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업과 선급

 
 

默庵 박현규 한국해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의 회고록인 ‘묵암제해록’이 7월초 발간됐다. 이 책에는 그의 개인사는 물론 70여년 해운업계에 종사하며 한국해운의 역사와 동고동락해온 박현규 이사장의 해기사로서, 해운경영인으로서의 족적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특히 한국선급과 한국해양소년단, 해운학술활동 등의 시발과 진흥에 일조했던 그의 활약상이 드러나 있다.
한국해운업계 발전사의 단면을 담고 있는 ‘묵암제해록’의 내용중 제 4장 <해운비사와 봉사>의 내용중  △한국선급 △한국해양소년단 △한국해양대학교 △해운학술 활동 △해운비화 부분을 4-5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선급(船級, classification)이란 선박의 등급, 즉 선박의 구조 및 설비 등에 대한 검사를 통해 정해지는 선박의 등급을 말하며, 일정 기준에 합격한 선박에 대해 선급협회가 선급증서를 발행함으로써 선급이 부여된다. 간단히 말하면 배의 질을 감정하는 기관이 선급협회이고, 이 협회에서 결정한 배의 등급이 선급이다. 선급은 선박의 매매 및 용선시 기본 자료로 사용된다. 또한 해상보험에서는 선박의 보험 자격을 인정하는 근거로도 사용되며 선박이 원양항해를 할 수 있다는 보증이 된다. 2016년 현재 세계선급협회(IACS)에는 로이즈선급(LR), 미국선급(ABS), 노르웨이·독일 선급(DNV·GL), 프랑스선급(BV), 일본해사협회(NK), 중국선급(CCS), 이탈리아선급(RINA), 러시아선급(RS), 인도선급(IR Class), 크로아티아선급(CRS), 폴란드선급(PRS) 등 11개 선급과 함께 한국선급(KR)이 회원사로 활동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50년대 말까지 선급이 적용되는 해운, 조선, 해상보험 업계의 규모가 영세하여 선급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사람도 없었고, 선급협회 설립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당시 우리나라 선박은 모두 세계 최대 선급인 로이즈선급 등 외국 선급협회에 등록되어 있었다. 당시 나는 대한해운공사 해무조사역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대한해운공사 소속선들의 선급이 LR, ABS, DNV 등으로 다양하여 선급검사를 받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외국에서 도입하는 중고선박이 증가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의 선급도 천차만별이어서 어려움을 가중시켰기 때문에, 나는 우리나라에도 선급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통감하게 되었다.

