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적하보험 영국법 준거약관의 법적 성질과 내용

- 대법원 2016. 6. 23. 선고 2015다5194 판결 -

 

 

이필복(서울중앙지방법원 판사)
이필복(서울중앙지방법원 판사)

1. 서론

영국의 런던보험자협회(Institute of London Underwriters: ILU)가 1912년 해상적하보험에 관한 표준약관인 협회적하약관(Institute Cargo Clauses: ICC)을 채택하여 시행한 이래로, 영국을 비롯한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해상적하보험 체결 시 위 협회적하약관을 그대로 또는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사용해 오고 있다. 위 협회적하약관은 1963년, 1982년 및 2009년에 3차례에 걸쳐 개정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2009년 현재 1963년 ICC(구 ICC)과 1982년 ICC(신 ICC)가 약 50:50의 비율로 공용되고 있다고 한다. 1982년 협회적하약관은 ① “이 보험은 영국의 법률 및 관습(또는 실무, 이하 ‘practice’로 표현되는 문구의 해석에서 같음)에 준거함(This insurance is subject to English law and practice).” 이라는 영국법 준거약관을 두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위 영국법 준거약관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② “이 보험증권 하에서 발생하는 책임에 관한 모든 문제는 영국의 법과 관습이 적용된다(All questions of liability arising under this policy are to be governed by the laws and customs of England).”거나 ③ “이 보험증권에 포함되어 있거나 또는 이 보험증권에 첨부되는 어떠한 반대되는 규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보험은 일체의 전보청구 및 결제에 관해서만 영국의 법률과 관습에 의한다(Notwithstanding anything contained herein or attached hereto to the contrary, this insurance is understood and agreed to be subject to English law and practice only as to liability for and settlement of any and all claims).”는 내용으로 수정된 준거약관이 더 빈번하게 사용된다고 한다. 그 중 특히 더 빈번하게 사용되는 ② 유형의 영국법 준거약관의 법적 성질과 그 내용에 관하여는 이를 어떻게 파악하여야 하는가가 문제되어 왔다. 대법원 2016. 6. 23. 선고 2015다5194 판결(이하 “대상판결”이라고 한다)은 이러한 유형의 영국법 준거약관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지에 관한 우리 법원의 입장을 분명히 밝힌 것으로서 의미가 있다.

 

2. 사실관계

가. 대한민국 법인인 원고는 2012. 6. 14. 터키의 매수인 A와 사이에 폴리머리제이션 라인(Polymerization Line) 1세트 4포장(이하 ‘이 사건 화물’이라고 한다)을 미화 350만 달러에 매도한다는 내용의 수출계약을 체결한 다음, 2012. 6. 22. 미합중국 법인인 피고와 사이에 이 사건 화물에 관하여 부보금액 미화 385만 달러로 하는 적하보험계약(이하 ‘이 사건 보험계약’이라고 한다)을 협회적하약관에서 규정하고 있는 WAIOP 조건(With Average Irrespective Of Percentage, 일정한 해상소유의 위험을 해손의 종류나 규모와 상관없이 보상하는 조건)으로 체결하였다.
 

나. 이 사건 보험계약에는 ① “본 보험증권에 따라 발생하는 책임에 관한 모든 문제는 영국의 법률과 관습이 적용된다(All questions of liability arising under this policy are to be governed by the laws and customs of England).”라는 내용의 준거법 약관(이하 ‘이 사건 준거법 약관’이라고 한다)과 ② 원고가 피고에게 부보화물의 갑판적재 사실을 고지하지 않은 경우 이 사건 보험계약의 담보범위는 ‘투하(投下, Jettison)와 갑판유실(甲板流失, Washing Overboard)’ 이외의 일반 분손은 담보하지 않는 분손부담보[分損不擔保, Free from Particular Average (F.P.A.)] 조건으로 축소된다는 내용의 ‘갑판적재 약관’(On-Deck Clause, 이하 ‘이 사건 갑판적재 약관’이라고 한다)이 포함되어 있다. 피고는 이 사건 보험계약 체결 시 원고에게 위 갑판적재 약관에 관하여 설명하지 않았다.
 

