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해운
전쟁은 해운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은 전쟁과 해운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의 전쟁은 국지전이었기 때문에 전쟁의 영향을 받는 해역이 한정되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의 경우, 전세계의 해역이 전쟁의 영향권안으로 들어갔다. 그 결과 당시 해운업을 어느 정도 영위하던 국가들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거의 예외없이 해운이 심대한 영향을 받았고, 이 영향으로 전후 세계 해운업의 구조는 많이 다른 양상을 나타내게 된다.


1차 대전에 의하여 약 1,200만총톤의 선박이 상실되었고, 징발로 약 1,500만톤의 선박이 시장에서 퇴출되어 약 2,700만톤(전전 선복의 60%)이 시장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대체 건조투입은 이보다 훨씬 느렸기 때문에 선복부족현상은 전쟁 기간 중 극심하였다. 게다가 잠수함의 공격을 피하는 우회항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어, 운항거리가 크게 늘어났고, 전쟁으로 인한 무역 구조의 변화(독일, 러시아가 사라지고, 미국, 일본이 새로 참여)로 인한 새로운 선복수요도 크게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갑작스러운 수요증가로 인한 항만의 대기시간 증가, 수리시설의 군 징발로 인한 선박수리의 지연 등도 가세하였기 때문에 선복부족은 더욱 가중되었다. 그 결과 운임이 폭등하였는데 부정기선 운임의 폭등이 더욱 심하였다. 그 이유는 부정기선이 보다 많이 전쟁용으로 징발되었고, 완전경쟁시장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부정기선운임은 전쟁이 나던 해인 1914년에 전전의 2배, 1915년말에는 8배, 1916년 중반에는 16배, 1917년말에는 무려 28배가지 폭등하였다.    

 

전쟁기간 전후의 각국 해운구조의 변화
우선 전쟁이 나기 직전인 1914년 현재 각국별 선복보유량을 보면 총톤수 100만톤 이상을 보유한 국가는 영국, 영연방, 미국, 노르웨이, 일본, 이태리, 프랑스, 네델란드, 스웨덴으로 10개국이었고, 그 외에는 소련, 그리스, 덴마크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이는 다른 면에서 본자면 세계열강이라고 해 보아야 불과 10여개국이 이 지구를 요리하고 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 이하 여러 가지 자료를 바탕으로 이들 국가가 1차 대전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영국 및 영연방
영국은 개전하던 해인 1914년 에 1,890만톤을 보유하여 세계 선복의 42%를 점하는 세계 제1의 해운국이었다. 여기다 영연방의 보유선 160만톤을 합하면 세계 선복의 46%가량을 보유한 해운대국이었다.


영국은 주전국이었기 선박의 상실량도 가장 많았다. 특히 독일의 잠수함인 U보트에 의한 상선의 무차별 격침으로 많은 상선이 바다 깊숙이 가라앉았다. 전쟁중 영국이 상실한 선복량이 약 900만톤이었다. 다른 나라의 상실량 합계가 600만톤인데 비한다면 엄청난 상실이 아닐 수 없다.  


