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해상안전 대책의 허점
다시 원론적인 이야기 한마디 하여야 하겠다. 국내법과 달리 국제법은 법의 제정과정과 집행 방법에 다른 점이 많다. 오늘날의 국제법과는 달리 전통적인 국제법은 국가간의 오랜 관행이 법제화된 관습법이 주류를 이루어왔다. 이 국제관습법이라는 것은 존재 자체가 약간 애매하다. 그리고 어떤 강대국이 국제관습법을 강력하게 부정할 경우, 이에 대항하는 수단이 마땅치 않다. 강대국이 아니라도 그런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동서냉전체제하에서 사회주의국가들의 주장 중에도 그런 것이 많았다. 특히 세부 내용면에서 학자들간에 의견이 엇갈리는 문제는 당사국간의 분쟁해결에서 얼마든지 팔이 안으로 굽을 수 있다.

 

국제사회가 발전하면서 이러한 불명확성을 명확하게 하고, 내용도 정리하기 위하여 그간 국제관습법으로 되어 있던 내용과 새로 필요한 국제질서를 조약으로 만드는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국제법의 성문화라고 할 수 있다. 국제법이 조약화되어 존재와 그 내용이 명확하게 된 장점은 있으나 국제관습법의 조약화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문제의 하나는 조약이 국제회의 같은데서 채택되었다고 해서 바로 발효되는 것이 아니고 비준이라는 또 하나의 절차를 거쳐야 하고, 해상안전과 관련된 조약과 같은 다자간 국제조약의 경우, 발효요건이라는 것이 있어 일정수 이상의 국가가 비준하였을 경우에 발효되도록 되어 있다. 한 국가가 특정한 조약을 비준하고자 할 경우, 국내에서 사전에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등 절차도 복잡하다. 그 결과 조약채택회의에서는 필요성을 인정하여 조약을 채택해 놓고, 비준절차가 지지부진하여 조약이 발효되지 못하고 사문화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특히 해상안전과 관련된 조약과 같이 국가 또는 그 국가의 국민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주는 내용이 있는 조약의 경우, 비준에 신중을 기한다. 꼭 필요한 조약도 발효되지 않고, 오래 방치된다.


또다른 문제는 조약 내용의 성실한 집행의 보장이 안되는 점이다. 조약을 국내에서 시행하기 위하여는 국내법이나 시행세칙을 제정하여 성실하게 집행하여야 한다. 국가에 따라서는 국제여론에 못이기거나 조약의 비준국가라는 법적 자격의 필요성 때문에 조약을 비준해 놓고, 실제 국내법의 제정을 소홀히 하거나, 국내법을 정비해 놓고도 실제 집행을 형식적으로 하거나 집행 자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해상안전과 관련된 국제조약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해상안전이나 해양오염방지를 위하여는 국가나, 해상에서 종사하는 선박에게 안전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의무를 부과하게 된다. 필요해서 채택하기는 하였지만 의무가 부과되는 것은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해운기업의 경우, 많은 경비의 지출이 수반되는 조약의 발효를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해운기업들은 자국 정부가 해상안전과 관련된 조약의 비준을 미루도록 로비를 하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에도 구태여 앞서갈 필요는 없다는 입장을 갖게 된다. 이런 저런 이유로 조약은 채택만 해 놓고 발효가 늦어진다.

 

대형 해난사고의 계속적인 발생과 TSPP
전술한 바와 같이 토리케년호의 사고 이후 해상안전과 관련된 많은 조약이 채택되었으나, 발효가 안된 상황이 오래 지속되었다. 그런 중에도 대소 해난사고는 계속해서 발생하였다. 특히 토리 케년호와 1978년 사이에 일어난 대형사고중 상당수가 미국의 연안에서 발생하였고, 그 중 몇몇 사고는 미국 연안을 대규모로 심각하게 오염시켜 여론이 매우 악화되었다. 이에 미국이 화가 났다. 그 이유는 토리 케년호에서의 사고와 유사하게 사고를 낸 선박이 편의치적선 등 외국선인데 안전에 대한 충분한 조치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고를 내고, 그 사후 수습에 당사국(선박등록국)이나 선주가 충분한 기능을 하지 아니하고 피해만 미국이 입기 때문이다.


