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되면 되게 하라

우리 역사 속의 물류 발자취와 물류 선인들의 행적을 ‘물류’라는 프리즘으로 살펴본 책 ‘역사속의 물류, 물류인’이 올초 발간됐다. 민생경제 차원에서 역사속 물류의 흔적을 훑어본 이 책의 내용중 장보고를 비롯한 박지원, 김정호, 정약용, 최봉준, 임상옥, 정주영, 조중훈 등을 물류선인으로 소개한 내용이 주목할만하다. 대중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인물들의 물류에 대한 의지와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역사속 물류선인’ 대목이 더욱 흥미롭다.
이에 필자와의 협의를 통해 관련내용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농부의 아들, 흙수저 물고 태어나다
정주영의 아호는 아산峨山이다. 1915년 강원도 통천군 송전리 아산마을에서 아버지 정봉식鄭捧植과 어머니 한성실韓成實의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주영의 아버지 정봉식은 부지런한 농사꾼이었다. 어린 시절 정주영은 새벽 다섯 시면 일어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농사를 지으러 나갔다. 장남인 정주영에게 농사일을 가르치려 했기 때문이다.
1930년 송전소학교를 졸업했으나 가난 때문에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농사를 도왔다. 이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1931년부터 여러 차례 가출을 하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네 번째 가출 끝에 드디어 정주영에게 안정된 삶이 시작되었다. ‘복흥상회’라는 쌀가게에서 4년간 열심히 일한 후, 그 주인으로부터 쌀가게를 인수받아 ‘경일상회’의 사장이 된 것이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1939년 12월 조선총독부는 일본이 제 2차 세계대전에 돌입함에 따라 쌀의 공급과 배급을 통제하면서 정미소까지 통제하는 바람에 문을 닫게 되었다.
 

사업가의 첫걸음이 자동차 서비스업
경일상회를 정리하고 수중의 돈 1,050원(당시 대학을 졸업한 은행원의 15개월치 봉급에 해당함)을 가지고 강원도 통천 고향으로 돌아가서 아버지께 논 2천여 평을 사드렸다.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 지 딱 7년 만의 일이다. 장남을 대견스럽게 여기던 아버지는 어서 빨리 장가를 들어 어엿한 가장으로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한편 아산리 구장의 딸이었던 변중석이라는 처자와 선을 보게 되었다. 변중석의 큰 오빠와 정주영은 송전소학교 동창지간이라 그녀의 오빠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여동생을 정주영에게 주자고 어머니를 채근했고, 그렇게 혼사는 금세 결정이 되었다.

정주영과 변중석은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산비탈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다. 그때부터 다시 자동차가 쌩쌩 굴러다니는 서울 시내를 쏘다니며 소규모 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는 사업을 찾으러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길거리에서 쌀가게 경일상회의 단골이었던 이을학(당시 경성서비스공장의 직공)을 만나 아현동 고개 근처에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이 마침 매물로 나와 있다며 그것을 인수해서 운영해보라고 권했다.

