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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암제해록’- (3)한국해양대학교(下)
[532호] 2017년 12월 28일 (목) 13:05:37 해양한국 komares@chol.com
   
 

默庵 박현규 한국해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의 회고록인 ‘묵암제해록’이 7월초 발간됐다. 이 책에는 그의 개인사는 물론 70여년 해운업계에 종사하며 한국해운의 역사와 동고동락해온 박현규 이사장의 해기사로서, 해운경영인으로서의 족적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특히 한국선급과 한국해양소년단, 해운학술활동 등의 시발과 진흥에 일조했던 그의 활약상이 드러나 있다.
한국해운업계 발전사의 단면을 담고 있는 ‘묵암제해록’의 내용중 제 4장 <해운비사와 봉사>의 내용중  △한국선급 △한국해양소년단 △한국해양대학교 △해운학술 활동 △해운비화 부분을 4-5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이준수 학장의 해양대학 이전
나는 1964년 5월에 이준수의 뒤를 이어 다시 해양대 동창회장을 맡았다. 1967년 12월, 손태현이 학장직을 마치자 손태현이 학장을 더 할 것인가, 아니면 4년 전의 합의처럼 후임을 이준수로 할 것인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교수회의에서 ‘4년 전에 약속대로 손 학장은 한번만 하고, 후임은 이준수가 맡는 것이 마땅한 것’으로 정리되어 이준수가 1968년 1월 제12대 해양대학 학장으로 취임했다.

이준수는 학장에 취임하자마자 UNKRA 자금으로 동삼동에 터를 잡은 해양대학의 이전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960년 말부터 해기사의 해외취업이 활성화되어 해기사의 수요가 부족해지자, 1968학년도부터 한국해양대학 항해과와 기관과의 입학생 수를 기존 각 100명에서 각 150명으로 증원되었다. 해양대학을 이전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손태현 학장 때부터 있어 왔다. 1965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해양대학을 방문했을 때, 손태현 학장이 “대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부산항 입구 쪽으로 옮겼으면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당시 손태현 학장은 ‘예산이 얼마나 되느냐?’는 박정희 대통령의 질문에 ‘12억원’이라고 해서 결국 성사되지 못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으로서는 해대 이전에 대해서는 공감한 듯 보였다고 하는데, 공장 두어 개를 지을 수 있는 금액에 해당하는 예산 12억 원을 마련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손태현 학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숙소인 동래관광호텔까지 찾아가 한 번 더 해대 이전을 간청했다.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은 ‘예산이 너무 많이 드니 이전은 천천히 생각하기로 하고, 우선 당장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을 말해 보라’고 했다고 한다.

손태현 학장 재임시 해대 이전 문제는 한국 최대의 상항인 부산항의 입구로 이전해야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면, 이준수가 학장으로 부임한 1968년도에는 현실적인 문제가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1968년 입학생부터 정원이 항해과와 기관과 각각 50명씩 늘어나 총 200명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중리 교사는 각과 정원이 50명이었을 때 건립되었기 때문에 1969년이 되면 이미 중리 교사는 시설 부족에 봉착할 게 너무나 뻔했다.
일단 조도 이전을 추진하기로 결정한 1968년 어느 날 국영기업이었던 진해화학 사장으로 부임한 이한림 장군이 진해화학을 방문하는 길에 해양대학에 들렀다. 당시 이한림 장군은 비록 5.16쿠데타에 반대하기는 하였지만, 우리나라 육군 중에서 인격적으로 가장 존경받는 군의 대선배의 한사람인 동시에 박정희 대통령의 일본육사 동기생으로 매우 가까워서 정부 내에서 영향력이 컸다. 그래서 이준수는 이 분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극진히 영접하는 동시에 조도로 이전하였으면 좋겠다는 구상을 보고하였다. 이 소리를 듣고 조도 현장을 방문하였던 이한림 장군은 ‘조도가 너무 좁아서 해양대학의 백년대계로 보기는 어려우니 다른 곳을 찾아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내보였다. 이에 대해 이준수는 “우리는 바다를 일터로 하는 해기사를 양성하는 기관이다. 육군이 땅위에서 활동하는 군인이라면, 해군은 바다를 운동장으로 하는 직업이다. 우리의 운동장은 태평양이다. 그러니 태평양을 바로 앞에 바라볼 수 있고, 우리나라 최대의 상항인 부산항에 드나드는 국내외의 대형선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산교육을 생활로 배울 수 있는 이곳이야말로 해대의 최적지”라고 대답하였다. 이한림 장군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하고 적극 지원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한림 장군과의 인연

