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해운의 당당한 대표기업으로 활약해온 不惑의 한진해운이 2월 17일 법원의 파산선고를 받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한진해운 로고자(‘H’)의 철거광경을 담은 한 매체의 포토뉴스를 접한 많은 이들의 심경은 착잡했을 것이다. 1년전만해도 설마하며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으니...

법원은 2월 2일 한진해운의 주요 자산매각 절차가 마무리되었고 청산가치가 회생가치보다 높은 만큼 회생절차를 폐지한다고 밝혔다. 2016년 8월 31일 한진해운이 회생절차를 신청한 지 5개월만이다. 이로써 한진해운은 향후 본격적인 청산절차를 밟게 됐다.

국가적으로 글로벌 정기선사의 성장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지를 상기하고 앞으로 우리해운에 또다시 제2의 한진해운이 생겨나지 않도록 ‘경계심’과 ‘분발의지’를 되새기는 차원에서, 40년 역사를 뒤로 하고 사라진 한진해운의 연혁을 되짚어보았다. 

 

 
 

1977년 국내 최초 컨전용선사 ‘HJCL’로 출범

1977년 5월 국내 최초의 컨테이너 전용선사로 출범한 ㈜한진해운(Hanjin Container Lines Co., Ltd=HJCL)은 우리나라의 컨테이너전용선사 시대를 개막하며 등장했다. 이후 1980년대에 국영선사였던 대한상선(KSC)을 인수한 뒤 미주와 유럽항로 등 세계를 무대로 한 도전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고 1990년대에는 글로벌 시대의 원양선사로서 역량과 면모를 착실히 갖추어나갔다.

그 결과 한진해운은 법정관리에 들어가기 직전인 지난해 상반기까지도 국내 최대의 해운기업으로 컨테이너선, 벌크선 등 150여 척의 선박으로 전 세계 370여개 정기항로를 운영하며 연간 1억톤 이상의 화물을 수송하는 글로벌 7위의 세계적인 선사로서 한국 수출입의 대동맥 기능을 해왔다.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적 선사인 대한상선과 최초의 컨테이너 전용선사였던 Hanjin Container Lines가 1988년 합병해 재출범한 한진해운(Hanjin Shipping Co.,Ltd)은 수출입 교역의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 수출 원자재와 수입 원료 및 상품을 세계로 잇는 교량 역할을 수행해왔다.

뿐만 아니라 한진해운은 해상운송과 함께 국내외 터미널 운영과 수리조선 사업 및 물류사업, 관련 IT사업 등을 통해 지구촌 곳곳의 다양한 고객을 연결해왔다. 전세계 60여 개국에 5,000여명의 글로벌 인력을 바탕으로, 세계 주요항만에 전용 터미널과 내륙 물류기지를 운영하며 안정적인 글로벌 물류네트워크를 구축했던 글로벌 선사였다.

한진해운은 글로벌 선사로서 ‘고객을 위한 완벽한 서비스를 최우선 가치로, 최적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변화와 혁신을 중시하고 있다’고 강조해왔으며, 친환경 첨단선박 운항은 물론, 물류서비스의 핵심인 세계적 수준의 글로벌 물류 IT시스템 개발, 국내 최초의 첨단 자동화 터미널 운영, 친환경 컨테이너 도입, 운송 구간별 탄소배출량 계산기 개발, 컨테이너선 운영을 통한 산학협력 등 한발 앞서 서비스체제 구축을 실현하기도 했다.
 

한진해운 40년사 출범-도전-성장-불황-위기 6단계 시기로 구분
한진해운의 역사는 크게 6단계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한진해운도 ∇출범과 함께 국내 컨테이너 전용선시대를 연 1977-1988년 ∇세계무대 진출을 위한 도전기였던 1989-1991년 ∇글로벌 경쟁시대 진입한 1992-1996년 ∇급변하는 세계해운시장에 응전했던 1997-2002년 ∇ 지속 성장 속에 닥친 불황기 2003-2013년 ∇장기불황에 미래를 향한 변모와 혁신을 시도했던 2014-2015년으로 나누어 자사의 연혁을 정리한 바 있다.