자동차 수리야말로 큰 돈 안 들이고 목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이고 이를 인수하면 일할 수 있는 기술자는 자신이 데리고 오겠다고 약속하기까지 했다. 문제는 아도서비스를 인수하기 위해서는 3,500원이라는 큰돈이 필요했다. 고민 끝에 정주영은 삼창정미소 주인인 알짜 부자 오윤근을 찾아가 그의 신용을 담보로 돈을 빌려 인수금의 10퍼센트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고스란히 빚으로 아도서비스를 인수했다. 정주영은 이미 자동차 산업에 대한 발전 전망에 대해 눈을 떴기에 무리해서라도 시작한 사업이었다. 1943년 2차 세계대전이 날로 격화되어 가던 어느 날, 일본 정부는 기업정비령을 내렸다. 아도서비스를 종로에 있는 일진공작소에 강제로 흡수 합병한다는 요지의 통지서가 정주영에게도 날아들었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개인은 너무나 무력한 존재일 뿐이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아도서비스의 청산절차에 들어갔다.
1948년, 드디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1949년 4월, 중구 초동 106번지(오늘날 충무로 명보극장 자리)에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간판을 걸었다. 오늘날의 ‘현대’라는 상호가 최초로 등장한 것이 이때이다. 우리나라도 해방이 되었으니 ‘현대를 지향해서 발전된 미래를 살아보자’라는 뜻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현대건설의 모체 탄생
어느 날 정주영은 자동차 수리대금을 받기 위해 관청에 들를 일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북적이는 것을 목격하고는 그 쪽으로 가보니 돈을 받으러 온 업자들이 복도에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알아보니 토목이나 건축을 하는 건설업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경리 창구에서 수천 원씩의 대금을 받아갔다. 관청에서 나오자마자 정주영은 동업자들에게 건설업 간판을 하나 더 달자고 제의했다. 동업자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한 때는 철로 공사판, 고려대학교 건물 신축공사 현장에서 막노동 경험이 있기에 그에게는 토건업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현대자동차공업사 간판 옆에 ‘현대토건사’라는 간판을 하나 더 달았고 공업학교에서 건설·토목을 가르치던 교사를 영입한 후 기능공 10명을 뽑아 인력을 구성한 뒤, 미 군정청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1950년 1월에는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하여 사옥을 중구 필동으로 옮기게 되는데 이렇게 하여 현대그룹의 모체가 된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게 되었다.

현대건설주식회사가 힘찬 출발을 한 지 불과 5개월 뒤, 한반도에는 6·25 전쟁이 터진다. 전쟁 후 모든 것이 폐허로 변했다. 남한의 교량 1,466개가 파괴되었는데 남한의 다리 전체가 거의 파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53년 4월, 정부는 고령교(대구와 거창을 잇는 다리) 복구공사를 현대건설에 정식 의뢰했다. 이 공사는 당시 정부 발주공사로서 사상 최대 규모였는데 공사금액은 5,457만 환이었고 24개월 내에 공사를 끝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처음으로 국내 최대의 토목공사를 맡으면서 큰 기대에 부풀어 야심차게 교량 복구에 들어갔으나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정주영이 현장에 방문한 것은 봄철인 건기여서 물이 말라 강바닥의 흰모래가 드러나 있어서 일단 모래를 파고 거기에 기초공사를 할 계획이었다. 강의 백사장에 모래를 깊이 파고 기초공사를 하고 나니 어느새 여름철이 시작되었고 쉼 없이 내리는 빗줄기로 인해 순식간에 강물이 불어 폭포처럼 흘러갔다. 애써 기초공사를 했으나 몇 차례의 폭우가 지나간 후 교각의 파일을 채 한 개도 건지지 못한 채 모조리 물에 휩쓸려 나간 것이다.

장비가 넉넉하면 동시다발로 공사를 진행할 수 있었으나 그가 가진 장비라고는 크레인 한 대, 믹서기 한 대, 콤프레셔 한 대가 전부였다. 더구나 물가는 1년 사이에 120배가 뛰었다. 결국 고령교 공사는 계약기간보다 2개월 늦게 완공되었고 애초에 공사 금액이 5,457만 환이었으나 공사를 끝내고 보니 들어간 돈은 그 두 배가 훨씬 넘는 1억 2,000만 환이나 되었다. 현대건설은 고령교 복구공사로 분명 큰 손해를 보았지만 2년 뒤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로 재기에 성공하여 단숨에 한국의 5대 건설업체에 오르게 되었다.
1960년엔 국내 건설업체 중에서 도급액 1위를 차지해 명실 공히 국내 최고의 건설회사가 되었고 1961년에는 중구 무교동 92번지에 현대건설 본사사옥을 건립함으로써 자신들만의 사옥을 갖기도 하였다. 이어 1964년에는 단양 시멘트공장을 준공하여 건설업체로서의 자재조달도 확보해 놓았으니 이제 국내에서는 현대건설을 당할 만한 건설회사가 없게 되었다.

