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무역상사의 완성자

우리 역사 속의 물류 발자취와 물류 선인들의 행적을 ‘물류’라는 프리즘으로 살펴본 책 ‘역사속의 물류, 물류인’이 올초 발간됐다. 민생경제 차원에서 역사속 물류의 흔적을 훑어본 이 책의 내용중 장보고를 비롯한 박지원, 김정호, 정약용, 최봉준, 임상옥, 정주영, 조중훈 등을 물류선인으로 소개한 내용이 주목할만하다. 대중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인물들의 물류에 대한 의지와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역사속 물류선인’ 대목이 더욱 흥미롭다.
이에 필자와의 협의를 통해 관련내용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그림2-절단된 해저케이블
그림2-절단된 해저케이블

무역입국의 귀감
임상옥은 인삼무역으로 출발하여 상업이 천시 받던 조선 후기에 거부가 되었고 중국과의 교역을 통해 조선 무역의 본질을 보여줌으로써 오늘날 무역대국으로 일어선 우리에게 귀감이 된 최초의 종합무역상사 경영자라 할 수 있다.
임상옥의 본관은 전주, 자는 경약, 호는 가포. 아버지는 중국 연경에 내왕하던 상인인 봉핵이다. 그가 태어난 의주는 조선 후기 대중국 무역의 중심지였다.
그는 어릴 적에 역관이 목표였던 아버지가 거듭된 낙방을 하지만 그 아버지 아래에서 중국어를 배웠다. 그러나 임상옥의 아버지는 역관 시험을 포기하고 당시 만상인 대금업자한테 돈을 빌려 금수품을 챙기고 밀무역에 나서서 돈을 벌었으나 비참한 일을 맞이한다. 결국 임상옥의 일가는 모두 관노로 끌려간다.
후에 만상 사환으로 들어간 임상옥은 만상 도방으로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기에 이르러 만상 도방이 그에게 밀무역을 시키기 시작하면서 상업에 종사하기 시작 때가 바로 정조 20년(1796년) 17세의 나이였다.

용기와 재치로 얻은 인삼교역권
그가 국제무역의 거상으로 성공하기까지는 중앙권력의 뒷받침도 크게 작용했다. 순조 10년(재임기간 34년) 이조판서 박종경의 권력을 배경삼아 의주상인 5명과 함께 최초로 국경지방에서 인삼무역 독점권을 획득했는데 이때 임상옥이 인삼교역권을 얻기 위해 박종경 대감의 부의금으로 백지 어음을 내어서 그를 놀라게 하여 관심을 얻은 후, 그와 담판을 지어 인삼교역권을 따낸 것이다.

박종경이 임상옥에게 던진 질문도 유명하다. 그는 임상옥에게 ‘하루에 숭례문을 드나드는 자가 몇이냐?’라고 물었고, 임상옥은 이利가와 해害가 둘이라 답했다. 박종경이 무슨 뜻인지 물어보자 임상옥은 ‘숭례문을 드나드는 자가 몇 백이건 몇 천이건, 대감에게 이익이 되는利자와 해가 되는害자 둘 밖에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박종경이 이에 크게 웃고는 임상옥에게 그대는 ‘그 둘 중 어느 쪽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임상옥은 ‘소인은 심心가 이옵니다. 이해를 떠나, 대감의 마음을 얻고자 합니다.’라고 답했다. 이 대화를 바탕으로 그는 인삼교역권을 얻어냈고, 임상옥은 이 관계를 티 내지 않고 평생 지속하였다.
바로 이 부분에서 임상옥이 정치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박종경이 순조의 외삼촌으로서 세도정치인의 한 인물로 역사적으로도 살인, 뇌물, 음흉한 짓으로 탄핵까지 받을 정도로 세도를 누렸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전주 감영에서 이방이 찾아와 뜬금없이 그에게 5만 냥을 꾸어달라고 요청하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 부탁하는 데다, 당시 5만 냥이면 기와집을 한 채 지어낼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이었으나, 임상옥은 선뜻 5만 냥을 꿔주었다. 사람들이 왜 그런 거금을 선뜻 내주었는지 묻자 임상옥은 이리 답했다.
“내 그를 보니 눈에 살기가 어려 있기로, 돈을 내어주지 않았으면 무언가 사생결단을 내려 할 것이다. 나는 그런 꼴을 보기 싫었을 뿐이다.”
사람들이 믿으려 하지 않자, 그는 사람 한 명을 딸려 붙여 이방의 뒤를 밟게 했다. 이윽고 따라갔던 사람이 돌아와 ‘거액의 공금을 횡령한 것이 탄로가 나서 당장 벌충해 갚지 않으면 목숨이 경각에 달린 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5만 냥을 꾸러 왔다가 불여의하면 이왕 죽을 몸이라 돈 많은 부자에게 칼부림이나 한번 속 시원히 해보려고 비수를 품고 있었다 하더이다.’라 하자, 사람들은 모두 그의 사람 보는 안목에 감탄하였다.
이처럼 사람 보는 안목으로 홍경래의 회유를 사전에 차단한 적도 있다.
 