이한림 장군은 5. 16 군사쿠데타 당시 1군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쿠데타에 반대하여 끝까지 저항하는 자세를 지키다가 쿠데타군에게 체포되어 강제 퇴역 당한 강골의 육군 중장 출신의 군인이다. 이 분은 1999년 12월에 한국해양대학교에서 명예경영학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강골인 예비역 육군 장성과 해양대학과 무슨 인연이 있어서 해양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드렸고, 본인이 이것을 기꺼이 받았는지는 세인들은 의아해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한림 장군과 해양대학은 우연한 기회를 통하여 아주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쿠데타의 소용돌이도 어느 정도 진정되고, 누구나 이제는 경제 재건에 앞장서야 할 때라고 생각할 때, 이한림 장군이 1963년에 설립된 국영기업체였던 한국수산개발공사 초대 사장으로 부임하였다. 수산개발공사는 원양어업을 통하여 경제 개발을 달성해 보자는 야심찬 쿠데타 정부의 계획의 하나였다. 사장으로 부임하자 당장 필요한 것이 선박에 대한 전문지식을 가진 경영인을 구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이한림 장군은 1964년 4월 윤상송 전 학장에게 선박담당 상임고문으로 취임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는 윤상송 학장의 처남인 전두열이 이한림 장관과 친분이 있었던 데 기인한 것이었다.

윤상송 학장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상임고문으로 취임하였으나, 상임고문이라는 직책이 어떤 현안에 대해 책임을 가진 자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윤상송 학장은 1966년 4월 수산개발공사의 상임고문직을 사임하면서 이준수를 선박담당 이사로 추천하였다. 당시 이준수는 해양대학의 부교수 겸 실습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러한 제안을 받게 되어 내키지는 아니하였으나 이준수는 거절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학교를 사직하고 수산개발공사 본사가 있는 서울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기간은  1966년 6월부터 10월까지 4개월에 불과했다.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이준수가 수산개발공사에 근무하는 동안 그의 사무실로 해대 동창회 간부들이 모여들게 되면서 해대 발전에 대한 여러 가지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주로 동창회장직을 맡고 있던 내가 자주 드나들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사장인 이한림 씨와도 만나서 인사하게 되고, 저녁 자리도 같이 하게 되었다. 이때 이한림 장군은 해대동창회의 뜨거운 애교 정신을 발견하면서 우리들과 급속하게 가까워지게 되었다. 당시를 회고해보면, 해대 일의 상당수를 동창회에서 하였고, 학교의 행정담당자들은 문제가 있으면 서슴없이 동창회에 연락하곤 했다. 그것도 서울에서 사업을 하면서 고정적인 사무실과 비서가 있어 연락이 비교적 쉬웠던 나에게 연락을 하면 우리들이 동분서주하면서 문제를 해결해 내었다.

이렇게 된 것은 해대 졸업생, 특히 동창회 간부들의 애교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해대에서 제기되는 문제의 해결은 90% 이상이 서울에서 해결해야 하는 사안이었다. 그런데 학장 등 학교 행정담당자들이 서울까지 일일이 왕래하는 데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뿐만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한 로비활동에도 적지 않은 비용이 소요되었다. 박봉으로 고생하는 해대의 행정책임자들이 이러한 비용을 조달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동창회가 나서서 자기 일로 생각하고 동분서주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독특한 한국해대의 운영방식과 동창회의 애교심을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나와 신태범 등의 동창회 임원들과 깊이 대화를 해본 이한림 장군은 그 후 한국해양대학의 열렬한 후원자로 변신하셨다.

1969년 2월 이한림 장군은 건설부장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박 대통령이 이 분을 건설부 장관으로 발탁한 이유는 그 당시 자기 정열을 모두 쏟아서 추진 중이던 경부고속도로 공사를 촉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한림 장관도 이러한 박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매진하게 된다. 하루가 멀다 하고 현장을 직접 다니면서 건설을 독려하고 다녔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한림 장관의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 방문에 아무 관련이 없는 나와 신태범 등 해대 동창회 임원들이 자주 동행할 것을 요청받곤 했고, 이러한 요청을 나와 신태범은 거절하지 않고 동행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동행길에 자연스럽게 해대 이야기가 나오게 되고, 이한림 장관도 해대의 조도 이전에 더욱 관심을 갖고 도와주게 되었다. 이러한 도움 중 큰 것만 몇 가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해양대학이 조도로 이전하기 위해서는 조도가 부산의 도시계획상 교육지구로 지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조도는 국방부와 해군, 민간인이 각각 1/3 정도씩 소유하고 있었다. 절차상으로 보면, 부산시가 도시계획에 반영하고 이것을 건설부의 중앙도시계획위원회에 상정하여 통과된 뒤 건설부장관이 고시를 하여야만 확정되는 것이 순서다. 이러한 절차를 밟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이한림 장관은 국방부장관과 해군참모총장에게 소유 부지를 문교부로 이관하도록 지시하여 관철하였다. 그리고 부산시에서 상정하지도 않았는데, 장관 직권으로 조도를 부산시 도시계획상 교육지구로 지정 고시해 버렸다. 부산시 실무자들은 반대하였지만, 당시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을 가진 호랑이 건설부장관의 이러한 조치에 말 한마디 못하고 받아들였다.



