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정보의 집대성, 물류정보화의 선각자

우리 역사 속의 물류 발자취와 물류 선인들의 행적을 ‘물류’라는 프리즘으로 살펴본 책 ‘역사속의 물류, 물류인’이 올초 발간됐다. 민생경제 차원에서 역사속 물류의 흔적을 훑어본 이 책의 내용중 장보고를 비롯한 박지원, 김정호, 정약용, 최봉준, 임상옥, 정주영, 조중훈 등을 물류선인으로 소개한 내용이 주목할만하다. 대중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인물들의 물류에 대한 의지와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역사속 물류선인’ 대목이 더욱 흥미롭다.
이에 필자와의 협의를 통해 관련내용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김정호의 본관은 청도淸道, 자는 백원伯元·백온伯溫이고, 호는 고산자古山子이다. 출생연도는 분명하지 않으며, 태어난 곳은 황해도 봉산鳳山 또는 토산兎山이라고도 한다. 평민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지리학에 정진하여 일생을 정밀한 지도와 지리서를 만드는 일에 바쳤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30여 년간의 각고 끝에 1834년(순조 34) 《청구도》 2첩을 완성하였다. 이후 1857년(철종 8)에 전국 채색 지도인 《동여도》, 1861년(철종 12)에 《대동여지도》를 완성하여 교간校刊하였다. 이와 같이 19세기 조선의 지리정보를 집대성하여 지도를 만들고 체계화한 김정호의 저작활동은 물류활동의 기본이 되는 정보화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실천한 큰 범주의 물류 선각자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김정호의 이러한 지도 제작 배경에는 조선후기 상업의 발달이라는 시대적 상황이 맞물려 있었다. 상업의 발달로 성장한 상인들에게는 전국을 권역별로 자세히 파악할 수 있는 정보, 곧 지도가 필요했을 것이고, 김정호는 이를 위해 절첩식 형태로 상인들이 휴대하기에도 편리하게 지도를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대동여지도에 각 고을의 거리를 십리마다 표시한 것이나 역이나 원 등 상업과 관련된 정보가 자세한 것도 이를 입증한다. 그리고 목판지도를 제작하여 대량 보급을 꾀한 것은 그만큼 이 시기에 지도 수요가 광범위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 전체를 그린 전도(全圖)로서 의의가 크다. 

1834년(순조 34) 김정호가 만든 우리나라 지도(보물 제1594호)인 《청구도》는 채색필사본이나 흑백필사본이며, 건곤乾坤 2책으로 되어 있다. 이본異本으로는 『청구요람』이 있다. 대축척의 지도로 건곤 두 책을 상하로 연결시키면 전국도가 된다. 전국을 남북으로 29층, 동서로 22판으로 구분하여 방안 눈금으로 나누어 그렸다. 방안 하나는 남북이 100리, 동서가 70리가 되도록 구분하였다. 실제 지도의 크기는 가로가 17.5㎝, 세로 25㎝이므로, 조선시대 10리는 4㎞가 아니라 약 5.4㎞임을 감안하여 지도의 축척을 계산하면 21만 6000분의 1이 된다.
 

거리와 방향의 정확성 - 지도제작의 평환법
책머리에는 최한기의 서문이 있는데 서문에서 그는 김정호와 친구임을 밝혔고 김정호가 『청구도』를 어떻게 제작했음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이어 작자 자신이 만든 범례를 수록하였는데, 「청구도」의 제작 과정을 소상히 밝혔다. 또한 『청구도』가 종래의 방괘법에서 벗어나 평환법平   法을 쓰고 있음을 설명하였다. 방괘법은 사정四正과 사우四隅의 거리가 일치하지 않아서 지도의 정확성을 기하기가 어렵다. 이에 비해 평환법을 쓰면 지도상의 거리와 방향의 정확성을 가져올 수 있다고 지도식地圖式을 그려 설명하였다.

그리고 중국에서 수입한 『기하원본幾何原本』에서 배워온 확대 축소법을 그림으로 그려 설명하면서 청구도가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제작했음을 밝혔다.
다음으로는 본조팔도주현도총목本朝八道州縣圖總目을 수록하여 청구도의 색인 역할을 하게 하였고, 「도성전도都城全圖」를 머리 부분에 수록하여 서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는 궁궐과 종묘가 있는 도성이 한 나라의 중심지이므로 상고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전국의 주현도에는 산천·강·도서·도로를 비롯하여 주현 읍치와 서울까지의 거리, 각 읍의 군軍·호戶·전田·곡穀의 수를 군·현별로 지도 안에 기록하여 그 군현의 크기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고적지에는 간단한 설명까지 덧붙였다. 끝 부분에는 여러 장의 역사지도를 수록하였는데 1면 크기의 「동방제국도東方諸國圖」·「사군삼한도四郡三韓圖」·「삼국전도三國全圖」·「본조팔도성경합도本朝八道盛京合圖」와 4면 크기의 「신라구주군현총도新羅九州郡縣總圖」·「고려오도양계주현총도高麗五道兩界州縣總圖」등이 있고, 「군국총목표軍國總目表」를 수록하였다.

