默庵 박현규 한국해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의 회고록인 ‘묵암제해록’이 7월초 발간됐다. 이 책에는 그의 개인사는 물론 70여년 해운업계에 종사하며 한국해운의 역사와 동고동락해온 박현규 이사장의 해기사로서, 해운경영인으로서의 족적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특히 한국선급과 한국해양소년단, 해운학술활동 등의 시발과 진흥에 일조했던 그의 활약상이 드러나 있다.
한국해운업계 발전사의 단면을 담고 있는 ‘묵암제해록’의 내용중 제 4장 <해운비사와 봉사>의 내용중  △한국선급 △한국해양소년단 △한국해양대학교 △해운학술 활동 △해운비화 부분을 4-5회에 걸쳐 연재한다. 본호 한국해양대학교 편은 上下로 나누어 게재한다.       -편집자 주-
 

해양대 졸업자의 귀휴병 편입
내가 승선생활을 마치고 대외적으로 맡은 첫 번째 직함은 해양대학 동창회장이었는데, 2대(1953.5-1959.4)와 4대(1964.5-1973.1) 등 2회에 걸쳐 15년간 재임했다. 내가 한 많은 활동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아 있는 일이 모교인 한국해양대학교와 관련한 것들이다.
정전협정이 1953년 7월 27일에 조인되었으니 내가 육상근무를 시작하던 때는 아직 전쟁 중이었다. 따라서 부산의 거리에서 현역으로 입대하지 않은 해대생들이 강제 징집되는 사례가 발생하였다. 나는 1953년 5월 한국해양대학 동창회장에 임명되었다. 해양대 동창회는 1기생이 졸업한 1948년 2월에 창립되어 1기생 이재복이 1953년까지 동창회장을 맡아왔었다. 동창회장으로서 해양대 출신 해기사들의 병역 문제를 손놓고 지켜볼 수는 없었다.

6.25 당시 징발 선박이었던 옹진호와 홍천호에 승선하여 근무하였던 나는 현역으로 편입되지 않은 채 해운공사 소속으로 그대로 종군만 하였다. 군속 신분도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군속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정작 내가 군역을 필했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나는 당시 부산 병무국의 병무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해양대 1기 동기생인 김종욱과 긴밀하게 협의하였다. 즉 해기사들이 이미 해군에 징집되어 군복무를 마쳤는데도 일반 육군에 징집되는 것은 부당하므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지 않겠느냐는 것이 주된 취지였다.

1949년과 1951년 병역법 제66조에는 ‘국외를 정기적으로 왕복하는 대한민국 선박의 선원’은 “귀휴병歸休兵, 예비병, 후비병, 또는 보충병으로 병무소집 또는 간열소집을 면제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다. 부산 병무국의 징집담당이던 병무계장도 마침 수산대학 출신이었는데, 어선에 승선했던 수산대 출신들도 해양대 출신들과 같은 난관에 봉착하고 있어서 김종욱과 긴밀하게 협조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이 조항을 근거로 해기사들을 귀휴병으로 분류하여 소정의 군사교육을 이수한 뒤 전역시켜 군에 징집되는 것을 막아주었다. 귀휴병이란 정해진 기간의 병역을 마치기 전에 복무를 면제받은 병사를 말한다. 이런 이유로 내 전역증명서에는 6·25 종전 직전인 1953년 7월 22일 해군에 징집되어 1955년 5월 11일까지 해군에 복무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시형 학장의 주거를 해결하다
지금 돌이켜 보니, 1956년에는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3월에 갑종선장 면허를 취득하였고, 6월에 딸(박선아)이 태어났으며, 9월에 대한해기원협회 부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이 해에 일어난 일 가운데 가장 컸던 일은 아마도 은사이신 이시형 학장님이 학장직에서 쫓겨나게 되어 거처를 마련해드린 일이었던 것 같다. 
1956년 11월 28일 신성모가 한국해양대학의 제8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전날 신성모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혼자 부산으로 내려와 해양대학 학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와 이시형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자신이 서울에서 내려온 이유를 차분하게 얘기하였다. 자신이 내일 아침에 학장으로 취임하고자 내려왔다는 사실과, 그러니 내일 아침까지 학장 자리를 비우고 관사도 사흘 안에 비워주었으면 좋겠다고 차분하게 얘기하였다. 목소리는 아주 조용하였으나 이시형의 귀에는 청천벽력처럼 들렸다.