두 번째는 학교 건립을 위해서는 상당한 면적의 바다를 매립해야만 했다. 이 매립 면허 소관부처는 건설부이다. 나와 이준수는 이한림 장관을 찾아가 매립이 필요하다고 하자, 해도를 꺼내 놓고 어디를 어떻게 매립할 것인지 설명하라고 해서 설명하니 그 자리에서 실무자를 불러 매립 면허를 허가해 줄 것을 지시해서 바로 매립 면허가 나왔다(1971.4.2).
셋째, 조도는 영도에 부속된 섬이다. 그러니 여기에 학교를 건립할 경우 학생들은 배를 타고 조도를 드나들어야 한다. 이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희망 같으면 조도와 영도를 연결하는 다리나 방파제 같은 것이 있어서 현재와 같이 연륙連陸이 되면 좋겠으나, 해대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하고, 이한림 장관에게 부산항의 장기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조도와 영도를 연결하는 방파제를 건설해 줄 수 없겠느냐고 넌지시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한림 장관은 말을 듣자마자 “좋은 생각”이라고 즉각 찬성하여 조도와 영도를 연결하는 방파제 건설 계획을 세우라고 실무자에게 지시했다. 실무자들이 당장 예산이 없다고 하자, 다른 예산을 전용해서라도 바로 착공하라고 지시하여 부랴부랴 다른 예산들을 전용하여 방파제 건설 계획을 추진하게 된다. 이 방파제 건설 계획에 대하여 당시 김학렬 경제기획원장관 겸 부총리(재임 1969.6-1972.1)가 반대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한림 장관은 건설 업무는 내 소관인데 왜 부총리가 간섭이냐고 오히려 화를 내고 이 일을 소신대로 밀고 나갔다.


넷째, 방파제 건설계획을 세우는 데 실무자들은 예산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지형상 가장 가깝고 공사비가 덜 들어가는 방안으로 설계하였다. 그 결과 방파제가 지금의 동삼동 하리의 횟집 밀집 지역으로 비스듬하게 설계되어 해대 본관 건물과 일직선으로 연결되지 아니하여 보기 안 좋을 것이라는 의견이 나왔다. 그래서 나와 이준수가 건설부를 찾아가 그러한 의견을 전했더니 이한림 장관이 ‘알았다’고만 대답했다. 그런데 이준수가 부산에 도착해 보니 어느 새 실무자가 측량사를 대동하고 현장에서 기다리다가 어떻게 해 주었으면 좋겠느냐고 물어서 ‘본관과 일직선으로 지어 달라’고 의견을 내어 지금의 ‘한림제’를 건설하게 되었다.

다섯째, 방파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다른 곳에서 대량의 암석을 운반해 와야 했다. 이것을 처음에는 다대포 인근 산에서 가져오는데 거리도 멀고, 운반에도 애로가 많아 공사의 진척이 영 더디어 언제 이 공사가 완공될지 모를 지경이다. 그래서 실무 안으로는 조도의 뒷산의 일부를 헐어서 여기서 나는 암석을 사용하면 공사가 간편하고, 공사비도 저렴해져서 좋을 것이라는 의견이 나왔다. 그래서 그렇게 하자고 제안하였으나, 자연 훼손으로 부산항의 경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박영수 부산시장이 강력하게 반대하여 건설부에서도 어쩌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박 대통령이 부산시를 연초 초도순시를 할 때 이 문제가 제기되었고, 해야 한다는 이한림 건설부장관의 의견과 경관을 해치니 불가하다는 부산시장의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되었다. 조용히 듣고 있던 박 대통령이 중재안으로 ‘조도에서 암석을 채취하되, 채취가 완료되고 나면 절대 보기 싫지 않도록 복원하도록 의무화하는 것이 어떠냐’는 중재안을 내어 그렇게 결정되었다. 중재안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건설부 안을 찬성한 셈인데, 박 대통령도 외화벌이의 역군인 고급해기사를 양성하는 해양대학을 아주 관심 있게 바라보고 있었던 셈이다. 
 

해대의 조도 이전과 문교부
해대의 조도 이전 문제를 처음으로 공식 제기할 때의 문교부 장관은 문홍주(재임 1966.9-1968.5)였다. 우선 문교부 장관을 설득하지 못하면 이 문제가 정부 안에서 발붙일 곳이 없다. 그래서 문 장관을 상대로 로비가 필요하여 양재원 당시 동서해운 사장을 동원하여 문 장관에게 접근하였다. 양재원은 문 장관이 부산대 총장으로 있을 때부터 매우 가깝게 지낸 사이였다. 동남아해운의 양재원의 중재로 문 장관을 요정으로 초대하는 데 성공하였다. 당시에는 공무원의 접대라면 예외 없이 한식 요정에서 이루어지던 때였다.