「군국총목표」에는 전국의 행정구역과 목장, 인구, 봉수, 장시, 군보 등의 통계가 있고, 전국의 각 군현별로 전답·민호民戶·남자 인구·여자 인구·군보軍保·곡부穀簿·방면坊面·서울까지의 거리를 나타내는 거경距京 등이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참고자료로 이용되었다.
『청구도』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해동여지도海東輿地圖』를 참고하여 만든 듯하다. 『해동여지도』는 정조 때 제작되었는데 남북으로는 함경도를 1로 하여 해남을 118로 삼았으며, 동서는 함경도에서 1로 시작하여 평안도가 76으로 끝난다. 이러한 경위선 표식 지도는 전국을 커다란 하나의 방안에 넣어 제작하였기 때문에 이전에 제작한 다른 지도에 비하여 매우 정확한 편이다.

청구도의 장점을 요약하면, 첫째 『청구도』는 현존하는 고지도 중 가장 크며 축척이 약 1:216000에 해당하는 가로 462㎝, 세로 870㎝인 전국도이다. 둘째 『청구도』는 경위선 표식과 기하원본의 확대 축소법을 적용하여 제작하였기 때문에 앞서 제작된 어느 고지도보다 과학적으로 만들어졌다. 셋째 『청구도』는 군현의 경계를 확실하게 하였으며, 특히 비입지飛入地와 두입지斗入地를 표시하여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만들었다. 넷째 청구도는 보기 좋고 사용하기 편리하게 책첩冊帖으로 만들었다. 다섯째 각 읍의 군·호·전·곡의 수를 군현별로 지도 안에 기록하여 그 군현의 크기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김정호 초상화
김정호 초상화
가장 정확하고 정밀한 과학적 실측지도 - 대동여지도
『동여도』는  철종·고종 연간에 김정호가 만든 필사본의 전국 채색지도로, 병풍처럼 접고 펼 수 있는 분첩절첩식 형태로 되어 있다. 총 23첩으로 맨 앞 첩은 목록집이고, 제1첩부터 제22첩까지는 각 지역의 지리가 그려져 있다. 지도는 산천표시와 함께 주현별州縣別 경계선을 그어, 주현간의 도로를 표시하였다. 그 바탕 위에 영진營鎭, 주현州縣, 진보鎭堡, 역도驛道, 목소牧所, 방면坊面, 창고倉庫, 봉수烽燧, 능침陵寢, 성城, 도로道路, 파수把守 등을 표시하였다. 지도상의 거리는 제1첩 1면에 방안을 그려놓고 ‘방십리매편方十里每片’이라고 하여 매방每方의 실거리가 10리임을 표시하였다. 동여도는 지금까지 알려진 대동여지도의 필사본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정밀·정확하게 그려진 훌륭한 지도첩이다. 도화서에서 그린 지도제작 솜씨와도 같은 뛰어난 그림과 글씨, 채색 등이 18세기 후반기 조선지도 제작기술의 높은 수준을 잘 나타내는 대표적 작품 중의 하나로 꼽힌다.

김정호는 조선 후기에 민간에서 활발하게 사용되었던 전국지도·도별지도와 국가가 중심이 되어 제작하였던 군현지도를 결합하여 군현지도 수준의 상세함을 갖춘 대大축척 전국 지도를 만들었다. 특히 『대동여지도』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가장 정확하고 정밀한 과학적 실측지도로 평가된다. 『동여도지』와 『대동지지』는 지역 단위로 지역의 특성을 기술하는 지역별 지지와 강역·도로·산천 등의 주제별 지리학을 결합시킨 지리지로서 이전의 전국 지리지나 읍지에서는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구성을 취한다.
우리나라 고지도의 대명사이며 우리나라 지도의 고전인 『대동여지도』는 1898년 일본 육군이 조선 침략의 기초 단계로 경부선을 부설하면서 측량기술자 60명과 한국인 2~3백 명을 비밀리에 고용하여 1년간 조선을 샅샅이 뒤져 5만분의 1 지도 3백장 정도를 만들었는데, 『대동여지도』와 큰 차이가 없어 감탄하였다고 전한다. 이 이야기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그리고 이어진 일본의 한국 토지측량에 『대동여지도』를 사용하였다는 일화와 함께 『대동여지도』의 정확성과 훌륭함을 전해 주는 증거로 널리 전해 온다.
 