이시형으로서는 당국으로부터 학장이 교체되었다는 공문을 받은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시형은 신성모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대선배일 뿐 아니라 늘 마음속으로 우러러본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신성모가 국무총리 서리에서 내려 왔을 때, 일부러 신성모를 찾아가 아예 해양대학장으로 취임하여 학교의 발전을 책임져 보는 일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기도 하였다. 신성모도 이시형의 제안을 받아드리고 싶은 눈치를 보이기는 하였으나,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하였다. 그러했던 분이 이번에는 혼자 불쑥 찾아와 마치 점령군이라도 된 듯 행세하였기 때문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신성모가 해양대학의 제8대 학장(1956.11.28)이 됨에 따라 제7대 이시형은 학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시형은 학장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면 늘 스스로 부학장이 되어 해양대학에 남아있고는 했는데, 그만큼 그는 그 스스로 해양대학과 자신을 동일체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다행히 외부인사가 학장으로 기용된 것은 제2대, 3대(황부길), 6대(황부길) 때뿐이었는데,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제2대 학장 황인식黃寅植의 취임에 대하여 학생들은 반대하여 시위도 하고 등교를 거부하기도 하였지만, 이시형은 그 모든 것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갑작스러운 인사이기는 했으나, 이번에도 전례와 같이 하면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해양대학의 주요 보직자들이 상의하여 부학장으로 내려올 이시형을 위하여 부학장실을 마련하였다. 신임 신성모 학장이 보직교수들을 대동하고 교내를 순찰하였는데, 부학장실에 이르자 ‘이 방은 무슨 방이지?’라고 물었다. 이에 부학장실이라고 하자, 신성모는 ‘이것 치워!’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한마디로 이시형은 실업자로 전락하여 해운입국을 기치로 고급해기사를 양성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온갖 어려움을 함께 해 온 해양대학과의 공식적인 인연을 끝내게 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즉각 동창회장인 나에게 전달되었다. 동창회에 특별한 사안이 없어서 해운공사 일에만 전념하고 있던 나는 이시형 학장을 찾아가 ‘지금 머물 집을 찾고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하였다. 나 자신도 아이가 셋이나 딸린 가장으로 하위직에 머물러 있던 처지였고, 동창들도 대개 배를 타고 있거나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한 상황이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동창들에게 그러한 사실을 알리고 모금을 시작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통신시설이 발달되어 있던 때도 아니었고, 대부분의 동창들이 배를 타고 있어서 모금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나마 모금된 돈에 개인적으로 살던 집을 담보로 은행에서 빚을 내어 부산 대신동(현 주소지 부산 서구 대신로 45길 30번지)에 조그만 주택 하나를 구할 수 있었다. 어렵게 구한 집은 해양대학이 군산에 있을 때 재무관으로 근무한 적이 있던 원 모 씨가 살던 집으로 서울로 이사가는 바람에 내놓은 것이었다. 이시형은 1985년 75세를 일기로 타개할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이시형은 2002년 월간 『해양한국』에 게재한 회고록에서 이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동삼동) 신축교사에 정착하여 정상적 상선교육이 궤도에 오른 지 1년이 지난 (1956년 11월) 어느 날 신성모 씨(전 국무총리 서리)가 내방하여 학장직을 교대하자는 것이었다. 청천벽력이었다. 아닌 밤중의 홍두깨였다. 아무런 이유도 아무런 예고도 없는 벼락 인사였다. 모든 것을 단념하고 운에 맡기기로 결심했다. 퇴직금 제도가 없었던 시절이어서 해대 10년을 근무했어도 그냥 빈손으로 나가야만 했다. 더 다급했던 것은 관사를 비우라고 독촉을 받았을 때였다. 추운 엄동설한에 나갈 길이 아득하였다. 무심코 수일을 지내던 당시 해대동창회장이었던 박현규 군이 찾아와 ‘선생님, 나가서 계실 집을 구하고 있는 중이니, 조금만 더 참아주십시오’라는 것이었다. 졸업생들이 돈을 모아 집을 마련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고마웠다. 참으로 고마웠다. 그때서부터 오늘까지 졸업생들이 모금하여 사준 지금의 집을 항상 감사하며 소중히 여기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아마 제자들의 이러한 미담은 그리 많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면서 자신의 다복을 새삼 느껴본다.”