영국은 전쟁기간 중 해상보험의 국영화, 상선수출의 금지, 선박국영, 전시비상건조계획의 적극적인 추진 등을 시행하면서 해상수송력을 확보하고자 안간임을 다하였으나 수송력부족을 어쩌지 못하였다. 그 결과 전쟁수행과 민생안정에 필수적인 물자를 운송하는데 차질이 와서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하였다. 영국으로서는 다행히 미국이 말기에 전쟁에 참전하면서 동맹국인 영국을 도왔기 때문에 1차대전이 연합국측의 승리로 끝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1919년에 전 세계선복량은 전전의 4,500만 총톤에서 4,800만 총톤으로 증가하였으나, 영국선복량은 오히려 250만총톤이나 감소되어 세계 상선량 점유비도 34%로 축소되었다. 아마도 이 전쟁을 계기로 영국은 세계의 최강자로서의 위치를 미국에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
개전 당시 미국은 통계적으로만 보면 영국, 독일에 이어 세계 제3위의 선복보유국이었다. 그러나 국력에 비하여 해운력이 상대적으로 취약하였다. 세계 3위라고 하지만 보유선박의 대부분이 오대호 지방이나, 하와이, 알라스카 등 미국의 원격 식민지에 취항하는 선박이었기 때문에 미국 대외교역에서 자국선인 미국적선이 적취하는 양은 대외교역의 10% 내외였다. 나머지 90%의 화물은 당시 세계 1, 2위를 점하고 있던 영국과 독일의 상선이 담당하였었다. 개전하자마자 문제가 생겼다. 미국 대외교역화물 대부분의 운송을 담당하던 영국선중 상당량이 전쟁으로 인한 군의 징발로 철수하였을뿐만 아니라 두 번째로 큰 수송력이었던 독일 상선은 전쟁으로 인하여 항로가 막혀 사실상 이 항로에서의 가동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전쟁 발발로 인하여 발트해와 흑해의 자유항행이 크게 제약되면서 서유럽에 공급되던 러시아 및 독일의 물자 공급이 중단되자 그 수요가 미국으로 전가되어 식량을 비롯한 각종 생필품에 대한 주문이 쇄도하였다. 이렇게 밀려드는 주문에 미국은 충분히 응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운송수단이 없었다. 미국의 대외교역항로에서는 운송능력의 태부족 상태가 야기되어 운송대상화물들이 부두에 산적된 상태에서 오도가도 못하였다. 개전초기 미국은 참전을 하지 아니하고, 중립을 지켰다.


미국의 정책당국에서는 이러한 심각한 상황을 맞이하자 새삼스럽게 국가안보와 해운의 깊은 연관성을 깨달았다. 서둘러 1916년에 Shipping Act를 제정하여 선박원(United States Shipping Board)을 설치하여 해운업에 대한 국가 통제를 강화하고, 국가 예산으로 직접 전시용 선박을 비상건조하는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미국의 독특한 해운정책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특히 전시건조는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면서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1917년부터 1921년에 걸쳐 30억불이라는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여 900만총톤을 건조하였다. 선박원은 자국 건조외에 외국으로부터의 매입 및 용선, 적국선의 몰수, 중립국선의 징발등을 행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사후약방문이었다. 미국은 전시 비상건조를 통하여 900만 총톤을 건조하는 외에 다양한 방법으로 선박을 확충하여 1920년에는 1,450만 총톤을 보유하게 되었으나, 그 대부분의 선박이 종전이 된 후인 1919년 이후에 미국의 실질적인 관리하에 들어왔으므로 긴요한 전쟁수행에는 큰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그 보다는 오히려 전후의 경제혼란과 이에 따른 경기의 전반적인 침체하에서 세계 해운업을 장기적인 불황의 늪속에 빠지게 하는 주요원인을 제공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미국으로서는 방대한 양의 상선대를 평시에 정부가 보유할 이유가 없으므로 헐값으로라도 매각하기 위하여 손실을 크게 감수하여야 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1차 세계대전에서의 이러한 미국의 교훈은 그후 미국의 해운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이 정책은 약 20년후에 다시 겪게 된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전쟁준비를 완벽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을뿐만 2차 세계대전을 조기 종식시키는데도 일조를 크게 하였다.


1차 대전을 겪은 후 미국은 국가 안보와 해운의 연관성에 대한 기본원칙을 정립하였는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세 카데고리로 나뉘었다. ① 평시의 미국경제의 정상적인 운영을 위한 바람직한 해운의 존재 형태, ② 미국이외의 제3국간의 긴장(전쟁 등)으로 인한 비상사태하에서의 미국의 경제와 해운의 바람직한 존재형태, ③ 미국이 당사국인 상황하에서 국제적인 긴장(전쟁 등)이 발생하였을 때의 미국 해운의 존재 형태 등 삼단계에 걸친 해운과 안보의관계를 항시 설정하여 점검해 나가게 되었다.