상설 전시가 어려울 정도로 큰 지도
고대부터 현대까지 세계 지도의 발달사를 집대성하기 위해 미국에서 진행 중인 세계적인 작업 『지도학사(The History of Cartography)』시리즈(총 8권)의 한국편 서술 「한국의 지도학("Cartography in Korea)」(Gari Ledyard 집필)에서도 김정호가 만든 『청구도』와 『대동여지도』에 가장 많은 내용을 할애하였다.
『대동여지도』는 현존하는 전국지도 중 가장 큰 지도이다. 전체를 펼쳐 이으면 세로 6.6m 가로 4.0m에 이르는 대형지도가 되어, 적어도 3층 높이 이상의 공간이 있어야 걸 수 있다. 이 때문에 국내에서는 『대동여지도』를 상설 전시해 놓은 곳이 거의 없다. 높이 7m이상의 공간을 갖춘 곳이 드물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동여지도』를 잘 볼 수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렇게 지도가 크기 때문에 웬만한 책자에는 『대동여지도』를 수록하기가 힘들었다. 너무 축소되기 때문에 지도의 내용과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뿐만 아니라, 책에 수록하기 위한 사진 촬영도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책에는 『대동여지도』의 부분만을 수록하곤 하였으며, 이 또한 『대동여지도』의 전모를 일반인들이 보기 힘들었던 원인이기도 하다.

1925년 10월 8, 9일자 동아일보는 김정호에 관한 기사를 싣고, 기사 끝에 조선광문회에서 『대동여지도』의 출판을 시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기사는 김정호를 위대한 영웅으로 널리 알린 것으로 유명하지만, 조선광문회에서 『대동여지도』를 보급하려 하였음을 보여 준다. 1910년에 설립된 조선광문회는 빼앗긴 국토와 역사의 줄기를 되찾으려는 하나의 방법으로 “조선 구래의 문헌 도서 중 중개하고 긴요한 자료를 수집, 편찬, 개간하여 귀중한 도서를 보존, 전포함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니, 『대동여지도』의 출간 의도는 당연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하였으며, 1936년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서 2/3로 축소한 『대동여지도』의 영인본을 간행한 것이 최초의 고지도 영인사업이었다.
 

조선 후기 지도학의 성과 - 대축척지도
흔히 조선 후기의 지도학의 성과로 손꼽는 것이 대축척지도大縮尺地圖의 발달이다. 지도는 지표면을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일정한 크기로 지표 현상을 줄여서 나타내는데, 이 줄인 비율 즉 지도상의 거리와 지표상의 실제거리의 비율을 축척이라고 한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에서 이전 지도에서 볼 수 없었던 방식으로 축척을 표시하였다. 『대동여지도』를 펴면 원고지같이 눈금이 그려져 있는 면이 보인다. 가로로 8개, 세로로 12개의 눈금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지도 한 면을 그대로 나타낸 것으로 제목이 쓰여 있지 않다. 이를 오늘날 우리들은 ‘방안축척표’ 또는 ‘방괘표方罫表’라고도 부른다. 이 한 개의 눈금에 ‘매방每方 10리’라고 기록하여 눈금 하나가 10리임을 명시하였다. 또 ‘매편每片 종縱 120리, 횡橫 80리’라고 기록하여 지도의 한 면片의 동서 길이가 80리, 남북 길이가 120리임을 나타냈다. 하나의 눈금 즉 10리가 2.5cm이고, 지도 한 면이 동서로 80리이므로 20cm, 세로는 120리이므로 30cm가 된다. 지도상에서 축척은 일반적으로 거리를 가늠하는 데 사용된다. 『대동여지도』는 한 면이 120리×80리로서 쉽게 거리를 짐작할 수 있도록 고안 된 것이다. 『대동여지도』는 전체가 227면으로 구성되어 있고, 여백을 제외한 지도 부분은 213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장의 목판에는 지도 두 면(판)을 앉혀 목판의 매수는 126판이며, 뒷면에도 지도를 판각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목판 1면에는 지도 4면에 해당하는 내용이 들어 있어 목판은 총 60장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축척은 지도 내용 속에도 표시되었다. 즉 도로 위 10리마다 점을 찍어 거리를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거리, 축척 표시 방법은 『대동여지도』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이다. 특히 도로상의 10리 점은 그 간격이 일정하지 않다. 평탄한 지역에서는 10리 간격이 멀게, 산지가 있는 곳에서는 10리 간격이 가깝게 표시되었다. 이는 10리 간격의 점이 지도의 축척을 나타냈을 뿐만 아니라 지형적인 조건을 알려주며, 지점과 지점간의 직선  거리가 아닌 도로상의 거리를 표현한 것임을 알게 한다. 실제 지도 이용자의 입장에서는 매우 편리한 지도가 아닐 수 없다.
 