국내에서 1위를 달성했으므로 이제 해외로 진출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마침 태국에서 고속도로 공사의 입찰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입찰경쟁에 뛰어들어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따내게 된다. 선진 16개국 29개 업체와의 경쟁 끝에 간신히 공사를 따낸 것이었다.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는 2차선으로 98킬로미터의 고속도로를 30개월 내에 끝내는 것이었다. 공사 낙찰가액은 미화 522만 달러로 당시 한국 돈으로는 14억 7,900만 원대였다. 요즘으로 치면 작은 공사에 불과하지만 당시에는 엄청나게 큰 규모의 공사였다.

하지만 공사는 어려웠다. 태국 현지는 하루에 한 번 스콜도 있었지만 그 외에도 소낙비가 양동이로 쏟아 붓는 것처럼 퍼부었다. 자연히 공사기간은 늦어지고 비가 와도 인건비는 지급해야 했기에 예산 외의 돈이 더 들어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렵사리 공사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미국 감리회사는 공사현장을 돌아본 후 재시공을 지시하는 일이 빈발했다. 심지어 국제시방서에 맞지 않는다며 방금 깐 아스팔트를 모두 뜯어내고 다시 공사를 하라고 지시하기가지 했다. 결국 공사를 하다가 장비가 모자라면 사들이고 하는 방식으로 결국 29개월 만에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인 2억 8,800만원의 적자를 내며 완공했다.
현대건설이 입은 타격은 매우 컸지만 이 때의 경험을 통해서 국제사회에서는 반드시 원칙대로 일해야 하고 최상의 질을 유지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월남에서 다진 해외건설 경험
1966년 1월, 정주영은 월남전에 뛰어들었다. 우리나라가 파병 등 군사원조를 하는 한편, 월남의 건설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기 때문이다. 건설 분야에서는 현대건설이 준설산업을 주로 맡았고 대림산업은 항만분야에 진출했다. 현대가 처음 따낸 공사는 캄란만 군사기지 준설공사였다. 캄란만은 남중국해에 면해있는 천혜의 항구로 미군의 전쟁물자가 도착하는 월남의 전략요충 항구였다. 캄란 소도시 건설공사는 현대건설의 창립 이래 최대 규모의 공사였다.

이에 이어 메콩강 갈대숲 준설공사도 맡게 되었다. 당시 미군은 준설선 자마이카호 8,000마력의 강력 엔진으로 메콩 강에서 토사를 파 올려 메콩강 델타의 수풀을 덮어 메콩강 연안에 항로를 낼 계획을 갖고 있었다. 메콩강 델타는 곡창으로 유명해 베트콩에게도 식량조달창구 역할을 톡톡히 했으므로 이곳을 미군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베트콩은 어느 날 준설선 자메이카호를 폭파해버렸다.
이에 화가 난 미군은 캄란 소도시 건설공사를 해치운 현대의 실력을 눈여겨보고 메콩강 델타 준설공사 회사로 지목했다. 밤낮 없는 기습 공격을 감행해가며 베트콩으로부터 당장 철수하지 않으면 자마이카호처럼 폭파시키겠다는 협박에도 불구하고 현대 직원들은 공포에 떨어가며 공사를 진행했다. 목숨을 내놓고 월남전 와중에 공사를 마친 현대는 1966년 캄란항 준설공사를 비롯해서 1972년 전까지 네 건의 준설공사를 완료했고 소도시 건설공사와 항만공사 등을 합하여 66억 2,230만원을 벌어들여 흑자를 기록했다. 이처럼 월남전에서 상당한 이익을 낸 현대는 재정적인 이익과 더불어 또 한 번 해외진출공사에서 귀중한 경험을 쌓게 되었고 이는 태국에서의 경험과 더불어 국내 경부고속도로 착공에 커다란 길잡이가 되었다.
 

물류기반시설 건설의 리더
박정희 대통령은 제2차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경부고속도로를 만들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1962년부터 1966년까지 시행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더욱 불이 붙었다. 물자수송량은 급증하고 있었으나 도로 여건이 나빠서 수송이 제때 되지 않아 경제 개발에 막대한 차질을 빚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박대통령은 이 일을 맡을 사람은 정주영 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가장 적은 경비로 가장 빨리 고속도로를 놓을 것을 지시했다.

