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물도 사람처럼

이 글은 해양수산부와 한국해운조합이 공동 주최한 ‘제 2회 가보고 싶은 섬여행’ 후기에서 선정된 대상 및 우수상 후기 2편을 주최측과의 협의를 통해 게재한 것이다.        -편집자 주-

 
 

흑백 사진 속 여인
태초에 섬이 하나 있었다.
어부 두 명이 납친 된 이후부터는 이 섬에 해군들이 주둔하게 되었다. 장군봉 정상에는 기지탑이 설치되었고, 해군들은 감옥같은 이 섬에서 일말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보이는 건 새파란 하늘과 옥빛 바다 그리고 초록을 머금은 나무들이 전부였다. 맑은 날은 하늘과 바다색이 같아서 그 경계선을 구분 할 수 없을 지경이니, 보이는 건 두 가지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낮의 지루함을 이기지 못한 한 병사가 마을에 내려가 어부들의 그물 손질을 도와주기로 했다. 일을 마치고 어부의 집에 초대되어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말린 생선 몇 조각과 김치가 전부인 걸인의 밥상이었지만, 일상의 단조로운 식사에 질려온 병사에겐 황후의 밥상이었다. 더군다나 식사 내내 병사가 눈을 떼지 못하고 쳐다보던 낡은 사진 한 장이 있었다. 흑백 사진 안에는 청아하고 단아한 한 여인이 미소 짓고 있다. 어부의 외동 딸이었다. 병사는 가슴 설레어 하면서도 용기 내어 한번 만나게 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직업군인이 된 병사와 어부의 딸은 중매를 하게 되었고, 이 섬에 정착해 살게 되었다. 직업 군인은 외양선을 거쳐 지금은 외지에서 건설업을 하고 있다. 사진 속 소녀는 미싱공, 일용직 잡부등의 고단한 삶을 거쳐 지금은 옛집을 수리해 지금의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다. 
그 낡은 흑백 사진 속 여인네 집에서 3일을 보내게 되었다.

 
 

“혼자 뭐하로 여까이 옵니까? 방 값은 같으니께 마 둘이 오소”
“네, 혼자 여행하는 객이라 괜찮습니다”
“그라믄, 여기 식당도 가게도 없으니 햇반이나 먹을 거 단단이 챙겨오소”
“네”
통화상으로 지레 겁을 먹은지라 통영항에서 먹을거리를 바리바리 싸다 보니 큰 짐이 세 개나 된다. 통영을 떠난 여객선은 지친 바다를 힘겹게 가르며 나아간다. 여객선 승선자가 80여명인데 당랑 세 명만 남기고 나머지 승객들은 소매물도에 버려진다. 매물도를 찾는 이가 줄어듬에 내심 즐거워하는 이기적인 여행자의 마음이다.

소매물도의 번화함을 뒤로 하고 매물도에 도착하니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린다. 민박집 주인아줌마의 반가운 환영속에 체크인을 한다. 생각보다 젊어 보이시고 말투도 세련된 분이시다. 방과 욕실을 안내 해 주시고, 매물도 관광에 대해서 설명해 주신다. 바다가 보이는 민박집이라 예약 했는데, 오션뷰가 가히 예술적이다. 앞마당에 않아 수평선에 맞닿은 하늘을 보며 망중한을 즐길 수 있어서 좋고, 떨어지는 해의 멋진 공연을 즐기기에도 안성맞춤이다. 

민박집은 작은 터미널이다. 사람들이 오고 가며 만남과 이별을 이야기 한다. 떠나는 사람들에게선 아쉬움이 묻어나고, 들어오는 이들의 표정에선 설레임을 읽을 수 있다. 떠남과 만남이 공존하는 곳이다. 그 공존의 교집합을 담당하는 분이 민박집 주인장이다. 항상 그 자리에 계신다. 맥주 한 잔에 새옹지마 같은 인생사를 얘기해 주시기도 하고, 여행객이 조금이라도 불편하지 않는지 세심하게 배려해 주신다. 투숙객 중 몇 분과 친해져서 식사도 같이하고, 몇 잔의 술로 삶의 다양성도 이야기 한다. 이번 여행에서는 야심차게 준비해 간 봄베이 진이 위력을 발휘해서 서먹서먹 하던 분위기를 일순간에 화기애애하게 만들어 주었다. 주인장이나 여행객들과 함께 즐거움을 교감할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놈이다. 참 여행자는 안다. 여행지에서 만난 주민들과 십분 이상 이야기 하는 이는 여행자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여행객임을.
흑백 사진 속 여인의 이야기에 여행자의 눈빛은 별처럼 반짝이고, 지친 밤은 적막한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속세를 벗어나니 자연이 참 곱다.
매물도는 당금마을과 대항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서로 멀진 않지만 들어오는 배 시간이 다르고, 당금마을에만 방파제가 있어서 일종의 큰형님 역할을 한다. 그러다 보니 여행객들도 당금마을이 더 많다. 예술가들이 두 마을을 꾸미기 시작해서 지금은 집집마다 예쁜 현판과 조각물들로 채워졌고, 섬 전체가 하나의 작은 예술 조각들로 가득하다. 폐교의 고즈넉한 풍경, 절벽 밑으로 만을 형성해 만들어진 자갈 해수욕장, 전망대로 오르며 만나게 되는 흑염소 가족들의 나들이를 구경하는 맛도 구수하다.
매물도의 큰 매력이라면 정상인 장군봉에 올라 소매물도를 비롯한 인근 섬들을 관망하는 것이다. 장군봉을 오르며 드러나는 섬의 매력들은 압도적이다. 산에 오르다 보면 잘록한 허리쯤 되는 곳에 광활한 풀밭이 있다. 거센 바람을 막아 주는 이가 없어 이곳의 풀들은 항시 수난의 연속이다. 바람 불어 풀이 누운 자리에 파도 소리가 메아리친다. 8부 능선에 이르면 하늘에서 대항마을을 바라보게 된다. 오가는 배들이 뿜어내는 흰 물결들이 고요한 호숫가의 정적을 깨운다.