나는 육상근무를 하는 동안 주로 선박검사 및 수리, 해양사고 처리, 선원교육 및 관리, 해상 보험과 관련한 일들을 했다. 대한해운공사는 해외 각국에서 배들을 도입하였는데, 도입 시 필요한 선급 검사증서 등의 모든 자료가 영어뿐만 아니라 프랑스, 노르웨이 등 각국의 언어로 되어 있어서 처리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또한 도입한 선박의 선급을 유지하려면 검사를 정기적으로 받아야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선급협회가 없어서 검사를 받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해운을 세계적으로 발전시키려면 선급협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해상법과 로이즈선급과 미국선급 등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업무에 참고하고 있었다.1)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홀로 공부하고 연구하여 선급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즉 선박이 원양항해를 하려면 그 선박이 국제협약이나 기국의 해상법이 보유를 의무화하고 있는 감항능력堪航能力이 무엇인가와 이를 보증해 주는 것이 선급이라는 것을 이해하였다. 다시 말하여 선박이 좋다거나 나쁘다라는 것은 그 선박이 얼마나 견고한 구조로 되어 있으며, 이는 선박을 구성하고 있는 자재가 얼마나 좋은 것인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이러한 선박의 질을 감정하는 기관이 선급협회이며, 선급협회에서 결정한 선박의 등급이 선급이다. 그런데 보험회사는 영국의 로이즈선급LR, 미국선급ABS, 프랑스선급BV, 노르웨이선급DNV, 일본해사협회NK 등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거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급협회의 선급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선급이 있다고 해서 그 역할을 제대로 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한국선급 설립 발안發案
그래도 우선은 우리나라 선급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그래서 나는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선급의 중요성과 우리나라 선급협회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는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동의하지 않았고, 동의하는 사람들은 실행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원로 해운인 가운데 신성모가 선급의 필요성을 비교적 일찍 인식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신성모는 자유당 말기 해무청 자문기관인 해사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고 있었는데, 1958년에 개최된 위원회 회의에서 한국의 해운과 조선업이 발전하려면 선급을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초대 교통부 해운국장과 2대 한국해양대학장, 해무청장 등을 역임한 황부길도 선급 설립의 필요성을 인식한 사람이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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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사람 선급을 설립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적임자가 나타났는데, 허동식(해양대 항해과 1기)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허동식은 해양대 1기 동기생으로 1948년 졸업과 동시에 잠시 승선생활을 하다 이시형 학장의 권유에 따라 학교에 남아 교수로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1956년 신성모 학장이 부임하여 ‘공부를 더 하고 오라’는 말에 따라 1958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해상법 공부를 시작하여 1960년 3월 법학석사 학위를 마치고, 경희대학교 박사과정 재학중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조선과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당시 해양대 출신중 재정적으로 제일 성공한 사람은 항해과 1기 이재복이었다. 그는 졸업후 해상생활을 하지 않고 제일물산공사(구두약 제조)를 설립하여 당시 서울에서 3층짜리 건물을 소유하고 있을 만큼 성공을 거둔 사람이었다. 그는 1948년 2월 졸업과 동시에 해양대 초대 동창회장직을 맡아오다 내가 육근을 시작하자마자 1953년 5월 나에게 동창회장직을 물려주었다. 우리는 사무실도 가까웠고 동기생인지라 자주 어울렸고, 나는 선급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곤 했다. 1960년 5월 19일, 황부길이 해무청장에 취임하였다. 이재복은 개인적 친분이 있던 황부길 청장이 취임하자 예방하였다. 평소 내가 강조했던 선급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고 있던 이재복은 황부길 청장에게 ‘한국 해운을 진흥시키려면 선급협회를 설립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제안했다. 황부길은 이 제안에 전적으로 동감을 표시하며, “해기사 중에서 선급을 설립하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대답하였다.3)

1960년 초 허동식은 서울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지만 시간강사 신분이어서 미래가 불투명하여 직장을 찾아야 할 형편이었다. 나와 허동식은 1960년 5월 하순 동기인 이재복이 경영하는 제일물산공사(서울역 앞)를 방문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이재복이 “나는 선급에 관해서 아는 바가 없어 직접 설립할 수 없는 바, 자네(허동식)가 선급을 설립한다면 내가 재정적으로 지원해주겠다”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허동식은 해양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항해사로 승선하고 곧 해양대학의 교수로 남았기 때문에 선급 사업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나도 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선급 설립에 매달릴 수 없어 그 동안 모아두었던 미국선급과 로이즈선급, 일본해사협회 등의 검사규칙과 선명록 등 선급 설립에 참고가 될 만한 자료를 허동식에게 제공해주었다.