그는 태국에서 고속도로 건설 경험으로 물량소요 산출에 자신이 있었고 기본공사시방서도 확보해 놓은 상태에서 현대건설을 비롯한 삼환, 대림, 삼부, 극동건설 등 총 13개 건설회사가 참여했다. 서울에서 오산까지 105킬로미터, 대전에서 옥천까지 28킬로미터의 구간을 맡은 현대는 이들 회사 중 가장 규모가 큰, 전 구간의 5분의 2 정도를 맡게 되었다. 1970년 6월 27일, 착공한 지 290일 만에 경부고속도로는 전장 429킬로미터가 완전히 개통되었다. 429킬로미터 공사에 총 429억 원이 들었다. 정부가 예상한 330억 원보다는 약 100억 원이 더 들었지만 세계에서 가장 싼 건설비로 가장 빠른 시간 안에 공사를 마쳤다.
 

국산 자동차 생산 - 물류기기 제조
1976년, 정주영에게는 또 새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해 1월에 현대자동차에서 만든 포니 승용차가 처음으로 세상에 선을 보인 것이다. 그가 자동차 사업에 뛰어든 이유는 젊었을 때 아도서비스공업사를 설립해서 자동차 수리를 전문적으로 해 본 경험과 건설업은 외상, 즉 어음장사인데 자동차는 100퍼센트 현금 장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미국의 포드사가 한국에 자동차사업 진출을 강력하게 희망하고 있었고 1차 방문 시 소득 없이 돌아간 포드사에 면담을 요청한 현대와 정주영을 대상으로 면밀히 조사하고 면담한 결과, 포드사와 현대는 자동차 조립기술 계약을 체결했다. 당시의 합작비율은 현대가 21퍼센트, 포드가 79퍼센트였고, 1차 계약이 끝나고 50대 50으로 변경하였다. 그러나 정주영은 시간과 비용이 들더라도 기술을 개발해서 자체 브랜드를 가진 독자적인 모델의 자동차를 만들고자 했다.  당시 정부는 중화학공업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 정책의 일환으로 자동차 공업정책을 발표하고 국산 소형승용차의 대량생산 계획을 제출해줄 것을 요청했다.

현대는 독자 모델로 5만 대의 생산계획서를 내었고 1973년 9월 설계는 이탈리아의 이탈디자인 쥬지아로, 엔지니어링은 역시 같은 회사의 만토바니, 엔진은 영국의 조지 턴블과 계약하여 국산차 개발과 기술의 국산화에 대한 집념을 이뤄나가기 시작했다. 현대는 1974년 10월 30일에 열린 제 55회 토리노 국제자동차박람회에 독자적으로 개발한 첫 제품 ‘포니’와 스포츠카형 ‘포니 쿠페’를 출품했다. 첫 제품인 포니는 그곳에서 뜻밖의 인기를 끌었다. ‘우수한 스타일링과 한국 최초의 자동차’라는 언론의 극찬을 늘상 받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아시아에서는 일본 다음으로, 세계에서는 16번째로 고유모델을 가진 자동차 생산국이 되었다.
 

현대건설 - 중동 진출
1973년에는 제 1차 석유파동이 터졌다. 1차 오일쇼크는 아랍 산유국과 이스라엘 사이에 벌어진 제 4차 중동전 때문이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은 곧바로 타격을 받았다. 1974년 한국정부는 위기관리시스템을 가동하였고 1975년에는 한국 기업들이 외채를 상환할 능력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부도 직전까지 몰렸다.
그 무렵 박정희 대통령은 원유를 사려면 달러가 필요하니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건설공사를 할 수 있는지 알아보도록 지시했고, 정주영은 그 해를 ‘중동 진출의 해’로 선포하고 직원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사내에 아랍어 강좌부터 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주영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만나게 된다. 페르시아만의 주베일이라는 지역의 모래펄에 대규모 산업항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공사금액은 9억 4,464만 달러(당시 금액으로 4,600억 원 상당)로 당시 우리나라 국가 예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이었고 공사 내용은 50만 톤급 유조선 네 척을 접안할 수 있는 해상터미널의 구축이었다.

