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러두고 보고 싶은 섬, 영산도

이 글은 해양수산부와 한국해운조합이 공동 주최한 ‘제 2회 가보고 싶은 섬여행’ 후기에서 선정된 대상 및 우수상 후기 2편을 주최측과의 협의를 통해 게재한 것이다.        -편집자 주-

목포연안여객선터미널
목포연안여객선터미널

“어디 가요?”
“영산도요.”
“아이고 좋겠네, 잘 다녀 오소~”
달랑 백팩 하나 들고 간 여행이었다. 내심 ‘외지인 티가 안 나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내 차림새는 영락없는 여행객이었나 보다. 목포연안터미널로 가는 길, 나는 작렬하는 7월의 햇볕 아래 땀을 뻘뻘 흘리며 걷고 있었다. 여자 혼자 하는 여행이라 낯선 사람과의 대화를 경계하고 있었는데, 여행 온 대학생이 부러운 듯 단도직입적으로 어딜가냐고 물어보는 아저씨에게 나는 행선지를 말해버리고 말았다.
준비하던 시험을 다 치르고, 나는 그동안 단단히 벼르던 섬 여행에 나섰다. 시험을 준비하던 막판 3개월은 정말 힘들었다. 그러나 이를 버틸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은 <시사in> 잡지에 소개 된 ‘그 섬에 가고 싶다’의 영산도의 풍광을 시험 끝나고 가서 눈으로 담아오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많은 여행지 중에 섬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섬으로 들어간다는 것, 그것은 나에게 지금까지의 삶에서 벗어나 작은 낙원으로 훌쩍 떠나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직항이 없어 중간에 배를 갈아타고 한 번 더 들어가야만 하는 곳, 영산도는 도시 생활에 지쳐있던 나에게 청량한 안식처로 삼기에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예리항에서 영산도로 들어가는 배
예리항에서 영산도로 들어가는 배

영산도는 신안군의 작은 섬이다. 영산도로 들어가는 바닷길은 너무 아름다웠다. 나는 자욱한 물안개 너머 지금껏 알지 못했던 세상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목포서 여객선을 탔을 때와 달리 작은 배를 타고 하얗게 부서지는 물보라를 맞으니 ‘정말 내가 여행을 온 거구나’하는 실감이 났다. 섬에 다다르자 안개가 걷히며 영산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한 폭의 동양화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듯, 배는 부드럽게 선착했다.
영산도에는 식당이 없다. 다만 2012년 ‘명품마을’로 지정 되어 관광객들을 위한 ‘부뚜막’이라는 곳이 하나 있을 뿐이다. 그런데 내가 도착한 날은 일요일이었고, 3일 전에 급히 예약한 탓에 선장님이 부뚜막에 말하는 걸 잊으셨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 마을의 이장이신 선장님께서 본인 집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대접해주시겠다고 했다. 이장님의 어머니께서는 예정에 없던 외지인의 방문에도 선뜻 음식을 내어오셨다.

차려주신 식사는 소박했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맛으로 가득했다. ‘톳’으로 국을 끓여주셨는데,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으니 알싸하면서도 시원한 국물이 단번에 혀 끝을 자극했다. 세찬 파도가 입 안 가득 밀려들어오는 기분이랄까. 육지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해초들도 차례로 먹어 보았다. 독특한 식감, 이게 뭐지? 할머니께 여쭤보니 꼬시래기로 만든 초무침이라고 대답해주셨다. 나를 꼬시는듯한 꼬들꼬들한 맛에 반해 젓가락이 계속 움직였다.