허동식은 이들 자료를 연구한 끝에 선급의 사업은 선박의 안전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조선업과 해상보험 발전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특히 3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장차 해운과 조선업이 크게 발전할 것이므로 사업 전망도 밝을 것으로 판단하고 선급을 설립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사무실은 이재복이 서울역 인근 자기 건물의 2층을 내주었다. 그리하여 불과 며칠 만에 허동식과 나는 1960년 5월 하순 선급설립취지서를 작성하여 6월 상순부터 해운, 조선, 보험업계 인사들과 접촉하여 선급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나는 허동식에게 한국선주협회와 한국대형선선주협회, 대한해운공사, 기타 관련자들을 대한해운공사 인근의 아관원이라는 중국집으로 초청하여 선급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동참해 줄 것을 요청하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나와 이재복을 포함하여 총 18인이 한국선급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허동식이 발기인과 회원을 모집하고 있는 동안 나는 1960년 7월 29일 제5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낙선한 김용석(해양대 항해과 1기)이 선급에 함께 참여하도록 하였다. 그렇게 해서 김용석은 윤승기(해양대 기관과 2기)와 함께 한국선급 최초의 검사원이 되었다. 김용석은 1960년 10월 1일부로 검사원으로 임용되어 해원회관(현 부산연안여객선터미널 자리)의 사무실 하나를 얻어 부산에 상주하며 선급업무를 맡았다.
 

한국선급 설립
한국선급은 1960년 6월 20일 서울특별시 중구 양동 남대문 옆 중화반점인 아관원에서 발기인회를 개최하고, 서울특별시 중구 봉래동 1가 157번지 제일물산공사 내에 사무실을 두기로 결의하였다. 발기인 대표로 선임된 이시형이 1960년 7월 4일 해무청에 설립신청서를 제출하였고, 해무청으로부터 설립허가가 난 것은 8월 23일이었다. 선급 설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급규칙이었다. 나와 허동식, 해양대 후배 1명이 모여 숙의하였지만 선급 규정을 만들기에는 실력이 모자랐다. 일본해사협회와 여러 선급규정을 베껴놓고 다시 토의를 했지만, 그 이상의 규정을 만들 수 없어 대충 문장을 다듬어 초안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한국선급 최초의 검사규칙이 1960년 9월 29일 제1차 이사회에서 승인되었다. 그런데 이 검사규칙에는 등록업무와 선급검사업무만을 규정하였고, 강선구조에 관한 규정은 포함되지 않아 강선구조에 관한 규정은 일본해사협회 규칙을 준용하였다.4)

한국선급은 1960년 9월 10일 대한해운공사 회의실에서 황부길 해무청장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10월 20일 서울민사지방법원에 등기를 완료함으로써 사단법인으로서의 법인격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나는 한국선급의 설립에 아이디어와 자료를 제공하고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직간접적으로 기여했지만, 1960년 말부터 해상생활을 준비해야 했다. 나는 당시 대한해운공사의 해무조사역으로 있었지만, 아이도 셋이나 딸리고 노동조합운동을 하면서 고위직에 밉보이기도 해서 해상생활을 하기로 마음먹고 있던 터였다. 따라서 나는 6월 20일에 열린 한국선급 발기인회에는 참여하였지만, 9월 5일까지 모집한 한국선급 회원으로는 참여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나는 대한해운공사 해무부장으로 계셨던 형님(박현호)을 대한해기원협회 회원 자격으로 한국선급 회원으로 참여하도록 하였다.

나는 1960년 12월부터 1962년 6월까지 대한해운공사의 제주호에 원외선장 및 선장으로 승선하였다. 1962년 6월 나는 해무조사역으로 다시 육상으로 복귀했다. 복귀하고 보니 한국선급이 아직 입급선박도 확보하지 못하고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 외항선의 대부분은 외국의 선급에 등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제 막 설립된 한국선급에 등록하려는 선박이 없어서 검사조차 의뢰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다만 한국해양대학 출신인 오용한(吳用漢, 기관과 2기생)이 대한해운공사의 용도계장으로 있었던 관계로 이따금 검사를 의뢰하는 것이 업무의 전부였다. 이밖에 다른 일거리도 허동식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의뢰하여 주는 정도였는데, 1961년도에 선용품의 검사와 감정 62건을 처리한 것에 불과했다.
 