다. 한편, 이 사건 화물은 2012. 6. 14. 중국의 상하이 항에서 터키의 이스켄데룬 항까지의 운송을 위해 운송 선박의 갑판 위에 선적되어 출항하였는데, 원고는 2012. 6. 22. 이 사건 보험계약을 체결할 당시 피고에게 이 사건 화물이 갑판적 되었음을 고지하지 않았다. 위 운송 선박이 2012. 7. 7. 오만 앞바다를 항해하던 중 이 사건 화물 4포장 중 한 포장인 보일러 1대(이하 ‘이 사건 보일러’라고 한다)가 해상으로 떨어지는 사고(이하 ‘이 사건 사고’라고 한다)가 발생하였다. 원고로부터 이 사건 화물의 선하증권 및 이 사건 보험계약의 보험증권을 수취한 A회사는 원고에게 위 보험계약에 기한 보험금청구권을 양도하고 2013. 4. 3. 이를 피고에게 통지하였다. 원고는 피고를 상대로 이 사건 보험계약에 기한 보험금의 지급을 구하는 소를 제기하였다.

 

3. 사건의 경과

가.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은 두 가지였다. 첫째, 이 사건 보험계약이 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이하 ‘약관법’이라고 한다)의 적용을 받는지 여부. 만약 약관법이 적용된다면 약관법 제3조 제4항에 의하여 피고는 위 보험계약 체결 당시 원고에게 설명하지 않은 이 사건 갑판적재 약관을 위 보험계약의 내용으로 주장할 수 없게 될 여지가 있다. 둘째, 위 갑판적재 약관이 보험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 원고가 갑판적재 사실을 피고에게 고지하지 않은 이상 위 갑판적재 약관에 따라 갑판에 적재된 이 사건 화물에 대한 이 사건 보험의 담보 범위인 WAIOP 조건은, 분손부담보(FPA: Free from Particular Average)와 투하 및 갑판유실(JWOB: Jettison and Washing Overboard) 조건으로 축소되는바, 이 사건 보일러가 해상으로 떨어지는 사고가 이 사건 보험계약으로 부보되는 ‘갑판유실’에 해당하는지 아니면 부보되지 않는 ‘갑판멸실(甲板滅失, Loss Overboard)’에 해당하는지 여부이다.
 

나. 제1심 법원은 우선 원고와 피고의 이 사건 보험계약상 법률관계에 대하여는 영국법인 1906년 영국해상보험법(Marine Insurance Act 1906, 이하 ‘영국해상보험법’이라고 한다)이 적용된다고 전제하였다. 그러나 한편 우리나라의 약관법 또한 위 보험계약에 적용됨을 전제로, 약관에 정하여진 사항이라고 하더라도 거래상 일반적이고 공통된 것이어서 보험계약자가 별도의 설명 없이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사항이거나 이미 법령에 의하여 정하여진 것을 되풀이하거나 부연하는 정도에 불과한 사항이라면, 그러한 사항에 대하여까지 보험자에게 명시·설명의무가 있다고는 할 수 없다(대법원 2013. 6. 28. 선고 2012다107051 판결 등 참조)는 우리 판례를 들어 이 사건 갑판적재 약관이 설명의무의 대상이 되지 않으므로 피고가 위 갑판적재 약관을 이 사건 보험계약의 내용으로 주장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나아가 영국해상보험법 및 관습에 의하면, 보험의 목적에 생긴 손해가 그 부보위험인 해상 고유의 위험으로 인하여 발생한 것이라는 점에 관한 입증책임은 피보험자가 부담한다(대법원 2001. 5. 15. 선고 99다26221 판결)고 전제한 뒤, 이 사건 보일러가 갑판유실되었음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결국 이 사건 사고가 이 사건 보험계약에 의해 담보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였다.
 

