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기사의 산실’ 한국해양대 창립자

 

한국해양대학교의 실질적 설립자인 이시형 학장의 23주기 추도행사가 4월 9일 부산시 기장의 기독교 묘원에서 있었다.

 

범우 장학회(회장 박범식)가 주최한 이날 행사에는 한국해양대학교 해사대학 교수와 학생대표, 한국해양대학교 제1기 동기생 및 동문 관계자들이 참석해 이시형 학장의 업적을 되새겼다.


1945년 11월 한국해양대학교(이하 해대)의 전신인 진해고등상선학교를 창립한 이 박사는 해대의 초대학장과 3대(1949년), 5대(1951년), 7대(1955년)에 걸쳐 네 번이나 해사대학장을 역임한 해대인들의 영원한 스승으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유사 이래 최고의 호황을 구가하는 해운시장에서 우수한 해기사의 부족난이 국제 해운시장의 핫이슈가 되어있는 지금, 일찍이 해기사 양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해양대학 설립을 주도했던 그가 후배들에게 재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음은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추도행사에 참석한 손태현 박사(전 한국해양대학교의 명예교수)는 추도사를 통해 “한국해양대학교가 2만 4,000여명의 한국 해기사를 배출하며 무에서 유를 창출한 한국 해운전반의 발전을 위해 다양한 분야에서 공헌해온 해기사들의 산실”이라고 말하고 “해방 후, 한국 동란을 겪는 등의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한국해양대학을 일구고 지켜낸 이시형 학장의 큰 업적을 추모하고 그분의 숭고한 유지를 받들어 나가자”고 덧붙였다.


아울러 손 박사는 “이시형 학장은 우리 해운 발전에 기여한 공이 제대로 평가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되어야 마땅하나 초라하게 기독교 묘원에 모셔져 있다. 각계각층에 다각도로 국립묘지 안장을 요청해 왔으나 현재까지 성사되지 못하고 있다. 이를 논증하고자 5년째 작업하고 있지만 오늘까지 이렇게 초라하게 모시게 됨이 부끄러워 후배들에게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다”고 추모의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추도행사에 함께 자리한 해사대학의 교수들과 이홍찬 부학장과 재학생 대표인 안세훈 사관장 등 참석자들은 이시형 초대학장에 대한 재평가와 묘소 이전 문제 등에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동참한다는 각오를 밝혔다.

 

4월 9일 있었던 이시형 박사 추모식 현장에서의 기념촬영
4월 9일 있었던 이시형 박사 추모식 현장에서의 기념촬영

 

< 이시형과 해양대학교 >
‘海員同盟’ 활동중 진해고등해운양성소 설립

이시형 학장(이하 이시형)은 1936년 7월 동경고등상선학교 기관과를 졸업했다. 이후 그는 조선우편주식회사에서 9년여간 해상근무를 하다가 終戰 수개월전에 하선했다. 1945년 해방이후 그는 의기투합한 40여명의 해기사들과 함께 ‘海員同盟’을 결성, 조선우선주식회사를 일본으로부터 인수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동맹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이시형은 해기사 육성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다. 그러던중 주위에서 鎭海高等海員養成所 건물을 인수받아 해기사를 양성해보라는 권유를 받게 되었다. 고민 끝에 이시형은 일생을 선원교육에 바칠 것을 결심하고 학교설립을 위해 군정당국 교섭에 들어갔다. 당시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그는 군정청 운수부 당시 책임자에게서 학생교육(관비)에 대한 인가를 얻어내 1945년 11월 5일 정식 인가서를 발급받았다. 이날이 현재 한국해양대학교의 개교기념일이 되었다.  이렇게 탄생한 진해고등상선학교에서 이시형은 초대 교장직을 맡았고 진해고등상선학교는 이후 9개월만에 진해해양대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47년 인천해양대학과 합병되어 朝鮮海洋大學이 되었다가 이듬해인 48년 10월 국립조선해양대학, 50년 1월 국립해양대학, 56년 7월 한국해양대학으로 재차 개명되었다. 92년 3월 종합대학으로 승격되면서 한국해양대학교라는 오늘날의 교명을 비로소 얻었다.  


해양대학의 초대학장을 지낸 이시형은 47년 학장직에서 물러나 평교수로 재직하다 49년 3월부터 56년 해양대학을 떠나기 전까지 4번 학장직을 수행했다. 그의 교직인생은 파란만장한 역사를 걸어온 해양대학과 마찬가지로 기구했다고 전해진다.

 

학교를 설립한 뒤 교명 바꾸기를 5번, 대학의 위치 바꾸기를 5번, 소속 관할청 바꾸기를 4번 겪었다. 이시형 개인적으로도 4번 학장직에 취임했다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물러나는 질곡의 시절을 보내야 했다.


이시형은 정말 어려운 난관 속에서도 우수한 해기사 양성을 위해 온 힘과 열정을 해양대학에 바친 것으로 한국해양대학교 50년사는 적고 있다. 그가 열망했던 우수한 해기사양성은 60년이 지난 지금에도 난제로 남아있다.


1985년 4월, 74세로 별세한 이시형은 평생 무욕(無慾)과 강직(剛直)의 삶은 살았다고 한다. 그를 그리워하는 문하생들과 후배들은 그의 흉상을 모교에 세워 그 유덕을 기리며  ‘해기사의 산실’ 이라는 해양대학의 대명사를 해기전승으로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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