한국선급의 터다지기
선급 설립의 아이디어와 자료를 제공하고,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던 나로서는 한국선급을 돕는 길이 있다면 기꺼이 돕고자 했다. 한국선급은 1962년까지 삼익해운(대표 김창준) 소유의 은룡호(1,048톤) 1척을 입급 받은 것이 전부였다. 이런 상황에서 군사정부가 1962년 해운업 진흥을 위해 17만 5천톤의 선박을 증강하고, 그 중 3천톤 이하의 선박은 국내에서 건조하고 나머지 11만 5천톤은 해외에서 도입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는 한국선급에게는 서광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호재를 활용하여 선급 발전을 도모하고자 한국선급 이시형 회장은 군사정부에 “대개의 선진국가에서도 구명, 위생, 거주, 소방시설을 제외한 항목의 선박 관련 검사는 기술단체인 선급협회에 위촉하고 있는 것이 상례”이므로 우리나라에서 건조되는 선박의 검사를 한국선급이 대행하게 해 줄 것을 건의하였다.5)

한국선급은 건의서를 교통부와 국무총리에 제출했지만, 정작 조선은 상공부가 관장하고 있었다. 내가 1962년 6월 제주호를 하선하여 대한해운공사의 해무조사역으로 복귀하게 되자 아무래도 선급 업무를 다루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한국선급의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내가 추천한 김용석 마저 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1961년 8월에 사직해 버리고 없었다. 1960년부터 1970년경까지 상공부 조선과장이 서울대 조선과를 졸업한 김철수였는데, 울산 태화소학교 동창생이었다. 나는 김철수를 만나 ‘한국선급이라는 곳이 만들어졌고, 정부에서도 해운과 조선업을 진흥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으니 우리나라에서 건조하는 선박은 반드시 한국선급에 건조검사를 받도록 해줄 것’을 설득하였다.

5.16쿠데타 이후 정부의 경제개발 정책과 김철수 조선과장의 조선공업 육성책 입안과 추진, 그리고 선급에 대한 이해가 맞아 떨어져 1963년부터 67년까지 ‘선용품의 인증검사, 우리나라에서 건조하는 선박의 제조검사 및 국적선의 한국선급 입급을 권고하는 정책적 지도를 해주었다. 1963년부터 대한조선공사에서 외항 화물선과 원양어선의 건조가 시작되었고, 그 제조검사를 한국선급 등록 여부에 관계없이 한국선급이 시행하게 되었다. 또한 정부는 한국선급을 육성하기 위하여 각 해운업체 소유 외항선의 한국선급 등록을 권장하였다. 그 결과 한국선급에서는 1964년 처음으로 선명록을 발간하였는데, 등록선이 23척이었다. 1965년까지 대한해운공사 소유선박 18척이 전부 한국선급에 입급하게 되자 여타 해운선사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1966년 말 한국선급 입급선은 122척, 22만 5,413톤으로 국적선 총선박량 43만 9,582톤의 51.3%를 차지하였다. 『한국선급35년사』에 따르면, 1962년 이시형의 “건의서가 1년 후부터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6) 

그러나 건의서가 정책적 효과를 발휘하려면 정책담당자가 움직이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정책 담당자인 김철수 조선과장을 움직이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를 썼다. 그런데 그 정책 지도나 권장 등도 담당자가 바뀌게 되면 지속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김철수에게 한국선급을 육성할 수 있는 방안을 입법화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는 1968년 1월 28일 조선공업육성자금운용요강(상공부 고시 4660호) 제11조 “조선자는 건조선박에 대하여 사단법인 한국선급협회의 제조 검사를 받아야 한다”7)는 조항으로 명문화됨으로써 빛을 보게 되었다.8) 한국선급이 국내 건조 선박의 제조검사를 맡게 된 것은 전적으로 상공부 조선과(주무과장 김철수)의 정책적 노력 덕분이었고, 그가 조선진흥정책을 입안하는 과정에서 한국선급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배려하는 데 내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밝혀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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