정상에 오르면 풍경의 장관이 절정에 달한다. 탁 트인 시야에 들어오는 수채화 같은 자연의 모습은 숨이 멎을 정도이다. 장군봉 정상 한켠에는 이런 푯말이 있다.
“이 산은 매물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장군이 군마를 타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장군봉(210m)이라 일컫는다. 장군봉에서 내려다 보는 등대섬, 선유도, 가익도, 욕지도, 사량도, 거제도, 남해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특히 날씨가 맑은 날에는 저 멀리 대마도까지 조망 할 수 있는 행운도 얻을 수 있다. 장군봉 아래 편 숲은 산신제를 지냈던 제단이 있어 이를 신성시함으로써 현재까지 원시림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북으로 난 절벽은, 유럽의 피요르드식 해안 모양으로 절벽에 부딪히는 새하얀 파도의 모습이 절경이다. 또한 남쪽으로 이어지는 풀밭 트레킹 코스는 바다와 절벽이 함께 만들어 내는 수려한 외모가 압권이다.  이제껏  다녀본 올레코스 중 단연 으뜸이라 칭하고 싶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오면 출발지인 대항마을에 이르게 된다. 뭐니 뭐니 해도 매물도의 최고 하이라이트는 대항마을 - 당금마을 - 전망대 - 쉼터 - 장군봉으로 이어지는 트래킹 코스이다. 민박집에서 숯불에 구워진 고기로 배를 채우고 연인과의 달콤한 술에 취해 아침 일찍 떠나는 다수의 여행객들은 이 트레킹 코스의 참맛을 모를 것이다.  매물도를 겉 핥기로 맛만 보고 떠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매물도의 일몰은 발리의 짐바란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힘에 겨워 바다로 추락하는 빠알간 태양 덩어리가 마지막 안간힘을 쓰며 시시각각 화려한 색을 연주한다. 그래서 수평선 아래로 사라지기 전과 후의 풍경은 사뭇 다른 느낌을 가져다준다. 섬을 가려준다고 해서 ‘가리어’라고 불리는 5개의 암초 바위(흔히 매물도의 오륙도라고도 불린다)에 반사되는 일몰의 자태도 곱다. 방파제에서 낚시를 즐기는 강태공들의 모습을 보자. 해가 질 무렵 그들의 뒷모습은 또 하나의 ‘가리어’를 연상 시킨다.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 내는 조합이 섬 이름만큼이나 아름답다.
 

나 홀로 길을 가네
섬 여행에서 빠지지 않고 해야 할 몇 가지가 있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얘기 나누는 것(민박집 주인장을 주 타깃으로 삼으면 좋다,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된다), 달무리가 은은하게 별들 사이로 비칠 때 방파제에 누워 별들을 세는 것(캔 맥주 2개는 필수 동반해야 하며, 방파제에 다리를 걸치고 않으면 바다가, 그 자세로 누우면 하늘이 그대의 고민을 해결해 준다. 정말이다!), 바다가  잘 보이는 한적한 곳에서 망중한 즐기기.(말그대로 멍 때리기다. 생각 버리기에 전념해서 뇌를 깨끗하게 비어 버린다)

때론 한 발짝 물러서서 사물을 보면 잘 보일 때가 있다. 어려운 난관에 봉착 했을때나 나 자신을 찾을 수 없을 때에 그리하면 좋다. 섬 여행을 떠나면 나에게서 벗어나 다른 세계에서 나를 바라보게 된다. 이런 맛에 중독되어 버려서 섬 여행은 당분간 계속 혼자일 것 같다. 진정 나는 내가 나 자신일 때만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아쉬움을 뒤로 하고 여객선에 오른다. Going Home 이다.
같은 배에 탄 여행객들은 모두 패잔병이다. 들어 올 땐 노르망디로 출정하는 의욕 넘친 병사들 이었건만, 나갈 땐 1.4후퇴때 흥남부두를 탈출하는 절망에 찬 난민들이다. 한 마리 갈매기가 긴 여정을 달래려는 듯 여객선 꽁무니를 하염없이 따라온다.
아! 매물도 사람처럼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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