나는 이준수 학장 등이 참석하여 문 장관에게 해대 이전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협조해 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하였다. 문 장관은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해양대학을 조도로 이전하려면 학장과 동창회장이 발가벗고 인디언 춤을 추면 도와주겠다’고 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이준수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옷을 벗기 시작하였다. 그만큼 이준수로서는 해대의 조도 이전이 목숨을 걸만큼一所懸命 필생의 사업이었던 것이다. 나는 누구보다 이준수의 열정과 바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머뭇거리지 않고 그와 어울려 기꺼이 전라全裸로 인디안 춤을 췄다. 물론 당시 술자리에는 시중을 드는 아가씨들도 동석했던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것으로 우리의 조도 이전에 대한 의지를 각인시키게 되었고, 문 장관의 협조로 해대 이전 안이 문교부의 공식 의제로 받아들이도록 되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1968년 5월 말에 문 장관이 사임하고 후임으로 권오병 장관(재임 1965.5-1966.9, 1968.5-1969.4)이 취임하였다. 권오병 장관은 해대 이전안에 대하여 강하게 반대하였는데, 그 이유는 당시 문교부의 가장 큰 과제가 서울대학교를 이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대학로에 자리 잡고 있던 서울대학교가 좁아서 옮겨야 한다는 이유는 표면적인 것이었다. 오히려 대학생의 반독재 투쟁과 데모가 자주 일어나던 당시에 서울대가 청와대와 너무 가까운 것이 신경이 쓰여 옮기자는 것이 근본적인 것으로 서울대 이전 안은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가 컸다. 권오병 장관으로서는 자기의 모교이기도 한 서울대학교 이전안을 빨리 잘 성사시키는 것을 최대 과제로 삼았다. 그러니 뭉칫돈이 들어가는 해양대학 이전 안이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해대 이전 안은 권 장관의 반대로 예산이 전액 삭감될 위기에 처하였다. 그러나 이준수와 전용인 총무과장이 ‘어떻게 하든 문교부 실무자들을 구워 삶아서 장관 모르게라도 예산을 책정하도록 하자, 그리고 이것이 문제가 될 경우, 공무원을 사임할 결심을 하자’는 중대한 결심을 하였다. 그만큼 해대의 조도 이전 계획은 이준수의 인생을 건 큰 모험이었다. 드디어 문교부 장관 임석 하에 다음해 예산안을 보고하는 회의가 열렸다. 당시는 군사 문화의 영향으로 브리핑이라는 제도가 정착되어 있을 때다. 해양대학 이전 예산도 이 브리핑 차트에 들어 있었다. 이 부분을 보고할 때 권오병 장관이 벼락을 칠 경우 모든 것은 끝나게 되어 있다. 의식적이었는지 실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브리핑 중 다음 장으로 넘길 때 한 장이 겹쳐 넘어가서 해양대학 이전 예산안 보고가 누락되어 버렸다. 이렇게 해서 주무장관인 권오병 장관도 모르는 사이에 해대 이전 예산안이 문교부 예산에 포함될 수 있었다.

이 일이 있은 얼마 뒤 권오병 문교부장관이 국회의 불신임 결의로 물러나고, 후임에 홍종철 장관(재임 1969.4-1971.6)이 문교부 장관으로 부임하였다. 관례에 따라 해대 학장으로서 이준수는 장관에게 신임 인사 차 들렀다. 일정이 바빠서 문간에서 인사만 하고 나오기로 하고 장관실에 들어갔는데 “해대 학장입니다” 하고 인사드리자마자, 홍 장관이 “해대 이전 문제가 있지요? 그 문제를 중점적으로 검토해 봅시다. 그런데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오후 2시에 시간이 나니 가지 말고 그때 오시오”라고 해서 신임 인사 차 들른 것이 해대 이전 문제를 중점적으로 논의하는 방문으로 바뀌었다. 막 취임한 홍 장관이 누구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어서 해대 이전 문제에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오게 되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고 있다. 짐작컨대 당시 건설부 장관이던 이한림 장관이 새로 부임한 홍 장관에게 부탁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할 따름이다. 그러나 이 짐작이 거의 맞을 것이 홍종철 장관은 5.16 쿠데타 주체로서 박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승승장구하던 시절인데, 군의 대선배이고 박정희 대통령과 죽마고우 같은 이한림 건설부장관을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사이였다. 그는 문교부장관으로 부임하자 이한림 장관에게 부임인사차 들렀을 것이고, 그 자리에서 해양대학에 대하여 이한림 장관이 설명하고 적극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부탁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이한림 장관은 해대 문제에 관심이 높았고, 또 적극적이셨다.

