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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암제해록’- (2)한국해양소년단
김현리의 해양소년단 운동
[529호] 2017년 09월 27일 (수) 15:10:15 해양한국 komares@chol.com
   
 

默庵 박현규 한국해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의 회고록인 ‘묵암제해록’이 7월초 발간됐다. 이 책에는 그의 개인사는 물론 70여년 해운업계에 종사하며 한국해운의 역사와 동고동락해온 박현규 이사장의 해기사로서, 해운경영인으로서의 족적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특히 한국선급과 한국해양소년단, 해운학술활동 등의 시발과 진흥에 일조했던 그의 활약상이 드러나 있다.
한국해운업계 발전사의 단면을 담고 있는 ‘묵암제해록’의 내용중 제 4장 <해운비사와 봉사>의 내용중  △한국선급 △한국해양소년단 △한국해양대학교 △해운학술 활동 △해운비화 부분을 4-5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우리나라 해양소년단 운동과 김현리를 따로 떼어 얘기할 수 없다. 그만큼 우리나라 해양소년단 운동은 김현리의 주도하에 오늘날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김현리는 경북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50년에 대한소년단 산하에 있던 경북 제1대 대원으로 입회하였다. 그 뒤 김현리는 대구공업고등학교와 서울공업고등학교를 거쳐 1955년에 해양대학 기관과에 입학하였다. 해양대학 재학 중 우리나라를 부강한 나라로 발전시켜 세계로 뻗어 나가려면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해양사상을 고취시켜야 한다는 인식에서 그는 1962년 한국해양대학 해양소년단을 조직하였다. 그때의 단원은 동기생과 후배들을 합하여 35명 내외였다. 12월 7일 김현리는 대한소년단 경남연맹에 등록을 마쳤다. 1962년도에는 인천의 경기수산고등학교가 대한소년단 산하에 해양연장대를 발족한 바 있었다.

1964년 김현리가 해양대학을 졸업하고 해군장교로 입대하게 되어, 해양대학 내의 사정과 사회의 인식 부족으로 더 이상의 해양소년단 활동은 불가능하였다. 1966년 4월 해군에서 복무를 마친 김현리는 대한해운공사에 입사하여 동남아시아를 순항하게 되어 동남아, 여러 나라의 소년단 활동을 살펴보는 기회를 가졌다. 그 뒤 김현리는 대한해운공사를 떠나 한라해운 등 여러 회사를 전전하였다. 그러다가 1973년에 잠시 귀국하게 된 김현리는 틈을 내어 해양대학을 방문하고 ‘아트라 프레미아호’ 기관장으로 승선시 실습차 승선해 있었던 실습생 이영대와 이규학에게 해양소년단원으로 교육해 놓았으니 이준수 학장에게 교내 특별활동으로 해양소년단의 활동을 활성화시켜달라고 건의하였다. 이준수 학장이 흔쾌히 승낙하여 한국보이스카우트 부산연맹 Sea Scout 1500단 501대, 502대가 설립되었다.

김현리의 열정적인 운동에 힘입어 1974년에는 한국해기사협회에 505대와 506대, 부산해양고등학교에 507대가 각각 조직되었다. 단세도 차츰 커져 1975년 5개 선대 158명, 1976년 5개 선대 126명, 1977년 17개 선대 525명, 1978년 16개 선대 643명, 1979년 22개 선대 805명으로 늘어났다. 1979년 8월 하선하여 귀국한 김현리는 김주년 위원장으로부터 해운업계의 장기 불황으로 시 스카우트(Sea Scout) 사무국의 운영이 곤란해지고 있는 반면, 조직은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어 큰일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지도자회의를 소집한 김현리는 여러 의견을 청취한 끝에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 직할 시 스카우트연합회를 만들기로 하였다.