다. 원고는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는데, 항소심은 제1심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으나 그 논리적 경로는 제1심과 다소 달랐다. 항소심 법원은 이 사건 보험계약의 성립 및 효력 등 이 사건 보험계약에 따른 법률관계의 준거법이 영국법임을 전제로, 국제사법 제27조가 소비자 보호를 위하여 준거법 지정과 관련하여 소비자계약에 관한 강행규정을 별도로 마련해 두고 있는 점이나 약관법의 규정내용, 입법목적 등을 고려하면, 외국법을 준거법으로 하여 체결된 계약에 관하여 당연히 약관법을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대법원 2010. 8. 26. 선고 2010다28185 판결 참조), 달리 약관법을 적용하여야 할 사정도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약관법 제3조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원고의 주장을 더 나아가 살펴볼 필요 없이 이유 없다고 하였다. 다만 항소심은 약관법이 적용되는 경우의 가정적 판단과 이 사건 보일러가 갑판유실되었음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다는 판단에 대해서는 제1심과 같은 결론에 이르러 결국 원고의 항소를 기각하였다. 원고는 대법원 2015다5194호로 상고하였으나, 대법원이 2016. 6. 23. 상고를 기각하여 위 판결은 그대로 확정되었다.
 

 

4. 대법원의 판시사항

대법원에서도 제1심, 항소심(원심)과 같은 쟁점에 관한 판단이 이루어졌다(이하는 각 쟁점에 관한 법리와 판단 별로 필자가 재구성하였음).

가. 국제사법 제25조는 제1항 본문 및 제2항에서, “계약은 당사자가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선택한 법에 의한다.”, “당사자는 계약의 일부에 관하여도 준거법을 선택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제26조 제1항에서 “당사자가 준거법을 선택하지 아니한 경우에 계약은 그 계약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국가의 법에 의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외국적 요소가 있는 계약에서 당사자가 계약의 일부에 관하여만 준거법을 선택한 경우에 그 해당 부분에 관하여는 당사자가 선택한 법이 준거법이 되지만, 준거법 선택이 없는 부분에 관하여는 계약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국가의 법이 준거법이 된다.
 

… 이 사건 준거법 약관은 이 사건 보험계약 전부에 대한 준거법을 지정한 것이 아니라 보험자의 ‘책임’ 문제에 한정하여 영국의 법률과 관습에 따르기로 한 것이므로 보험자의 책임에 관한 것이 아닌 사항에 관하여는 이 사건 보험계약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우리나라의 법이 적용된다고 할 것인데, 약관의 설명의무에 관한 사항은 약관의 내용이 계약내용이 되는지 여부에 관한 문제로서 보험자의 책임에 관한 것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대법원 2001. 7. 27. 선고 99다55533 판결 참조), 이에 관하여는 영국법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약관법이 적용된다.
 

나. 약관법 제3조 제3항이 사업자에 대하여 약관에 정하여져 있는 중요한 내용을 고객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할 의무를 부과하고, 제4항이 이를 위반하여 계약을 체결한 경우에는 해당 약관을 계약의 내용으로 주장할 수 없도록 한 것은, 고객으로 하여금 약관을 내용으로 하는 계약이 성립되는 경우에 각 당사자를 구속하게 될 내용을 미리 알고 약관에 의한 계약을 체결하도록 함으로써 예측하지 못한 불이익을 받게 되는 것을 방지하여 고객을 보호하려는 데 입법 취지가 있다. 따라서 고객이 약관의 내용을 충분히 잘 알고 있는 경우에는 그 약관이 바로 계약내용이 되어 당사자에 대하여 구속력을 갖는다고 할 것이므로, 사업자로서는 고객에게 약관의 내용을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대법원 2010. 9. 9. 선고 2009다105383 판결 참조). … 이 사건 보험계약 체결 당시 원고는 이 사건 갑판적재 약관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고 보이므로, 피고가 그 내용을 설명하지 않았더라도 이 사건 갑판적재 약관은 이 사건 보험계약의 내용이 된다고 봄이 상당하다.
 

다. 영국 해상보험법 및 관습에 의하면, 보험의 목적에 생긴 손해가 그 부보위험인 해상 고유의 위험으로 인하여 발생한 것이라는 점에 관한 증명책임은 피보험자가 부담하고, 그 증명의 정도는 이른바 ‘증거의 우월(preponderance of evidence)'에 의한 증명에 의한다(대법원 2001. 5. 15. 선고 99다26221 판결 참조). 그리고 영국법의 적용을 받는 영국 적하약관에서 규정하고 있는 ‘갑판유실’이란, 해수의 직접적인 작용으로 인하여 갑판 위에 적재된 화물이 휩쓸려 배 밖으로 유실되는 경우를 의미하는 제한적인 개념이므로, 악천후로 인한 배의 흔들림이나 기울어짐 등으로 인하여 갑판 위에 적재된 화물이 멸실되는 이른바 ‘갑판멸실’은 갑판적재 약관의 담보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