 
 

사람 보는 안목으로 홍경래 난을 피함
23대 순조(1800~1834) 즉위 후 정현왕후의 수렴청정(순조가 어려서 대리정치-세도정치의 문제)이 시작되자 제일먼저 천주교를 박해한다. 천주교의 박해 이유는 벽파인 정현왕후 정적인 시파와 남인들을 처리하게 위한 수단이었다. 그로 인해 오가작통법을 이용하여 천주교 금지법을 만들어 다섯 가구 중 한 가구라도 천주교를 믿으면 나머지 가구들을 처형하였다.
이때 잡혀간 시파나 남인의 사건을 신유사옥이라 하고 이로 인해 민심이 동요해 1811년~1812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다. 이 때 서북지역의 많은 상인들은 홍경래의 봉기군에 참여했으나, 그는 중앙권력과의 연계를 바탕으로 관군을 지원하는 의병에 참여하여 방수장이 되었다.

그 이유는 홍경래가 일찍이 임상옥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그의 밑에서 서기로 일했는데, 임상옥은 홍경래가 하는 일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적당한 구실을 붙여 좋은 말로 그를 내보냈다. ‘그가 물상 객주집 서기로는 그릇이 너무 넘친다’는 이유에서였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던 홍경래였으나, 임상옥은 그런 점을 오히려 마음에 걸려했다. 그가 떠난 지 얼마 후, 그는 난을 일으켰으나, 임상옥은 이와는 조금도 연관되지 않았다.
이는 그가 당시 홍경래의 봉기군이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던 권신 박종경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처럼 사람을 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건 보는 뛰어난 안목과 탁월한 상업적 수완
그는 또 사람 보는 눈만 아니라, 물건 보는 눈도 뛰어났다. 어떤 사람이 큰 산삼을 가지고 와서 임상옥에게 감정을 청하니, 그는 아침 햇빛에 비춰보고 나서 그것이 경삼(옮겨 심어서 자란 산삼)임을 밝혔다. 산삼주인은 사실을 실토하면서 탄복했다. 이처럼 감정 안이 뛰어났으므로 사람들은 절대 임상옥을 속일 수 없었고, 그와 거래할 때 정직하게 장사를 했다고 한다.

언젠가는 도정都正 홍미산洪美山이 진귀한 산호 지팡이를 짚고 왔다가 부러진 일이 있었다. 그 산호 지팡이는 본인의 것이 아니라 친구에게서 잠시 빌려온 것이었기 때문에 무척 난감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것은 중국에서 어렵게 구해온 물건이라 조선에서는 아무리 돈을 주어도 구하기 매우 힘들었다. 그때 누군가가 임상옥의 창고에는 없는 게 없다고 귀 뜸해 주어 홍미산은 바로 임상옥을 찾아갔고, 사정을 들은 임상옥은 흔쾌히 자신의 광을 열어 주어 그 속에 있는 수많은 산호장 중에서 같은 것을 골라가게 했다고 한다.
또 어느 날 의주 부윤의 갓머리에 다는 장신구 옥로玉鷺가 깨져 임상옥의 집에서 급히 구했더니 몇 백 개의 옥로가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의 재산이 얼마나 많았는지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또 한 번은 임상옥의 집에 원접사, 평양 감사, 의주 부윤과 그 일행과 기타 일꾼 등 도합 700여명이 임상옥의 집을 찾아왔다. 예고도 없이 일시에 불쑥 찾아온 것이라 사람들은 떡이라도 하나 얻어먹으면 다행이겠거니 했으나 임상옥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한 상 가득하게 내와 그 일행 700명의 요리상을 일시에 각상各床으로 내놓는 범절을 보였다. 700명분의 술과 안주와 밥과 국을 장만하는 대응력도 대응력이지만 그 음식을 담는 상과 그릇과 수저도 얼마나 많았겠는가. 이 모든 것이 임상옥의 재물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이다.