 

일본
일본은 1차 세계대전에서 해운면에서 가장 짭짤한 재미를 본 국가 중의 하나였다. 일본은 영국과 동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조약상의 의무로 전쟁에 거의 자동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전장인 유럽수역과 멀리 떨어져 있어 실질적인 전투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일본의 적국중 동양에 발판을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국가는 독일이었다. 독일은 중국의 칭따오(靑島)에 해군기지를 가지고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칭따오 해군기지의 능력만으로 일본과 맞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전쟁초기에 서둘러 철수하였다. 이렇게 철수한 함정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과정에 약간의 해상전투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곧 평정되고 말았다. 일본은 독일 함대가 철수한 칭따오를 접수하고 태평양의 아시아 해역과 인도양에 대한 시 파워를 장악하였다.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들도 유럽수역에서의 전쟁에 바빠 태평양이나 인도양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글자 그대로 일본은 태평양과 인도양에서 호랑이 없는 동산의 토끼였다.


개전 당시 일본은 170만 총톤의 선복을 보유하고 있었다. 전쟁으로 운임이 폭등을 거듭하면서 일본 해운 기업은 큰 돈을 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유럽세에 눌려 하고 싶어도 개설하지 못하였던 정기선을 자유스럽게 개설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일본 해운은 적국함정이 활동하지 아니하는 태평양 및 인도양에서 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전쟁으로 인한 상실도 거의 없었다. 이러한 호경기를 맞이하여 일본은 조선능력을 극대화하여 자국선을 건조하는 동시에 외국으로부터 긴급 발주하는 선박을 높은 가격으로 건조해 주어 조선붐도 함께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본 해운업과 조선업의 호황은 일본무역도 크게 신장시켰다. 1913년의 일본의 수출은 3억 1,500만 미불이었는데 1917년에는 7억 9,900만불에 달하였다. 특히 일본은 연합국의 선박 풀의 범위밖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더욱 높은 운임을 향유할 수 있었다.

 

독일 등의 해운
영국을 주축으로한 연합국측과 대항하여 1차 대전을 일으켰던 독일을 비롯한 동맹국들은 개전당시 합계 약 650만톤의 상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중 510만톤이 독일선이었다. 이 중 200만총톤 이상의 선박이 전쟁중 포획되거나 침몰되었다. 그중에는 개전당시 미국의 여러항구에서 활동중이던 선박들이 미국의 참전으로 포획된 선박이 포함된다. 또 영국은 우세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독일의 수역을 봉쇄하였기 때문에 독일상선은 셰계해역에서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노르웨이 및 중립국해운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네덜란드 등 중립국은 거의 대부분이 전쟁중 여러 가지로 피해를 많이 입어서, 전쟁 종결후에는 선복량이 감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립국은 교전국의 화물운송 등에서 고운임을 받는 등으로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전쟁이 진전되면서 영국이 독일에 대한 해상봉쇄를 강화하자, 독일로 가는 화물의 운송은 중단되었으나, 영국으로부터 많은 해상운송요청이 있어 고수익성은 종전까지 계속되었다.


특히 노르웨이의 경우, 개전당시 영국, 독일, 미국에 이어 세계 제4위의 선복 보유국이었고, 상선대의 대부분이 부정기선으로 3국간 항로에 취항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시의 고운임을 가장 잘 엔조이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그 결과 총운임수입이 1914년에 2억 1,150만 크로네였던 것이 1917년에는 11억 720만 크로네로 5배이상 증가하였고 종전후까지 이어진 해상운임의 이상 과열로 1920년에는 12억 8,000만 크로네를 올려 자본금의 두배에 상당하는 배당금을 지급하고도 상당규모의 선박대체자금을 적립할 수 있었다. 노르웨이 해운의 특징을 보면 다른 나라들이 자국의 무역과 해운의 연계발전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비하여 노르웨이는 해운을 완전히 독립된 사업으로 간주하여 주로 부정기선으로 3국간 운송에 종사하고 있는 점이다. 그들은 이러한 해운업을 위하여 그들 특유의 경영기법을 개발하여 이에 의하여 성공한 대표적인 해운기업으로 평가되고 있다. 