이때 김현리가 나를 찾아와 도와달라고 해서 해양담당 중앙이사직을 맡았고, 이준수가 부회장을 맡았다. 나는 또 김임식 국회의원을 초대하여 김현리 일행과 식사를 하며 시 스카우트 활동을 소개하고 홍보영화도 보여준 뒤 도와줄 것을 부탁하였다. 나는 또 국회와 문교부, 해운항만청, 보이스카우트 본부 등의 여러 인사들을 만나며 시 스카우트 발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김임식 의원도 민주공화당 중진 의원들을 만나 시 스카우트 문제에 대해 거론하여 도와주려고 애를 썼고, 김현리와 수차례 만나 상의해 주었다. 이러한 노력 끝에 1979년 9월 14일 등록증을 발급받고, 기존의 시 스카우트 지구연합회는 1979년 9월 30일자로 발전적으로 해체하였다. 김현리는 1979년 11월 다시 ‘한라 프라이드’호에 승선하였다.
 

   
 

한국해양소년단 설립
1980년 3월 귀국한 김현리는 보이스카우트 중앙이사회에서 시 스카우트 직할연합회가 승인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고, 독자적으로 한국해양소년단 연맹을 창설하기로 하였다. 김현리는 문교부와 교통부 등에 대한 브리핑 자료와 아울러 창단 취지문을 작성하고 그동안의 활동사항 등을 정리하고 당시 부산지법의 판사로 재직 중이던 김경훈1)에게 앞장 서 줄 것을 당부하였다. 김경훈은 검토한 뒤에 판단하여 대답하겠다고 말하였다. 며칠 뒤 도와주겠다는 김경훈의 답변을 들은 김현리는 우선 발기인을 선정하여 그들을 일일이 방문하여 허락을 받았다. 해운 불황기여서 힘겨운 나날이었지만, 그 취지에 공감하여 나도 한국해양소년단 연맹 창단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며칠 뒤면 법인의 인가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김경훈의 말을 듣고, 김현리는 해양소년단의 앞날에 대한 부탁을 남기고, 다시 승선하기 위해 5월 16일 일본으로 출국하였다. 5월 24일 드디어 법인 설립에 대한 승인을 해운항만청으로부터 받았다. 김경훈은 시 스카우트라는 단체명을 그대로 갖고 법인 등기를 마치고, 초대 총재의 자격으로 임원을 아래와 같이 개선하였다.