이렇게 홍 장관의 관심 표명으로 이전 안이 활기를 띠게 되었으나, 또 얼마 후 홍 장관이 사정비서관으로 옮겨가고, 그 자리에 민관식(재임 1971.6-1974.9)이 문교부장관으로 취임하였다. 민 장관에게 부탁하니 이 분은 매우 적극적이어서 직접 현장에 와서 둘러보고 여러 가지 의견도 제시하고, 예산을 집중 배정해서 이전 안이 빨리 매듭 되도록 하라는 지시하기도 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1969년부터 해대 이전 예산이 매년 1억 원 정도 책정되는 게 고작이었다. 그렇게 가면 완공하는데 10년은 걸릴 것이다. 그래서 10억 원 정도를 집중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민 장관이 그렇게 하도록 담당자에게 지시하였다. 그러나 10억 원의 예산을 빼내기가 어려워서 1972년도 예산으로 5억 원 정도를 배정받게 되면서 해대 이전 문제에 속도가 붙게 되었다. 1969년에 조도의 토지를 매입하고, 1970년에 교사 착공을 한 지 꼭 5년 만인 1975년 11월에 조도 교사를 준공하게 되었다.

해양대의 조도 이전은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1969년 토지를 매입하고, 1970년 착공하여 1975년 11월 15일 조성옥 문교부 차관의 임석하에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이준수의 필생의 업적인 해대의 조도 이전 사업은 총 예산 14억 9,269만원이 소요되었고, 대지 6만평, 건물로 본관 2,523평, 항해학관 1,400평, 기관학관 1,400평, 도서관 1,005평, 강당 430평, 기숙사 3,597평 등이 신설되었다.
 

실습선 한바다호 건조
해대의 조도 이전과 함께 이준수의 학장 재임 중의 큰 업적으로 들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실습선 한바다호를 대일청구권 무상자금으로 건조한 것이다. 해양대학은 1960년 초 대한해운공사가 운항하던 낡은 화물선인 김천호(3,081 GT)를 인수하여 이름을 반도호로 바꾸고, 선박을 개조하여 학생수용시설을 늘려서 실습선으로 활용해 왔다. 그러나 1937년에 건조된 반도호는 1970년대에 들어서자 선령이 30년을 훌쩍 넘는 노후선이 되어 실습선으로 활용하기가 더 이상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손태현 학장 재임 시부터 실습선을 신조하기로 학교 방침을 세우고 문교부에 예산을 요청한 바 있었다. 문교부는 국제개발협회IDA에 차관을 신청하였으나, 국제개발협회의 차관은 기능교육에 한정된 것이어서 실습선 건조는 그 대상에서 제외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준수가 학장으로 재임했던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 당시 정부예산 규모가 적었고, 그에 따라 문교부 예산도 적어서 실습선 건조와 같이 예산이 많이 들어가는 사업을 정부 예산으로 건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런 때 통하는 속담이 “외상이라면 소도 잡아먹는다”이다. 정부에서도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돈이 없어 못하는 일은 외국차관(결과적으로 외상이 된다)으로라도 우선 해결해 보자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다.

그래서 1970년에 국민투자기금 중 조선공업육성자금에서 융자받고자 하였으나 이 자금의 연간 운용 예산이 10억원 미만이어서 이 자금으로 실습선 신조도 불가능하였다. 이듬해인 1971년에는 외무부를 통하여 네덜란드정부의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네덜란드의 대외 원조는 정책적으로 고려되는 국가에 한하여 UN 기구를 통하여 제공되기 때문에 신청에 응할 수 없다는 회신을 받았다. 그러자 문교부는 경제기획원, 외무부, 과학기술처 등을 통하여 대미부채상환금, 콜롬보 계획에 의한 영국 및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조, UN 특별기금, 기타 스칸디나비아 제국의 원조 자금 등에 의한 실습선 신조를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에서는 미국의 전시 잉여 선박의 원조를 요청해 보기도 하였으나, 이들 선박은 모두 노후선인데다가 미국 의회의 동의를 얻어야 했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이 없었다.

결국 해대의 실습선 신조 문제는 해대의 영원한 후원자였던 민병권 장관과 이한림 장관의 도움을 받아 해결되었다. 당시 문교부 장관이었던 민관식 장관에게도 호소하였다. 앞서 지적한 두 장관과는 달리, 민관식 장관은 해대와는 그렇게 뚜렷한 인연이 없었으나, 해대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깊이 인식하고 도와주려고 애쓴 장관이었다. 민관식 장관과 해대의 인연이라고 한다면 당시 해대의 학장을 맡고 있던 이준수가 경기중학교 후배라는 것 정도였다. 또 하나의 도움이라면 역시 경기중학을 나온 교육시설국장 이해경李海暻이 민관식 장관의 신임을 받고 있었는데, 이 분도 경기중학 동창인 이준수를 좋아하여 도움을 주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해경 국장은 나와 인척(처 이화숙의 사촌 친동서)이기도 하고, 해양대학 관계도 있고 해서 평소부터 아주 깍듯이 대접해 두어서 나와는 막역한 사이였다.

