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력 유출은 기술 유출”

 
 


국내 조선업계 구조조정에 따른 대규모 인력감축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고급 기술인력’의 해외유출이 우려되고 있다.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갖췄다고 평가받는 국내 조선산업의 근간인 기술인력의 경쟁국 유출은 향후 국내 조선업을 위협할 수 있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조선업의 경쟁력 유지를 위해 ‘인력감축’에 초점이 맞춰진 구조조정 방안의 재고(再考)가 필요하다는 지적의 소리가 높다.

국내 조선업계 구조조정은 대규모 인력감축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모양새이다. 현대중공업은 최근까지 약 2,000여명의 희망퇴직을 받았고 앞으로도 직원 외주화 등 추가적인 인력 조정을 단행할 방침이다. 대우조선해양은 최대 3,000여명 인력감축, 삼성중공업도 1,500명 규모의 감축을 예고한 상황이다.
 

이 같은 대규모 구조조정이 진행되며 대형 조선야드가 모여있는 경남지역의 노동계는 벌써부터 들썩이고 있다. 조선업 불황이 시작된 지난해부터 1,000여명의 퇴직자가 발생한 가운데, 수천명에 달하는 추가적인 구조조정은 지역 경제마저 위협하고 있는 수준으로 인구이탈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현대중공업 야드가 입지한 울산시의 발표에 따르면, 올 4월말 기준 주민등록 인구는 119만 8,076명으로 지난해 11월 120만 640명에서 5개월 연속 줄어들고 있다. 순 유출인구만 2,500명이 넘는다. 울산시 관계자는 “시의 인구감소 요인에 대해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있다”면서도, “울산의 핵심산업인 조선산업의 불황이 인구감소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이 위치한 거제지역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동 지역에서 조선소 인력대행업체를 운영하는 한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해 말부터 외주인력을 중심으로 인력감축이 진행되고 있다. 대형 조선사의 아웃소싱 형태로 인력을 보급하는 이 회사는 4~5년전만 하더라도 약 20명의 인력을 공급했었으나, 최근에는 그 규모가 6~7명 수준으로 확 줄어들었다. 거제지역 인력업체 사장인 A씨는 “한창때는 노동자들이 숙식하는 방을 잡기가 힘들 정도로 상황이 좋았다. 하지만 작년부터 급격히 일감이 줄어들었고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급격히 인력이 줄다보니 이미 계약된 숙소를 처리하는데도 골치가 아프다”고 토로했다.

조선 불황 경남지역 인구이탈 ‘가속화’
연봉 3~9배 받고 퇴직자 중국으로 유출

문제는 조선소 노동자들의 해외유출이다. 퇴직한 근로자들 중 많은 인원이 해외로 스카우트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직급, 직종에 따라 다르지만 적게는 3배, 많게는 9배 높은 연봉을 받고 해외로 이적하고 있다.


‘인력유출’은 곧 ‘기술유출’을 의미한다. 한 조선연구자는 “업계에서는 ‘3·9·3 법칙’이라고 한다. 중국 조선소가 한국 조선사 퇴직자들에게 접촉해 한국에서 받는 연봉의 3배~9배를 적어도 3년간 준다고 제안한데서 나온 말”이라고 귀뜸했다. 기장(과장)급을 중심으로 스카우트 액수차이가 나고 핵심 기술인력일수록 스카우트 비용은 더욱 커진다는 것. 해외에서 일을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높은 연봉에 학자금, 아파트까지 제공할 정도로 공격적인 제안의 유혹을 뿌리치기도 힘들다는 것이다.

中조선, 韓 인력 영입으로 핵심기술 확보 시도
중국 조선업계는 국영 조선소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구조조정이 이미 수년전부터 진행되고 있다. 중국 정부의 강력한 주도하에 중국선박공업집단CSSC와 중국선박중공집단CSIC을 축으로 한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으며, 한때는 CSSC-CSIC간 통합 소문도 나올만큼 ‘초대형화’에 목을 메고 있는 상황이다.


이 과정 속에서 한국 조선업계의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은 중국에게 고급 기술을 확보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가 되고 있다. 중국 조선산업의 기술력은 아직 한국에 비해 10년정도 뒤쳐져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최근 몇년간 공격적인 기술 투자로 초대형 컨테이너선, 해양플랜트, 심지어 초대형 크루즈선까지 수주했지만 아직까지 인도된 선박이 전무한 만큼 기술력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으며, LNG선 등은 수주조차 안되고 있다.


현재 한국 대형 조선사는 약 2,000~3,000명의 자체 설계인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반면 중국은 대부분 외주 설계회사에 의존하고 있으며, 설계인력도 우리나라의 절반 이하 수준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기술인력 유출은 중국 입장에서는 시기적으로도 적절하다. 이미 수년전부터 진행된 구조조정이 본궤도에 올랐고, 이 과정서 퇴직한 한국 고급 기술인력을 영입한다면 ‘양과 질’ 모두 업그레이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가장 고급인력으로 꼽히는 설계인력의 경우, 중국으로 넘어간다면 그 피해가 막심하다. 해양플랜트 설계 및 엔지니어링 기술은 해양플랜트 부가가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부문이다. 국내 조선업계는 수주초기 설계부문을 제외한 단순 조립·건조에 집중했으나 이후 설계·엔지니어링을 포함한 턴키(Turn-key, 설계·시공 일괄입찰) 입찰을 진행하며 설계·엔지니어링 기술력을 키워나갔다. 조선업계가 막대한 적자를 ‘수업료’라고 표현할 만큼 해양플랜트 설계·엔지니어링은 향후 막대한 수익을 보장할 수 있는 기술인 것이다.