감사하게 한 그릇 쓱싹 비우고 나서, 본격적인 마을 구경에 나섰다. 영산도에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일몰을 후경으로 삼아, 사진기를 들고 벽화가 그려진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한발짝 한발짝 내딛을 때마다 여유와 평안함이 아른거리며 차올랐다. 안내 표지판이 잘 되어 있어 걷다 보니 금세 바닷가에 도착했다. 조약돌 하나를 손에 쥐어 보았다. 바다와 조약돌이 함께 연출하는 해조음, 호젓한 경치. 오랫동안 내 안에 간직하고 싶어 나는 가만히 서서 그 순간을 기억하려 애썼다.
영산도에서의 첫 날, 왠지 모를 설렘과 두근거림으로 쉽사리 숙소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 마을회관 쪽을 서성였다. 나를 발견한 선장님께서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여러 마을주민들이 오리 고기를 먹고 계셨다.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가 오리 고기를 한 점 먹었다. 나는 서울 사람이라 고기보다는 회가 더 귀한 음식이었는데, 여기는 회보다는 고기와 과일이 육지에서 공수해 와야만 하는, 더 귀한 음식이란다. 주민 분들과 즐겁게 대화하다 보니 너무 편해서 내가 지금 여행 온 것인지 잊어버릴 정도였다. 여행객의 피로와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탐방로를 따라 내려가면 영산도 앞바다가 펼쳐진다
탐방로를 따라 내려가면 영산도 앞바다가 펼쳐진다

다음 날 아침 무엇을 하면 좋을까 선장님께 여쭤봤더니, 섬에 있는 산인 ‘된볕산’의 전망대에 오르는 것을 추천해주셨다. 나는 전망대를 지나 산을 한 바퀴 돌아서 내려오는 건 어떠냐고 여쭤보았다. 선장님께서는 그것도 좋지만 긴 바지를 입고 올라가야 한다고 하셨다. 그런데 도시 생활에서의 계획 짜기에 지쳤던 나는, 이번 여행을 올 때만큼은 ‘아무 생각 없이’ 내려왔고, 바지도 달랑 2벌만 가져왔으며, 그마저도 2벌 모두 반바지뿐이었다. 그렇지만 선장님의 말에 “긴 바지는 안 가져 왔는데요” 라고 대답하면 칠칠맞아 보일까봐, 알겠다고만 대답해버렸다. 내일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상상도 못한 채.
둘째날 아침, 나는 선크림만 간단히 바른 채 서둘러 숙소를 나섰다. 핸드폰도 필요 없을 것 같아 거치적거린다는 생각에 두고 나왔다. ‘등산이라고 해봤자, 영산도에 오기 전 들렀던 목포의 유달산 산행한 정도려니, 유달산 보다 훨씬 낮아 보이는데..’ 하고 쉽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는 완벽한 나의 판단 착오였다. 된볕산을 너무 만만하게 본 것이다.

전망대까지는 수월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남해 바다는 절경이었다. 드넓게 펼쳐진 바다, 탁 트인 전경 …. 마음 깊은 곳까지 탁 트이는 듯 했다. 그런데 정상까지 오르면 더 멋진 풍광을 감상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시원한 아침 공기에 소쇄瀟灑한 기운이 더해져 정상까지 빠르게 갈 수 있으리라,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었다.
전망대를 지나자, 길이 다소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방향 표시가 잘 되어있어 쭉 따라가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다만 반바지를 입고 있었던 탓에, 앞으로 전진해 나갈수록 야생초와 나뭇가지에 다리가 점점 긁혀나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미 정상 부근에 다다른듯하여 뒤로 돌아갈 바에야 끝까지 완주하여 영산도에 나의 발자취를 남겨보자는 마음으로 걸어 나갔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장애물이 나타났다. 산에 여기저기 벌들이 포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요리조리 잘 피해갔는데,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으악!”하면서 앞으로 뛰쳐나갔다. 벌한테 쏘인 것이다. 분명히 벌이 없다고 생각하고 지나가던 구간이었는데.. 등짝이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 났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핸드폰을 두고 온 것이 후회가 되었다. ‘나 혼자 이 산을 끝까지 내려가야 하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자 무서우면서도 왠지 모를 오기가 동시에 생겨났다.
빠르게 발걸음을 재촉하다보니 어느새 산의 정상에 다다랐다. 섬 밑에서 볼 때는 야트막해보였는데,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꽤 높이 올라온 것이 느껴졌다. 육지의 등산에서 정상을 오른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섬에서의 등산은, 정상을 정복했을 때의 뿌듯함과 사방의 바다를 한 눈에 담을 때의 상쾌함을 동시에 맛 볼 수 있게 해주었다.