나는 실습선 건조 문제를 도와달라는 이준수의 부탁을 받고, 이해경 국장에게 부탁을 했다. 그러니 이해경 국장이 ‘은사 중의 한 분이 모 대학 총장으로 있는데, 5만달러 짜리 교육기자재 도입을 도와달라고 해서 막막한 상황인데, 수백만달러까지 실습선을 지어달라’니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설득에 설득을 거듭한 끝에 이해경 국장이 ‘그럼 문교부 예산에 포함해서 경제기획원에 제출할 테니 경제기획원은 알아서 할 수 있겠느냐’고 묻기에, 나는 경제기획원은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고 답을 했다. 당시 경제기획원 차관이 김용환(재임 1972.8-1973.5)이었고, 담당국장이 울산의 고향 후배로 나와는 상당히 가까운 관계였다. 김용환 차관은 내 사돈인 신현확 국무총리(첫째 며느리 신정애의 부친)의 개인비서를 했던 사람이어서 안면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의 지원에다 대일청구권자금을 총괄하는 당시 경제기획원 경제 협력 업무 분야에는 나와 업무상으로나 개인적으로 울산고향 후배로 매우 가깝게 지내던 이선기(당시 경제기획원 경제협력차관보, 재임 1974.11-1977.9) 씨와 차화준(당시 경제협력국장) 씨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해대의 조도 이전 문제를 도와준 가장 큰 공로자가 이한림 장관이라면, 한바다 호 건조의 제일 공로자는 단연 민관식 장관이었다. 민관식 장관은 계속 고심하던 중 마침 사용 중이던 대일청구권자금 무상분(PAC자금, property and claims) 중 문교부에 배정된 자금을 활용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히고 이 안을 박 대통령에게 건의하였다. 이 결재 서류에 박 대통령이 서명하면서 문교부의 최우선 프로젝트로 할 것과 이를 위해서 이미 배정된 자금도 가능한 것은 모두 회수해서 이 사업에 집중할 것을 지시하는 각서를 작성하여 내려 보내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일단 결정된 사업에 차질이 생겼다. 당초 너무 요구 예산 규모가 크면 당사자들이 예산 배정에 난색을 보일 것을 우려하여 모자란 줄 알면서도 소요 자금을 300만 달러만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선가로는 300만 달러로는 실습선을 건조하기에 어림도 없는 금액이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계속 증액에 증액을 거듭하여 결과적으로 670만 달러의 투자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한정된 예산에서 다른 분야에 이미 배정되었던 예산까지 모두 회수해서 한바다호 건조 예산으로 투입하는 해프닝이 계속해서 발생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다른 대학이 원망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당시 이해경 교육시설국장은 모 대학 총장으로 계시던 은사가 특별히 부탁하여 연구 기자재 구입 자금으로 5만 달러를 배정한 것이 있는데, 이것까지 회수해서 한바다호 건조자금으로 돌렸다고 한다. 이렇게 어렵사리 확보한 예산으로 일본의 우스키臼杵조선소에 한바다호를 발주하여 약 1년간의 건조기간을 거처 완공하여 1975년 7월에 인수하였다.

정부측에서는 실습선 건조 예산은 일본의 대일청구권 무상분 중 일부이므로 배는 일본에서 건조해야 하는데, 조선소 선정은 자신들에게 위임하라는 조건을 달면서 동일교역의 박기억을 소개해 주었다. 가수 싸이의 친할아버지인 박기억은 동일교역(현 디아이그룹)을 운영하며 과학기기를 수입하기도 하고, 일본업계의 브로커 역할을 많이 하셨던 분으로 로타리활동을 하면서 가까워진 사이였다. 그가 우스키조선소의 실습선 건조 제안서를 내게 갖고 와서, 자기가 이것을 성사시키면 어떻게 해서든지 실습선을 성공적으로 건조할 수 있게 하겠다고 해서 이준수에게 소개해주었다. 우스키조선소는 일본 오이타 현의 우스키 시에 소재하는 소형 조선소였다. 물론 국가예산이 투입된 건조사업이었기 때문에 입찰을 하기는 했지만, 결국 일본의 조선소에서 지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큰 마찰 없이 우스키조선소로 낙찰되었다.