물류정보화의 시초 - 지리정보의 기호화
앞서 언급한 『지도학사(The History of Cartography)』시리즈의 한국편을 집필한 레드야드(Gari Ledyard)는 『대동여지도』를 한국의 지도 중에서 가장 지도학적으로 우수한 지도라고 평했다. 그것은 오랫동안 내려온 동양 지도의 지지(地誌, text)적인 전통에서 벗어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대동여지도』는 글씨를 가능한 줄이고, 표현할 내용을 기호화하는 새로운 방식을 확립하여 현대지도와 같은 세련된 형식을 보여 주었다.

『대동여지도』의 내용과 표현상 가장 큰 특징은 산과 물의 특징적인 표현과 분별성이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산이 가장 강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 이유는 산을 독립된 하나의 봉우리로 표현하지 않고, 이어진 산줄기로 나타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산줄기를 가늘고 굵게 표현함으로써 산의 크기와 높이를 알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대동여지도』의 장점은 많지만 특히 주목되는 내용이 도로, 군현의 경계 표시, 봉수, 역원, 1,100여개에 달하는 섬島嶼, 목장, 그리고 역사지리적인 옛 지명들이다. 그 가운데서도 도로 표현이 독특하여 많은 관심을 받아 왔다. 『대동여지도』에서 도로는 직선으로 표시되었는데, 이는 이전의 지도에서 거의 볼 수 없는 방식이었다. 이는 『대동여지도』가 목판본이기 때문에 흑백으로 인쇄될 수밖에 없었고 곡선으로 표현되는 하천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대동여지도』의 두 번째 특징은 목판으로 간행한 목판본 지도, 즉 인쇄본 지도라는 점이다. 목판지도는 지도의 보급과 대중화에 큰 역할을 한다. 『대동여지도』는 상세하고 내용이 풍부한 대형 목판본 전국지도였다. 『대동여지도』이전에 목판본 전국지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인 목판본 전국 지도로는 세로 길이 1m정도의 『해좌전도海左全圖』와 길이 140cm정도의 『팔도전도八道全圖』등이 있다. 지도가 소수의 관리, 학자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김정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김정호는 국토의 모습을 담은 지도가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할 교양이며, 국가가 어지러울 때일수록 지도와 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음을 엿볼 수 있다. 김정호가 만든 서울지도인 『수선전도首善全圖』역시 목판본으로, 서울을 담은 목판지도의 백미로 꼽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동여지도』의 세 번째 특징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전국지도이면서도 보기 쉽고 가지고 다니기 쉽게 만든 지도라는 것이다. 김정호는 이를 위해 『대동여지도』를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형태로 만들었다. 이 점은 『대동여지도』에 앞서 1834년(순조 34)에 김정호가 완성했던 전국지도인 『청구도』와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하다. 형태상으로 『대동여지도』는 분첩절첩식의 형태로 되어 있어 책자의 형태로 된 것에 비해 매우 간략하고, 지도가 보거나 가지고 다니기에 매우 편리하다.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를 남북으로 120리 간격, 22층으로 구분하여 하나의 층을 1첩으로 만들고 22첩의 지도를 상하로 연결하여 전국지도가 되도록 하였다. 분첩절첩식 지도는 가지고 다니거나 보관, 열람에 매우 편리하다. 일부분이 필요할 경우 일부분만을 뽑아서 휴대하며 참고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강릉까지 여행을 할 경우 지도 전체를 가지고 갈 필요 없이 서울에서 강릉까지 수록된 제 13층 지도만 뽑아서 가지고 가면 된다. 또한 절첩식 지도의 장점은 부분으로 자세히 볼 수 있고, 서로 이어 볼 수 있어 분합分合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대동여지도』를 한 장의 종이에 그렸을 경우, 세로 6.6m 가로 4.0m 정도의 큰 지도가 되어 가장자리의 지명만 읽을 수 있고 대부분의 중심부에 있는 지명은 읽을 수 없다. 분첩절첩식 지도는 필요한 부분을 선택하여 연결함으로써 대형 지도가 지니는 단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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