 

5. 검토

가. 영국법 준거약관의 법적 성질과 그 내용

1) 당사자들이 어떠한 영국법 준거약관에 의해 준거법을 영국법으로 지정하는 것인지(저촉법적 지정, 抵觸法的 指定) 아니면 영국의 법률규정을 계약 내용으로 편입하는 것인지(실질법적 지정, 實質法的 指定)는 기본적으로 당사자의 의사표시 해석의 문제이다. 다만 각 보험계약의 종류(적하보험과 선박보험)와 각 준거약관의 유형별로 나누어 접근하는 것은 유용한 방법이다. 앞서 서론에서 본 해상적하보험의 세 가지 영국법 준거약관 유형 중 ① 유형은 해당 보험계약에 관한 법률관계 일반을 규율하는 준거법을 영국법으로 지정하는 것이라는 점은 별다른 의문이 없다. 또한 ③ 유형은 ‘일체의 전보청구 및 결제에 관해서만’ 영국의 법률(과 관습)에 의한다고 분명하게 한정하고 있으므로, 해당 사항의 준거법을 지정(이른바 ‘부분지정’)하는 것이라는 점도 비교적 분명하다. 문제는 ② 유형이다. 이 유형의 영국법 준거약관에 관하여는, 우선 준거법을 지정하는 것이라는 이른바 저촉법적 지정설이 있고, 이는 다시 해당 보험계약에 따른 법률관계 일체에 관한 준거법을 지정하는 약관이라는 견해(전부지정설), 보험계약관계에서 발생하는 보험자의 ‘책임’ 문제에 관하여만 준거법을 지정하는 약관이라는 견해(부분지정설)로 나뉜다. 이와 달리 위 약관들은 준거법을 지정하는 이른바 ‘저촉법적 지정’을 의도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외국법을 언급함으로써 그것을 계약의 내용으로 편입하는 이른바 ‘실질법적 지정’을 의도하는 약관이라는 견해(실질법적지정설)가 있다.
이 사건에서 대법원은 “이 사건 준거법 약관은 이 사건 보험계약 전부에 대한 준거법을 지정한 것이 아니라 보험자의 ‘책임’ 문제에 한정하여 영국의 법률과 관습에 따르기로 한 것이므로 보험자의 책임에 관한 것이 아닌 사항에 관하여는 이 사건 보험계약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우리나라의 법이 적용된다”고 함으로써 부분지정설을 따르고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2) 필자는 위와 같은 유형의 약관은 ‘보험자의 책임 문제’에 대한 준거법을 지정하는 것이라는 부분지정설을 지지한다. 이 경우, 당사자가 위와 같은 유형의 약관을 통해 준거법을 지정하려고 하는 부분인 ‘보험자의 책임 문제’의 범주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보험자의 책임 문제’는 일응 보험계약의 성립과 (실질적) 유효성(existence and material validity), 방식(또는 형식적 유효성, formal validity)의 문제를 포함하지 않고, 보험계약의 효력(effect)에 관한 문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는 하나, 어떠한 쟁점이 위 ‘보험자의 책임 문제’의 범주에 포섭될 것인지는 구체적인 사안별 검토를 요한다. 대체로 어떤 위험이 보험에 의해 담보되는가(보험사고 해당성), 어떠한 범위의 손해가 보험에 의한 전보의 대상이 되는가(전보되는 손해의 범위), 보험금 지급의 방법, 보험금청구권의 소멸시효, 지연손해금, 보험계약자 등의 손해방지의무에 관한 문제 등이 ‘보험자의 책임 문제’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대상판결은 “약관의 설명의무에 관한 사항은 약관의 내용이 계약내용이 되는지 여부에 관한 문제로서 보험자의 책임에 관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라고 하여 이에 관하여는 영국법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약관법이 적용된다고 하였다. 이는 약관의 설명의무에 관한 사항이 당해 약관이 보험계약의 내용으로서 유효하게 성립할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성립 및 실질적 유효성의 문제) 또는 위 약관의 보험계약 편입 방식의 문제로 성질결정(性質決定, characterization)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3) 대상판결과 해상적하보험에 관한 ② 유형의 영국법 준거약관을 다룬 선행 및 후행 대법원 판결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도 하나의 과제이다. 해상적하보험에서 같은 유형의 준거법 약관이 문제되었던 대법원 1991. 5. 14. 선고 90다카25314 판결에서는 “영국법 준거약관의 적하보험계약을 체결함에 있어 화물을 적재하고 출항한 선박으로부터 사고의 발생이 예상되는 전문을 수령한 사실을 감춘 경우, 위 전문 수령사실은 영국해상보험법 제18조 제2항 소정의 고지의무의 대상에 해당하므로 보험자가 같은 법 제17조, 제18조에 의해 고지의무위반을 이유로 위 보험계약을 해지한 것은 적법하고, 거기에 우리 상법 제651조 소정의 제척기간이나 상법 제655조의 인과관계에 관한 규정은 적용될 여지가 없다”고 판시한 바 있고, 최근 선고된 대법원 2018. 10. 25. 선고 2017다272103 판결에서도 영국해상보험법 제17조 내지 제20조에 규정된 최대선의의무와 고지의무에 관한 규정이 위와 같은 유형의 영국법 준거약관을 포함한 해상적하보험에 관하여 적용됨을 전제로 판단한 바 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고지의무의 내용, 요건과 그 위반의 효과, 고지의무위반을 이유로 하는 계약의 해지(또는 취소)에 관한 체척기간은 보험계약의 성립과 유효성의 문제로 성질결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러한 성질결정에 따르면 대법원은 위 판결들에서 ② 유형의 영국법 준거약관을 근거로 보험계약의 성립 및 유효성의 문제까지 영국법에 의한 것이므로, 전부지정설을 채택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작지 않다. 특히 위 1991년의 판결에 대해서는 “외국법 준거약관은 동 약관에 의하여 외국법이 적용되는 결과 우리 상법 보험편의 통칙의 규정보다 보험계약자에게 불리하게 된다고 하여 상법 제663조에 따라 곧 무효로 되는 것이 아니고”라는 설시를 근거로 전부지정설을 채택한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대상판결과 위 판결들의 입장이 일응 모순되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위 판결들이 대상판결과 같은 부분지정설을 따랐으되, 고지의무를 ‘보험자의 책임 문제’에 포섭되는 문제로 성질결정하고, 단지 약관법의 적용과 관련한 문제가 대두되지 않아서 해당 쟁점에 관하여 침묵한 것이었다고 이해할 여지가 있으나, 분명하지는 않다. 대상판결과 위 판결들 사이의 관계는 앞으로 정립이 필요한 부분이다.
 