해대의 조도 이전과 나
학교를 짓는 과정에서 학교 내의 파벌간의 다툼으로 여러 차례 감사원에 투서가 제기되어, 그때마다 이준수가 곤욕을 치러야 했다. 건설에 소요되는 시멘트를 빼돌렸느니, 보일러 공사에 부품이 제대로 사용되지 않았다느니 그런 유치한 내용들이었다. 투서가 접수될 때마다 감사를 거듭했지만, 이준수가 워낙 청렴한 사람이어서 어떠한 잘못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 뒤에도 투서가 감사원에 접수될 때마다 문교담당 과장은 ‘그(이준수)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투서를 각하시켜 버렸다. 이 당시 감사원 문교담당 과장이 신현수였는데, 이때의 인연으로 우리 둘째 아들(박주석)과 며느리(홍윤경)를 연결시켜 주기도 했다.
나는 이준수의 인품에 감화되어 그가 어떠한 부탁을 하든 내 일처럼 발벗고 나섰다. 이준수의 일생을 걸고 추진한 해대의 조도 이전 사업은 그의 꿈과 나의 현실감이 어우러져 이뤄낸 일 가운데 대표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준수는 당시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우리 대학이 조도로 이전하는 데에는 허다히 많은 문제들이 있었다. 상부 관청인 문교부를 비롯해서 경제기획원, 교통부, 국방부 등 10여 개 부처와의 협의가 필요했다. 학장이 서울에 상주하면서 노력해도 어려운 일들은 박현규 동창회장이 감당했다. 귀중한 시간을 기꺼이 할애하여 필요한 경비를 모두 사재로 부담하면서 해결하였다. 박현규 동창회장이 없었더라면 조도 이전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해양대 동창회직을 1973년 1월까지 맡다가 한국선급의 허동식에게 넘겨주었다. 1975년 11월 해양대 조도 캠퍼스 준공식 당시 나는 고려콘테이너터미널 사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준수는 조도 방파제 끝에 교명탑을 세우기를 원했다. 세계 유수의 해양계 대학에서는 미래의 상선 사관이 될 학생들에게 ‘Anchor Spirit’을 심어준다는 의미에서 닻을 교정에 전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준수는 해양대학의 상징물로 닻 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마침 1975년 8월에 한바다호가 진수하였기 때문에 한바다호의 닻을 기본모형으로 하여 교명탑을 조성하고, 조도 캠퍼스에 나무를 심기로 하였다. 이준수는 나에게 협조를 요청해 왔다. 당시 동창회장은 허동식이 맡고 있었지만, 나는 동창회장 직에 연연하지 않고 교명탑 조성비 500만원과 상당액의 헌수금을 모금하는 데 앞장섰다. 교명탑의 ‘韓國海洋大學’은 초대 학장인 이시형이 직접 썼고, 교명탑 앞의 탑문은 내가 썼다. 이준수가 조도 준공이 가까워 오자, 어느 날 교명탑문을 써달라고 왔다. 원래는 교명탑과 헌수비獻樹費를 모금해준 동창회장 명의로 하는 것이 상식에 맞는 일이었다. 하지만 1973년 1월부터 동창회장직을 맡은 허동식은 국방부나 문교부, 경제기획원 등에 아무런 연이 없어 실제 조도 이전 업무 중 서울에서 해야 할 일은 내가 신태범의 협조를 받아 전담하다시피 하여 도와주었다. 그래서 이준수는 준공식에 맞추어 교명탑문을 내게 써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동창회에 아무런 직함이 없는 내가 교명탑의 탑문을 쓰게 된 것이다. 이준수는 이때의 일을 회고하며 “한국해양대학의 반 세기의 긴 역사 속에서 다년간 동창회장과 기성회장을 역임하면서 모교의 크고 작은 많은 문제를 해결하여 헌신적으로 공헌한 박현규의 모교애를 잊을 수 없는 일”로 꼽고 있다.

이준수는 해대의 조도 이전과 한바다호 신조 등 해대의 역사를 만들어놓고, 1975년 12월 말 학장직에서 물러나 한바다호의 실습감으로 승선하였다. 그는 한바다호의 초대 실습감으로서 또 하나의 거사를 구상하였다. 신조선인 한바다호는 취항 1년 차인 1976년 대만과 싱가포르까지의 실습 항해를 다녀왔고, 이듬해인 1977년에는 보증 수리를 위해 우스키조선소에 도킹(docking) 수리를 마친 후 태평양을 건너 미국 오레건주의 포틀랜드에 다녀옴으로써 한바다호에 대한 신뢰성이 확보되었다. 이후 이준수는 실습감으로서 마음속에 꿈꾸고 있던 세계일주 항해를 위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교내에서는 물론 교육부에서도 세계일주 항해에 예산 부족을 이유로 들어 난색을 표명하였다. 그러자 이준수는 결국 내게 상의를 해왔다.

한바다호가 건조된 뒤 처음으로 인천에 입항했을 때인 1976년 2월 6일이었다. 당시 문교부에서도 막대한 예산을 들인 실습선이라 유기춘 장관(재임 1974.9-1976.12)이 직접 치사를 하겠다고 해서 내가 차를 가지고 유기춘 장관을 모시러 갔다. 그런데 동승한 이해경 국장이 ‘자기가 문교부에 오래 있었지만, 해양대 동창회장 같은 분이 계셔서 해양대학이 발전을 하는 것입니다’고 공치사를 했다. 당시 인천항에는 동창회가 주도하여 선상에 유기춘 문교부 장관, 최경록 교통부 장관, 민병권 무임소 장관, 이한림 전 건설부 장관 등이 참석하여 ‘실습선 운항 요원 확보와 원양항해 예산 확보’ 등의 요청을 청취하였다. 이에 유기춘 장관과 최경록 장관은 동석한 해운항만청 김상진(해양대 1기) 해운국장에게 산학협동을 위해 해기사 고용업계의 지원협조를 받아 해결책을 강구토록 지시하였다.