한국해양소년단의 법인 설립에는 내가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바다와 친숙해지지 않으면 한국 해운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에서 한국해양소년단연맹에 관심을 갖고 사단법인으로 만드는 데 관여했다. 당시 부산지방법원 판사였던 김경훈을 총재로 추대하고 나는 부총재로서 일을 추진했다. 문제는 인가기관인 해운항만청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나와 절친한 사이였던 해운항만청의 강동석 선원선박국장에게 강력히 말하여 사단법인 인가를 받는 데 성공했다.2)
이렇게 하여 1980년 7월 25일 사단법인 한국해양소년단연맹 창단 발대식을 한국해양대학 대강강에서 이범준 해운항만청장, 김영배 해군제독, 해운항만 관련 인사 400명, 단원 1,2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한국해양소년단연맹은 1981년 이준수 한국해기사협회장을 제2대 총재로, 나와 김주년을 부총재로 각각 선임하였다. 1981년 단세는 9개 연맹, 단원 3,354명이었고, 1982년 단세는 11개 연맹, 181개 육상단체, 207개 선대, 4,666명이었다. 그런데 1982년 12월에 실시한 팔당-한강수로탐사 도중 지도자 구대진과 대원 홍성묵이 물 밑에 잠겨 있던 와이어 로프에 보트가 걸려 전복되는 바람에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사고 직후 나는 이준수 총재, 김주년 부총재, 최재수 한국선주협회 전무 등과 사고 현장에 달려와 사고 수습을 도와주었다. 한강 탐사에서 사고가 일어남으로써, 희생자들에 대한 장례 절차가 끝나는 대로 김현리는 탐사계획을 계획하고 실행한 책임자로서 구속될 처지였다. 당시 대통령비서실 정무제2수석비서관이 김태호(1935-2002)였는데, 나와 동향이었다. 나는 “해운입국의 기초를 세우려고 거룩한 일을 희생적으로 하다가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일어났다”는 점을 들어 김현리가 처벌되지 않도록 힘써 줄 것을 부탁하였다. 한국선주협회 전무인 최재수(당시 한국해양소년단 이사)도 나와 함께 사방팔방으로 도움을 요청하여 간신히 김현리의 구속은 면하였다. 사고의 책임을 지고 남궁호 총재가 사임했고, 김현리는 벌금 100만원을 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렇게 되자 해양소년단에는 김현리 사무총장과 여직원 1명 등 단 3명만이 남아있는 조직이 되어, 해체될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당시 한국선주협회 전무이자 해양소년단 이사를 맡고 있었던 최재수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당시 해양소년단은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한국선주협회 사무실 구석에 간신히 자리를 마련해 해양소년단이 명맥은 이어가게 했지만, 또 다른 문제가 불거졌다. 점심 문제였다. 이들은 점심을 걱정할 정도였는데도, 선주협회 사무국의 직원들이 민망해 할 것을 염려해 점심시간이 되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같이 근무하던 서대남 상무에게 지시하여 식권을 나눠주어 점심을 해결하게 했다.”3)
나는 흐트러진 조직을 추스르기 위해 김현리에게 삼익주택그룹의 이종록 회장을 4대 총재로 추천하였다. 그리고 허문도 문공부 차관과 전경환 새마을운동중앙본부 사무총장, 정연세 해운항만청장, 강영식 수산청장, 정동성 국회의원 등을 고문으로, 이명박 현대건설 사장, 김현철 삼미 회장, 이무웅 태영 사장을 부총재로, 이맹기 대한해운 사장, 정몽준 현대중공업 사장, 김상진 한국선급협회 회장 등을 이사로 영입하도록 했다. 허문도의 노력과 윤석순 의원의 협조로 한국해양소년단연맹 육성법이 1984년 12월 31일자로 제정 공포되어 해양소년단은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였다.4)

우리말에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다는 속담이 있지만, 김현리야말로 누울 자리가 있든 없든 다리를 뻗는 사람이었다. 한강 사고가 난 지 채 몇 개월도 지나지 않은 1983년 어느 날 김현리가 갑자기 해양소년단의 사업으로 남극南極을 탐험하겠다고 나섰다. 이에 다들 놀라서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지만, 남극은 지구가 가지고 있는 자원의 마지막 보고이며, 청소년의 극기 훈련에 더없이 좋은 곳임은 물론, 그런 어려운 행사를 해내어야만 온 국민의 관심을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이 김현리의 논리였다. 그의 열정에 어리둥절했던 관계자들 모두가 그러한 제의와 주장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극지라는 지역의 특성과 어려움을 감안하여, 해양소년단연맹의 기치 아래 탐사를 하되, 전문가들로 탐사대를 구성하여 실행하기로 하였다. 해양소년단의 남극탐험 사업은 청와대 정무제1수석비서실, 외무부, 안전기획부, 주한미국대사관, 주한칠레대사관, 주미 한국대사관, 주칠레한국대사관 등 여러 부처에서 범국가적인 사업으로 지원해주었다. 그 결과 이러한 계획에 따라 1985년 11월 6일부터 12월 16일까지 남극의 킹조지 섬 탐사와 남극 최고봉 빈슨 메시프(Vinson Massif, 5,140m)를 우리나라 최초로 등정했다. 남극 최고봉 빈슨 메시프에 등정한 해양소년단원은 허욱, 허정식, 이찬영 대원이었다.5) 이러한 해양소년단의 활약에 힘입어 우리나라는 1986년 11월 28일 우리나라가 남극조약에 가입하고, 1988년에 킹 조지 섬에 남극기지를 설치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해양소년단은 우리나라가 세계33번째 남극조약가입국이 되는 데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6년 12월 24일 정부로부터 윤석순 총재와 남극대원 17명에게 국민훈장 모란장(1), 동백장(1), 목련장(3), 석류장(12)을 받았고, 김현리는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취임하지 못한 해양소년단연맹 총재직
한국해양소년단연맹에 대한 나의 관심은 여전하였지만, 그때부터 내가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들기 시작하여 조금씩 소원해진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한 때 웃을 수도 없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1985년 이종록 총재의 임기가 끝나가자 김현리는 해양소년단의 운영에 좀 더 많은 후원금을 내거나 끌어들일 수 있는 총재감을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강 탐사에서 많은 회원들이 희생된 결과 후원금을 많이 낼 수 있는 후원자는 고사하고, 총재를 맡으려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래서 김현리는 나에게 총재가 되어달라고 매달렸다. 이러한 부탁은 새로운 총재를 물색할 때마다 있어온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매우 집요하였다. 그러나 나는 항상 그래 왔듯이 거절하였다. 해양소년단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주 중요한 단체라고 생각하였지만, 내가 직접 총재가 되어 이끌기에는 자신은 물론 자격을 갖추지 못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현리의 요청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아주 집요하였다. 새로운 총재의 선출이 예정되어 있는 총회 전날인 1985년 4월 8일이었다. 김현리가 다시 찾아와 신신당부하였다. 만약 내가 수락하지 않으면 해양소년단은 총재가 없는 단체가 될 수밖에 없다는 하소연이었다. 그래서 나는 ‘총재감이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면’이라는 전제 아래 수락하였다. 그런데 그 이튿날 열린 총회에서 윤석순 민정당 의원이 새로운 총재로 선출되었고, 나는 아무런 직책도 맡지 않았다. 비록 총재에 취임하지 않았으니 쫓겨난 것은 아니라고 해도 웃어넘길 수밖에 없는 해프닝이었다.