이 이야기는 해당 이시형의 회고록이 『해양한국』(2002.4)에 실리기 이전에, 잠시 해양대학 교수로 재직했던 신상초(月岡 1922- 1989)의 소개로 널리 알려졌었다. 신상초는 월간 『광장』에 ‘잊을 수 없는 사람’으로 이시형을 소개하면서, 당시의 미담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해당은 빈손으로 가두에 쫓겨나야 할 딱한 처지에 놓여 있었는데,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관사를 비우라는 독촉은 매일같이 내려왔다. 이 딱한 사정을 보다 못해 해대 졸업생들이 돈을 모아 집을 마련해주는 운동을 벌였다. 당시 동창회장은 박현규 씨인데, 그를 중심으로 몇몇 동창들이 앞장서서 모금을 한 결과 부산 시내에 아담한 작은 주택을 마련할 수 있었다. 관사를 나온 해당 선생은 30여 년간 이 집에서 살았다. 그는 제자들이 마련한 집에 사는 것을 늘 감사히 여기고 또 이를 자랑삼아 이야기 했다. 필자도 이 집 마련 이야기를 몇 번 들었지만, 해당은 취기가 몽롱해서 졸업생들의 고마움을 이야기 할 때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제자들이 선심을 써 스승의 집을 마련해준 예는 가끔 있다. 그러나 해양대학 졸업생들처럼 거의 모두 성금을 내 모교를 떠나는 스승의 주택을 마련해준 예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때문에 필자는 이 점을 미담 중의 미담으로 알고 있다.”

평북 정주 출생인 신상초는 동경제국대학 법과 3학년 재학 중 일본 학병으로 중국 전선에 배치된 뒤 탈출하여 조선의용군 일원으로 항일전쟁에 참여하였다. 해방후 한국해양대학 교수를 잠시 역임하다가 서울중학, 성균관대, 한양대, 경희대 교수를 역임했고, 5대 민의원(1960), 9-10대 유정회 국회의원(1960-1982), 11대 국회의원, 동아일보와 중앙일보 논설위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는 말년이던 1984년부터 1989년까지 북한학회 회장직을 역임하는 동안 『광장』에 ‘잊을 수 없는 사람’을 연재했는데, 해당 이시형은 10번째 사람으로 소개되었다. 신상초는 1989년 2월 26일 사망하였기 때문에 『광장』 1989년 1~2월호에 이시형을 소개한 것이 그의 마지막 유고가 되었다.
 

윤보선 대통령의 반도호 휘호
해양대학은 오랫동안 실습선이 없어서 해양대 1기생은 KBM 2호를 타고 실습을 했고, 2기는 1947년 통위부(국방부 전신)에서 제공한 YMS호를 타고 실습을 했다. 375톤급 목조 소해정인 YMS는 주로 군산의 부두에 정박한 채 학생들이 정비를 했고, 1948년 여름 2기생들을 태우고 해양훈련차 어청도까지 항해하기도 했다. 1950년 6.25전쟁 1.4후퇴시 이 배의 엔진을 수리하여 선장 허동식(항해과 1기), 기관장 남재술(진해고등해원양성소 연습과 45년 졸업), 교관 강경욱(기관과 1기), 강남수(기관과 1기)의 인솔 하에 제주도 피난길에 목포에 기항하기도 했다. 하지만 6.25동란으로 YMS와 KBM 2호가 해군 에 징발된 이후에는 1959년 반도호를 실습선으로 확보할 때까지는 각 선사에 분산하여 실습을 해야만 했다.

해양대학이 자기 실습선을 확보한 것은 신성모 학장 때였다. 신성모는 전임 이시형 학장과 여러 교수들을 내쫓듯 학교에서 내보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의 재임기에 이은상이 작사한 해양대학 교가가 제정(1958)되었고, 해군예비원령이 입법화(1958) 되었으며, 허동식, 김용성, 이준수, 손태현 등 많은 교수들이 타 대학의 대학원에 진학해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신성모 학장의 빼놓을 수 없는 업적 중의 하나는 실습선을 확보했다는 점이다. 신성모 학장은 내무부장관(1948.1-1949.3),국방부장관(1949.3-1951.5), 국무총리 서리(1950. 4-1950.11) 등을 역임하는 등 이승만 정권의 핵심인사 중 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그의 정부내 영향력에 힘입어 선박이 부족했던 당시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던 대한해운공사 소유 김천호를 불하받았다. 1960년 해양대학은 김천호를 1억 900만환(단, 대한해운공사 부담 수리비 4,500만환 차감)에 구입하였다.김천호는상선이었으므로 실습용으로는 부적합했기 때문에 대한조선공사에입거하여 개조 준비를 하고 있던 중 발생한 4.19혁명에 충격을 받은 신성모는 1960년 5월 29일 별세하였다.