해운국장 김상진은 곧 1976년 5월과 6월 두 차례 한국선주협회, 한국선박대리점협회, 한국해양대학 동창회, 한국해양대학 대표 등을 초치하여 회의를 거듭한 끝에 ‘한국해양대학 연습선 교육후원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1976년 9월 10일 이맹기 한국선주협회장을 회장으로 하고, 전택보 한국선박대리점협회장, 신태범 한국해양대학 동창회장을 부회장으로 하는 한국해양대학 연습선 교육후원회를 발족시켰다. 이 후원회에서는 국적선 척당 월 33,000원, 해외취업선(5,000GT 이상) 척당 월 17,000원을 적립하여 기금을 조성하기로 하였다. 나는 1973년 동창회장을 그만두었지만, 허동식과 신태범으로 동창회장직이 넘어가는 동안 학교 일을 내 일로 알고 성심성의껏 도왔다. 우선 천경해운과 대한해운, 고려해운 등의 해운업체와, 동창회 등에서 모금을 했고, 문교부의 추경예산 등을 확보하여 세계일주 계획을 실행할 수 있었다.

한바다호는 1977년 9월 1일 학생 184명, 교관 15명, 보통선원 31명, 선의 1명, 기자 3명, 화가 1명을 태우고 부산을 출항하여 파나마, 뉴욕, 런던, 암스테르담, 함부르크, 르아브르, 리스본, 바르셀로나, 나폴리, 아테네, 알렉산드리아, 콜롬보, 자카르타 등 13개국의 항구를 순방하고 128일 만에 12만 7천 마일을 세계일주순항을 마치고 1978년 1월 6일 모항인 부산으로 귀항하였다. 한바다호의 세계 일주는 꿈 같은 사람 이준수에 의해 추진되고, 이룩되었다. 거기에 나도 힘을 보탰다는 데 보람을 느낀다. 이준수는 실습감으로 한바다호의 실습항해에 동행하였는데, 귀항시 내가 한바다호 건조와 세계일주 항해를 위해 노력한 나의 공로를 기념하기 위해 대형 조개껍질 2점을 선물로 보내왔다. 나는 지금도 이 기념품을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한국해양대학교 기성회장
나는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해양대학교나 로타리클럽에 관계된 일 외에는 되도록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자 하였다. 나이도 나이려니와 내 경험과 판단능력이 늘 올바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해양대학교 일만은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1983년 3월 기성회 회장을 맡아달라는 학교 측의 요청을 기꺼이 수락하였다. 기성회란 어떠한 일을 이루기 위하여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조직한 모임을 말하지만, 학교와 관련해서는 6·25 전쟁 이후 학교 시설의 복구와 학교 운영을 돕기 위해 학부모와 후원자를 중심으로 만든 모임을 말한다. 즉 기존 육성회에 관한 규정은 1977년에 공포된 문교부훈령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에 따르면 육성회의 목적은 면학분위기 조성과 교육여건의 개선을 기하는 데 있으며, 육성회에 관한 회계 관리는 비국고회계非國庫會計의 관리규정에 의하고 있다. 육성회의 전신으로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전화戰禍로 소실된 학교시설의 복구와 확충을 위하여 각급 학교에 기성회期成會의 조직이 활용되었다. 당시 학교 설립자의 부담으로 미치지 못하는 긴급한 교육시설의 확보와 학교의 운영을 돕기 위하여 학부모와 찬조자를 중심으로 발족되어 교실 등 시설의 확충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해양대학의 기성회는 종합대학교로의 개편을 앞두고 그 준비 과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즉 국고가 전혀 지원되지 않는 비승선학과非乘船學科를 신설하기 위한 조치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해양대학교가 종합대학교로 승격된 것은 기성회가 조직된 때로부터 근 10년이 지난 1991년 10월 22일이었고, 초대 총장으로 전효중田孝重이 취임한 것은 그 이듬해인 1992년 3월 1일의 일이었다. 학비는 물론 기숙사의 수용 및 제복까지 국고에 의존하던 시절, 즉 승선학과만이 존재하였던 시절에는 기성회를 둔다는 것 자체가 불법不法으로 처리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양대학에 승선학과만이 존재하였던 시절에도 기성회가 존재하였는 바, 그것은 위에서 여러 번 지적하였듯이 국고의 지원 자체가 충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양대학은 알게 모르게 기성회의 모금을 나름대로 활용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그때그때의 관할 기관이 자신들의 의무를 다 하지 못한 대가로 눈을 감아 준 데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내가 회장을 맡은 기성회의 존재는 어정쩡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13년간 한국해양대학 기성회장을 맡은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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