 

전쟁후의 해운업의 변화 각국별 선박 보유
구조의 변화와 선복과잉 :

가장 큰 변화는 전쟁의 결과 선박소유업에 대한 국제적 경쟁이 격화되었고, 세계 상선대의 상대적 지위에 변화가 왔다는 점이다. 전쟁중 그때까지 기능하고 있던 범선들이 적어도 원양항로에서는 거의 퇴출되었기 때문에 기선에 대하여서만 검토한다. 제1차대전중 선박의 상실과 파괴는 놀랄만한 것이었다(범선을 합하면 1,200-1,300만총톤에 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후 세계선복 총량은 오히려 증가하였다는 점이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이 추진하였던 방대한 규모의 계획조선이었다. 그 외에도 참전국들이 거의 모두 상실선의 보충에 전력을 경주하였고, 특히 일본은 공동화된 태평양 및 인도양 항로에서 자기 세력 확장의 천재일우의 기회로 삼았을뿐만 아니라 영국으로부터의 대량발주에 힘입어 조선능력을 최대한으로 확대하였다.


이러한 전시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는 조선능력의 급속한 증강이 이루어져 전쟁 전후를 비교하여 약 2.5배로 증가하였다. 이 조선시설들은 전후에도 상당기간 전면 가동되었다. 그 이유는 이 전쟁을 통하여 해운업의 안보상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세계의 주요항로에 대한 주도적인 지위를 자랑하던 영국이 전시에 전쟁용으로 필요한 선박을 징발하는 형식으로 많은 항로에서 주력선대를 철수시켜 전쟁용으로 전용함으로서 대외교역에 심대한 차질을 받은 미국을 비롯한 여러나라 들이 자국상선대의 유지를 안보 차원에서 다루게 되었다. 미국뿐만 아니라 해운업에 별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였던 카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등도 서둘러 해운업을 육성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패전국 독일이 보유하였던 상선대가 전후 배상으로 연합국측에 이양되자 독일 해운기업은 상실된 선복을 보충하기 위하여 대량건조계획을 추진하였다.

 

선복과잉으로 인한 불황:
이러한 대량건조는 전후 세계해운을 극심한 불황으로 몰아넣었다. 전쟁으로 인하여 기존의 무역체계와 경제가 혼란에 빠져 미쳐 회복되지 못하여 세계해상물동량 수요는 전전에 비하여 현저히 감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총선복량은 14%나 증가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1920년 하반기부터 그때까지의 세계해운사상 가장 극심하고 장기적인 불황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해운에 대한 중요성을 깊이 인식한 각국 정부들은 해운기업이 파산하는 것을 두고만 볼 수 없어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하여 파산을 방지하였다. 결과적으로 국민들의 납세부담은 그만큼 늘어났다. 기존의 상선들이 운송대상물의 부족으로 적자운항을 하고, 많은 선박이 화물이 없어 계선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많은 신조선이 건조되어 시장으로 진입하는 기현상이 상당기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하나의 예외가 있었으니 그것은 1차 대전을 계기로한 석유수요의 급격한 증대로 인하여 탱커만은 선복부족현상을 보였다.  탱커는 전전의 125만톤으로부터 약 900만톤으로 증가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해운의 기여가 매우 컸기 때문에 전후에 영국에는 상선대를 Merchant Navy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 중요성을 특히 강조하기 위하여 황태자가 상선대장관(Master of Merchant Navy)에 취임하였고, 이를 계기로 상선사관들도 해군 복장과 유사한 제복을 입게 되었다. 또 선원들의 사기를 앙양하고, 교양을 높이기 위하여 선주단체와 해원단체, 그리고 교육기관이 합동으로 선내에 도서실을 설치하여 사관과 보통선원이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하여 원양항해에 따르는 무료한 여유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하고, 선원들의 교양을 향상시키는 동시에 하선후의 생활에도 대비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해운관계 국제협력의 발전
해운업은 가장 먼저 발달한 국제적 비즈니스이고, 해운비즈니스는 국제적인 기반위에서만 효과적으로 조직화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도로규칙은 영국은 차량이 좌측통행, 유럽 대륙에서는 우측통행이라고 해도 큰 불편없이 지낼 수 있다. 그러나 공해상의 항행에서 이러한 두 규칙이 존재한다면 안전은 보장될 수 없다. 그 외에도 예를 들면 어느 선박이 선적항의 규칙에 의하여 만재흘수선까지 적재하고 다른 나라 양육항에 들어갔는데 그곳의 만재흘수선규칙이 달라서 처벌받거나 벌금을 부과받는다면 대단히 불편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해운비즈니스의 수행과정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어느 항만이라도 주요항만이라면 많은 국적의 선박이 수시로 입출항한다. 또 한 척의 선박은 많은 다른 나라의 항만에 기항한다. 또 개별적인 운송거래의 관계당사자인 선주, 선박 브로커, 송하인, 수하인, 당해 거래와 관련되는 은행, 선박 및 적하의 보험을 인수한 보험업자의 국적도 서로 다를 경우가 허다하다. 여기에 각국의 법령이 서로 다를 경우, 어느 법령에 의하여 처리할 것인지가 불분명하고, 너무 복잡하여 전문가도 혼동하기 쉽다. 그보다는 용선계약서, 선하증권, 해상보험증권과 같은 사적계약 서식이 공동으로 만들어지고, 선주책임, 선박충돌, 해난구조와 같은 문제에 관한 법령이 통일되거나 유사할 경우, 훨씬 업무수행이 용이해질 것이다.    