신성모에 이어 윤상송이 9대 해양대 학장(1960.8.4-1962.6.7)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국립대학의 학장은 교수회의에서 결정하여 문교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 임명되었다. 당시 해양대에는 1기생인 손태현과 이준수가 교수 중에는 가장 연장자였으므로, 교수회의를 좌지우지할 위치에 있었다. 나는 1960년 12월까지 대한해운공사의 해무조사역으로 근무하고 있었고, 동창회장직은 이준수에게 물려준 뒤였다. 당시 나는 대한해운공사 노조운동으로 경영진에게 밉보여 해상근무를 고민하고 있었던 때였지만, 모교의 일을 모른 채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이준수와 손태현, 몇몇 동창들과 모임을 갖고 숙의를 거듭한 끝에 윤상송을 학장으로 모시기로 했다. 논의 중에 이시형이나 황부길을 다시 모시자는 의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4.19라는 사회적 분위기는 모든 것을 새로 출발해야 한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어서 결국 선배 해기사로서 덕망이 있는 윤상송을 모시게 된 것이다.

당시 윤상송은 1960년 1월 동남해운에 재직하면서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학위논문을 준비하고 있던 중이었다. 윤상송은 김천호의 개조 수리비로 미국 대외원조기관(USOM, US Operations Mission)으로부터 2억 2천만 원의 원조자금을 받아 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 원조자금을 받는 데는 당시 재무부 예산국장으로 있던 이한빈과 특별회계담당이었던 김학렬의 협조가 큰 몫을 했다.
윤상송은 김천호 개조 공사가 진행되는 도중 하와이로 실습항해를 해보기로 결심하고 윤보선 대통령에게 실습선의 선명을 받았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는 이 일을 나와 이준수에게 맡겼다. 아마  1960년 봄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준수와 내가 경무대로 윤보선 대통령을 만나 해양대학의 실습선의 선명과 휘호를 부탁하러 갔다. 대통령을 면담하기까지도 아는 사람을 총동원해서 어렵게 경무대까지 들어갔는데, 면담을 기다리는 사람이 수십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윤보선 대통령은 나와 이준수를 만나 주었다. 나와 이준수는 “해양대학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드린 뒤, 최초의 실습선이므로 대통령께서 명명 해주시는 게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찾아왔다”고 사전 설명을 하고, “해양대학에서 몇 가지 시안을 가져왔으니 의미도 좋고 영어로 발음하기도 쉬운 선명으로 명명해 주시고 휘호도 써주십사”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윤보선 대통령은 ‘당장은 휘호 쓸 준비도 안 되어 있으니 며칠 뒤에 다시 오면 준비해 놓겠다’고 대답하였다. 며칠 뒤에 나는 이준수와 함께 경무대로 윤보선 대통령을 찾아뵙고 ‘반도호’라는 선명과 휘호를 받아왔다. 이 일은 반도호 명명식에 윤보선 대통령이 참석하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 1960년 12월 14일 영도 대한조선공사에서 진행된 반도호 명명식에는 윤보선 대통령과 곽상훈 민의원  의장이 참석해 축하해 주었다. 나는 1960년 12월에 대한해운공사의 제주호의 원외선장으로 승선하여 반도호의 진수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신문에 난 것을 보고 내 배나 되는 것처럼 자족감에 빠지기도 했다.
 