화가 난 미국이 자위권을 발동하기로 하였다. 그 방안으로 1978년에 미국이 국내법으로 유조선과 항만의 안전에 관한 법률(Tanker and Port Safety Act 1978)을 제정하여 미국 연안에 취항하는 선박에 적용하게 되었다. 동시에 미국은 해상안전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있는 국제기구인 IMO에 미국과 유사한 조치를 강력하게 시행하여 미국이 원하는 수준의 안전기준이 국제 기준으로 정착되도록 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면서 이러한 요구를 충족하지 아니한 선박의 미국 연안 취항을 강력하게 금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것은 세계 해운업계에 전달된 매우 강한 메시지였다. 왜냐하면 문제가 된 것이 주로 유조선인데 당시 미국은 세계 제1의 원유수입국이었는데 만약 미국이 요구한 기준을 충족하지 아니하면 가장 큰 시장에의 접근이 사실상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청을 받은 IMO는 서둘러 국제회의를 소집했다. 이렇게 소집된 회의가 TSPP(Tanker Safety and Pollution Prevention)회의였다. 이 회의는 논의를 거친 후, 73년과 74년에 각각 채택된 해양오염방지협약과 해상인명안전협약의 조기발효를 촉구하기 위한 여러 가지 대안들을 논의해 채택과 함께 MARPOL 73과 SOLAS 74의 미비점을 보완하는 프로토콜(PROTOCOL : 이 경우의 프로토콜은 원 조약에 대한 개정 보완조약의 의미를 갖는다)을 채택하며 여러 가지 다양한 의견 때문에 조기에 채택하지 못하였던 STCW(Standard of Trainning, Certificate and Watch-keeping for Seafares)조약을 채택하였다. 이 TSPP회의를 계기로 해상안전문제와 해양오염방지 문제가 다시 국제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따라서 많은 국제조약이 채택, 비준, 발효되었고, 해상안전과 관련된 다양한 국제제도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항만국 통제제도의 일반화
74 SOLAS와 TSPP를 계기로 나타난 새로운 움직임의 하나가 소위 항만국통제(Port State Controll)제도다. 전통적인 국제해운관습법에서는 국제항행에 종사하는 선박에 대한 사회적 기술적인 규제는 당해 선박의 등록을 받아준 등록국의 배타적 관할에 속하는 것이므로 등록국(이것을 기국이라고도 한다 이하 같다)이외의 국가에서는 원칙적으로 관여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원칙은 외국 상선의 영해에 대한 무해통항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 비록 외국 선박일지라도 영해를 통항하면서 연안국에 피해를 주지 않는한 자유스럽게 통항(무해통항)할 수 있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리고 상선의 국제적인 안전기준의 준수여부도 바로 기국의 배타적인 관할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 원칙적으로 기국에게 맡기고 연안국이나 항만국은 관여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토리케년호 사고를 비롯한 여러 가지 대형해난사고의 원인과 사고후의 사후수습과정에서 이러한 원칙의 허점이 발견되기 시작하였다. 즉 이러한 제도가 시행되기 시작할 무렵인 19세기와 20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국제해운업에 종사할만한 선박의 등록을 받아줄만한  소위 주권국가들은 10여개국으로 한정되었다. 이들 국가의 대부분이 소위 열강으로 불리는 국가들이었으므로 국제적인 자기 권리 찾기에도 한몫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의무의 이행에도 어느 정도 공신력을 가질만 하였다. 그러나 20세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편의치적선제도가 일반화되고, 많은 식민지들이 새로 독립하여 소위 개발도상국으로 국제사회에 참여하면서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즉 편의치적국과 개발도상국은 선박의 등록을 받아주면서 이들 선박이 국제적인 안전기준을 안 지켜서 일으키는 사고와 그 사고의 사후수습에서 국제적인 기준에서 요구되는 일반적인 의무를 수행하지 아니하고 수수방관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것이 명백하게 드러난 것이 토리 케년호 사고 이후 잇달아 일어난 편의치적선 들에게서였다.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하여 SOLAS 74에서 기국의 의무소홀로 인하여 국제적인 안전기준을 지키지 않은 선박이 국제항행에 종사할 경우, 연안국이 자위권 발동 차원에서 필요한 조치를 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미발효로 방치되다가 전술한 미국의 ‘유조선과 항만의 안전에 관한 법률 78’에서 규정되어 미국에서 먼저 시행하고, 이 제도를 미국이 IMO를 통하여 국제적인 제도로 확산시킬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였음은 전술한 TSPP회의의 설명에서 기술한 바 있다.


뒤이어 1982년에 서유럽 14개국이 공동으로 작성한 기준미달선에 관한 항만국 통제에 대한 양해각서가 1982년에 채택시행되었다. 이 조약의 공식명칭은 Memorandam of Understanding on the Port State Controll 1982로서 약칭 파리 메모램덤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기준미달선(Sub-standard Vessel)이라는 개념은 해상안전과 관련된 일반인 국제조약인 요구하는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선박을 일컫는 개념이다.