4) 대법원이 대상판결에서 위와 같이 부분지정설을 택한 이상, 약관법의 규정들이 국제적 강행규정인가 하는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당사자의 합의에 의해 그 적용을 배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에 추가하여 준거법이 외국법이더라도 그의 적용이 배제되지 않는 강행규정을 국제적 강행규정(國際的 强行規定, internationally mandatory rules)이라고 한다. 대상판결과 같이 약관의 설명의무에 관한 사항에 대하여는 준거법의 지정이 없는 것으로 보고 객관적 연결을 통해 우리나라 법의 일부로서 약관법을 적용하는 경우에는 국제적 강행규정에 관한 논의를 할 필요가 없다. 약관법의 규정들이 국제적 강행규정인지 여부는 ② 유형의 준거약관에 대해 ‘전부지정설’을 따르는 경우이거나 ① 유형의 준거약관이 문제되는 사안에서 문제된다(대상판결의 원심이 전부지정설을 따르는 것을 전제로 약관법 규정의 국제적 강행규정성 여부를 판단한 바 있다). 해상적하보험이 아닌 선박보험에서 ① 유형과 같은 “이 보험은 영국의 법률 및 관례에 준거함”이라는 영국법 준거약관을 둔 사안들에서는, 약관법의 규정들이 국제적 강행규정인지 여부가 중요한 쟁점이 되었던 바 있다. 대상판결에서 약관법 제3조를 적용한 것은 약관법 규정의 국제적 강행규정성 논의와는 다른 차원의 경로로 이루어진 것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편, 대법원 1991. 5. 14. 선고 90다카25314 판결에서는 “약관이 보험자의 면책을 기도하여 본래 적용되어야 할 공서법의 적용을 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거나 합리적인 범위를 초과하여 보험계약자에게 불리하게 된다고 판단되는 것에 한하여 무효로 된다”는 판단이 이루어진 바 있는데, 이는 약관법의 국제적 강행규정성 문제에 선행하는 것으로서 ‘약관에 의하여 준거법을 지정하는 것 자체가 허용되는가’라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5) 요컨대, 해상적하보험계약에서 ② 유형의 영국법 준거약관이 있는 경우, 쟁점이 되는 논의의 평면은 세 단계로 나뉜다. 즉 ⒜ 위 준거약관은 저촉법적 지정을 의도한 것인가 아니면 실질법적 지정을 의도한 것인가, 저촉법적 지정이라면 전부지정인가 부분지정인가, ⒝ 저촉법적 지정이라면, 이와 같이 약관에 의하여 준거법을 지정하는 것이 허용되는가, ⒞ 전부지정설에 의하는 경우에는, 약관법의 규정은 국제적 강행규정으로 취급할 수 있는가, 부분지정설에 의하는 경우에는, ‘보험자의 책임 문제’는 어떠한 법률관계의 범주를 포섭하는가라는 세 가지 평면에서 접근하여야 한다. 대상판결을 그 중 ⒜ 저촉법적 지정설 중 부분지정설, ⒝ 약관에 의한 준거법 지정 긍정설(대법원 1991. 5. 14. 선고 90다카25314 판결 참조), ⒞ 약관의 설명의무에 관한 사항은 ‘보험자의 책임 문제’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채택한 것으로 이해된다.
 