해무가 특히 아름다웠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숨막힐 듯한 장관이었다. 해무가 가득한 산 정상.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했고, 나 혼자 비밀의 문을 열고 미지의 세계에 들어온 것 같기도 했다. 육지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신비한 느낌이었다. 이 장관을, 집에 가져갈 수는 없을까, 마치 옛 시조에 나오듯 병풍처럼 ‘둘러두고’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내려오는 길은 여전히 무서웠다. 올라갈 때보다는 금방 내려왔는데, 벌에 또 쏘일까 무서워서 ‘걸음아 날 살려라’ 라는 마음으로 거의 날다시피 산을 내려왔기 때문이다. 내려오고 나서 보니, 내 다리는 여기저기 상처가 나 만신창이가 되었다. 씻자마자 보건소(영산도에는 작은 보건지소가 있다)로 가 벌에 쏘인 상처를 치료했다.

보건소로 가는 길에, 전 날 뵀던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아침에 등산하러 가면서도 우연히 마주쳤었는데, 산에 올랐던 내가 안 내려오자 걱정되어 전망대까지 혼자 올라갔다 오셨다고 했다. 괜히 걱정만 끼쳐드린 것 같아 감사하면서도 죄송했다. 다친 다리는 여행 와서 생긴 추억으로 생각하라는 따뜻한 말씀을 건네주시기도 했다. 전날 마을회관에 이어 영산도 주민 분들의 따뜻한 마음 씀씀이를 느낄 수 있었다.
숙소에서 잠깐 쉰 후, 선장님의 조카와 조카 친구들이 여행을 왔다고, 같이 해상투어도 하고 낚시도 나가보자는 선장님의 제안에 이끌려 배를 탔다. 햇빛에 반짝이는 바다, 기분 좋게 일렁이는 배…. 모든 것이 완벽했다. 우리는 우선 배를 타고 영산도를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영산도에는 ‘영산 8경’이라는 8대 비경이 있다. 영산 8경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석주대문’과 ‘비성석굴’ 이다. 일명 코끼리바위로 불리는 석주대문은 기암괴석 중간에 대문 모양의 커다란 구멍이 나 있는 형태이다. 예로부터 파도가 사나울 때 교역선들이 석주대문 아래서 쉬어 갔다고 한다. 요즘도 파도가 세차면 가끔 배들이 쉬어간다고 선장님께서 덧붙이셨다. 자연이 빚은 피난처라니! 만물의 신비로움과 경외로움이 새삼 다시 느껴졌다.

비성석굴은 비성鼻聲, 즉 석굴에서 코고는듯한 소리가 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내가 간 날은 날씨가 맑아 잠잠한 콧소리가 났다. 사실 비성석굴 그 자체보다 나를 더욱 매료시켰던 것은 비성석굴 앞의 에메랄드빛 바다였다. 비취색 바다를 보는 순간 나는 남도에, 영산도에 더욱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런 쪽빛 바다색은 외국에서만 볼 수 있는 줄 알았는데, 남도가 이런 보물을 숨겨놓고 있었다니. ‘그동안 내가 우리나라 섬의, 바다의 아름다움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산도의 절경을 둘러본 후 본격적으로 낚시에 나섰다. 처음 해보는 낚시라 미끼를 끼는 것부터 모든 것이 새로웠다. ‘과연 내가 잡을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으로 미끼를 던졌다. 그런데 이게 웬 일! 넣자마자 얼마 되지 않아 우럭을 낚아 올렸다. 처음으로 본 손 맛이었다. 스스로 잡았다는 기쁨에 팔이 아픈 줄도 몰랐다. 이날 나는 총 우럭 3마리를 포함해 총 4마리를 낚아 올렸다. 다른 생선 하나는 선장님께서 이름을 말해주셨는데, 처음 들어본 이름이라 가물가물하다. 검은색의 날씬한 몸통이 벵에돔이 아니었을까 싶다.
갯바위에서 거북손도 차곡차곡 따다 모았다. 낚시가 끝난 후, 선장님께서 우리들이 직접 잡은 생선들을 회를 떠 주셨다. 회가 입에 넣자마자 녹는 듯 너무 맛있어서 처음에는 초장을 찍어먹는 것조차 잊었다. 허겁지겁 먹는 나를 보며 선장님께서 “서울에서는 이렇게 안 먹어 봤어요?”라고 물어보셨다. 나는 다소 겸연쩍어하며 “이렇게 살이 두툼한 회를 실컷 먹어보기는 처음이에요..” 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석양이 질 무렵, 영산도로 다시 돌아왔다. 숙소에서 잠시 쉬고 바비큐장에 가니 선장님 조카, 그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돼지고기, 전복, 생선구이를 맛보며 여름밤의 정취를 즐겼다. 내년에 영산도에 다시 오고 싶다는 얘기를 하면서.