미국과 유럽의 주요해운국들이 항만국 통제를 시행하게 되자, 뒤이어 다른 국가들도 이 제도를 받아들여 시행하게 되어, 이제는 항만국통제는 기준미달선 축출을 위한 국제적인 일반제도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 제도는 기존의 해상안전과 관련된 국제법 체계를 크게 훼손하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피해를 받는 연안국이 자위권 차원에서 발동하는 영토주권의 일부로 간주한다면 기준미달선의 영해내 통항은 잠재적인 유해통항이라고 널리 해석하여 시행하게 된 제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해난사고는 제도의 산물
TSPP를 계기로 해상안전과 관련된 새로운 국제체제는 어느 정도의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채택만 해놓고 오래 방치되었던 MARPOL 73과 SOLAS 74도 그 개정 의정서까지 포함하여 조기발효되었다. 항만국통제도 실시하게 되었다. 선원의 자격과 훈련, 당직 등 안전과 관련된 국제준측도 마련되었다. 선원과 관련해서는 그 이전에 ILO조약 147로 불리는 선원에 대한 처우와 관련된 조약들도 국제적으로 적용되어 선원들의 열악한 근무환경과 처우도 개선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 당연히 줄어들어야 할 해난사고는 줄어들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더 증가하는 경향까지 보였고, 적어도 국제적인 관심사가 될만한 대형사고는 거의 없어졌던 여객선의 대형사고까지 나게 되면서 국제여론은 다시 악화되었다. 대형 유조선 사고로는 미국의 영토인 알라스카의 발디즈만에서 원유를 적재하고 미 본토로 출항하던 엑손 발디즈호가 출항중 좌초로 많은 원유를 해양에 유출시켜 대규모 오염사고를 발생시켰다. 이 사고는 피해액면에서는 사상 최고의 손실을 기록하였고, 미국 연안에서 미국선사에 의하여 발생된 사고라는 점에서 미국민을 흥분시키기게 충분했다. 이런 저런 사유로 해서 미국의 여론이 악화되어 다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게 되었다. 89년에 이 사고가 나자 사태가 겨우 수습된 다음 해에 유류오염법(Oil Pollution Act 1990)을 제정하여 해양오염방지 대책을 대폭 강화하였다. 이 법에는 미국 연안을 항행하는 유조선의 선체를 이중화할 의무도 포함되었다.


해상안전에 관련된 전문기관들도 다시 어떻게 하면 대형사고를 방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면서, 대책 강구에 부심하였다. 그 결과 얻어낸 결론이 개별적인 사고의 원인을 분석해보면, 선장이나 선원의 인적과실과 같은 개인적인 요인으로 귀결되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해난사고는 다른 문제와 마찬가지로 시스템의 산물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해상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해난사고를 근본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대책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이에 앞서 ISO는 품질관리를 향상시키기 위한 시스템으로서 ISO 9000 시리즈라는 것을 제정하여 이를 제조업체들이 채택하도록 유도함으로서 상품의 품질을 크게 향상시킨바 있다. 해상안전에 관한 전담국제기구인 IMO에서도 이러한 ISO 9000시리즈의 정신과 제도를 본 따서 해난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자 한다면 육, 해상의 관리체제 전반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를 하드웨어면과 소프트 웨어면을 망라한 지침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IMO가 제정한 ISM(International Safety Management) Code다. 이 ISM Code는 1993년 IMO의 제18차 총회에서 채택되어 각 선박회사 및 선박관리회사가 이를 적용하도록 권고하는 동시에 각국 정부에도 이를 권고하도록 요청하였다. 그 후 이 제도는 시행과정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보완하고 시행성과를 점검하여 적용범위를 확대하고, 초기의 권고사항을 강제사항으로 발전시키게 되어 지금은 전 선박회사 및 선박관리회사들이 다 시행할 의무를 지고 있다.

 

9. 11 테러와 ISPS Code의 출현
2001년 9월 11일, 인류역사상 전무 후무하고,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도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쌍둥이 빌딩으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던 뉴욕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 빌딩이 테러범에 의하여 폭파되어 수천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고, 이를 TV를 통하여 바라보던 지구상의 전 인류를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다. 뿐만 아니라 그 후 일어난 아프카니스탄 및 이라크 사태와 뒤 이은 무장 저항세력들의 무차별적인 자살폭탄 테러는 전 지구를 새로운 공포속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하였다. 테러발생지역도 처음에는 미국이나 이라크 등 특정지역에 한정되었다가 그 대상 지역이 전지구적으로 확장되면서 지금은 전 인류가 이유도 모르고 테러의 공포속에 살게 되었다.


이 문제에 대한 대응도 어쩔 수 없이 필요하게 되었다. 1970년대 후반 이후의 해양오염문제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도 이러한 테러로 가장 심각한 피해를 보았고, 방치할 경우, 더 많은 피해를 받을 개연성이 높은 미국이 앞장서서 대책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 대책 마련에 있어서 이러한 유형의 테러중 가장 쉽고 영향력이 강한 민간항공기와 공항, 그리고 정도는 항공기나 공항보다 덜하지만 비슷한 성격을 가진 선박과 항만도 당연한 보호대상이 된다. 미국의 주도에 의하여 이러한 테러로부터 상선과 항만을 보호하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자는 주장이 나왔고, 이를 IMO가 받아들여 대책마련에 나섰다.