그러나 고급인력이 중국으로 넘어간다면,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고 손에 넣은 ‘알짜배기’ 기술이 고스란히 중국으로 넘어갈 수 있는 처지이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선박 생산도면의 경우 과거 중국으로 많이 유출됐지만, 해양플랜트나 고부가가치선박 기본설계는 아직 지키고 있다”면서도, “고급인력의 유출은 이러한 기본설계를 그대로 넘겨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중국 뿐만이 아니다.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조선 신흥국들에서도 물밑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후문이다. 중국의 경우, 설계·엔지니어링 인력, 고급 기술인력을 대상으로 공격적인 영업이 진행되고 있고, 동남아 신흥국에서도 기술인력과 숙련공 중심으로 스카우트가 이뤄지고 있다. 동남아의 경우, 중소형 야드와 함께 대형 수리조선사들이 입지해 있다.

과거 日 구조조정 실패... 그대로 답습
정부·조선업계 “인력유출 알아도 못막는다”

대규모 인력 해외유출이 예상되고 진행되고 있지만, 정부와 조선업계는 별다른 대책이 없는 상황이다. 한 조선업계 관계자는 “알면서도 못막는 격”이라며 정부와 조선사들의 상황을 설명했다.


이 같은 인력유출 사례는 과거 한국이 일본을 제치고 조선 강국으로 도약한 역사에서도 나타난다. 한때 세계 1위를 차지했던 일본 조선업계가 1980년대 불황을 맞아 단행한 구조조정에서 설계인력을 대거 내보냈고 당시 조선업에 지속적인 투자를 진행했던 한국 조선이 그들을 받아들이면서 한국 조선이 현재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한때 국내 조선업계 사이에서도 인력빼가기 경쟁이 붙었던 사례도 있었다. 무분별한 인력 빼가기를 근절하기 위한 조선사간 신사협정도 맺어졌다.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의 폐해를 정부나 조선업계가 모를리가 없다.


구조조정 대상에 올라있는 조선업체들은 정부와 채권단의 인력 구조조정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여기에 더해 계속되고 있는 경영적자 개선을 위해서라도 인력감축을 통한 운영비 절감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한 조선업체 관계자는 “인력과 기술 해외유출에 대한 우려가 나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회사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인력감축을 할 수밖에 없다”며, “해외로 이적하는 인력을 막을 수는 없지만 핵심 기술유출에 대해선 철저히 관리할 것”이라고 답했다. 정부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산업부 관계자는 “각 기업들이 스스로 마련한 자구안에 대해 정부가 나설 수 없다”며 즉답을 피했다.


방위산업청 “인력관리·품질관리 협조” 요청
“기술력 뺏기면 韓조선 설 곳 없다”

한편 정부내에서도 무분별한 인력감축과 인력 해외유출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지난 5월 11일 방위산업청은 대우조선해양, 현대중공업, 한진중공업, STX조선해양 등 함정을 건조하는 조선소 5곳에 ‘조선업 구조조정 간 함정사업·인력·품질·보안 관리강화 협조 요청’이라는 제목의 공문을 보냈다.


방사청은 공문에서 “조선업이 경기 악화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음을 잘 인지하고 있다”면서 “업체 타개 방안으로 구조조정 과정 중 인력 감축 및 부서 축소 조정 등으로 인한 계약조건(인원 조정 시 사업팀 승인) 위반 소지가 발생하지 않도록 관련 내용을 확인, 방위사업 인력 관리 및 함정 품질 관리 강화에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방사청은 이어 “또 인력 및 부서 등 조정 과정 중 보안 저촉에 각별히 유념해 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학계와 연구계에서는 대규모 인력유출과 기술유출 등 구조조정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인력손실을 최대한 막아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한 금융권 연구원은 “이 시기를 잘 버티면 호황기는 다시 찾아온다”면서, “우리 조선 기술력의 뿌리는 인적자원이다. 대규모 인력유출이 일어난다면 중국과의 기술격차는 금새 좁혀질 것이며, 이는 한국 조선업의 경쟁력을 크게 악화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다른 학계 전문가도 “중국은 이미 가격경쟁력에서 한국에 비해 한참 앞서있다. 이 상황에서 고급 기술마저 중국에 내준다면 한국 조선업은 더 이상 설곳이 없다”라고 말했다.


조선업계에서는 약 2년 후를 조선업 회복의 시기로 보고 있다. 에코십, LNG선, 초대형 컨테이너선 등 경쟁국보다 앞선 기술력으로 세계 시장을 석권했던 우리 조선업계가 호황기를 대비하기 위해선 지금의 기술격차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어렵지만 베끼는 것은 쉽다. 수많은 인재들의 노력으로 탄생한 한국 조선업의 기술력을 경쟁국에게 거저 주지 않으려면 정부와 업계의 구조조정 방향 선회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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