건설관계자들은 몇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20세기 최대의 공사라고 불렀고, 이미 정보를 수집한 미국, 영국, 서독, 네덜란드 등 세계 굴지의 건설회사들은 몇 년 전부터 주베일 항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것은 물론이고 사우디아라비아 당국 요로에 입김을 불어넣고 있었다. 현대도 입찰 서류를 만드는 프로젝트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을 들였다. 최종적으로 공사 낙찰은 가장 저렴한 가격을 쓴 회사에게 돌아가므로 정주영은 8억 7,000만 달러를 썼지만 실무진 대표가 제출 직전에 금액이 너무 싸다고 생각하여 자기 임의로 9억 3,114만 달러로 고쳐 쓴 것이 낙찰되었다.

정주영은 한국에서 자재를 가져다 써야 한국 경제가 좋아진다고 생각하여 공사에 필요한 모든 자재 중 85퍼센트는 국내에서 조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임원들의 반대가 거셌지만 정주영은 해보기로 작정했다. 필요한 기자재를 주베일까지 옮기는 데 모두 열아홉 차례의 항해를 해야 했고 그 중에 단 한 번만이라도 실패한다면 공사는 차질이 올 것이며 자칫하면 공사 자체가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총 19항차 중 8항차 때 발생한 경미한 사고와 태풍으로 인해 어려움이 있었지만 거의 안전하게 모든 자재를 운반하고 세기의 대 역사라는 주베일 항만공사는 계획대로 성공리에 끝났다.  현대는 이 공사로 인해 수송, 토목, 건설, 수중공사, 플랜트, 중공업 기술 등 거의 전 분야에서 기술의 약진을 이루었다.
 

해상물류, 조선산업으로 본궤도에 오르다
1967년 한국은 세계무역수출기구GATT에 가입하면서 수출 활로가 넓어지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공업 중심의 산업은 외화가득률이 높지 않기 때문에 산업체제 자체를 중공업으로 전환해야겠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대한 첫 번째 사업은 조선이었다. 조선은 일자리를 많이 창출할 수 있는 업종이면서 기계와 운송, 항만산업을 겸한 산업이라 이를 발전시키면 기계, 운송, 항만이 동시에 발달할 것이므로 조선 산업을 통해 해상물류 및 고부가가치 창출의 물류산업이 본격화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주영에게 조선소 건설을 추진해보라고 직접 당부했고, 정주영은 가출했던 시절에 인천 부두에서 하역작업을 하면서 이곳에 나중에 큰 조선소를 짓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떠올리며 응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조선과 같은 거대한 사업을 일으킬 만한 기술도 돈도 없었기 때문에 선진국의 조선업체와 기술제휴를 맺는 한편, 조선소를 짓기 위한 차관 도입, 즉 돈을 빌리는 방법 외에는 없었다.

일단 조선 산업의 선진국인 일본과 캐나다, 미국의 조선업체와 접촉을 시도했으나 문전박대를 당하자 영국 런던에 있는 버클레이 은행에 문을 두드렸다. 그는 당시 한국 돈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보이며 우리나라가 500년 전에 거북선 한 척을 만들어 수백 척이나 되는 일본의 군함을 모조리 싸워서 이겼음을 강조하며 은행장을 설득했다. 버클레이 은행장은 이내 정주영이 만든 배를 누군가가 사겠다는 계약서를 가지고 오면 바로 돈을 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정주영은 ‘그리스의 해운왕’이라고 하는 리바노스 그룹(그리스 최대의 재벌회사)을 찾아갔다. 정주영은 리바노스에게 자신의 조선사업에 대한 포부와 현재 걸려있는 여러 문제를 설명하며 결국 왜 여기까지 찾아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다소 황당하고 체계적이지 못한 설명이었지만 리바노스는 정주영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아보고 배 한 척이 아니라 30만 톤급 유조선 두 척을 만들어 달라며 계약서를 정주영의 손에 쥐어줬다. 결국 버클레이 은행은 정주영에게 4,300만 달러의 차관을 제공했고 공사는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조선소 건설은 24시간 365일 밤낮없이 진행되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현대중공업은 국내 1위 선박 건조회사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세계에서도 1위의 자리를 지켜내고 있다.