이종철 제독의 학장 취임과 본교 출신 첫 학장 손태현
나는 1960년 12월에 제주호의 원외선장으로 승선하여 1962년 6월에 해무조사역으로 육상으로 복직하였다. 5.16쿠데타의 여파로 윤상송이 취임한 지 2년이 채 안되어 1962년 12월에 학장직에서 물러났다. 윤상송이 학장직에서 물러나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군사정부가 추진한 국립대학 통폐합에 따라 해양대학이 부산대학으로 흡수될 뻔한 위기를 극복하는 데 진을 뺐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4.19 이후 폭발한 학생들의 무절제한 자유화 욕구에 따른 혼란을 감내하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후임 학장으로 해군사관학교 1기생인 이종철이 10대 해양대학 학장(1962.12.31-1963.7.21)으로 임명되었다. 비록 군사정부하에서 이기는 하지만, 국립대학통폐합령도 이겨냈던 해양대학으로서는 이것을 그대로 좌시할 수는 없었다. 이미 2대 황인식 학장의 예에서와 같이, 교수회의와 동창회에서는 이종철 제독의 학장 취임을 반대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당시 학교 대표로 이준수와 손태현, 그리고 동창회 대표격으로 내가 선임되었다. 당시 해양대 동창회장은 이준수가 맡고 있었기 때문에 교외에서 동창회를 대표할 사람으로 나를 뽑았던 것이다. 1962년 12월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눈이 많이 내렸던 날이었다. 나는 이준수, 손태현이 함께 이종철(박옥규 제독의 사위) 제독의 집(서울 종로)을 방문했다. 우리는 “해군사관학교는 우리 보다 6개월이나 늦게 개교했고, 재학 연한도 우리보다 짧고, 우리 대학 1기생이 모교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데, 그 1기생이 학장을 하기도 전에 아무리 군사정부 하이지만 해군 출신이 해양대학 학장으로 온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이것은 누가 보아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이종철 제독에게 학장직을 받아들이지 말 것을 간곡하게 요청했다. 당시 이준수와 손태현은 학교에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심스러웠기 때문에 내가 동창회의 대표격으로 주로 이야기를 했다.

이종철 제독은 우리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더니, “참 옳은 말이다. 그러나 지금 정부에서 발령이 난 것을 내가 거부하거나, 학교측이 반대하게 되면 정부에 반대하는 것이 되니까 서로에게 좋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6개월만 학장직을 하고, 해양대학 출신이 후임이 될 수 있도록 힘써 보겠다”고 답했다. 우리들로서는 더 이상 반대할 명분이 없어서 이종철 제독을 제10대 학장으로 받아들였다. 이종철 학장은 그의 약속대로 7개월여 만에 학장직에서 물러났다.

이종철 학장은 7개월여 간의 학장 재임 기간 중 해양대학이 안고 있던 난제를 해결해 주었다. 그것은 해군예비원령이 제정될 때 재학생만을 대상으로 했다. 그런데 재학생 중 신체검사 기준에 미달하여 해군예비사관이 되지 못한 학생이 70여 명이나 나왔다. 이들은 육군 이등병으로 징집되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이는 징병제도가 생긴 이래 이때까지 병역이 면제되어 온 해양대생과 해기사의 특수성을 스스로 부인하는 결과가 되었다. 해양대학에서는 이 문제를 이종철 학장에게 해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종철 학장은 마침 해군참모총장으로 있던 해사 1기 동기생인 이맹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병역면제의 특례를 만들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맹기 해군참모총장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70여 명 해양대 재학생을 해군에 입대시켜 단기간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해군하사관으로 예편시키는 형태로 병역을 이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종철 학장은 7개월 간의 재임기 동안 교수들과 협의하여 학사행정을 했고 스스로 퇴임하면서 문교부장관에게 ‘다음 학장은 해양대학 출신으로 임명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다시 후임 학장을 누구로 할 것인가를 놓고 여러 가지 안이 나왔다. 나는 1963년 하반기에는 대한해운공사 해무조사역으로 일하면서 선박건조사업으로 선박을 건조하기 위해 정신없을 때였다. 그런데 학교에서 모교 출신 첫 학장을 추천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모교에서는 ‘미국의 연방상선사관학교(King’s Point)와 연세대 등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고, 1기 중에서 제일 연장자인 손태현이 먼저 학장을 하되 1번만 하고, 이준수가 그 다음에 하는 것으로 하자’는 안이 나왔다. 교수회의에서도 손태현을 학장으로 추천하기로 하고, 임기는 한번만 하는 것으로 조건을 달았다. 지금과는 달리 대학의 행정 책임자를 교수회의에서 선임하는 제도가 전혀 없을 때였으므로 구속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못마땅했던 지 문교부(이종우 장관, 재임 1963. 3-12)에서는 해양대학 학장 추천안을 수용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와 이준수 등이 총동원되어 로비를 하여 결국 손태현이 1963년 9월에 11대 학장으로 임명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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