그의 상업적인 수완은 중국 상인들이 따르지 못할 만큼 탁월했다. 1821년 변무사의 수행원으로 청에 갔을 때, 베이징 상인들이 불매동맹을 펼쳐 인삼 값을 낮추려 하자 그는 가지고 간 인삼을 불태우겠다고 위협하여 원가의 10배로 판 이야기는 유명하다.
상인들은 임상옥의 인삼 독점을 시기하여 청나라 상인들을 선동하여 불매동맹 담합을 맺어 임상옥을 골려주려 하고 있었다. 사신 일행의 귀국 시기 이전에 인삼을 팔아야만 하는 임상옥이 결국 헐값으로 내다 파는 것을 다분히 노린 수작이었으나, 임상옥은 귀국 하루 전날까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오히려, 귀국 하루 전날 인삼을 쌓아 놓고 장작을 준비해 주저 없이 불을 질러버렸다.
북경 상인들이 놀라 인삼을 끌어내려하자, 임상옥은 그들을 나무라고 그들이 끌어내던 인삼을 다시 빼앗아 태워버리려고 했다. 값을 얼마든지 쳐 주겠다 애걸복걸했으나 임상옥은 들은 척도 않고 불을 지피며 인삼을 던져 넣기를 재촉했다. 이에 북경 상인들은 담합이고 뭐고 서로 값을 올려서 결국에는 본래 값의 배에다가 이미 타버린 인삼 값까지 치러야 했다. 그야말로 혹 떼려다 혹 붙인 꼴, 이 일로 임상옥의 이름이 국내외에 떨치게 되었다.

또 임상옥이 청나라와의 거래를 위해 북경에 갔을 때 있었던 일이다. 임상옥은 사신을 따라 북경으로 갈 채비를 서둘며 먼젓번에 함께 청나라에 다녀온 어느 문상을 불렀다. 그러나 그 문상은 몸이 불편한 것을 핑계로 원행 길에 따르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상옥은 이 문상이 일전에 그 장사 밑천을 도둑에게 전부 털린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돈을 갚으려 하기는커녕 병을 핑계대고 안 가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이 훤히 보이니 절로 화가 나서 벌컥 소리쳤다.
“예끼 고얀 사람 배은망덕해도 유만부동이지. 자네가 못 갈 지경이면 돈이라도 갚아야 할 게 아닌가.”
“뭘 그리 걱정이 심하십니까. 혹 그 호상이 제 안부를 묻거든 중병을 앓다가 죽었다고 하면 그만 아닙니까?”
“고얀 사람이군. 다시는 내 앞에 발길도 들여놓지 마라. 당장 물러가지 못할까.”
임상옥은 못내 그 문상의 장사꾼답지 못한 비겁함과 좀스러움을 괘씸하게 여기면서 북경에 당도했다. 그는 바쁜 일정에 그 괘씸한 문상의 일을 잠시 잊고 있었는데, 하루는 북경의 돈 대준 그 호상이 처연한 얼굴빛으로 찾아와서 말했다.

