서 민간에 널리 활용되는 수레의 보급 문제에 관해서 소극적으로 대응하였기 때문이다.
 

물류의 중요성보다 신분 귀천이 우선이었던 사회
영조는 ‘우리나라에는 태평거가 없다. 만약 있다면, 장 보는 여인이 늘 타게 되었을 것’이라며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 좌승지 원인손은 우리나라는 모래와 돌이 많은 토양 때문에 태평거 운행에 적합하지 않다고 해서 반대론에 힘을 실었으며 ‘이미 귀천의 구별이 있는데, 감히 가벼이 제도를 범할 수 없는 것’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당시 북경에서 귀천을 막론하고 태평거를 타는 양태에 대한 분명한 적대 의사를 밝힌 것이다.

영조는 그 뒤에도 궁중에서 직접 수레를 타보고, 매우 좋은 운송수단으로 가볍고 빠른 점을 장점으로 꼽기도 했으며 군영에서 양곡을 나르는 일에 이 같은 수레를 사용하면 좋을 것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중국의 태평거와 같은 새로운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명분론적 신분질서를 어그러뜨린다면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보였다. 탑승용 수레의 보급에 반대한 보수적 의견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18세기 후반, 북학파의 박제가는, 조선사회에서 흔히 말 등짐으로 물자를 운송하는 일이 많은데, 이렇게 하면 말을 혹사하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 뿐 아니라 말이나 가마를 탄 양반을 따라 다녀야 하는 하인들의 어려운 형편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방 수령이나 혹은 왕명을 받고 떠나는 사신들은 혼자서 말을 타고, 하인·역부들은 고달파도 휴식을 취하지 못하며 시종 걸어야 했기 때문에 병에 들기 쉽다는 것이다. 예컨대 사신을 따라 북경까지 먼 길을 쉬지 못하고 걸어야 했던 노복들은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에는 마치 죄수들처럼 쑥대머리의 몰골을 하게 된다고 했다. 수레는 이 같은 운송노동의 노동력을 절약해 준다고 보았다. 당시 양반들 가운데 혹자는 ‘귀한 것으로서 천한 것을 부리는 것은 천지간의 떳떳한 법이요 고금에 통한 의리’라고 합리화했다. 이처럼 태평거와 같은 새로운 제도가 기존의 사회 틀을 흔드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데 대한 불안감은 보수적인 기득권 세력이 수레제도의 대중화에 냉담하게 반응했던 주된 원인이 되었다. 실학자와 개혁적 관료들은 이 같은 틀을 넘어서서 새로운 제도를 받아들이고, 새 운송수단을 대중화·보편화하려는 지향을 보였으나, 현실의 벽을 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관부 공사에서의 화물용 수레 사용 증가
그러나 민간에서의 수레 보급의 어려움과는 달리 관부에서 사용하는 수레, 특히 짐을 나르는 화물용 수레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수레를 잘 사용하면 노동력을 절약할 수 있다는 실용적 발상이 적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관부의 생산*비생산 부문에서 민간의 노동력을 징발하는 부역노동은 17세기 이후 점차 물납의 조세가 증대하는 것에 대응하여 축소 조정되어야 했다. 부역노동이 축소되면 같은 종류의 역사가 고용노동에 의해 수행되기 마련이었다.

영조 10년(1734년) 전라감사 조현명이 주관한 전주부 축성역에서 많은 수의 동거를 제작하여 투입함으로써 노동력을 절약하고, 그 만큼 재정 지출을 줄였으며 축성역을 위해 수레를 동원하는 일은 그 뒤 다른 지역의 축성역에 영향을 끼쳤다. 영조 28년(1752년) 함경도 길주의 축성역에 수레와 소를 준비토록 조치한 것에서도 그러한 면을 엿볼 수 있다. 정조 18년(1794년) 착공된 화성 축성공사에서는 석물의 운송을 위해 많은 수레를 제작해서 투입했다. 새로 창안한 수레인 유형거 10채를 비롯해서, 대차, 별평차, 평차, 동차, 발차  등 모두 305채의 수레와 썰매와 구판 등이, 주로 석재와 목재 등 성곽의 자재를 실어 나르는 일에 쓰였다.

토목공사에서 수레의 활용도가 높아지면, 수레가 다닐 수 있는 도로의 정비도 중요한 과제가 되기 마련이었다. 순조 5년(1805년) 정순왕후 원릉 산릉역의 수석소의 보고에서, 석물을 운송하는 일과 관련된 재정 지출의 다소는 ‘수레 길의 멀고 가까움’에 달렸다고 했다. 이 같은 조건 때문에 당시 수석소의 감조관이 부석소에서 능소까지의 도로 사정을 직접 살펴보기도 했다. 현장답사를 통해, 수레가 운행할 수 있는 지름길이나, 평탄한 이동로를 찾는 과정이었다.
 

수레가 다니는 신작로 탄생
정약용은 화성 축성을 계획한 「城說」에서, ‘治道’의 중요성을 언급하였다. 수레를 운행하려면 반드시 길을 먼저 닦아야 하는데, 곧고 평탄하게 다듬어야 운행 중에 수레가 부서지거나 전복되는 불상사를 면할 수 있다고 했다. 길닦기는 산릉역뿐 아니라 축성역과 같은 토목공사에서 수레를 많이 사용하게 됨에 따라, 공역에 앞서 치러야 할 선결과제로 자리 잡게 되었다. 즉, 공역의 진행을 돕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수레가 다닐 수 있는 새 길을 만들어야 했다. 새로 만든 길은 ‘신작로’라 지칭했다. 그리고 각종 작업도구를 활용하면 노동력을 아낄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城說」에서, 화성 축성에 활용된 각종 작업 도구를 묘사했다.