중세까지만 해도 서로 모순되는 법령이나 재판관할권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불편과 불이익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대항해시대 이후 넓게 받아들여진 해사관습들이 그 적용영역을 확대하고, 이 관습들이 각 국이나 각 지방의 법령에 수용되게 되면서 불편과 불이익이 많이 개선되었다. 17-8세기의 영국의 항해법에서 보는바와 같은 극단적인 내쇼널리즘으로 인하여 이러한 관습법의 대부분이 파기되었다. 19세기에 들어와서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제시된 것은 그 후반기 이후의 일이다. 국제신호규칙 채택된 것은 1857년의 일이고, 국제해로규칙(Rule of the Road for Shipping)이 채택된 것은 1962년이다. 해상인명안전협약의 초안이 선보인 것은 사상 최악이라는 타아타닉호의 침몰사고가 난 후인 1914년의 일이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약 30년간 선주, 해상보험업자, 무역업자들은 이러한 혼란을 조정하고자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많은 항로에서 공통양식인 선적서류가 관계제국의 선주, 무역업자의 대표기관들이 상호협의하여 새로 만들어졌다. 해운관련계약에 관한 제법령도 그 통일을 향해 진일보할 수 있었다. 이것은 국제해사위원회(International Maritime Committee)의 노력에 힘 입은바 크다. 특히 선박충돌, 해난구조에 관한 제법령은 주요 해운국의 전부 또는 거의 전국가에 의하여 채택되었다. 다른 한편  필요성이 인정되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입법화(조약화)되지 못한 국제적 제법령도 관계당사자간에 자발적인 채택에 의하여 표준계약서식 형태로 발전하여 적용되게 되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국제민간규칙중 가장 중요한 규칙의 하나가 국제법학회(International Laww Association, 1864년 설립)의 주도로 만들어진 공동해손의 정산에 관한 국제적인 통일규칙인 1890년 York Antwerp Rule이다. 이 규칙은 조약이 아니므로 법규성은 없고 사적인 계약의 약관에 불과하지만 실질적으로 많은 국가가 이를 채용하여 운영하기 때문에 공동해손정산규칙으로 훌륭하게 기능하고 있다. 이 규칙도 그후 많은 수정을 거쳐 오늘까지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이와 같은 해운업과 관련된 제법령과 관행의 국제적 통일을 위한 노력은 1차 대전 후 더욱 촉진되었다. 해상안전규제, 해상안전장치, 만재흘수선, 조타규칙, 해상화물운송에 관한 국제협약(헤이그 규칙)등이 채택되었고, 선주책임, 해사저당권, 해사우선특권과 유치권에 관한 제법령도 국제해사위원회에 의하여 기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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