이처럼 김현리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해내고 마는 성품의 사람이었다. 즉 김현리에게는 해양소년단연맹 자체가 김현리 자신이었다. 그러한 열정으로 해양소년단연맹은 1995년에 세계해양소년단ISCA6)에 가입하였다. 2002년에 지병으로 해양소년단의 사무총장직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사퇴한 2003년 3월말 현재 해양소년단은 2개의 특수 연맹과 30개의 지방 연맹을 거느리고, 20여 만 명의 대원을 갖는 조직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러나 김현리는 2004년 3월 6일 사망하였는데, 그의 장례식이 너무나 쓸쓸하여 무척이나 화가 난 기억이 있다. 그의 장례식장에 문상을 하러 갔는데 부인하고 딸 이외에는 문상객이 별로 없었다. 너무 안타까워서 눈물이 흘렀다. 해양소년단을 위해 정말 평생을 걸고 열심히 했는데 알아주는 사람이 몇 명 되지 않았다. 화가 나서 몇 군데에다 조의금이라도 보내라고 야단을 쳤다. 그는 우리나라 해운의 장래를 위해 자기를 희생한 사람이었다.7)

한국해사문제연구소의 강영민 전무도 김현리에 대해 각별한 느낌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그는 해양소년단과 김현리의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역사의 인물이 아닌 제2, 제3의 장보고가 계속 나오기 위해서는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바다가 좋아 바다로 나가 바다를 개척하는 해양인들을 많이 길러내야 한다. 그들이 우리나라 해사산업을 발전시킬 꿈나무들이다. 해양소년단의 역할과 활동이 중요하며 후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즘 들어 보이스카우트보다 해양소년단의 활동이 더욱 활발하다. 고인이 된 한국해양소년단 김현리 사무총장이 땀과 눈물로 뿌린 씨앗이 열매를 맺는 것 같다.”8)
어쨌든 나는 지금도 해양소년단의 고문으로 있으면서 중요한 행사나 총회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다. 현재 관악구 행운동에 있는 해양소년단 본부 1층 입구에는 2005년에 내가 쓴 ‘해양강국’이란 휘호가 걸려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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