“내 들으니 먼저 내가 장사 밑천을 조금 마련해 준 그 문상이 급살병으로 죽었다더군. 아까운 인재를 놓쳐서 정말 섭섭하이. 우리네 장사 풍습에 한번 그 사람이 눈에 들면 밑천을 대줘서 뒤를 밀어줄 뿐더러, 실패를 해서 본전을 날려도 세 번까지는 봐주는데... 참 아까운 사람이야.”
눈물을 뚝뚝 흘리던 호상이 임상옥에게 약간의 은자를 전해달라며 은자까지 주었다. 임상옥은 정말 난처했다. ‘문상’이 죽지 않았다고 곧이곧대로 말해주자니 눈물까지 흘리며 슬퍼하는 호상의 마음을 배반하기 힘들었고, 말하지 않으려니 죄책감 때문에 참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하는 수 없이 그 은덩이를 받아 가지고 문상의 배신에 대해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돌아왔고, 그는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선걸음에 말을 달려 그 문상의 집을 찾았다. 당장 가서 그 호상과 있었던 일을 전하고 그를 나무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의 집 앞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는 것이 아닌가? 임상옥이 의아해 하며 조심스럽게 마당에 들어섰다. 알고 보니 초상이 났던 것이다. 임상옥은 온 김에 문상問喪을 하지 않을 수 없어 상청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는 순간 너무 놀라 정지했다. 곡하는 상주가 바로 그 문상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임상옥은 착잡한 심정으로 북경서 가져온 장례비용을 그 아들에게 전해주었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문상이 죽은 경위를 들었다. 아들은 임상옥이 떠난 이후 이 문상이 열병이 들어 백약이 효험이 없었다며 자식들에게 신의를 지키지 못해 부끄럽다고 하며 자식들에게는 신의를 지키는 사람이 되라 하며 그 호상에게 꼭 돈을 갚으라고 엄명을 하였다고 말하였다.
통곡하는 상주를 위로하며 빈소를 물러나온 그는 참 말 한마디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탄식하며 말 한 마디의 무서움과 신용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금 곱씹어 보았다.
 

빈민구제에 앞장 선 진정한 부자
변무사의 수행원으로 연경에 다녀온 뒤 오위장과 전라감영의 중군으로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832년 왕의 특지로 곽산군수가 되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834년 의주부 일대에 큰 수재가 나자 사재私財를 털어 수재민 구제에 앞장섰다.
이 공으로 이듬해인 1835년(헌종1) 구성부사에 발탁되었으나 비변사의 논책을 받자 사퇴했다. 이 후 삼봉산 아래 지은 거옥에 거주하며 재산을 풀어 빈민을 구제하고, 문인들과 교류하며 시와 술로 여생을 보냈다. 시를 잘 지었으며, 일생 동안에 지은 시를 추려서 적중일기라고 했다. 저서로는 가포집이 있으며 다음과 같이 그의 어록은 유명하다.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
장사란 이익을 남기기보다 사람을 남기기 위한 것이며, 사람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윤이고, 따라서 신용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자산이다.
조선시대 높지 않은 지위인 역관의 신분으로 태어나 신분의 벽을 무너뜨릴 정도로 위대한 거상으로 남아 관직까지 오른 인물. 관직에 오르면 많은 사람들이 온갖 유혹 속에 초심을 잃고 흔들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 때 “계영배”라는 술잔을 통해 욕심을 부리지 않고자 하는 마음을 잊지 않은 인물이다.
 

계영배의 교훈
거상 임상옥, 상인으로, 공직자로 청렴한 삶을 산 그의 인생을 통해 종합물류의 선구자인 현대판 종합무역상사의 귀감이 된 분의 삶을 통해 진정한 상업주의의 발전을 기대해 본다.
평생 그가 정한 좌우명을 실천케 해준 계영배는 과음을 경계하기 위해 만든 잔으로, 절주배節酒杯라고도 한다. 술잔의 이름은 “넘침을 경계하는 잔”이라는 뜻이며, 잔의 70% 이상 술을 채우면 모두 밑으로 흘러내려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지닌다. 고대 중국에서 과욕을 경계하기 위해 하늘에 정성을 드리며 비밀리에 만들어졌던 “의기儀器”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자료에 의하면 공자가 제나라 환공桓公의 사당을 찾았을 때 생전의 환공이 늘 곁에 두고 보면서 스스로의 과욕을 경계하기 위해 사용했던 “의기”를 보았다고 한다. 이 의기에는 밑에 구멍이 분명히 뚫려 있는데도 물이나 술을 어느 정도 부어도 전혀 새지 않다가 7할 이상 채우게 되면 밑구멍으로 새어나가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환공은 이를 늘 곁에 두고 보는 그릇이라 하여 “유좌지기宥坐之器”라 불렀고, 공자도 이를 본받아 항상 곁에 두고 스스로를 가다듬으며 과욕과 지나침을 경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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