출범과 도전, 성장, 불황, 위기로 이어진 한진해운 40년 역사의 보다 세세한 흔적들을 시기별로 살펴보면, 1977년 5월 우리나라 첫 컨테이너전용선사로 설립된 한진해운(HJCL)은 출범 이듬해 10월 중동항로를 개설하고 컨선 ‘정석호(760teu)’를 투입했으며 79년 3월 북미서안항로 개설하고 ‘한진 서울호(1,150teu)'를 취항시켰다. 1983년 9월에는 북미서안항로에서 주간 정요일 서비스를 개시했고 86년 1월에 북미동안항로(AWE)를 개설하고 ‘한진 뉴욕호(2,700teu)’를 취항시켰다. 같은해 7월에는 냉동, 냉장 서비스를 개시한데 이어 11월에 미국 시애틀에 전용터미널을 개장했다. 87년 6월에는 국적선사로는 처음으로 미국 대륙횡단 2단적 열차(DST) 서비스를 시작했고 88년 12월에 국내 첫 현대적 국영선사였던 대한상선과 합병해 지금 한진해운(Hanjin Shipping Co.,Ltd)으로 재출범했다.

대한상선과의 합병이후 한진해운은 1989~1991년 기간에 세계무대를 향한 새로운 도전을 적극 추진했다. 1989년 1월 동사는 조양상선과 유럽항로의 공동운항을 시작했고 이 시기 유럽운임동맹(FEFC)에서 탈퇴했다. 같은해 3월에는 태평양항로안정화협정(TSA)에 가입했으며, 90년 1월에는 핫코일 제품 전용선인 ‘한진 피츠버그호(38,393DWT)’를 인수했으며 같은 7월 HANCOS 예약통제시스템을 전산화해 현업에 적용했고 11월에는 구주지역본부를 런던에서 함부르크로 이전했다. 91년 1월에 미주-아시아-유럽을 잇는 펜듈럼서비스(Pendulum Service)를 개시한데 이어 3월에는 미국 롱비치에 전용터미널을 개장했다. 또한 같은해 5월 한국가스공사 입찰에서 국적 LNG 3호선 운영선사로 선정됐으며 10월에는 업계 최초로 해상직원을 대상으로 ‘가족동승제도’를 시행했다.
 

1992년 국적선사 최초 매출액 1조원 돌파
한진해운이 글로벌 경쟁 시대에 적극 부합했던 시기인 1992~1996년 기간에는 92년 5월 국적선사 처음으로 4,000teu급 컨선 ‘한진 오사카’호 명명식을 치렀고 그해 12월에 국적선사로는 최초 매출액 1조원을 돌파했다. 93년 1월에는 교육선박 운영을 시작했고 8월에 Lloyd’s Loading List지가 선정하는 극동-구주항로 정시성부문 Star Perfomer상을 수상했다.  95년 1월에 미동안-북유럽간 대서양항로를 개설, 3대 기간항로 운항체제를 구축함으로써 글로벌 서비스 네트워크을 완성했다. 같은 해 2월에는 부정기선사인 ㈜거양해운을 인수했으며 4월에는  유럽-중국서비스를 개설했고 9월에 국내 최초로 멤브레인형 LNG선 ‘한진 평택’호를 인수했다. 96년 1월 인터넷 홈페이지(www.hanjin.com)를 개설했으며 그해 3월 처음으로 여성해기사를 채용했다. 그해 6월에는 국적선사 최초의 5,000teu급 컨선 ‘한진 런던호’가 취항했다. 
 

DSR-Senator 인수, UA 결성...해운업 급변화에 응전
이후 1999년대 후반에서 21세기 초반인 1997~2002년 기간에는 세계 해운시장의 변화가 급속하게 진행됐고 한진해운은 그에 적극 응전했다. 97년 2월 독일선사인 DSR-Senator사 인수계약을 체결했으며 98년 3월에는 유나이티드 얼라이언스(UA)를 결성하는 한편, 7월 글로벌 정보시스템인 신정보시스템(NIS)을 적용했다. 21세기가 시작된 2000년 3월에는 물류전문 IT자회사 싸이버로지텍을 출범시켰으며, 2001년 4월에 터미널운영 합작법인 TTI(Total Terminal International)를 설립한데 이어 6월 미주 내륙의 컨테이너 운송 자회사인 Hanjin Logistics Inc.을 설립했다. 2002년 6월에는 국적선사 최초로 안전보건경영시스템(OHSAS 18001) 인증 취득을 취득했고 그해 9월 롱비치 터미널(Pier-T)을 확보했다. 
 