이에 따라 IMO는 선박 및 항만시설에 대한 보안을 강화하기 위한 대책의 마련을 서둘러  2002년 12월 12일 영국 런던에서 해사보안외교회의를 개최하여 ISPS(International Code for the Security of Ships and of Port Facilities) Code를 채택하고 이를 SOLAS 조약의 일부로 삽입하였다.


ISPS Code는 자살 폭탄으로 대표되는 크고 작은 테러가 빈발하는 상황에서 채택되었기 때문에 어느 제도보다 신속한 대응이 필요한 사안이었다. 따라서 국제적인 제도로서는 이례적으로 빠른 비준 발효 절차를 거쳐 2004년 7월 1일에 전세계적으로 시행되게 되었다. 이 Code에 의하여 국제항행에 종사하는 모든 여객선과 500톤 이상의 화물선은 적법한 국제선박보안증서인 ISSC(International Ship Security Certificate)를 소지하여야 하고, 이 증서가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게 되었다. 동시에 국제항행에 종사하는 선박이 기항하는 항만도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것이 의무화되었다.

 

해상안전 및 보안의 미래
이상 다섯 차례에 걸쳐 해상안전 및 보안에 관한 역사적인 발전과정을 살펴보았다. 이 과정에서 해상안전이라는 인간이 추구하여야 할 보편적인 가치가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충분히 달성될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후퇴하거나 제 자리 걸음을 하는 현상을 발견하였다. 게다가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선박연료의 변화와 산업화의 진전, 석유의 대량소비시대를 맞이하여 석유에 의한 해양오염문제가 새로운 인류의 공적으로 등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미 150년전에 사라진 것으로 알았던 해적들이 유령처럼 다시 나타나 해상교통을 방해하고, 전에는 미쳐 생각지도 못하였던  9. 11 테러와 같은 새로운 위협요소가 해상교통에도 나타나게 되었다.


어찌 되었든 오늘날의 해상안전 문제는 멀리 거슬러 오른다면 인간이 물위를 왕래하기 시작한 원시시대로 거슬러 오를 것이고, 좀더 가까이는 컬럼버스 이래 인간이 해양을 천연의 고속도로로 이용하여 지구를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해상안전문제는 당해 항해를 책임지고 수행하는 당사자의 문제로 한정된 것이었고, 사회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그에 대한 대책도 사전적인 예방조치보다는 경제적인 손실에 대한 사후 보전을 목적으로 하는 보험이 주류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로서는 해난사고와 같은 해상안전문제는 거의 전적으로 불가항력에 의한 사고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18세기 후반이후의 산업혁명과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새로운 강제기선의 출현과 선박의 대형화는 목조범선시대의 불가항력적인 사고를 몰아내는데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복병은 의외의 곳에 있었다. 신도 이 선박은 침몰시킬 수 없다고 장담하고 처녀 출항하였던 타이타닉호가 처녀항해에서 빙산과 충돌하여 1,500명이 넘는 인명을 북대서양의 차가운 바닷물 속에 수장하면서 인간과 해상안전간의 새로운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해상안전문제에 관련된 역사는 대형해난사고와 그 후속 대책의 숨박꼭질이었다. 원양 항해에 종사하는 대형여객선과 여기에 승선한 여객의 인명안전에 중점을 두는 SOLAS 조약체계는 미쳐 기능해 보기도 전에 그 객체인 대형원양여객선이 항공기에 밀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967년에 일어났던 토리 케년호 사고로 인한 대규모 해양오염문제는 새로운 인류의 공적으로 간주되어, 이에 대응하는 각종 사전 예방 및 사후 수습책들이 나타났으나 오늘 현재까지도 어느 것도 만족할만한 결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목조범선에 의한 해난사고가 불가항력이었던 것에 비하여 강제기선이후의 해난사고의 주된 원인이 인적과실, 특히 선장과 선원의 과실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만들어진 ILO조약 147이나 STCW 협약도 당초 목적과는 달리 해난사고를 결정적으로 줄이는데 크게 공헌하지 못하였고, 기국에 대한 불신을 대신할 기준미달선에 대한 항만국 통제도 비슷하게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채택된 ISM Code나 ISPS Code의 성과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평가를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다만 한가지 자위할 것은 ISM Code의 시행이후 전세계가 깜짝 놀랄만한 대형사고가 덜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그것이 우연의 산물인지 아니면 ISM Code의 영향인지는 좀 더 두고보아야 한다. 아마도 신이 아닌 인간이 해상교통을 관장하는 한 해난사고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하면 최소화할 것인가에 대하여 진지하게 반성하고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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