나. 갑판유실과 갑판멸실의 의미

대상판결은 영국 해상보험법상 갑판유실과 갑판멸실의 구별기준을 분명히 하였다. ‘갑판유실’은 해수의 직접적인 작용으로 인하여 갑판 위에 적재된 화물이 휩쓸려 배 밖으로 유실되는 경우를 의미하는 제한적인 개념으로서, 해수의 직접적인 작용 없이 악천후로 인한 배의 흔들림이나 기울어짐 그리고 화물의 부적절한 고박으로 인하여 갑판 위에 적재된 화물이 배 밖으로 멸실되는 이른바 ‘갑판멸실’과는 구별된다. 이 글은 주로 해상적하보험계약에 포함된 영국법 준거약관의 법적 성질과 내용에 관하여 다루기 위한 것이므로, 이 쟁점에 관하여는 더 다루지 않는다. 다만 대상판결은 증명의 정도에 관하여, “영국 해상보험법 및 관습에 의하면, 보험의 목적에 생긴 손해가 그 부보위험인 해상 고유의 위험으로 인하여 발생한 것이라는 점에 관한 증명책임은 피보험자가 부담하고, 그 증명의 정도는 이른바 ‘증거의 우월(preponderance of evidence)’에 의한 증명에 의한다”는 법리를 원용하였는데, 대법원이 부분지정설을 따르면서도 위 쟁점에 관하여 영국의 증거법을 적용한 것은, 적어도 손해발생의 원인이 갑판유실인지 갑판멸실인지 여부의 문제는 ‘보험자의 책임 문제’로 보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6. 결론

해상적하보험에서 영국법 준거약관의 법적 성질과 그 내용을 확정하는 것은 생각보다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영국법 준거약관의 각 유형별로 그 의미하는 바가 다르게 해석될 수 있고, 실제로 우리 법원의 판례도 각 준거약관의 유형별로 다르게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비록 쉽지는 않지만, 실무상으로는 각 준거약관의 유형에 따라 도달하게 될 결론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특히 해상적하보험에서 보험자와 보험계약을 체결할 화주는, 그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위 영국법 준거약관으로 인하여 전혀 뜻밖의 결과를 마주하게 될 수도 있음에 유의해야 하며, 보험자는 화주에게 그러한 약관 규정의 존재와 법적 결과를 설명하여야 약관법의 적용 등으로 인해 어떠한 약관조항의 편입이나 유효성이 제한될 위험을 피할 수 있다. 적어도 외국적 요소가 없는 순수 국내계약에서는, 무분별하게 영국법 준거약관을 채택하여 사용하기 보다는 대한민국법을 준거법으로 지정하는 것이 불필요한 법적 위험을 제거하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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