통일염원 - 통일 소를 몰고 넘어가다
1989년 1월 25일부터 2월 3일까지 정주영을 비롯한 현대 측 방북단들은 북한 방문을 허가받고 중국 북경을 거쳐 평양으로 들어갔다. 북한의 고위층 인사들과 차례로 만나 금강산 개발 및 남북합작투자, 남북경제교류 등을 논의할 계획이었다. 정주영은 9박 10일간 평양에 머무르면서 오늘날 금강산 관광의 합의서를 현지에서 만들었고, 그로부터 9년이 지난 후 1998년 김정일 위원장은 정주영에게 금강산 관광사업을 현대에서 맡아 적극적으로 해달라고 함으로써 계약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1999년, 정주영은 처음으로 ‘소 떼 방북’을 추진했다. 그는 어린 시절 우리나라의 농촌에서는 소 한 마리를 가지고 있으면 온 집안 식구가 먹고 살 수 있다는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충남 서산목장에는 소가 2,000여 마리 정도 있었다. 그리하여 제 2차 방북 때 500마리에서 ‘앞으로 계속 지속될 것’을 기약하는 의미로 한 마리가 추가된 501마리(암수 비율 7:3)를 5톤 트럭 15대, 8톤 트럭 35대 등 모두 50대에 나누어 북으로 이동했다. 이어 제 3차 방북은 ‘통일소 북송’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수소 200마리, 암소 300마리를 5톤 트럭 50대와 사료차 5대, 수행차량 등 모두 72대의 차량에 의해 북한으로 넘어갔다.

그러한 정주영의 노력의 결실로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북 정상회담을 갖게 된다. 두 정상은 회담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 연결 사업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두 가지 노선으로 나뉜다. 하나는 서울에서 출발하여 평양을 통과, 신의주를 이용하는 노선인데 이는 중국대륙을 통과해 유럽으로 가는 방법이고 둘째는 서울에서 출발하여 원산을 거쳐 함경북도의 나진·선봉을 지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러시아의 광궤열차와 연결, 시베리아를 통과하여 모스크바, 유럽으로까지 연결하는 노선이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기차를 타고 서울에서 평양을 거쳐 유럽으로 가는 철의 실크로드 시대를 열자”고 말했다.
정주영의 꿈은 남한에서 생산된 수출품을 실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부터 모스크바를 지나 유럽의 파리에까지 연계하려는 수출열차를 꿈꿨다. 또한 그는 전 세계 원유의 30퍼센트가 매장되어 있다고 하는 시베리아의 원유를 남한으로 가져오고 싶어 했다. 현대그룹이 시베리아에서 유전개발 사업에 뛰어들어 거기서 생산된 원유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송유관을 통해 북한의 나진·선봉을 지나 북한 내륙지방을 통과한 후 서울까지 가져오는 것이 꿈이었던 것이다.

그의 꿈은 항상 경제성을 기반으로 되어 있었다. 남북경협을 통해 북한의 개방을 유도하여 TSR열차와 TCR열차에 대한민국 수출물량을 연계하면 배로 컨테이너를 싣고 갔을 때에 비해 요금이 훨씬 싸지고 운송하는 기간도 짧아질 뿐만 아니라 바다에 비해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 또한 시베리아 내륙을 개발함으로써 우리나라 국가 예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원유대금을 좀 더 싼 가격으로 수입할 수 있는 대체효과도 있다. 이는 정주영의 마지막 꿈이었기에 말년에 러시아를 방문하여 옐친 대통령을 만났고, 심지어는 러시아에서 떨어져 나간 칼믹 공화국의 대통령까지 만났다.  그러나 정주영의 죽음으로 인해 그 꿈은 무산되었지만 이는 여전히 대한민국의 꿈으로 남아 있다.

저작권자 © 해양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