화성의 호참을 팔 때 사용하는 괭이, 곡괭이, 가래 등을 설명하고, 수레에 관해서도 자세히 다루었다. 그 동안 산릉역· 축성역 등 각종 토목공사에서 석물 등을 운송하는 수레로서, 대거와 썰매雪馬가 많이 사용되었다. 이 가운데 대차는 바퀴가 너무 높아서 돌을 싣기 어렵고, 바퀴살은 약하여 부서지거나 뒤집히기 쉬우며, 제작하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많이 만들 수 없다는 약점을 일일이 지적하기도 했다. 썰매는 전체가 땅에 닿으므로 밀고 당기는 데 힘이 들고, 구덩이를 만나서 빠지거나, 돌출부를 만나 걸리는 일이 많다는 약점이 있다고 했다. 썰매는 빙판에서 운송작업을 수행하는 데 적합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중국 명대 모원의가 지은 『武備志』를 참조하여 새로운 수레 하나를 고안해서, 유형거라 이름 지었다. 유형거는 썰매보다 제작비용이 헐하고 사용하기도 편리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城說」에서 유형거의 제작과정에 관해 서술하고, 도본을 그려 넣기도 했다.

17세기의 대형 토목공사에서 석물을 운송하는 일은 주로 僧軍이 담당했다. 승군은 민간의 요역노동이 물납세로 개편되었던 대동법 시행 이후의 시기에, 부역노동의 담당자로 무거운 부담을 지고 있었다. 승군은 고된 작업을 잘 견디며, 근실하고 정제된 일꾼으로 인식되었다. 석물의 운송 작업은 토목공사에서 가장 힘들고 위험한 일인데, 오랫동안 승군이 담당하는 분야로 간주되고 있었다. 18세기 중엽 승군을 더 이상 산릉역에 징발하지 않게 되자, 석물의 운송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가 크게 떠올랐다. 募軍을 여기에 투입하고, 혹은 擔軍이라는 이름으로 擔機 등의 장비를 써서 운송 노동을 전담하는 일꾼을 별도로 고용하기 시작했다. 모군·담군 만으로 어려울 경우, 때로 승군을 며칠 동안의 단기간 동원하기도 했는데 순조 5년(1805년) 정순왕후 원릉 산릉역에서는 무거운 혼유석을 옮기는 일 등에 한정해서 다시 승군을 며칠간 징발한 일이 있었다.
 

이용후생의 실천- 수레 사용 활성화로 승역 부담 줄여
부역노동의 비중이 크게 줄었던 18세기 이후 각종 토목공사에서 점차 승군을 징발하기 어렵게 되자 다양한 종류의 차량이 제작되어 공역에 투입되었다. 정조 즉위년(1776년) 경종 의릉 산릉역에서 큰 돌 외에는 수레만으로 운송함으로써 인력을 적게 쓸 수 있었고, 영조 28년(1752년) 효순현빈의 묘소를 조성하는 역사에서 묘소도감 제조로 참여한 박문수는 승군을 징발하지 않더라도 수레와 이를 끌 수백 마리의 소만 있으면 공역을 무난히 진행할 수 있다고 장담하여 승군을 돌려보내고 그 대신 각 군문에서 많은 수의 수레를 차출하여, 그 삯은 묘소도감에서 치르는 방식으로 공역에 투입했다. 결국 승군의 부역노동을 쓰지 않는 만큼 특별히 제작한 수레의 운송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박문수의 제안은 실현되었다. 영조는 일찍이 승역의 과도한 부담을 우려하며, ‘우리나라의 최약자는 승려’라고 표현하여 개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으며, 박문수의 건의를 받아 들여 승군을 사역하지 않고, 대차를 특별히 제작하는 방식으로 노동력의 공백을 보완하였다.

이처럼 18세기 중엽 승군을 징발하지 않기로 결정한 뒤에, 산릉도감과 같이 대규모 공역을 승군의 부역노동으로 수행하던 분야에서 합당한 대안으로 수레를 활용하였고 영조 33년(1757년) 영조의 비 정성왕후,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가 연달아 사망하여 산릉역이 거듭되었을 때에도 부득이 다시 승군을 징발하였으나 그 수를 크게 줄였다. 그나마 관례대로 1개월 간 사역하지 않고 15일 만에 돌려보냈다.
당시 산릉도감에서는 수레의 활용에 각별한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때의 산릉도감에서는 각종 수레를 ‘役機’ 혹은 ‘役器’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전의 산릉도감에서 일반적으로 ‘車子’라는 명칭으로 각종 수레를 포괄해서 지칭했던 것에 비하면, 새로운 변화가 감지되는 부분이었다. ‘역기’란 명칭은 ‘役事에 쓰는 기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기’를 써서 공역에 들 노동력을 절약해 주기를 기대한 것이다.

정성왕후 홍릉 산릉도감의 수석소에서는 대설마 2채, 중설마 10채, 소설마 8채, 판동차 10채를 제작하여 석물 운송을 담당했다. 홍릉 산릉도감에서는 이 같은 장비를 역기라 표현하고, ‘運石의 지속은 역기의 다소에 달렸다’고 해서 역기의 확보와 효율적 관리를 매우 중히 여겼다. 즉, 동차·수레 등 역기가 많이 사용되면 노동력을 절약할 수 있었고, 그 만큼 재정 지출을 줄일 수 있었다. 바로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한 실천방식이었던 셈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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