영산도의 밤은 낭만적이었다. 조금 있으니 여러 마을 주민분들도 오셨는데, 거기에는 ‘효경이’와 ‘연진이’도 있었다. 영산도에는 아이들이 3명밖에 없는데, 영산도 주민들은 명품마을 사업을 하면서 아이들의 이름을 따 펜션 이름을 ‘바다네’, ‘효경네’, ‘연진네’로 지었다. 나는 ‘연진네’ 숙소에서 묵고 있었는데, 실제 연진이를 보니 반가웠다. 

 연진이랑 효경이는 나를 언니처럼 따르면서, 이내 내 손을 붙잡고 어디론가 이끌었다. 그리고 캠핑장 끝 쪽에 놓여진 자신들의 고무오리보트로 데려가서는, 그 위에 자꾸 누워보라고 권했다. 처음에는 왜 오리보트 위에 누워보라는 것인지 몰랐다. 그런데 시키는 대로 누워보니, 왜 연진이와 효경이가 그토록 나를 그곳으로 데려오려고 했는지 바로 알게 되었다. 누워서 밤하늘을 바라보자, 별이 손에 잡힐 것처럼 바로 눈앞에 떠있었다. 연진이와 효경이는 내 옆에 같이 누워 그 경치를 나에게 구경시켜 주고 싶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영산도를 떠나는 배를 타기가 아쉬워 아침에 섬을 한 바퀴 더 둘러보았다. 낙조가든에서 한없이 펼쳐져 있는 지평선을 바라보기도 하고, 톳과 미역을 햇빛에 말리는 정담은 마을 풍경을 다시 한 번 느리게 눈에 담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 마을 중간에 있는 ‘바다, 연진, 효경 전교1등 도서관’에도 들러보았다. (학년 당 학생이 한 명뿐이라 모두가 전교 1등이어서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도서관에 들어서자 은은한 후박나무 향이 내 몸을 휘감았다. 책장에 손을 뻗어 시집을 꺼내 흔들의자에 위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고요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이따금 저 멀리 바다를 응시하다보니 어렸을 때 외할머니 집 툇마루에서 배를 대고 누워 책을 읽었을 때의 여유로움이 되살아나는 듯 했다.

애초 1박 2일의 여정으로 왔던 곳, 있다 보니 2박 3일 동안 있게 되었다. 영산도는 찾는 휴양객이 많은데, 늦게 예약했음에도 일요일, 월요일에 숙박하게 되어 빈 숙소가 있었다. 혼자였다면 바다낚시는 가기 힘들었을텐데, 때마침 월요일에 다른 관광객이 와줘서 잊지 못할 추억을 쌓을 수 있었다. 역시, 여행의 묘미는 ‘우연히 가져다 주는 행운’에 있는 것이 아닐까. 영산도의 벽화에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 참 멋진 일이네요’라는 글귀가 있었는데, 이는 나의 영산도 여행에 딱 들어맞는 문구가 아니었을까 싶다.
천혜의 자연을 품은 영산도에서 만든 추억들이 여전히 내 마음 저편에서 넘실댄다. 다시 7월이다. 내 몸이 들썩거린다. 그 섬, 영산도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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