중국 수리조선 진출, 3자물류서비스...2012년 매출 10조원
이후 한진해운은 2003~2013년 기간중 밀레니엄 초반기에 지속적인 성장을 구가하며 글로벌 선사의 면모를 다졌다. 그러나 미국발 금융위기를 계기로 급습한 불황이 도래한 시기이도 하다.

2003년 1월 한진해운은 COSCO, 양밍라인, K-Line과 함께 CKYH 얼라이언스를 출범시켰으며 3월에는 Hanjin Logistics를 기반으로 3자 물류서비스를 개시했다. 2005년 9월에는 포브스 주관 ‘아시아 50대 우량기업’에 선정됐고 2006년 9월 선박관리 전문회사인 (주)한진에스엠(HSM)을 설립했다. 이듬해(2007년) 5월에는 중국 취산도에 수리조선소를 건설하는 한편 자회사이던 거양해운을 흡수 합병해 세계 10위권의 벌크선사로 부상했다. 2009년 5월에 국내 최초의 첨단 자동화터미널인 한진해운 신항(부산)터미널을 개장했고 그해 12월 지주회사 한진해운홀딩스가 출범했다. 2010년 4월에는 차세대 해운물류 IT시스템인 ALPS(Advanced Logistics Pathfinder System)를 오픈한데 이어 6월에 국적선사  최초로 1만teu급 컨선 ‘한진 코리아호’가 취항했고 7월에 스페인 알헤시라스 컨테이너 전용터미널을 개장했다. 2011년 3월에는 첫 초대형 유조선 ‘한진 라스타누라’호 투입과 베트남 탄캉카이멥 컨테이너 전용터미널 개장이 이뤄졌다. 2012년 3월에 국내 최초의 1만 3,100teu급 컨선 ‘한진 수호’호가 취항했으며 4월 CKYH에 에버그린이 합류해 아시아-유럽 서비스를 개시했다. 그해 10월에 다우존스 지속가능경영지수(DJSI Korea) 운수업 부문 최우수기업 인증을 획득했고 12월에 매출액 10조원을 국적선사 최초로 달성했다.
 

2014년 5월 37주년에 제2의 도약 선포 위기극복 다져
2013년 2월에는 컨서비스 정시율 세계 1위를 차지한 것으로 발표(Drewry)됐으며 같은해 10월 한국선급과 삼성중공업, 현대중공업 등과  ‘컨선 연료절감기술 공동연구’ 협약을 체결하며 선박기술 R&D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해 12월 남부발전 발전용 유연탄의 장기운송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계적인 금융위기 이후 해운업계에는 구조적인 불황의 기간이 장기화됐다. 이 시기(2014-2015년) 한진해운은 어려운 주변환경을 극복하고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미래를 향한 변모와 혁신을 나름대로 추구했다

2014년 3월에 ‘CKYH 얼라이언스’에 합류한 에버그린과의  제휴로 ‘CKYHE 얼라이언스’가 공식 출범했고 4월 조양호 회장이 대표이사 회장로 선임됐다. 5월 창립 37주년을 기념해 한진해운은 제 2의 도약을 선포하며 위기극복과 더 큰 성장을 향한 의지를 다졌으나 결과적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2015년 3월에는 아시아-남미서안항로를 전략적으로 재편했으며 지난해(2016) 5월에는 하팍로이드, NYK, MOL, K-Line, 양밍과 함께 ‘THE 얼라이언스’를  결성했다. 

‘We move global trade’을 주창하며 국내 선도물류기업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 해운을 넘어 Logistics 사업으로 꾸준히 Value Chain을 확장하려 했던 한진해운은 1980년대와 90년대, 금융위기(2008년) 등 수차례의 해운불황과 세계 경제위기 파도에 맞서가면서 전세계 해운 선도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위기국면에서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핵심자산을 매각했기 때문에 사업포트폴리오가 최근 수년간 편중된 결과를 보인 것이지, 금융위기 이전 한진해운은 정기선과 부정기선 등 해운사업부문을 포함해 3PL, 터미널, 수리조선, 선박관리업, IT 관련사업까지 사업영역을 꾸준히 확대하며 다양한 사업 포트폴리오를 가져왔던 사실이 역사로 기록돼 있다.

한진해운의 자산과 인력은 국내외 이곳저곳으로 흩어지고 있다. 한진해운의 파경에 대한 ‘아쉬움’과 ‘회한’이 가시지 않고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남아있는 그 흔적들이 조양상선이 그랬듯 한국해운의 미래에 ‘자양분’이 되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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